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송산리 무령왕릉 답사(2006년 5월 7일)
공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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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백제의 두번째 수도로서 백제시대에는 웅진(熊津)이라 불리었다.
백제의 수도는 서울--> 공주(웅진)-->부여(사비)로 바뀌었다.
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잡히어 죽자, 문주왕은 475년 안전한 남쪽으로
이동하여 금강을 끼고 있는 공주로 천도하였다.
공주는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왕, 25대 무령왕, 26대 성왕
이렇게 5분의 백제왕의 수도였고, 26대 성왕때(538년)에는 수도를 부여(사비)로 다시 옮겼다.
공주는 5분의 왕과 왕비의 무덤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이 있는 곳으로, 특히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 처녀분이며 능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지석(誌石)이 발견된 삼국시대 유일의 무덤이다.
송산리 왕릉이외에 공주에는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석장리가 있다.
1. 송산리 고분군
송산리(宋山里)는 원래 은진 송씨(우암 송시열이 은진 송씨)의 선산이라서 송산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아빠 이야기에 의하면)
송산리 고분군에는 모두 7기의 고분이 있는데, 1~5호분은 돌을 쌓아서 방을 만든
굴식돌방무덤(돌판으로 방을 만든 고분으로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고분이라고도 부른다)이고, 6,7호는 벽돌을 쌓아서 시체와 부장품을 놓을 만든 방을 만든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이다. 전축분인 6호분은 사신도(청룡, 백호, 주작,현무)가 있었다.
7호분이 바로 무령왕릉인데 벽화는 없다.
2. 무령왕릉
1~6호분은 이미일제 시대에 도굴을 당해서 부장품은 없고, 6호분에는 사신도만
남아있다. 6호분에 비가 오면 물이 스며들자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 무령왕릉이다(1971년).
총7기중에서 2기는 전축분, 5기는 석실분(굴식 돌방 무덤)
무령왕릉은 무령왕과 왕비가 같이 모셔진 부부 합장묘이며, 108종 4600점의 부장품이 나왔으며, 국보로 지정된 것만 12점이다.(신라 천마총은 11,500점)
부장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석이다.
지석은 묘의 주인에 관한 일종의 증명서이다.
이 묘의 주인공의 이름과 태어난 해, 죽은 해, 묻힌 해 그리고 간단한 행적을 기록한 돌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지석, 2개가 발견됨으로써 이 묘가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무령왕의 원래 이름이 사마인데 이 지석에도 역시 사마라는 이름이 나온 것이다.
왕의 지석 내용을 보면
“ 영동 대장군 사마왕 62세 계묘년 5월 7일에 돌아가시다”라는 한자가 나온다.
이 사마가 바로 무령왕릉을 의미한다.
왕비의 지석을 보면 뒷면에 1만문의 돈으로 토지신 에게 땅을 사서 묘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시대 무역로. 백제가 3국중 가장 먼저 주도권을 쥐고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로 강한 나라로
부상한데에는 중국과 가야,왜를 잇는 무역로의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백제 부흥의 왕인 무녕왕의 가장 큰
과업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에 의해 붕괴된 이 무역로를 회복하는 것이다)
3. 위진 남북조 시대와 고구려, 백제
1호분부터 5호분 까지는 모두 굴식돌방무덤(석실분)인데, 6,7호분만 전축분이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을 가보면 다시 굴식돌방무덤(석실분)으로 바뀐다.
이 전축분은 중국 남북조 시대(420~589) 남조 국가중의 하나인 양나랑에서 수입한 문화이다.
무덤 양식은 쉽게 바꾸지 않는데 무령왕은 양나라 무덤 양식인 전축분으로 바꾼 것을 보면 백제가 양나라와 보통 사이가 아닌 듯 하다.
아래 연표에 보듯이 위(조조), 촉(유비), 오(손권) 3국이 서로 싸우다가 조조의 신하인 사마씨가 위나라를 빼앗아 진(晉)나라를 세우고 3국을 통일한다.
하지만 이 진나라는 나라가 혼란해 지면서 남쪽으로 천도한다(동진:東晉).
이때 북쪽에서는 5胡(호) 16國 (5오랑캐가 16개의 나라를 세우다)의 시대가 시작된다. 다섯 오랑캐는 흉노,갈,선비, 저, 강을 말한다.
(남쪽은 동진, 북쪽은 5호 16국으로 분열)
북쪽에 있던 16국 국가 중에서 가장 강성했던 국가는 저족이 세운 전진(前秦)인데, 전진왕 부견이 순도라는 승려를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준다.(소수림왕, 372년)
5호 16국은 북위(北魏: 398~533)에 의해 잠시 통일되나 다시 서위, 동위로 분열된다.
한편 중국 남쪽은 진이 남으로 천도하여 동진(東晉)이라 말하는데, 동진(317~420)이 망하고 이후 유송(劉宋: 420~478), 남제(南齊 : 479~501), 양(梁: 502~556), 진(陳: 557~589)으로 이어진다.
동진에서 보낸 인도승 마라난타가 백제 침류왕에게 불교를 전해준다(384년)
그리고 양나라는 무령왕에게 전축분 기술을 전해준다.
589년 드디어 분열된 위진 남북조(魏晉 南 北朝) 을 통일한 나라가 수나라이다.
(참조)
위진 남북조 시대(魏晉南北朝時代: 220-589)는 중국의 역사에서 위진 시대와 남북조 시대를 통틀어 일컫는 낱말이다.
위진 시대(魏晉時代: 220-420)는 삼국 시대(위,촉,오) 조조가 세운 위(魏)나라(220-265)로부터 사마씨가 3국을 통일하면서 세운 서진(西晉)(265-317)을 거쳐 남으로 천도한 동진(東晉) (317-420)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약 2백년 간의 시기이다.(동진시대에 북쪽은 5호 16국 시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439-589)는 한족이 세운 남조(유송, 남제, 양, 진)와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북위, 동위,서위, 북주, 북제)가 대립하다,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출처] 기행문1-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 답사(2006년 5월 7일)|작성자 정상민
4.무령왕의 업적
1)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2) 5경박사 단양이, 고안무를 일본에 보냈다.
5. 느낀 점
백제 무령왕릉을 보고 백제도 신라 만큼 황금 문화가 화려했다고 느꼈다.
그런데 천마총과 달리 말과 관련된 유물은 없다.
신라의 김씨는 흉노의 후손들이라고 하는데 백제는 흉노족은 아닌듯 싶다.
그리고 천마총에서 신라의 무덤 양식인 적석목곽분( 통나무로 집을 만들고 시신과 부장품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돌을 쌓고 흙을 쌓은 무덤)만 보다가 송산리 고분에서 석실분과 전축분을 보니 두 민족의 뿌리의 차이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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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마총의 내부 모습. 유리관이 목곽에 해당된다. 관과 부장품을 놓을 작은 통나무집(목곽)을 짓고 그 위에 돌을 쌓고 흙을 덮었다. 도굴이 어려운 대신에 석실분(돌을 방을 만든 고분)처럼 벽화는 기대할 수 없다)
[출처] 기행문1-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 답사(2006년 5월 7일)|작성자 정상민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부여 계통이다. 고주몽이 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도망갔고, 백제는 소서노와
비류,온조가 고구려에서 나와서 세운 나라이다. 그래서 무덤 양식도 동일하다.
고구려, 백제 모두 초기에는 피라미드처럼 돌을 다듬어 쌓아 만들었다.그 이후에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바뀌었다)
(석실분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내부 모습. 2007년 8월2일)
[출처] 기행문1-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 답사(2006년 5월 7일)|작성자 정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