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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헤쳤던 형제들과 대면한 요셉
창세기 45장 1-15절
참담한 고난을 겪은 인생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고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자만이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형들에게 새 삶의 지평을 열어주는 요셉을 보면서 하나님 백성이 가져야 할 믿음에 대해 고찰해 봅시다.
현재의 장면은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들 중 하나입니다. 요셉이 드디어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유다의 긴 탄원을 들은 후 요셉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합니다. 앞서 그는 두 번 그들 앞에서 눈물을 감췄으나(42:24; 43:30) 세 번째 눈물은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신하들 앞에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이제 한계가 왔습니다. 그는 마음껏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퇴장을 명령합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힌 요셉(1-3)
우리가 우리를 해친 사람, 우리에게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대면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과도 화해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물론 항상 화해가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화해의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1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1-3)
유다의 탄원을 들은 요셉은 눈물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어 시중드는 모든 애굽 신하를 내보냅니다. 46:1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행동은 애굽인들에게 비밀을 지키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지혜문헌은 격한 감정을 감추는 것을 고상한 성품으로 칭하지만, 요셉은 감정의 솔직한 표현이 더 고상한 지혜임을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은 결코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억누르지 않습니다. 요셉의 울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궁중의 사람들이 모두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요셉이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이유는 유다와 형제들이 자신의 친동생 베냐민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상상도 못한 충격적인 사실 앞에서 형제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놀람을 표현한 동사는 예컨대, 무서운 전쟁 통에서 전신이 마비될 정도의 큰 두려움을 느낄 때 사용됩니다. 요셉이 자신을 드러낸 후 첫마디는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유다가 아버지에 대한 염려를 장황하게 설명하며 베냐민의 석방을 탄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아버지의 상태가 염려되었을 것이며, 또한 아마 요셉은 형제들이 연로하신 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이때 요셉은 더 이상 야곱을 ‘너희의 아버지’로 칭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마자 야곱을 ‘내 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요셉의 위대한 신앙고백(4-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끼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용서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분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리라고 경고하실 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4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4-8)
요셉은 형들을 향해 가까이 오라 말하면서 자신이 바로 형들이 팔았던 아우 요셉임을 밝힙니다.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는 말은 그가 요셉이라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그 사실은 형제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말문이 막힌 그들을 가까이 오라고 요청합니다. 통상적으로 인간관계에서 공간의 근접성과 심리적 친밀감은 비례합니다. 불편한 사람과는 심리적 물리적 공간의 간격이 큽니다. 더구나 대제국의 절대 권력자와 자그마한 가나안 지역에서 온 사람들과의 신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합니다. 요셉은 지금 그 장벽을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향해 ‘근심하지 말고 한탄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안심시킵니다(5). 이 이중적 감정 표현은 그들의 죄책감과 그에 따른 보복에 대한 염려가 뒤섞인 심리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요셉은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용서를 뛰어넘은 놀라운 경지의 신앙이 담긴 발언을 쏟아냅니다. 그것이 4중적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의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5); 하나님이 당신들의 생명을 구해 이 땅의 남은 자로 남겨두시고자 먼저 나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7);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8a); 나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8b).
요셉의 위대한 용서는 형제들의 진실한 회개에서 비롯되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인정과 고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요셉은 장기간의 기근 속에서 아버지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먼저 애굽 땅에 보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인간의 범죄마저 이용해 섭리하십니다. 이 땅에 2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도 5년의 연속적인 대기근이 남아 있습니다(6). 자신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 온 것은 이 오랜 기근 동안 온 땅과 자신의 가족의 보존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요셉의 신앙고백은 기나긴 요셉 이야기의 핵심과 본질입니다. 요셉의 입술에서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개별적인 인생 여정과 집단적인 인간의 역사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는 이끌어 가십니다. 요셉은 언제부터 자신의 역경의 인생을 이렇게 높은 신앙의 안목으로 해석할 수 있었습니까? 틀림없이 그가 형제들을 최초로 조우한 이후 2년 동안의 오랜 사색과 묵상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특히 구속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보존의 섭리가 작용합니다. 흥미롭게도 현재의 대흉년 속에서 하나님의 보존의 섭리는 6장 이하의 대홍수 속 보존의 섭리와 비교됩니다. 대홍수 때에는 세상의 모든 물이 창궐했으나 현재의 대가뭄에서는 세상의 모든 물이 다 말라버렸습니다. 홍수가 왔을 때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을 보존했던 것처럼, 흉년이 닥칠 때 야곱의 가족을 보존하십니다. 홍수에서는 방주가 구원의 수단이었으나, 흉년에서는 요셉이 구원의 수단이 됩니다.
7절의 번역은 약간 수정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족을 ‘남은 자’로 땅에 보존하기 위해 요셉을 애굽으로 먼저 보내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다. 이는 당신들을 위해 남은 자를 (그) 땅에 두시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을 살리시기 위함이다.’ 개역개정의 번역처럼, 과거의 학자들은 여기서 사용된 ‘쉬에리트’를 생존하여 살아남은 ‘후손’으로 해석하는 것을 선호했으나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큰 구원으로’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 어구는 ‘많은 생존자들을 위해’로 번역될 여지가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파라오의 아버지’로 칭합니다. 혈통적 관계가 아닌 ‘아무개의 아버지’라는 말과 비슷한 표현들이 구약에서도 종종 나타납니다(삿 17:10; 18:19; 왕하 6:21; 13:14). 그는 통찰력을 가지고 왕의 곁에서 그에게 중대한 조언을 하는 인물로서 보통 제사장이나 왕실 선지자들, 그리고 왕의 최측근입니다(삿 17:10; 18:19; 왕하 5:13; 6:21; 사 22:21), 바로의 아버지는 바로 자신의 신격화한 호칭인 ‘신의 아버지’와 동등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언뜻 무엄해 보이는 이 표현은 바로의 통치를 돕는 지혜로운 조언자를 뜻합니다.
가족의 이주를 요청한 요셉(9-15)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이 종종 우리 가족일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웃, 친구, 동료 혹은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해치고 잘못 대우하는 사람들과도 우리는 가능한 한 화평하게 지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참된 용서는 복수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상대방의 이익을 도모하는 실천을 동반합니다.
9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12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13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14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9-15)
요셉의 말이 일방적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이는 서사적 편성에 따른 대화의 재구성이라기보다는 형제들의 말문이 막힌 상황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즉시 돌아가 아버지를 애굽로 데려오도록 요청합니다. 야곱은 지체 없이 모든 가족을 이끌고 애굽로 내려와야 합니다(9). 그는 여생을 절망과 비탄 속에서 살다 죽음의 장소인 스올로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제 생명의 땅인 애굽로 내려갈 예정입니다. 그들을 위해 준비된 땅은 고센인데 이곳은 나일 삼각주의 동쪽에 위치한 초원 지대로 당시왕실이 위치한 수도와 매우 가까웠을 것입니다(10). 요셉은 향후 5년간 지속될 기근의 기간 동안 가족의 안전한 생존과 넉넉한 생활 지원을 약속합니다(11). ‘아버지를 봉양한다’는 말은 1차적으로 식량난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미이며, 그 외에도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는 요셉의 배려가 깃들어 있습니다. 수년간 흉년이 지속될 예정이라면 야곱의 가족은 반드시 이주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기근이 끝난 후의 귀향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5년 후가 아닌 무려 400년이 지난 뒤에야 고향으로 복귀합니다. 현재 그들은 통역사 없이 자신들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요셉이 특히 베냐민을 별도로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유는 분명히 그들에 대한 용서를 재확증 해주면서 그들이 안심하고 즉시 애굽으로 이주해오도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 야곱이 아들들의 말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베냐민의 증언이 절대적이었을 것입니다.
발언을 마친 요셉은 베냐민과 더불어 서로 목을 껴안고 웁니다. 이어서 형들과 입을 맞추며 껴안고 울고 난 뒤 비로소 형들이 요셉에게 말을 건네면서 형제 사이의 진정한 소통이 시작됩니다. 본문은 요셉이 베냐민과는 목을 서로 껴안고 우는 반면, 형제들과는 단순히 키스를 나누며 울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베냐민에 대한 요셉의 특별한 애정을 차별화하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뜨거운 형제애를 회복한 그들 모두가 서로 껴안으며 목 놓아 울었으리라는 추론은 충분히 정당합니다.
요셉의 용서와 관용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끊임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시선으로 자기 인생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참고 인내하며 자기 삶에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인애를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로 사는 자만이 관용할 수 있고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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