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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20230815
(춤)좀 자제를 했었어야 되는데, 그래야 이 칼로리를 여기에 다 오롯이 쏟아부을 수 있는데, 뒤에서 자제를 못하고 풀어버렸습니다.
해방이라는 게 적당히 해방이 아니고, 적당히 해방이었으면 해방 선언문 안 했습니다. 적당히 해방이면 여기 머하러 왔어요. 이거 완전하게 해방이기 때문에 여기 서는 겁니다. 적당한 해방 아니에요. 지금까지의 해방 자유는 너무나 옹졸했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 옹졸했었고, 그리고 소수에게만 적용되는 그런 해방과 자유였었던 것 같고, 그 다음에 아까 가사의 대속도 나왔지마는, 내가 힘들 때 해석을 잘 해가지고 풀어낸 그런 해방 자유였지, 지금 말하고 있는 이 해방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근데 지금 해방은 완전하게 내가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밝히는 이런 복음이기 때문에, 이 해방은 정말 완전한 해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 정말 이 기도가 떠오르면서 우리 모두가 이 복음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 아들로 거듭나는 것이구나. 저는 그게 너무 이 복음 안에서 보였습니다.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 은혜 누나부터 목사님도 중간중간에 ‘너와 나의 복음’ ‘함께 참여’ 이렇게 6번의 말씀에 저도 오늘 해방 선언문으로 이 선포를 하지만 모두가 한 말이고 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부담이 없는 것 같애요.
예전에는 이렇게 말씀 섬김 일을 하게 되면은 그 이제 별로 안 되는 내 과정과 내 경험과 이런 것들을 마구마구 이렇게 보따리 쌓아가지고. 근데 저의 보따리는 너무나 작은 보따리고 목사님의 보따리가 너무 큰 거예요. 그러니까 순서가 올 수가 없어요. 옛판에서는 이 계단판이잖아요. 계단판. 계단 12층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번 생에 선포할 기회는 올까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고, 근데 지금 다 바닥판이기 때문에 지금 선포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는 사람이나 듣고 있는 사람이나 다 한 사람입니다. 다르지가 않아요. 지금 여럿이 다 앉아 있지마는 다 한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한 사람만을 지으셨기 때문에 그래서 너무 이렇게 부담이 없는 것 같고, 제가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넷이 아니고 이렇게 하면 아니고라고 하면, 하나라고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한번 연습해 볼게요 둘이 아니고 하나. 좀 리듬을 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둘이 아니고 하나, 이렇게. 자, OK 준비된 것 같습니다. 자, 해볼게요.
시작. 둘이 아니고 (하나), 셋이 아니고 (하나), 넷이 아니고 (하나), 다섯 아니고 (하나), 여섯 아니고 (하나), 일곱 아니고 (하나), 여덟 아니고 (하나). 열 아니고 (하나). 아, 좋습니다. 왜냐 이게 그냥 말만 하는 게 아니에요. 진짜 하나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그냥 느낌상으로 하나였지, 지금은 너와 내가 완전하게 하나로 포개어지는 연합을 지금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해방도 적당히가 아니고 연합도 적당히가 아니에요. 완전하게 해방이고 완전하게 하나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시원한지. 정말 뉴진스라는 유명한 아이돌이 있는데, OMQ라는 노래 가사에 이런 가사가 나와요. “이 노래는 it's about you baby Only you You you you You you you you.”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왜 그러냐면 이 노래는 it's about you You.
그러니까 제가 지금 저만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목사님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한 게 아니라, 너에 대한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모두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지 지금 남 얘기가 아닌 거예요. 지금 오랜 시간 동안 저는 진짜 목사님 말씀부터 해서 말씀을 남 얘기처럼 들었던 것 같아요. 근데 이거는 남 얘기가 아니라 나에 관한 얘기예요. 나에 관한 얘기.
그러니까 만유를 포함하는 복음이 지금 나타난 거죠. 누구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만인에게 해당되는 복음이 나타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미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너무 시원하고.
노래 한 곡 더 있는데, ‘그대라는 사치’란 노래가 있어요. 한동근의 ‘그대라는 사치’란 노래가 있는데, 그대라는 사실, 그대라는 사실이 됐구나, 이 판에서. 짧게 하겠습니다. 오늘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내려갈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저는 지킬 게 없어요. 지킬 게 없고 하루밖에 없어요. 제가 일희일비를 좀 안 좋아했는데 일희일비 할래요. 하루밖에 없는데 무슨. 내일 생각할 거 있습니까? 내일 사는 사람 있으세요. 우리 오늘밖에 안 살아요. 일희일비 할 겁니다.
“그림 같은 집이 뭐 별거겠어요. 어느 곳이든 그대가 있다면 그게 그림이죠. 빛나는 하루가 뭐 별거겠어요. 어떤 하루던 그대 함께라면 뭐가 필요하죠.” 여기까지입니다. 제가 이 노래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소유가 많다 하더라도 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가 없다.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왜냐하면, 예수를 예수가 없으면 나도 없는 거예요.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잃어버린다, 나를 잃어버리는 거더라고요. 왜냐하면, 나라고 할 만한 게 없어요.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나라고 할 만한 것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소유입니다. 내가 아니에요. 다 옷과 같은 것이지. 옷은 내가 아니잖아요. 소유는 옷이기 때문에 나라고 절대 나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정말 천국이고, 사후세계가 전 관심 없어요. 사후세계. 기독교 이게 지금 전 세계로 나가는 거 맞나요? 기독교 듣고 있니? 전 사후세계에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신이다, 더더욱 관심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지은 사람의 온전한 모델인 사람이고 잃어버린 우리 자신이다.
자, 이 선포를 하고 싶어요. 이것만이 사실이고 진실이고 이 사람과 하나 된 나로 있을 때 그게 진짜 현실입니다. 나머지는 다 가상이에요. 가상. 그냥 생존이고 서바이벌이지. 오징어 게임 아시잖아요. 들여다보면 다 오징어 게임이고 그냥 서바이벌 해버리고, 내가 좋은 호텔에서 맛있게 천천히 고상하게 양념하는 것이나 길거리에서 포장마차에서 먹는 거나 다 그냥 같습니다. 다르지 않아요.
근데 이 사람 안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 예수 안에 있는 나 예수가 바로 나다 할 때, 나로 살 때는 그게 진짜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사람으로 산다는 거, 바로 이 예수 안에 있는 나로 사는 것입니다.
아까 이제 춤도 많이 추고 하는데, 춤추고 있는데 이런 생각 들더라고요.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는데, 옆에서 갑자기 “성훈아, 너 성격 왜 그래.” “성훈아, 너 왜 그거밖에 안 돼.” 그럴 시간이 없어요. 춤추느라 지금 시간도 부족한데 무슨 미덕이 어쩌고저쩌고 그거 생각할 시간이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
우리 모두 다 이 사람 안으로 매일매일 스카이다이빙 하고 있는 겁니다. 막 정신없이 공기가 나를 때리고 있는데, 옆에서 미덕이 어떻고 과거가 어떻고 역사가 어떻고 지긋지긋해. 정말 예전에 양문의 생활도 떠올리면은 한 달에 한 번 하는 연합순 가면 이모 삼촌들 만나는 거 좋단 말이에요. 되게 귀엽게 봐주시고 사랑스럽게 봐주시고 좋은데. 거기서 역사 얘기를 듣고 있자니 정말 저는 근데 놀랍게도 그걸 참았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래야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거든. 이거를 견뎌야 내가 죽음을 살아낼 수 있거든. 그래서 그렇게 살았는데 지금은 너 난 따로 있습니까? 다 온통 나밖에 없어요. 이거 나고 저기도 다 나밖에 안 앉아있네. 그러니까 야, 이거는 정말 어마무시한 복음이구나.
제가 오늘 여덟 가지 해방을 선언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소유로부터 해방. 아이유라는 유명한 연예인이 있는데, 어떤 프로그램에서 이야기를 했어요. 자기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런 거대한 인기들이 있지만은 실제로 자기 자신이 한 요 정도인 것 같다. 이것만 해도 사실 이제 좋은 놀라운 통찰력이라 할 수 있는데, 옆에서 어떤 남자분이 하는 얘기가 카푸치노는 거품까지 카푸치노다. 그러니까 진실을 마주하는 어떤 그런 순간에 우리는 다 그렇게 저는 그렇게 합리화를 하고 살았던 것 같애요.
내가 나라고 아닌 거 같은데라고 여기는 것들, 그리고 실제로 내가 아닌 것들까지. 카푸치노의 거품까지 카푸치노니까, 이것마저 나다. 나의 소유 나의 미덕 나의 역사라는 이 거품 나는 카푸치노니까 이것까지 다 나다. 이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이렇게 하니까 연합이 발생할 수가 없는 거예요. 존재와 존재가 하나 되는 연합인데, 이 소유가 중간에 끼니까 이게 하나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여전히 계단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고.
그다음에 호칭들도 다 소유인 거예요. MZ, MZ라고 하는데 MZ도 소유입니다. MZ라는 호칭도 소유예요. 그래서 MZ 그리고 양문회, 양생회, 청심회 그다음에 새싹회 이런 호칭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진짜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이거 너무 얘기하고 싶더라고요. MZ들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다 MZ면 MZ고, 우리가 다 청심회면 청심회고, 우리가 다 새싹회면 다 새싹회지, MZ고 청심회고 양문회고 이런 거 없습니다. 다 옛판이고, 다 끝났고, 이미 다 지나간 부산물이고, 껍데기고, 배설물에 불과합니다. 다 끝났습니다. 호칭은 소유에 불과하다.
정말 아브라함이 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사람의 원형인 그 사람,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 사람은 하나님 앞에 그냥 존재로만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 어떤 수식으로 붙여버리면 우리는 또 과거를 반복할 뿐입니다. 사람을 살린 예수, 좋은 말씀을 선포한 예수, 틀린 말은 분명 아니지만은 그 사람과 나와의 거리감이 생겨버려요. 수식어 하나 때문에.
그래서 좋은 것 죽인(?) 것, 그게 바로 선악과의 선이더라고요. 교회 안에도 선악과가 아주 깊게 침투했었습니다. 좋은 거, 목사님의 좋은 것들, 그리고 어떤 형제자매들의 좋은 거. 당연히 우리가 좋은 것을 이야기를 이렇게 하는 게 더 이제 쉽겠죠. 나쁜 거 얘기하는 것보단 좋은 게. 근데 좋은 것으로 내 머릿속에 사람이 치장이 되는 거예요. 목사님은 좋은 사람 목사님이랑 호칭부터 해 가지고 어떤 좋은 사람이라는 그런 이제 이미지들이 목사님과 제가 하나로 보이는데 그것이 방해가 되더라고요. 더 올라가서 하물며 예수가 어떻게 나와 하나로 발견되겠어요.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목사님조차도 나와 하나로 보이지 않는데. 근데 정말 존재자 앞에 있는 존재, 십자가라는 자리에서 모든 것이 해체되고 존재만 남은 한 사람, 그 태양 아래 모든 게 다 녹아내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못하는 흙으로만 드러난 한 사람, 이 사람이 나잖아요. 이 사람이 우리 모두잖아요. 이 사람의 운명에 해당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존재, 존재 가치라고 이야기하면서 안에 너무 이렇게 소유가 많이 섞여 있었던 것 같아요. 예수, 목사님, 그리고 바깥으로는 뭐 유명한 사람들, BTS, 뉴진스, 유재석, 김연아. 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볼 때 무엇으로 봤습니까? 소유 가치로 봤죠. 존재 가치로는 똑같아요. 예수와 나와의 존재 가치는 동일합니다. 목사님과 나와의 존재 가치도 동일합니다. 존재라는 것은 찢어질 수가 없어요. 하나이기 때문에.
근데 우리가 존재 가치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존재를 이야기하면서, 이 소유 가치에 낚여 가지고 그 사람의 인품, 사람의 외모, 성향, 사람의 과거, 사람이 됨됨이,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어떠함들,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놓은 존재,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놓은 존재 이유, 가치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가 바로 나다.”라고 하는 것은 이 소유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종교로부터 해방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우리 교회는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가 절대 아니에요. 사람의 필요가 기초가 된 것이 종교고, 하나님 나라는 오로지 하나님의 필요만이 기초로 있을 뿐입니다. 종교가 우리는 절대로 아닙니다. 기독교가 아니에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는 기독교가 버렸습니다. 기독교가 버린 예수를 가지고 우리가 지금 잔치를 하고 있잖아요. 정말 내려오지 못한 사람 예수로 잔치를 벌이는 교회가, 이런 사람들이 지구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내몰려 가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한 사람을 가지고 이렇게 자유와 해방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진짜 여기밖에 없죠. 그러니까 오로지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에 대해서만 살아있는 사람, 예수 안에 포함된 사람으로 있는 그 사람이 있는 곳인 곳은 더 이상 종교가 아닙니다.
어떤 친한 형에게, 교회를 나오지 않자 제가 이렇게 대화를 하다가 저에게 이러더라고요. “성훈아, 나는 이제 무교다.”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형, 나도 무교다.” 나도 무교인데 그러니까 형이 아마 못 알아들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종교가 아니니까, 이거 해방이잖아요. 나는 무교인데, 종교에 관심 없는데, 내가 내려오지 못한 예수 안에서 발견된 사람인 거 이외엔 관심이 없어요. 여기서는 종교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기독교도 없고 역사도 없고.
근데 종교의 잔재가 남아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독교라는 것은 낡은 헝겁에 불과합니다. 옛 부대고. 이 새 사람, 내려오지 못한 사람 예수, 이 참사람으로. 만약에 이 기독 사람들이 이 기독교라는 옛 부대를 가지고 가릴려고 한다면은 그 부대는 바로 터집니다. 성경은 예수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애기가 있는데, 애기가 장난감 가지고 놀잖아요. 성경은 장난감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증거하는 수단에 불과하지, 그렇다고 성경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이 한 사람을 증거를 하고 있는 수단으로서 성경이 있는 것입니다. 태초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고 자기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고 보시기에 심이 좋다 했다. 이 사람이 예수로 인해서 이제 완전하게 드러났고 이 예수는 성경은 곧 나에 대한 증언이다 라고 선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예수 안에서 발견된 사람은 누구라도 다 성경은 곧 나에 대한 증언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이거는 참람한 말이 아니에요. 참람한 말이 아닙니다. 결코 참람한 말이 아니에요. 너무나 자연스럽고 이게 순리입니다. 이 구속의 복음은 순리복음이에요. 순리. 그냥 하나님이 정해놓은 질서 안에서 나를 발견했고, 성경은 나를 증거하는 것이다. 이거는 순리입니다. 순리. 절대 역리가 아니에요.
억지로 얘기하는 것도 아니에요. 억지로 얘기했으면 땀 삐질삐질 흘렸습니다. 정말 너무나 시원하고, 어떤 삼촌은 또 목사님에게 종교의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라고 이야기하셨던데, 종교가 아니라니깐요. 종교가 아닌데 무슨 종교의 자유입니까? 이 세계는 네이버에 쳐도 나오지 않아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당하게 나가자고요. 무슨 쫄게 뭐가 있어요.
저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절대 안 됐었는데, 목사님이 참사람을 밝혀놓고, “성훈아, 이거 너다. 이게 하나님이 지은 사람이다.” “어, 나네요.” 하는 순간 그냥 게임 끝났어요. 순간 그냥 다 끝난 겁니다. 종교의 자유, 그냥 귀여운 말로 들립니다. 종교의 자유. 우린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참 사람으로 발견됨으로 인해서 누리는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가 아니에요.
기독교는 오랜 시간 동안 예수를 왜곡시켜 놨습니다. 신 뭐 구구절절 뭐 정치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얘기할 필요 없이 예수를 4대 성인으로 기독교 창시자로 만들어 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보니까, 쪼끔, 조금 화가 나는 일인 것 같애요. 조금 화가 나는 일. 왜냐 이 예수 안에서 내가 발견되는 것이 최종적인 하나님의 목표인데, 예수를 4대 성인으로 신으로 올려놨으니까. 이거 완전 내 밥그릇이고 밥이고 뭐고 다 싹 다 들고 간 거잖아요.
근데 이 사람이 밝혀졌다. 이 예수는 신이 아니다. 우리와 똑같지.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 내려오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더라.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 자체가 복음이 아니라, 내려오지 못한 게 무슨 복음이에요.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 예수 안에 내가 있다. 이게 복음이죠. 내려오지 못한 예수가 바로 나다. 이게 복음이죠. 그러니까 아직 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사람이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 이게 복음이다 하면은 조금 헷갈리는 것 같은데, 저는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가 바로 나다. 이 사람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복음인 거예요. 이게 구속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거 빼고 아무것도 없어요. 이거 빼면은 그냥 진짜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친한 동생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믿는 예수와 형이 믿는 예수가 다른 것 같다.” 그래서 제가 얘기했어요. “나, 예수 안 믿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다른 세계인지. “나, 예수 안 믿어. 예수 안에 내가 있어. 예수와 나는 하나야.” 목사님 진짜 감사합니다. 이번 생에는 예수를 믿을 일은 없을 것 같아요. 하난데 뭐, 예수와 내가 하나인데, 예수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 라고 하고 나서, 물론 자기가 또 하나님 아들이다 하고 나서 이제 죽임을 당했잖아요.
진짜 두려운 게 없는 것 같아요. 예수와 내가 하나다. 누가 뭐라 해도 사실인데, 누가 형은 아니 왜 그렇게 이야기하노, 왜 그렇게밖에 이야기할 수밖에 없노 해도 사실인데 어떡하냐? 진실인데 어떡하냐? 사실이니까. 이게 사실이야 이렇게 거대하게 이야기하든, 사실이야 이렇게 얘기하든 변동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정해놓은 사실 안에서 내가 발견되는 건데, 이거 싸우고 자시고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포만 하면 된다. 너무 쉬운 것 같습니다. 내 과거 역사 얘기할 필요 없어요. 내가 말씀 듣고 무얼 이해하고 내 인생이 어떻게 해석됐고 요것도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너무 쉽고, 대한민국 이 동생이 그러면 대한민국 목회자들 다 불러보든지, 복음을 믿는지,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다 불러와줘. 다 불러와줘. 왜냐 너도 사람 나도 사람으로 만나면 장땡. 너도 사람 나도 사람으로 만나면 끝인데. 목사라는 직함, 성도라는 직함, 죄송하지만 관심 없습니다. 전 사람인 것밖에 관심이 없어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안에 내가 있다. 그 사람밖에는 관심이 없어요.
제가 퀴즈를 하나 하고 싶습니다. 전기의 아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전기의 아들 전구입니다. 전구. 그 난이도를 좀 낮춰서, 농부의 아들 누군지 아십니까? 흙입니다. 자 마지막, 하나님 아들 누군지 아십니까? 맞습니다. 사람입니다. 사람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만을 지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로 인해서 완전하게 드러났고, 이 한 사람 예수, 이 사람 예수 안에서 내가 발견되는, 즉시 우리는 신분을 회복하는 겁니다. 하나님 아들,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니까 이 교, 이 교회, 기독교, 하나님 예수 이런 것에도 전혀 이렇게 관심이 없던 어떤 사람도 하나님 예수 하느님 아들이란 말을 하면 마치 이렇게 (손을 높이 올리면서) 생각을 해요. 이렇게.
근데 우리가 말하는 하느님 아들은 신성 뿜뿜, 신의 성품 등등, 어떤 이런 신비로운 것이 신비로운 것을 가득 머금고 있는 하느님 아들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못하고 아무것도 없는 그 사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들의 실체, 하나님 아들의 실체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 예수입니다. 이게 하나님 아들의 실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들이라는 단어에 겁먹을 필요도 없고 이것도 순리예요. 순리. 사실입니다. 사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들이냐 그리스도냐 생각할 거 없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이 사람 예수가 나다 이 선포 한방이면 끝이 납니다.
그 다음 해방은 나로부터 해방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가 바로 나다, 너도나도 이 선포를 하고 있잖아요. 이 선포 가운데 그냥 모든 사회 소유가 다 거둬지고 다 한 사람을 그냥 만나고 있는데, 피조물 형상 흙 산혼 등등 여러 가지를 통해서 목사님이 지금까지 사람을 말씀해 오셨는데, 이 모든 것들을 총체적으로 포함하는 표현이 지금 드러난 겁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이 사람 예수가 바로 나다. 이것이 피조물의 가장 정확한 표현이고, 내가 피조물이라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고, 내가 하나님 형상이라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고, 내가 흑이라는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람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에요. 호모 사피엔스 할 때 그 사람을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과학계에서 말하는 초신성의 후예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었다고 하는 사람을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이 예수라는 이 사람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고 초신성의 후예도 아니에요. 정말 이 세상과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요즘 젊은 세대들은 자존감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데, 나을 모르고서는 자존감 찾는다는 것은 정말 어둠 속에서 그냥 허공을, 그냥 손으로 붕붕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데 자존감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어떤 소유를 나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외모 돈 그리고 성격 이런 여러 가지 등등 소유를 가지고, 소유라는 나무 뒤에서 나 자존감을 찾았다. 나 자존감을 세우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지. 소유를 다 싹 다 걷어내고 흙에 정말 오만 가지 좋은 열매들이 다 맺혀 있어도 그걸 다 걷어내 버리면, 그냥 아무것도 못하는 흙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 흙, 이것만이 나이지. 나머지 소유는 나 자신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존감 수업을 찾아 들을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정해 놓은 나를 발견했는데, 무슨 자존감 수업을 듣습니까? 정말 온 인류가 이 한 사람 안에 다 포함되어 있구나.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이 예수라는 이 사람 안에 다 포함되어 있구나. 이 사람 안에서 내가 발견되는 즉시, 그때부터는 자존감이나 자신감이나 이런 거 어떻게 키울지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늘 사람이고 내가 내 어떠함이 어떻든 간에 내가 어떤 상황 환경 처지에 놓여 있든 간에 상관이 없어요.
우리는 늘 존재자 앞에 존재로, 하나님 앞에 그냥 늘 흙인 사람입니다. 이것만이 나이고, 이게 나의 정체성이고, 이것만이 나의 진짜 이름입니다. 나머지는 다 소유로부터 만들어진, 발생한 것이지. 하나님이 창조와는 상관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얼마나 해방인지.
이번엔 성경 구절을, 예수를 알지니 예수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는데, 예수를 볼지니 이 예수를 보면은 이 예수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보는 것이 전부인 세계입니다. 목사님을 봤더니, 아 내가 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가 바로 나구나. 목사님이 이 사람의 실체로 지금 있는 것이구나. 그런 즉시 여기 지금 앉아있는 사람들이 다 하나님이 정해놓은 사람의 실체로 지금 앉아있는 거거든요.
이건 그러니까 실체복음이지. 그냥 추상이고 관념이고 생각이 아니에요. 지금 눈앞에 보이잖아요. 이 사람 사람들이 이 사람이 다 사람인 겁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메두사 다 아시죠. 메두사를 보면 즉시 돌덩이가 됩니다. 딱 보는 순간 살짝만 스쳐도 살짝만 봐도 바로 돌덩이로 딱 변해요.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을 보는 순간, 이 사람이 나구나 라고 보는 순간, 우리도 사람으로 지금 살게 되는 거예요. 21세기를 그 사람으로 사는 겁니다.
2000년 전에 예수로 예수 한 사람으로 끝난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그 사람 예수로 사는 거예요. 나로부터의 해방을 이 구속의 복음이 가져다줬구나, 그게 너무 발견이 됐고.
그 다음에 여러 관계로부터 해방. 관계 때문에 얼마나 이 가랑이가 많이 찢어졌는지. 교회 안에 진짜 부수적인 게 본질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게 같이 섞여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예수와 나와의 관계는 딱 제껴놔지고, 옆에 내가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우선시 되다 보니까, 예전에 양문회 생활했을 때도 관계 때문에 튕겨져 나간 사람 한둘이가 아니에요.
근데 그때는 진짜 이 규화목판, 계단판이었기 때문에, 동생들을 보면은 “그래, 우리 함께 계단을 오르자.” 이거밖에는 할 얘기가 없는 거예요. 내가 누구인가가 정확하게 밝혀져야 되는데, 복음이 그때 당시에는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그니까 관계로부터의 해방은 너도 사람 나도 사람 이거면 그냥 한 방에 정리가 되더라고요. 우리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이 예수가 바로 나다 이거 이외에는 나머지는 다 부산물이고 비본질입니다. 2PM 소속, 3PM 소속, 대구교외 소속 다 날아갔습니다. 관심이 없어요.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이 사람 예수 안에 내가 있다. 이거밖에 관심이 없어요.
사람이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한가. 2PM 소속, 관심 없다니깐요. 대구교회 다니냐, 관심 없어요. 내가 어디 있든 간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 안에 내가 있다. 이 사람 안에 내가 있다. 이것만이 저에게 유일한 소속이에요. 모두가 이것만이 유일한 소속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실만 얘기하면은 장땡이구나. 그러니까 너무 쉬워요. 한 가지만 생각하면 돼요.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 중요한 게 많은 사람은 중요한 게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거는, 우리가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잖아요. 이 십자가에 못박해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가 바로 나다. 이 예수 안에 내가 있다. 이거 이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만이 중요한 거지. 이게 제일 중요한 거고. 이것만이 가장 중요한 것이구나.
진짜 너무나 해방이고. 바깥에 길거리 건너는 사람들이나, 학교에 어제 오랜만에 출근을 했었는데, 거기서 회의에 참석해 가지고 연수 듣고 있는 우리 동료 쌤들이나 할 것 없이 다 사람 아닌 사람 있습니까? 이 내려오지 못한 이 예수 안에 포함된 사람으로서는 너도나도 다 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작품이고 명품이고 하나님의 걸작입니다. 그러니까 야 이게 너무 엄청난 해방인 거예요.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너 어디서 왔니? 어쩌라고.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니도 사람이야 나도 사람이야.
어제, 아까 말했잖아요. 동생이랑 카톡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어디 목회자님 얘기하고 어디 사람 얘기하고 이렇게 이제 귀여운 옥신각신을 펼치다가, 근데 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 아니냐 제가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그냥 일절 정리되더라니깐요. 근데 동생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더라고요. 받아들이지 못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사람, 하나님이 정해 놓은 이 사람을 선포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구나. 진짜 전쟁이라는 게 왜 전쟁이라고 이야기하시는지 이제 이해가 되더라고요. 나 아닌 걸 나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다. 그러니까 이게 기독교냐, 종교를 떠나서 진짜 거짓이더라구요. 소유를 나라고 생각하는 거 이게 정말 거짓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하나님이 정해놓은 이 한 사람을 선포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구나.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 안에 내가 있다. 예수가 바로 나다. 이걸 선포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구나. 그게 너무나 알아듣었어요.
예전에는 비음판이었던 것 같아요. 비음판, 지금은 복음판입니다. 비음이 뭔지 아시죠. 슬플 비자 써가지고 슬픈 복음, 슬픈 소식. 왜 슬픈 소식이냐? “어, 들어왔어. 어서 와. 같이 계단 올라가자.” 이게 슬픈 소식 아니고 뭡니까? 이게 슬픈 소식이잖아요. 이게 무슨 복음입니까? 어우, 지긋지긋해. 그건 진짜 비음이었던 거 같애요. 비음.
근데 그게 비음인 줄도 모르고 내가 뭔가 되려고 하니까, 내가 뭔가 되려고 하는 게 여기 깊이 박혀 있었으니까 비음판 좋다고 따라 올라갔잖아요. 열심히 식은땀 뻘뻘 흘리면서. 근데 비음판과 복음판은 판이 다르다. 정말 너무 다른 것 같애요.
얼마 전에 스노클링 할 일이 있어서 바다에서 헤엄을 치다가 물고기들이 바닷속에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쫙짝 손을 뻗었어요. 아주 열심히 쫙짝 손을 뻗었는데 얘들 이렇게 물고기를 이렇게 헤엄치잖아요. 요러고 있다가 옆 제 손을 딱 보더니, 옆으로 이렇게 쏙 피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손을 더 뻗었어요. 그러니까 다시 쏙 피하더라고요. 나는 지금 죽겠는데 숨도 못 쉬어 못 쉬어 가지고 지금 바닷물 계속 들어오고 죽겠는데, 얘는 너무나 자유로운 거예요.
근데 이걸 딱 보니까, 누가 생각이 나겠어요. 목사님이 생각이 나고 여기 사람들이 생각이 나는 거예요. 육지판과 바다판이 완전 다르잖아요. 바닷속에는 넘어지고 과정 어쩌고저쩌고 이런 거 없어요. 바닷속에서 넘어진 게 뭐예요? 뭐가 넘어진 거야? 바닷속에서는 이게 넘어진 건가? 요게 넘어진 건가? 요게 넘어진 건가? 뭐가 넘어진 거지 이것도 서 있는 거고. 요것도 서 있는 거고. 이것도 서 있는 거고. 넘어진 게 없어요. 넘어진 게. 그러니까 판이 다른 거예요.
육지에 있으니까. 내가 육지에 위치하고 있으면 거기 넘어진다, 과정이다, 나 피났다, 이런 거 있는데, 바닷속에 퐁당 들어가는 순간, 내려오지 못한 예수 안으로 풍덩 빠지는 순간, 더 이상 넘어지고 자시고가 없어요. 넌 그 사람이다. 넘어져도 그 사람, 서 있어도 그 사람, 니가 눈물 흘려도 그 사람, 뭘 해도 그 사람, 너도 그 사람이라니까. 해방이잖아요. 이게. 뭘 해도 그 사람이라니까.
형 나 힘들었어, 최근에 이런 일 있었어. 응, 그래 너도 그 사람. 그러니까 이거 아주 천하무적 복음 아닙니까 이게 진짜, 야 이 진짜, 이 예수와의 연합, 이게 없으면 교회는 그냥 없어지는 게 도와주는 거 같애요. 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러 가지 좋은 거 문화센터로서의 교회는 하나님한테는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가 없어요. 이 예수와의 연합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필요한 거지. 건물부터 해서 여러 가지 것들이 우리의 필요, 우리의 필요로써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필요와는 상관이 없더라고요. 야 이게 밝혀지니까는 이게 또 엄청난 해방인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예전에는 과정 겪기 따라하기 육지에서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날 따라 해봐라 요렇게. 날 따라 해 봐라 저렇게. 목사님 따라 해 봐라 이렇게. 근데 목사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개가 소 흉내 낸다고 소가 되냐. 저는 얘기가 무슨 얘긴지 도저히 모르겠더라고요. 왜냐하면 나는 흉내 내는데 온 신경이 다 몰입이 돼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근데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 아, 목사님 감사합니다. 제 분수가 밝혀졌습니다. 흙에다가 페인트칠한다고 벽돌 됩니까? 흙은 늘 흙입니다.
아, 진짜 하나님이 정해져 있는 순리의 사랑으로 발견되면은 내가 뭐 되고 안 되고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애요. 그거 자체가 나니까, 난 늘 흙이니까. 난 늘 존재자 앞에 그저 존재니까. 야, 이렇게 너무나 정확하게 나를 밝혀주니까 너무 감사하고.
아이돌과 팬판 이게 구약판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돌과 팬, 아이돌 이라는 의미 자체가 우상이라는 뜻입니다. 저에게 목사님은 늘 아이돌이었어요. 목사님 사진, 진짜 수두룩 빽빽이었습니다. 휴대폰에. 근데 이 새판이 열리고 나서 싹 다 지워졌어요. 목사님과 내가 하나구나. 예수와 내가 하나구나. 지금 교회 마크가 초록 빨강 파랑 사람이 세 사람이 손을 잡고 있잖아요. 예수 목사님 나 끝. 그냥 하나로 손잡고 있는데, 더 이상, 목사님 더 이상 저에게 아이돌이 아니에요.
아, 제가 지금까지 목사님을 박물관에 모셔뒀더라고요. 지금 보니까, “나를 박물관에 이렇게 넣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근데 이 예수 안에 퐁당 빠져서 보니까, 내가 목사님을 안다. 목사님에 대한 어떠함. 수식어. 예수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것들이 다 박물관에 가둬 놓는 것이더라고요. 근데 “나를 좀 해방시켜줘서 감사합니다. 나를 해방시켜줘서 여러분 고마워요.” 어제 이제 말씀하셨는데 너무 시원하더라고요. 우리가 서로를 박물관에 가두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으로 살아야죠. 생명은 박물관에 가둬질 수가 없습니다. 생명은 늘 살아서 꿈틀꿈틀대는 거예요.
어떤 교리나 지식으로 가둬질 수가 없습니다. 사진 찰칵 찍어놓고, 나 성훈이 알아 제가 이렇게 하고 나서 사진 찍어보세요. 더 이상 저는 포즈를 하고 있지 않아요. 박물관에 가둘 수가 없습니다. 근데 기독교는 2000년 동안 예수를 박물관에 지식과 교리로, 지식과 교리라는 박물관에 가둬놨구나. 근데 이 구속의 복음이 오고 나서. 이 해방위 복음이 오고 나서 예수가 완전하게 해방됐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정말 놀라운 현장에 있는 겁니다. 지금 이런 일이 없었어요. 지구상에.
제가 지금 감정을 엄청 추스르고 있는데, 왜 그러냐면 수도꼭지 잘못 열었다가 여기 있는 말을 구석구석 얘기하지 못하고 내려갈까 봐 상당히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여튼 진짜 이 예수와 연합하게 하는, 연합을 가능하게 가능케 하는 복음이 나타났다.
진짜 화장으로부터 해방이잖아요. 여기 이모들하고 자매들 많은데 화장하고 오시잖아요. 물론 우리가 말하는 화장이 그 화장이 아니잖아요. 근데 이 존재를 소유로 화장을 너무 많이 했어. 오랫동안. 근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은 화장한 사람이 아니라 쌩얼인 사람이었어. 야, 쌩얼로 다니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존재로 이렇게 살 수 있고, 존재로 걸어 다니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이제 화장을 할 필요가 없어요. 성경 지식으로 미덕으로 역사로 과정으로 우리가 더 이상 화장할 필요가 없어요. 화장한 사람은 찾지도 않습니다. 쌩얼인 사람 일로 와 이겁니다. 쌩얼인 사람. 그러니까 뭐가 됐다는 착각이나 안 됐다는 착각, 다 착각입니다. 되긴 뭐가 돼. 그리고 안 되긴 뭐가 안 돼. 세상 우릴 자꾸 속이잖아요. “성훈아, 넌 이쯤 돼야 돼. 또는 왜 그거밖에 안 돼.” 이게 다 존재의 차원입니까? 다 소유의 차원입니다. 단 한 가지도 빠짐없이 다 소유의 차원이에요. 존재의 차원이 아니에요. 세상과 종교는 소유로 화장이 돼 있는 겁니다. 화장판이야 화장판. 우린 쌩얼판이야 쌩얼판.
쌩얼인 사람을 찾으신다. 벌거벗었지만 부끄럽지 않더라. 보시기에 심이 좋다. 한 사람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이 사람을 하나님이 자신의 상속자요 후사로 삼으셨구나. 야, 그러니까 정말 너무 시원하고 독립적인 존재로부터 해방이 되는 거 같애요. 저는 지금까지 좀 따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맨 처음에 목사님이 존재를 말씀하셨을 때도, 존재라는 것을 어떤 우리가 지금 우리가 지금 말하는 이 존재는 이 예수와의 연합안에서 밝혀진 존재이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잖아요. 불교에서 말하는 종교가 아닌 거예요. 이 연합 안에서 밝혀진 존재. 그래서 우리가 다 이 선포를 하잖아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가 바로 나다. 이게 바로 예수와의 연합을 말하는 거잖아요. 그니까 이 예수와의 연합안에서 밝혀진 나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거지. 이 예수 따로 나 따로 됐을 때 이 분리된 존재를 말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와 내가 하나됨을 선포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 내가 200% 피조물임을 고백하는 것이구나. 그냥 피조물이라는 것은 너무나 빈틈이 많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다. 내 하나님 앞에 흙이다. 형상이다. 이야기는 그리고 예전에도 다 했었어요. 지금 달라진 것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 종교와 자기를 사랑하는 제자 그리고 모든 자기가 이제 배불리 먹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차까지 밀리고 밀려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남은 이 한 사람, 이 한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정말 피조물의 총체적인 표현인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 해방의 복음은 또 여러 가지 감사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같애요. 예를 들면, 어떤 이모 삼촌들을 통해서 제가 이 교회에 왔습니다. 이모 삼촌들에게 감사합니다. 다음에 제가 이번 RT를 준비하면서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말씀하셔서 해석이 돼서 감사합니다. 근데 이 감사 속에는 내가 없어요. 내가 없어요. 내가.
근데 이 새판에서 저에게 유일한 감사는 오직 한 가지로 또 단순화되더라고요. 사람이라는 것이 감사합니다. 이거밖에는 제가 할 감사가 없더라고요. 하나님 저를 사람으로 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끝. 대구교회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한 일이지만은 하나님이 지은 사람으로 내가 발견된 순간부터는 제가 사람인 게 너무 감사합니다. 이거는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든 간에 언제든지 무한생산 가능한 감사인 거예요. 내가 사람인 것이 감사합니다.
이게 또 저를 너무 단순하게 했고 마지막으로, 이 시공간으로부터의 해방인 것 같아요. 진짜 이 예수 안에서 발견된 나는 정말 하루살이더라고요. 하루살이를 그냥 생각으로만 그렇지, 내일을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오늘을 사는 거니까 그렇지, 하루살이지. 이렇게 이해하려고 했는데, 이 사람은 진짜 오늘밖에 없더라고요. 역사는 다 소유로 끝이 났고 우린 지금 이 순간밖에 없더라고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불변하는 정해진 나로 발견되는 거. 이 사람으로 내가 지금 호흡을 하고 있는 거, 이 순간만이 영원하더라고요.
이 순간만 내일 생각할 필요가 없고, 정말 2000년 전에 죽었다는 예수를 오늘날 이 목사님을 통해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밝혀졌고, 우리 모두가 이 사람을 만남으로 인해서 진짜 어떤 시간 시계 이런 것들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하나님이 정해 놓은 사람은 유행을 안 타는 것 같아요.
유행 타는 패션은 좋은 패션이 아니잖아요. 저는 사실은 옷 사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왜냐하면 옷을 사면 또 생각해야 되고 또 다음 시절에 뭐 사니 저는 머리가 그렇게 돌아가지가 않아 가지고. 근데 이 하나님이 정해놓은 이 사실인 한 사람, 이 사람은 유행 안 타네. 시대와 문화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이 사람 변합니까? 안 돼. 안 변합니다.
이 사람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람입니다. 존재자 앞에 있는 존재, 시공간을 초월하는 이 한 사람, 와 진짜. 이 제가 여덟 가지를 적어왔지만은 이거보다 더 무궁무진한 해방이 아주 가득할 것 같아요. 하여튼 여러 가지 해방을 이렇게 선포를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중심에 십자가에 못 박해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 예수가 바로 나다라는 이 선포가 있습니다. 이 선포를, 이 사람을 놓치고 우리가 외치는 해방은 오래 못 갑니다. 비실비실해져 가지고 사라집니다.
근데 이 원천인 이 한 사람,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이 사람 예수가 바로 나구나. 이 사람 예수는 더이상 종교적인 인물이 아니고 잃어버린 나 자신이구나, 나의 정체성이구나. 이거를 진짜 발견하게 한 이 복음이 나타난 것이 너무 감사하고 사람으로 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