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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세포 배양과 생명윤리
2004년 2월 세계 과학계는 자신의 눈과 귀를 쫑긋 세웠다. 서울대 황우석 교수와 문신용 교수팀이 수정되지 않은 여성의 난자에서 핵을 제거한 뒤 여기에 체세포의 핵을 옮겨 심는 방법으로 배아 줄기세포를 얻는데 성공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 같은 내용은 세계적인 과학잡지인 <사이언스>의 인터넷 속보를 통해 보도되었다. 여성의 난자에서 핵을 제거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배아 줄기세포는 수정란이 아닌 난자만을 이용하므로 생명을 해친다는 윤리적인 문제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낳았다. 또한 유전정보가 저장된 환자의 체세포 핵을 사용함으로써 면역 거부 반응이 없는 줄기세포를 얻어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높아졌다.
그런데 2005년 5월 세계는 다시 한번 놀라야만 했다. 황우석 교수팀이 난치병 환자의 체세포로부터 줄기세포를 배양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황우석 교수는 “척수신경마비, 당뇨병, 면역결핍 등 환자의 세포에서 11개의 줄기세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서울대, 한양대, 미즈메디 병원 연구팀이 함께 했고 이 연구성과는 세계적인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게재됐다.
세계 과학계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체세포 복제의 대상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다양한 나이로, 환자로 확대되면서 환자 자신의 체세포를 이용해 질병을 치료하는 이른바 맞춤치료에 한발 더 다가선 점을 세계 과학계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생명윤리에 대한 논란이 다시 뜨겁게 촉발되고 있다. 개신교와 천주교 등 종교계들은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침해라며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배양을 비판하고 나섰다. 일부에서는 생명윤리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인간의 과학은 상상에 그쳤던 생명 복제와 체세포 배양의 문지방을 이미 넘어버렸다. 이것이 과연 인간에게 복이 될 것인가, 재앙이 될 것인가?
◎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 내용을 설명하고 그것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놀라운 뉴스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해보자.
◎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 성과가 발표된 이후 생명윤리를 강조하는 목소리도 확산되고 있다. 황우석 교수팀의 줄기세포 배양이 생명윤리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를 설명하고, 생명윤리에 대한 자기 생각을 근거로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찬반 입장을 밝혀보자.
◎ 황우석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말을 남겼다. 그렇다면 과학자에게 조국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을 말해보자.
◎ 과학이 진리 탐구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진리탐구의 지적 행위인 철학과의 관계를 말해보자.
(1) 핵이 제거된 하나의 난자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줄기세포 배양 성공
황우석 교수팀이 2005년 5월에 발표한 내용은 난치병 치료에 획기적인 진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환자의 체세포로부터 줄기세포를 배양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는 체세포 복제방식으로 치료용 배아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었다.
2004년 황우석 교수팀은 한 여성의 난자에 이 여성의 체세포의 핵을 넣어 복제했다. 2004년에는 세계 최초로 수정란이 아닌 난자를 가지고 줄기세포를 배양했다는 점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번 연구 성과는 2004년의 그것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익명의 여성이 제공한 난자에서 우선 핵을 제거한 뒤 환자들의 피부세포 핵을 넣어 이 환자의 세포를 복제해냈다. 즉, 핵이 제거된 난자를 이용하여 난치병 환자들의 줄기세포를 배양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황우석 교수팀은 모두 11명의 환자로부터 피부세포를 떼내 배아줄기 세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환자의 체세포에서 줄기세포를 배양한 일 난치병 치료에 획기적인 진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선 환자 자신의 세포를 복제한 것이기 때문에 유전자가 똑같아서 이 줄기세포를 배양해 환자에게 이식하면 몸에 면역 거부반응이 없다는 점에서 난치병 치료를 앞당길 수 있다.
또한 체세포를 이용한 줄기세포 배양 방식이 일반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번 연구에 체세포를 제공한 사람들은 척수마비 환자 9명과 소아당뇨 한 명, 선천성 면역결핍 1명이다. 나이도 두 살 어린이에서 50대 까지 다양하고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8명이나 포함됐다.
2004년에는 정상인 여성 한사람의 체세포 복제 성공했다는 점과 비교한다면 난자를 만들 수 없는 남성이나 폐경기가 지난 여성, 어린이도 기증받은 난자만 있다면 세포 복제가 가능해졌고 그만큼 다양한 계층의 난치병 치료에 이용될 수 있다.
(2) 앞으로 남은 과제
환자들의 줄기세포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난치병이 곧바로 치료되는 것은 아니다. 줄기세포를 원하는 방향으로 분화시키고 배양해 환자의 몸 속에 넣어야 한다는 문제가 남아있다.
이를 위해서는 줄기세포의 안전성과 효율성이 먼저 입증돼야 한다. 배아 줄기세포가 환자의 몸에 들어갔을 때 치료에 도움이 되는 세포로 분화하는 게 아니라 원치 않는 세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자들의 줄기세포를 원하는 쪽으로 분화하도록 통제하는 기술이 확실히 마련되어야 난치병 치료를 본격적으로 시도할 수 있다.
또한 줄기세포 분열이 적당한 시점에서 멈출 수 있도록 통제하는 기술도 필요하다. 원하는 시점에서 줄기세포 분열을 멈추지 못하면 암세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공된 난자에 따라 배양 성공율이 다른 것도 해결해야 한다. 황 교수팀의 연구를 봐도 30세가 넘는 여성이 제공한 난자를 이용해 체세포를 복제하면 성공율이 22.2% 인 반면 30세 이하의 여성이 제공한 난자는 성공율이 40.9%로 나타났다.
황우석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줄기세포 배양 기술은 마라톤으로 비유하자면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았고, 4막의 연극 중에 2막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1) 생명 윤리와 관련된 문제 제기가 나타나는 이유
배아줄기세포의 배양 성공은 난치병 치료 가능성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황우석 교수의 최근 연구는 그 가능성을 더욱 높였다. 그러나 그 뒤에는 인간 복제에도 한 걸음 다가섰다는 위험성도 동반하고 있다. 황 교수도 “과학적 검증보다 윤리적 검증을 3배나 더 받았다”고 밝혀 과학과 윤리 사이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복제 배아를 자궁에 착상시키게 되면 이는 곧 ‘인간 개체 복제’가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복제 우려가 나오는 것이다.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 성과 발표 이후 생명윤리 문제가 다시금 세계적 논란거리로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복제기술은 불임문제 해결은 물론 척수장애, 백혈병, 알츠하이머, 뇌졸중 등 불치병과 난치병을 치료하는 데도 획기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눈부신 발전 뒤에 따라올 어두운 그림자를 완전히 떨칠 수도 없다.
유전적으로 다른 2종 이상의 세포로 구성된 개체, 예컨대 ‘키메라’가 등장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머리는 사자, 몸은 염소, 꼬리는 뱀으로 된 괴물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외국에선 키메라마우스(새앙쥐)는 물론 염소와 양을 결합시킨 키메라를 탄생시킨 바 있다. 미국에선 쥐의 태아에 인간 뇌 줄기세포를 주입, ‘인간의 뇌’를 지닌 생쥐도 만들어냈다.
이처럼 생명공학이 발전할수록 잡종생물 출현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잡종생물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인간 조작’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만약 ‘잡종 인간’이 탄생한다면? 비윤리성의 문제를 넘어 상상하기 끔찍한 인류 사회의 대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여기에 상업적인 목적까지 가세한다면 인류 최대의 재앙으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 ‘돈’과 ‘이윤’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윤리와 인간 가치 따위는 하찮게 취급되기 일쑤였다. 세계 곳곳에서는 생명 복제를 이용하여 시장을 석권하고 돈을 벌려는 거대한 제약업체와 자본들이 활개치고 있다.
1997년 영국에서 탄생한 복제 양 ‘돌리’가 단명하면서 생명윤리 논쟁은 더욱 증폭됐다. 돌리뿐이 아니라 쥐, 소, 돼지, 고양이 등이 차례로 복제됐지만 하나같이 비정상적이었고, 단명했다. 생명의 존엄성 훼손을 비판하는 의견과 함께 복제연구 자체를 금지하자는 목소리가 거세졌던 이유다.
비정상적인 생명의 탄생 가능성으로 인해 생명윤리에 대한 논란이 더욱 거세어지고 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 호기심’에 의한 ‘생명복제, 인간복제’에는 반대하고 있다. 그렇지만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거대한 유혹’이 이러한 반대를 흔들고 있다.
황우석 교수도 강조했듯 줄기세포 배양은 치료법이 없어 죽어가는 수많은 환자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아닐 수 없다. 황 교수팀의 연구성과가 발표된 이후 줄기세포 배양 실험에 자원하는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처럼 ‘생명 복제로 인류와 세계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과학의 두려움’과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연장시킬 수 있는 과학의 따뜻함’은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문제는 세계적으로, 각 나라마다 과학과 생명윤리 사이에 팽팽한 논란을 벌이고 있지만 쳇바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2) 인간에 대한 인식의 문제
이러한 논란의 근본에는 ‘생명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가 놓여 있다. 종교계에서는 인간이 ‘생명 창조’의 영역까지 넘어서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이른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행위라는 지적이다. 이것은 곧 ‘인간의 영역’에 대한 철학과 사상의 정립을 요청하고 있다. 이는 신(神)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종교적 접근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과 세계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자연/세계에 대한 인간의 위치를 설정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칭송하고, 자연과 세계를 인간을 위한 선물쯤으로 인식하는 경우 인간의 ‘생명창조에 대한 도전’은 신의 영역으로 남은 몇 안되는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되돌리는 엄청난 성과로 이해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줄기세포와 생명복제의 연구를 대폭 허용하면서 부도덕한 실험과 실험 결과에 대해서 적절히 통제하는 방식을 찾게 될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도모하고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생명 복제의 허용 범위를 최대한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 경우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산업화로 인해 기후 온난화 등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는 현실을 반성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인간 스스로 자기 행위를 통제하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데 더욱 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3) 법을 통한 통제의 가능성
생명과학의 윤리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던지 생명공학의 연구과 발전은 계속되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국가적 지원과 후원에 힘입어서, 어떤 곳에서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서, 어떤 곳에서는 제약업체의 성공을 위해서, 또 어떤 곳에서는 환자 스스로의 필요에서 의해서.
따라서 생명공학과 과학에 대해 언제까지 토론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많은 나라에서는 이와 관련한 법을 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생명윤리법을 제정하여 운용하고 있다. 최근 미국 하원에서는 ‘줄기세포 연구 증진법안’이 통과되었다. 지금까지 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해왔던 공화당 의원들도 찬성표를 던졌다. 하지만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미국 하원이 서둘러 줄기세포 연구 증진 법을 통과시킨 것은 ‘생명공학과 관련 제약기술의 뒤처짐’을 우려한 때문이다. 여기에서 확인되듯 ‘법’을 통해서만 생명공학을 통제하고, 생명윤리를 실현하겠다는 시도는 현실에서 작동하는 또 다른 힘들에 의해서 좌초되거나 왜곡되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법’을 통한 통제와 제한뿐만 아니라 생명윤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 그리고 과학자들의 윤리의식을 강조한다. 얼핏 뾰족한 대책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보다 확실한 대책도 없다는 주장도 있다. 생명 치료를 넘어 생명 창조를 다루기 시작한 과학과 과학자들은 이제 자신의 연구가 곧 인류의 미래 모습과 운명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1) 황우석 교수팀에 열광하는 한국 사회
황우석 교수팀의 난치병 환자 줄기세포 배양 성공 발표가 있고 난 후 한국 사회는 말 그래도 ‘황우석 신드롬’ 현상을 보이고 있다. 황우석 교수의 생가를 복원하겠다는 발표나 황우석 교수에게 10년 동안 비행기를 무료로 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지원은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정부에서는 황우석 교수에게 ‘최고 과학자’ 칭호를 주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하며, 대통령 수준의 경호를 제공하겠다 밝혔다. 일부 사람들은 황우석 교수팀이 노벨상을 받도록 하자는 제안까지 내놓고 있다.
황우석 교수팀은 IMF 시절 스포츠 스타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그 때 시절을 보는 듯 하다. 2002년 월드컵의 난장과도 흡사하다. 한류 스타에 열광하는 일본과 대만, 중국과 홍콩의 사람들을 보는 듯 하기도 하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황우석 박사의 일대기를 소개하고 그를 국민의 영웅으로 각색하고 있다. 심지어 그 연구팀에 결합한 다른 교수 및 박사들 주변에서 기사거리를 찾아내기 여념이 없다. 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은 추켜세웠다. 한나라당의 공식 논평 제목은 “황우석, 당신이 최고입니다”일 정도이다.
황우석 박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어록’이 되고 있다. 그 ‘어록’들은 국민의 감정과 묘하게 결합하면서 묘한 파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쇠 젓가락질을 잘 해서 줄기세포 실험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발언은 민족 문화에 대한 작은 감흥을 일구어냈다. 그 후 이런 발언은 언론의 기사 만들기와 결합하면서 상승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2005년 6월 7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황우석 교수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작은 나라가 기 한번 피고 살라는 하늘의 도움’이라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극비리에 연구실을 방문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그리고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에서 말은 전 국민의 가슴을 울렸다.
(2) 황우석 신드롬의 배후?
경제의 어려움에 지치고 정치의 혼란에 신물난 국민들이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에 열광하다 위대한 과학의 성과에 열광하는 일은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최근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 성과를 국가적 차원의 자원으로 삼고, 이를 산업화하여 세계의 중심 국가 혹은 일류 국가로 성장하는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자아내고 있다.
황우석 교수팀과 그 연구 성과에 대한 일방적 찬사가 쏟아지고 있지만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또한 가질 필요가 있다. 현재 황우석 교수와 그 연구팀에 쏟아지는 찬사는 2002년 월드컵 신드롬 이후 최대의 ‘대중적 패닉’으로 평가할 수 있다. 좀 더 극단적으로 평가한다면, 최근의 황우석 ‘신드롬’에서는 강한 국가를 연상시키는 국가주의와 자기 겨레를 중심에 놓는 보수적 민족주의의 경향이 드러나기도 한다. 황 교수 신드롬에서 개인을 신화화하는 일종의 팬덤문화 현상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3) 과학적 진보에 대한 이성적, 비판적 견제의 필요성
일반 국민의 대중적 자부심이나 국가의 개입수준으로 볼 때, 황우석 교수의 연구는 이제 개인의 과학적 성취를 넘어서 국운을 건 프로젝트가 되고 있다. 우리가 황 교수의 연구 성과를 무(無)로 돌리거나 사회적으로 매장할 것이 아니라면 이제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 성과에 대해 환호만 하고 있기 보다 냉철한 이성으로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는 성숙된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매체들은 엄청난 윤리적 문제, 경제적․정치적 긴장이 내포된 이 국가프로젝트에 대한 이성적 비판적 성찰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 언론들은,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이번 황 교수의 연구에 대해서는 저널리즘으로서의 기본 자세마저도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신드롬을 부추기며 영웅 만들기를 선도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가와 자본은 더욱 열광하고 있다. 정부는 생명과학에 대한 지원책을 연일 발표하고 있으며, 주식시장에서 제약주들은 몇일 동안 상승세를 지속하였다. 생명공학을 ‘산업화’해온 국가와 자본은 줄기세포 배양을 한국을 상징하는 확실한 산업으로 만들어내겠다는 포부와 희망으로 들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 때문에 한국은 2005년 1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생명윤리법’에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 포괄적인 방식으로 생명 복제 연구를 허용하고 있으며,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거의 제한하지 않고 있다. 이를 신자유주의 자본운동에 대한 투항으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한 일일까?
더욱 위험스러운 것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논의와 견제’ 자체를 불온시하는 사회적 풍조이다. 황우석 교수에 열광하면서 그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대중의 집단적 힘이 적절한 이성적 비판으로 제어되지 못한다면 아주 위험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민족주의, 자기 민족에 대한 우월적 감정들이 고조되고 있어서 이같은 우려는 더욱 현실적이다.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국과 북한, 게다가 미국까지 어우러져서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최근 민족주의적 감성과 호소력이 꽤 높아지고 있다. 역사 문제와 독도 논란에서 많은 상처를 한류 열풍으로 위안해온 한국민들에게 황우석 교수의 성과는 엄청난 ‘자신감’을 부여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국가 차원의 에너지, 사회의 열정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이성에 바탕을 둔 비판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인 듯 하다.
(4) 자본에의 포섭 가능성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는 ‘산업과 경제 전쟁’을 유발할 수 있으며, 거대한 세계의 제약회사와 그 자본들의 유혹과 위협에 직면할 수 있다. 거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다국적 제약회사들은 인류의 질병 치료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에 급급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제약기술의 독점과 그것에 기반한 막대한 이익 추구 사례는 수없이 많다. 백혈병 치료에 신기원을 열었다는 ‘글리백’을 싼 값에 제공해야 한다는 세계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 약을 제조, 판매하는 권한을 가진 스위스 노바티스 사(社)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격을 고정시켜 놓고 있다.
에이즈 치료 백신 가격을 둘러싼 논란도 가열되고 있다. 국민의 대다수가 에이즈 감염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은 에이즈 백신을 싼값에 공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미국 등 에이즈 치료백신 개발에 성과를 올리고 있는 국가와 기업들은 이같은 요구를 일축하고 있다.
세계적인 제약회사들은 막대한 자금력으로 인류가 갈망하는 신약 개발 및 제조기술을 독점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이익을 축적하고 있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배양 기술 역시 이들에게 좋은 사업 분야이며,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 성과는 사업의 현실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우리 사회는 황우석 교수에 열광하는 만큼,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방식과 그것에 대한 자금 조달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에 ‘배아줄기세포 국제은행’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환호하기보다 거기에 누가 돈을 대야 하고, 어떤 식으로 운영해야 하는지도 함께 논의하는 ‘냉정한 접근’이 요구된다.
(1) 줄기세포(Stem Cell)
줄기세포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세포나 장기로 성장하는 일종의 모세포로, 간세포라 불리기도 한다. 이 줄기세포에는 사람의 배아를 이용해 만들 수 있는 '배아줄기세포(복수기능줄기세포)'와 혈구세포를 끊임없이 만드는 골수세포와 같은 '성체줄기세포(다기능줄기세포)'가 있다.
(2) 배아줄기세포
수정한지 14일이 안된 배아기의 세포인 ‘배아줄기세포(Embryonic Stem Cell)’는 장차 인체를 이루는 모든 세포와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기 때문에 ‘'전능세포’ 혹은 ‘만능세포’로 불린다.
1998년 이전까지 과학자들은 줄기세포가 배아가 성장하는 짧은 단계에만 존재하고, 이를 몸에서 격리해서 살아있게 하는데는 특별한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격리․배양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1998년 11월 6일 존스 홉킨스 대학의 존 기어하트(John Gearhart) 박사와 위스콘신 대학의 제임스 토마스(James Thomas) 박사의 연구팀은 각각 서로 다른 방법을 써서 인간의 줄기세포를 분리하고 배양하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하여 뇌질환에서 당뇨병, 심장병에 이르기까지 많은 질병을 치료하는데 줄기세포를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걸고 있다. 예를 들어 당뇨병을 치료하기 위해 인슐린 생산 세포를 만들어 내거나 척추부상으로 마비된 환자의 기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신경세포를 길러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과학자들은 믿고 있다.
하지만 배아는 장차 태아로 자랄 수 있는 엄연한 생명의 씨앗이라는 점에서 여러 조직이나 장기를 만들 수 있는 간세포를 얻기 위해 배아를 이용하는 것은 “살인행위나 마찬가지다”는 반대여론도 만만찮다.
(3) 성체줄기세포
성체줄기세포(Adult Stem cell)는 제대혈(탯줄혈액)이나 다 자란 성인의 골수와 혈액 등에서 추출해낸 것으로, 뼈와 간․혈액 등 구체적 장기의 세포로 분화되기 직전의 원시세포다. 여기에는 조혈모세포와 재생의학의 재료로 각광 받고 있는 중간엽 줄기세포, 신경줄기세포 등이 있다. 제대혈(탯줄혈액)은 조혈모세포를 다량 함유하고 있으며, 뼈 속의 골수에서 발견되는 골수세포는 혈액 및 임파구를 생산할 수 있는 조혈모세포를 비롯하여 중간엽 줄기세포 등 여러 종류의 줄기세포를 가지고 있다.
성체 줄기세포는 증식이 어렵고 쉽게 분화되는 경향이 강한 대신에 여러 종류의 성체 줄기세포를 사용하여 실제 의학에서 필요로 하는 장기 재생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식된 후 각 장기의 특성에 맞게 분화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성체 줄기세포는 인간 배아에서 추출한 배아 줄기세포와 달리 골수나 뇌세포 등 이미 성장한 신체조직에서 추출하기 때문에 윤리논쟁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현대 물질문명은 현대 과학의 성과로 함께 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면서 현대 과학에 대한 비판적 접근 또한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주목할 것은, 현대 과학에 대한 비판들이 단지 외부의 공격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대과학은 스스로의 발전 속에서 현대과학이 발딛고 있었던 자기 논리와 체계를 스스로 부정하거나 새롭게 연구해야 하는 상황을 스스로 초래하고 있기도 하다.
과학의 몇 가지 원리에 대한 현대 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현대 과학이 직면한 문제와 한계에 대해 살펴보자.
(1) 불확정성원리 (Uncertainty Principle)
현대 양자역학의 창시자이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W. Heisenberg 는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원자의 크기보다 더 작은 입자의 운동에서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확정할 수 없으며, 둘 중의 하나는 확정지을 수 없다” 라는 원리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불확정성원리 때문에 결정론적인 추론은 불가능하고, 겨우 확률론적인 추측밖에 할 수가 없다. 수소원자 속에 있는 전자가 어느 궤도를 어떤 속도로 돌고 있다고 말하기보다 어느 공간 영역에 ‘분포되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겨우 ‘그 영역에서 전자가 발견될 확률은 얼마이다’라는 정도의 정보밖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은 불확정성의 원리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완전히 부정한다. 우주의 벽돌이라고 할 궁극의 원자 세계를 표현할 때,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확률론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다면, 확률로 구성되는 거시 세계도 결정론적으로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카오스 이론과 함께 ‘결정론’을 부정하는 동시에 ‘인과율의 세계관’을 흔들어 놓았다.
(2) 불완전성 정리 (Incompleteness Theorem)
오스트리아 출신의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인 Kurt Godel은 그의 나이 불과 25세 때 학계와 많은 사상가를 놀라게 한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를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자연수론을 포함하는 공리론적 이론체계(수학의 대부분의 이론체계가 이에 해당됨)에 모순이 없으면, 그 체계의 무모순성을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 이 정리를 좀 더 알기 쉽게 통속적인 표현으로 바꾼다면 “자기 자신이 정신적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으로서는 그것을 증명해 보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괴델의 이 연구는 ‘인간의 이성 일반에 있어서 한계라는 것의 역할을 명확히 한 것이다.’라고 극찬받았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절대적으로 신뢰하거나 전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것이 아니다. 결국 인간의 불완전성이 현대에서 다시 ‘인정’되고 있는 셈이다.
(3) 광속불변의 원리 (Principle of Constancy of Light Velocity)
I. Newton 의 결정론은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A. Einstein은 우주의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대성이론을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뉴튼이 에너지를 가할 수록 무한히 속도가 증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데 비해서, 아인슈타인은 어떠한 물체도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그 물체에 가한 에너지가 속도를 증가시키는데 쓰이지 않고, 오히려 속도를 늦추게 하는 질량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가설로 삼았다. 이 가설은 ‘광속불변의 원리’(principle of constancy of light velocity)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 원리의 발견은 단지 물리학의 세계만 변화시킨 게 아니다. 시간과 공간, 즉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현실이 단지 ‘상대적일 뿐’이라는 사실은 인식의 상대성, 원인과 결과의 상대성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이것은 인간이 탐구하고 얻어낸 진리 또한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4)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열역학 제2법칙은 “열현상은 분자들이 무질서한 운동을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며, 그 반대 방향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법칙은 자연계의 모든 변화는 반드시 엔트로피(entropy)가 증대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한 번 사용한 에너지는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 법칙의 등장으로 오랫동안 수많은 발명가들이 일생을 바쳐 연구했던, 에너지를 전혀 소비하지 않고 영구히 돌아가는 ‘영구기관’의 꿈이 불가능함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 이론대로라면 인류 미래, 세계의 미래는 끝내 사라지게 된다. 엔트로피 증가 법칙에 의하면, 영원히 빛날 것 같은 저 찬란한 태양도 언젠가는 차가운 돌덩어리로 식을 것이다. 몇 십억년 후에는 완전히 균질한 혼돈인 열사의 상태가 되는 암울한 우주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당장의 일은 아니지만 인류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신의 연구로 이런 미래상을 ‘예언’(?)하게 된 볼츠만은 자살하고 말았다.
황우석 교수팀이 세계 최초로 난치병 환자에게서 체세포를 때어내 그 세포로 줄기세포(stem cell)를 추출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인류는 생명창조사회를 한발 앞당겼다. 이번 연구를 통해 이 줄기세포들이 근육, 피부, 위장 등의 장기 세포로 자라는 것도 확인했으며 앞으로의 과제는 줄기세포가 연구자의 원하는 장기 세포로 확실히 분화시킬 기술을 개발하는 일이다.
황 교수의 획기적 성과는 미국, 독일, 일본, 영국 등 선진국을 비롯한 지구촌 전체를 일거에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산업혁명과 버금가는 신인류의 기적과 같은 진보란 긍정적 측면과 배아의 생명경시라는 비난, 그리고 복제인간을 보다 쉽게 만들 길이 열렸다는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우리 인체는 210종류의 장기로 구성되어 있다.
연구에서 줄기세포는 근원세포로서 인체의 모든 장기로 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줄기세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 하나는 성인의 몸 안에서 탯줄혈액이나 골수를 추출해 줄기세포를 얻는 성체 줄기세포 방법이다. 두 번째가 배아 줄기세포 방법으로 냉동 수정란을 배양해 내부 세포덩어리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고 환자의 체세포를 복제해 배아 줄기세포를 얻는 것이다.
체세포 줄기세포 추출은 인간배아 복제방법
이번 황 교수 팀의 쾌거가 부시를 비롯한 종교단체에서 비난받는 이유 중 하나는 체세포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한 방식이 인간 배아 복제방법이기 때문이다. 부시대통령은 20일 전미 가톨릭 조찬기도회를 마친 후 “황우석 교수팀의 배아줄기 세포연구에 반대한다”며 “미 의회에서 줄기세포연구금지 완화법안이 통과하더라도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인 줄기세포 연구는 강력히 지지하나 생명을 파괴하는 배아줄기세포연구에 납세자의 돈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시가 대형교단인 보수기독교를 의식하든 말든 미국의 정가는 이미 ‘줄기세포 정치’가 시작되었다. 황 교수의 연구발표 직후 미국의 공중파방송과 주요 신문들은 황 교수가 불치병 치료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보도하면서 부시의 규제 때문에 미국의 생명공학을 망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종교계가 생명공학에 예민해 하는 이유
왜 종교계가 이토록 생명공학발전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또는 반대하는 것일까? 이는 거대종교들의 출현의 바탕과 생명공학 발전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거대종교들은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탄생했다. 그들의 교리는 하늘에서 비가 적절하게 내려 주어야만 오곡백과를 따먹고 살수 있던 시기에 형성되었다. 오곡백과의 생장과 사멸도 신기하거니와 인간의 생명은 또 얼마나 더 신비했을까. 오직 신만이 인간의 생명을 만들고 인간의 재능을 부여하고 인간에게 복과 저주를 내리며 인간의 내생을 결정했다고 믿었다.
기독교는 신에게 인간 생명의 창조를, 불교는 인연의 법에게 인간 존재의 윤회를 전적으로 의탁하면서 그 존재가치를 주장해왔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은 이 같은 존재가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종교계가 특히 생명공학에 극구 반대하고 있다. 종교계가 반대한다고 하여 생명공학의 행렬이 멈춰지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종교계는 기존의 교리를 고수하기보다는 인류와 이웃을 섬기는 선한 이웃, 청빈한 이웃으로 거듭나는 길이 오히려 종교의 미래를 담보 받는 길이다.
배아와 태아의 차이점
의학에서는 정자와 난자가 만난 후 2개월까지는 배아(胚芽), 이후를 태아(胎芽)라 부른다. 더욱이 수정 후 14일까지는 인체의 어떤 조직으로 분화할지 아직 정해지지도 않은 그냥 세포덩어리일 뿐이라고 한다. 이를 생명체로 보는 논리라면 이세상의 어느 물질도 쉽게 손댈 수 없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굳이 희랍철학자들의 견해를 빌리지 않더라고 세상의 모든 물질과 원소는 그 자체가 형상이의 가능성을 지닌 질료이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의 현 단계를 위험시 여기는 이들은 그렇게 생명의 질료까지도 중시하면서 정작 생명의 형상을 지닌 수억 명의 불치병환자들의 고통은 왜 외면하는 것일까. 더구나 이라크 전쟁을 치르면서 그토록 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과 이라크인들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나.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인류에게 실효성을 지니려면 앞으로 더욱 세밀하고 고밀도의 실험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연구 또한 지금까지의 노력 못지않게 험난할 것이다. 앞으로 생명공학의 진보가 주는 혜택이 단순히 종교적 교리나 관념적 창조론에 갇혀 더 이상 인간을 돌보지 않으려는 초현실 종교주의를 주의 깊게 좌시할 필요가 있다.
출처 : 국정브리핑 2005년 5월 27일
황우석 박사가 환자의 체세포를 복제해서 줄기세포를 만드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고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 윤리 문제 때문에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자랑스러운 성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내일 당장 난치병이 모두 고쳐지거나, 복제된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너무 조급하게 좋아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모든 생물은 세포로 구성돼 있다. 박테리아처럼 하나의 세포로 된 경우도 있고, 인간처럼 수십 조(兆)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고등 생물도 있다. 어느 경우이거나 세포는 천분의 1 센티미터 정도로 작기 때문에 현미경이 있어야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세포의 존재가 처음 밝혀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340년 전이었다. 신의 섭리에 따라 특별하게 만들어졌다고 믿었던 생명의 신비가 마침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몸에는 수백 종류의 세포가 있다. 길이가 몇 미터나 되는 실처럼 생긴 신경 세포도 있고,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막대 모양의 시각 세포, 산소를 운반해주는 둥근 원판 모양의 적혈구 세포,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거해주는 무시무시한 백혈구 세포 등이 모두 그런 세포들이다. 오늘날 우리의 평균 수명이 70세를 넘어섰지만, 세포의 수명은 한 달을 넘는 경우가 드물다. 우리 몸이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 세포들은 영양분을 흡수해서 세포의 작동에 필요한 온갖 종류의 화학물질과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스스로를 복제하는 신비를 반복한다. 그런 세포들이 각자 맡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해주는 덕분에 우리는 몸을 움직여서 일을 하고, 운동을 하고,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불행에 슬퍼하게 된다. 자연과 우리 스스로의 기원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는 것도 뇌세포들의 오묘한 작용 때문이다.
세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은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의 정체를 밝혀내면서부터였다. 마침내 당(糖)과 인산과 염기가 길게 연결된 두 가닥의 사슬이 나선 모양을 이루고 있는 DNA가 생명의 본질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특히, 부모와 자식을 이어주는 복잡한 유전 정보가 DNA 사슬을 구성하는 4종류의 염기가 연결된 순서로 암호화돼 있다는 사실은 정말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인간의 경우 거의 모든 세포의 핵에는 길이가 무려 1.8미터에 이르는 핵 DNA가 46조각으로 나뉘어서 들어있고, 그런 DNA에는 30억 개에 이르는 염기가 포함돼 있다. 세포마다 몇 개에서 몇 천 개까지 들어있는 미토콘드리아라는 세포 기관에도 또 다른 종류의 DNA가 들어있다. 그런 DNA가 적어도 20만 종류의 단백질을 만들어내고, 후손에게 소중한 유전 정보도 전해준다. DNA는 그야말로 생명의 분자인 셈이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생명과학자들은 그런 세포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있다. DNA에 숨겨져 있는 3만 개 남짓한 유전자가 과연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의 존재는 물론이고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까지 궁금하게 여기도록 해주는가를 밝혀내는 것이 현대 생명과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알아내고 싶어했던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의문을 풀어보려는 것이다.
물론 난치병을 치료하고, 국가 경쟁력을 유지시켜 줄 성장동력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가 언제까지나 눈앞의 경제적 이익에만 빠져있을 수는 없다. 우리도 늦었지만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생성과 작동원리를 밝혀내려는 인류의 가장 중요한 과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 선조가 애써 쌓아놓았던 `문화민족'의 긍지를 이어갈 수 있는 법이다. 생명의 신비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우리 과학자들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이 듣고 싶다.
출처 : 디지털타임스 2005년 6월 7일
우리말 가운데 중의적 뉘앙스를 가진 말로 ‘철’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봄이나 여름 같은 ‘계절’을 의미하기도 하고(철1) 또는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철2). 철1의 의미에서 철 2의 의미가 파생되어 나왔다면 이것의 의미는 분명해 보인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의 이 법이 바로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인간의 규범으로 보았던 것이다. 인간이 가진 분별력은 다름 아닌 자연의 철을 알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다. 분별력이 없다는 것은 ‘철’(철2)이 없는 것이고 이것은 자연의 ‘철’(철1)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영어와 비교해 보면 차이를 잘 알 수 있다. 영어에는 이 두 의미에 대응하는 단어가 하나가 아니고 각각 다르다. 우선 철1에 해당하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계절을 의미하는 season일 것이다. 그래서 제철과일은 seasonable fruit이고 그 반대는 unseason able fruit이다. 이것은 ‘계절에 맞지 않은’ ‘시기가 좋지 않은’ 등의 뜻이다. 말하자면 영어의 season에는 철1의 의미밖에 없다.
‘철없는 행동’을 unseasonable behavior로 번역하면 아주 어색할 것이다. 그것은 분 별없는 행동을 의미하므로 indiscreet behavior로 번역해야 본 뜻에 가까울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길(道)을 하나로 본데 대해서 서양은 무관한 둘로 본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를 낳는데 예컨대 인간의 복제는 자연이 취하는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도 취해야 할 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입장에서 볼 때 자연의 도-차라리 자연법칙이라고 불러야겠지만-와 인간의 도(윤리학)는 다른 것이다. 과학자는 말하자면 season(사실)에만 관여할 뿐 discretion(가치)은 그들의 관여사항이 아니다. 그 정신이 원자폭탄을 죄책감 없이 만들게 했으며 유전자 조작을 서슴없이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철이 없다는 것은 과학기술 문명의 효율성의 비결이다. 그들은 자연을 교묘히 조종함으로써 자연이 가하는 구속에서 해방되기를 원했다. 그것이 모두가 지켜야 하고 또 지키고 있는 구속인 만큼 그 것을 어길 수 있다면 즉 철만 없다면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철없음의 또 다른 얼굴은 무책임성이다. 마구 가져다 쓰고 거기 서 생기는 부산물들-오염, 자원고갈 등-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 것을 모두 고려한 생산양식에 비해서 엄청난 효율성을 가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60년대부터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술이 철학이라는 말을 전용하기 시작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철학은 점치는 기술이라는 이미지-그러나 이 발상만큼 반철학적인 발상도 없다-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런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철학이라는 말을 바꾸자는 논의가 철학계 내부에서 제기된 적이 있었다. 누구는 현학(玄學)을 제시했으며 또 어떤 이는 필로소피아라는 원음 그대로 쓰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필자는 철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그대로 사용하되 그것을 순수 우리말로 해독했으면 한다.
철학, 그것은 철을 밝히고 철을 배우고 철을 실천하는 학문이다. 철을 밝힌다는 것은 이 우주 속에 인간의 위치에 대한 궁극이며 철을 배우고 실천한다는 것은 우리말 그대로 ‘철들음’의 과정이다. 그것은 성숙의 과정이며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동시에 그것은 철없는 모든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크게로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작게 로는 편의주의에 사로잡혀 자신의 몸을 망치고 있는 일상에 대한 비판이다.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결합은 ‘철없음’에 기초한 전형적 문명이다. 또 그것이 그것의 융성의 비밀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그것의 반철학적 태도는 그 기원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융성이 얼마나 허망한 모래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 모두가 애써 외면하려고 할 뿐이다. 인간은 결국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을 떠나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황우석 박사의 줄기 세포 연관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또 한번 수습 불가능한 철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제발 철 좀 듭시다.
출처 : 부산일보 2005년 5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