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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덴스
Homo Ludens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년 ~ 1945
「이 책은 출판된 1938년으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으나 전 세계의 다양한 놀이 문화를 여러 학문의 관점에서 심도 있게 분석하고, 또 각종 사례들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어서 지금 읽어도 재미있고 유익한 자료이다. 그저 읽을거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인문학 전 분야에 대한 지적 관심을 높여 주어 더 깊은 지식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길라잡이 성격의 인문 교양서이다. 1981년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 되었으나 관련 학문분야의 사례가 폭넓게 인용되고 있어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들은 내용이 너무 어렵다, 난해한 부분에 주석이 있었으면 좋겠다, 전반적인 배경 파악이 잘 안 된다, 문장이 너무 딱딱하다 등의 애로 사항을 호소해 왔다.
-저자의 생애
하위징아는 1872년 네덜란드 호르닝언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두 살 위인 형 야콥과 함께 중세 귀족 가문의 문장을 열심히 수집하고, 또 문학 서적을 많이 읽었다. 하위징아가 귀족 가문에 몰두한 것은 그의 가문이 침례교 목사와 시골 농사꾼 출신이 많은 평범한 집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위징아의 부친은 호르닝언 대학의 생리학 교수를 지냈다. ~~1915~25년 사이에 하위징아는 레이던 대학에서 블로크(대학시절의 역사학 은사)의 아주 가까운 동료 교수로 활약했다.
하위징아는 원래 조울증 기질이 있었다. ~~~1902년 메리 빈센티아 쇼러와 결혼하면서 조울증 증상은 많이 가셔졌다. 아내와의 사이에 다섯 아이를 두고 아주 금술이 좋았으나 아내는 1914년 병으로 사망했다. ~~~그 후 독신으로 살다가 1937년 재혼하여 다시 가정의 단란함을 맛보게 되었다. ~~~1945년 숨을 거두었다.
-작품의 배경
「그는 <중세의 가을>2장 “보다 아름다운 삶을 위한 갈망”에서 중세인들 앞에 놓인 삶에는 세 가지의 길이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이 험난하고 참담한 세상을 부정하는 길이다. 두 번째는 그런 세상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것을 더 좋고 더 행복한 세상으로 만드는 길이다. 세 번째는 더 좋은 세상을 직접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꿈꾸는 것이다. 만약 지상의 현실이 절망적일 정도로 비참하고 그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어렵다면 빛나는 환상의 꿈나라에 살면서 그러한 이상의 황홀 속에서 지저분한 현실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것이다.
하위징아는 중세 후기의 꽃인 기사도와 궁정 연애에서 이 세 번째의 길을 발견한다. 이것을 <호모 루덴스>의 언어로 말해 보자면 진지함의 세계에서 벗어나 놀이의 세계로 들어갈 때 문화가 더욱 강력하게 추진된다는 것이다.
중세의 기사도와 궁정 연애는 바로 그 외양의 실현이고 거기에 상상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중세의 가을>의 개략적 주제이다. 이 책의 3장 “영웅적인 꿈”과 4장 “사랑의 형태” 13장 “이미지와 어휘” 등에는 관련된 내용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옮긴이의 글-
[들어가는 글]
우리의 시대보다 더 행복했던 시대에 인류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감히 “호모 사피엔스”(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라고 불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인류는 합리주의와 순수 낙관론을 숭상했던 18세기 사람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그리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게 밝혀졌고,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인류를 “호모 파베르”(물건을 만들어내는 인간)라고 부리기 시작했다. 비록 인류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Faber(물건을 만들어내는)라는 말이 sapiens(생각하는)라는 말보다는 한결 명확하지만, 많은 동물들도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말 역시 부적절하기는 마찬가지다. 인간과 동물에게 동시에 적용되면서 생각하기와 만들어내기처럼 중요한 제 3의 기능이 있으니, 곧 놀이하기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르 바로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
호모 루덴스를 펴내는 목적은 놀이 개념을 문화의 개념과 통합시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사용된 놀이라는 용어는 생물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장 놀이는 문화적 현상이다: 그 본질과 의미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동물들은 인간 사회가 놀이를 가르쳐 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놀이를 해왔다. ~~~강아지들의 즐거운 놀이를 유심히 지켜보면 거기에 인간의 놀이가 깃든 본질적 측면이 모두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아지들은 어떤 일정한 자세와 동작을 취하면서 상대를 놀이에 끌어들인다. 네 형제의 귀를 물어서는 안 된다, 물더라도 세게 물어서는 안 된다 등의 규칙을 지키면서 즐겁게 논다. ~~~강아지들은 이렇게 놀면서 엄청난 재미와 즐거움을 느낀다.
만약 우리가 놀이의 본질이 ‘본능’에서 나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반면에 놀이를 가리켜 “의지” 혹은 “의도”라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많이 말해 버린 것이 된다.
• 놀이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
놀이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fun(재미)의 요소라 할 수 있다. ~~~놀이가 벌어지는 현실은 인간 생활의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에 합리성에서 그 기반을 찾으려는 것은 무리이다. ~~~놀이라는 현상은 문명의 특정 단계나 특정 세계관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 문화의 기능을 담당하는 놀이
놀이를 동물이나 어린아이의 생활에 나타나는 행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기능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생물학과 심리학의 경계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 놀이의 진지함
사람들의 인발적인 생각으로 놀이는 진지함의 정반대 개념이다.
• 놀이의 일반적 특징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놀이는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는 기능이다. 놀이는 피상적인 것이다. 놀이의 필요라는 것은 그 놀이를 즐기고자 하는 욕망에 정비례한다. 놀이는 언제라도 연기되거나 정지될 수 있다. 육체적 필요나 도덕적 의무에 의해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놀이는 자유로운 행위이며 자유 그 자체이다. 놀이의 두 번째 특징은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점이다. 놀이는 ‘실제’ 생활에서 벗어나 그 나름의 성향을 가진 일시적 행위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아이는 놀이가 “~인 체하기”이며 “오로지 재미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체하기”는 놀이가 진지함에 비하여 열등한 것이라는 느낌을 드러내는 데, 이런 느낌은 놀이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듯하다.
놀이는 그 장소와 시간에 있어서 ‘일상’ 생활과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이처럼 따로 떨어져 있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이 놀이의 세 번째 특징이다.
놀이는 일단 시작되면 적절한 순간에 종료된다. 놀이는 어느 정도 벌어지다가 스스로 종료한다. 놀이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운동, 변화, 교대, 연결, 결합, 분리의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시간의 제약과 관련하여 놀이는 더욱 기이한 특징을 갖고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면 놀이는 문화현상이라는 고정된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일단 놀아 버리면, 놀이는 정신이 새로 발견한 창조물, 기억에 의해 보유되는 보물로서 유지된다. 그것은 뒤로 물려져 전통이 된다. ~~~놀이는 아무 때나 반복될 수 있다. 이런 반복의 기능은 놀이의 본질적 특징 중 하나이다.
• 모든 놀이에는 규칙이 있다
모든 놀이는 규칙을 갖고 있다. ~~~규칙을 위반하면 놀이의 세계는 붕괴한다. ~~~사회는 게임을 망치는 자보다는 게임을 속이는 자에게 훨씬 관대하다.
• 놀이의 예외적이고 특별한 지위
• 놀이는 경쟁 혹은 재현이다
고등 형태의 놀이에는 다음 두 가지의 기본적 양상이 있다. 첫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경쟁이고, 둘째, 어떤 것의 재현이다. 이 두 기능은 서로 합쳐져서 게임은 (1)경쟁의 ‘재현’이고, (2) 어떤 것을 잘 재현하기 위한 경쟁이다.
재현은 전시展示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을 관중 앞에 드러내는 것이다. 공작과 칠면조는 그들의 화려한 깃털을 암컷에게 전시한다. ~~~우리는 새들이 이런 연기를 펼쳐 보일 때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 이런 종류의 연기를 펼칠 때 상상력이 충만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어린아이는 실재의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고상한 것, 더 위험스러운 것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making an image)것이다. 그렇게 하여 아이는 왕자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사악한 마녀가 되고 혹은 호랑이가 된다. 어린아이는 문자 그대로 기쁨에 넘쳐 자기 자신의 밖으로 나가 버린다. 너무 황홀하여 그 자신이 왕자, 마녀, 호랑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러는 중에서도 “일상적인 현실”에 대한 감각을 유지한다. 그의 재현(다른 어떤 것이 되기)은 가짜 현실이라기보다 외양의 실현이다. 바로 이것이 imagination의 원뜻이다.
• 놀이와 의례의 관계
• 놀이의 진지한 측면
우리는 예식, 주술, 전례, 성사, 신비 예식 등이 모두 놀이 개념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 놀이와 축제의 관계
• 놀이와 종교의 관계
2장 언어에서 발견되는 놀이 개념
• 산스크리트 어, 중국어, 알공킨 어
• 일본어, 셈 어, 라틴 어
• 놀이와 경기(아곤)의 관계
고대 문화에서 놀이와 전투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뚜렷한 사례는 구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무엘서] 하권 2:14에서 아브넬이 요압에게 말한다. “부하들을 내세워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 이 부분의 라티 어역 성경은 이러하다. Surgant pueri et indant coram nobis(아이들이 우리들 앞에서 일어나 놀았다) “그래서 각 측에서 열둘이 나왔다. 그들은 저마다 상대방의 머리를 붙잡고 칼로 옆구리를 찔러 함께 쓰러졌다. 그래서 그곳을 옆구리 벌판이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역사적 근거가 있는가, 혹은 어떤 지명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전설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행동을 놀이라고 했다는 것, 또 놀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라틴 어역 tdjrud에서 Ludant라고 한 것은 Let them play(그들을 놀게 하라)의 뜻이다. 히브리어는 이 부분에 sahaq라는 단어를 썼는데 일차적으로 “웃다” 이고 이차적으로 “무엇을 농담 삼아 하다”, “춤추다”의 뜻이다. 셈투아긴트(70인역 그리스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이렇게 되어 있다. anastetosan de ta paidaia kai paizatosan enopion emon.
놀이가 시적 비유로 쓰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살육적 놀이라고 해도 그것이 여전히 놀이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로 이 때문에 놀이와 경기를 서로 다른 개념으로 분리할 수가 없다.
고대 사회에서 놀이와 전투는 서로 떼놓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냥과 놀이의 결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 음악과 에로스
• 놀이와 진지함의 상보적 관계
3장 놀이와 경기는 어떻게 문화의 기능을 발휘하나
문화 속의 놀이 요소를 말할 때, 문명 생활의 다양한 활동들 중 놀이를 중요한 행위로 여긴다거나, 문명이 어떤 진화 과정(가령 원래 놀이였던 것이 더 이상 놀이가 아니라 문화가 되어 버렸다)을 거쳐 놀이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는 놀이의 형태로 발생했고, 문화는 아주 태초부터 놀이되었다. ~~~가령 사냥도 원시 사회에서는 놀이 형태를 취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놀이가 곧 문화라는 얘기는 아니다. ~~~태초의 단계에 문화는 놀이의 특성을 갖고 있었고, 놀이의 형태와 분위기에 따라 발전했다. 놀이와 문화의 쌍둥이 조합에서 놀이가 먼저이다. 놀이는 객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확정적인 것인 반면, 문화는 후대의 역사적 판단이 특정 사건에 부여한 용어일 뿐이다.
대체로 보아 놀이 요소는 성스러운 영역에 포섭이 되면서 서서히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포섭되지 않은 나머지는 민담, 시가, 철학, 다양한 형태의 법률적, 사회적 생활로 결정結晶되었다. 그리하여 당초의 놀이 요소는 문화 현상 뒤에 거의 완벽하게 감춰졌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심지어 고도로 발달한 문명사회 에서도, 놀이 본능이 강력하게 터져 나와 개인과 집단을 거대한 게임(놀이)의 도취 속으로 밀어 넣는다.
• 놀이의 대립적 성격
함께 놀이하기는 본질적으로 대립적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 놀이는 두 명의 상대자 혹은 팀들 사이에서 놀이된다. 그러나 춤, 행렬, 공연은 대립의 요소가 완벽하게 결핍되어 있다. 더욱이 대립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경쟁적 혹은 아곤적 특징을 띠는 것은 아니다. 중창, 코러스, 미뉴에트 춤, 기악 합주의 각 부분, 고양이 요람이라는 게임 등은 인류학자들이 아주 흥미롭게 관찰하는 사항인데, 일부 원시 부족 사회에서는 이것들이 주술의 복잡한 시스템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자급자족적인 행위 가령 연극이나 음악의 공연 등은 절차나 방식이 부상(副賞)을 놓고 벌이는 경쟁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아곤(경기)의 카테고리에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게임이 보기에도 아름답다면 그 문화적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그렇지만 그 미학적 가치는 문화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놀이가 개인이나 집단의 생활 강도와 분위기를 높여 줄수록, 문명의 일부분으로 쉽게 편입된다. 문명이 놀이 속에서 혹은 놀이로서 발전해 온 과정에는 두 개의 반복적인 형태가 존재하는 데 하나는 신성한 공연이고 다른 하나는 축제의 경기이다.
• 경기를 놀이 개념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 승리와 부상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하여 놀이하고 경쟁한다. 놀이하고 경쟁하는 목표는 첫째도 둘째도 승리이다. 하지만 승리를 누리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 놀이와 원시 사회
• 아메리카 북서해안의 콰키우틀 관습
• 멜라네시아의 쿨라 제도
• 칭찬과 명예
청소년기의 생활에서 최고 단계의 문명에 이르기까지, 개인이나 사회가 완성을 지향하게 되는 가장 큰 동기는 자신의 탁월함에 대하여 칭찬받고 인정받으려는 욕망이다. 남을 칭찬하는 것은 실은 자기 자신을 칭찬하려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미덕에 대하여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을 잘 해냈다는 만족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어떤 일을 잘했다는 것은 남보다 잘했다는 뜻이다.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서는 그 뛰어남을 입증해야 한다. 인정을 받으려면 인정받을 만한 사항이 겉으로 드러나야 한다. 경쟁은 뛰어남(우월함)의 증거를 제시한다. 이것은 원시 사회에 더욱 잘 적용되는 사항이다.
미덕이라는 아이디어는 사물의 특이성과 관련이 있었다. ~~~명예는 정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공개적으로 남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강제로 유지되어야 한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도 명예를 가리켜 ‘미덕의 부상’이라고 했다.
따라서 미덕, 영예, 고상함, 영광 등은 처음부터 경쟁의 영역에 들어 있었고, 그 영역은 곧 놀이의 영역이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젊은 전사의 일생은 미덕의 끊임없는 연마이고 지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다.
• 문화 속의 과시적 요소
귀족은 힘, 기량, 용기, 재치, 지혜, 부, 관대함 등의 업적으로 자신의 미덕을 증명한다. 이런 것들이 없을 경우 그는 하다못해 말(言語)의 시합에서 뛰어날 수 있다. 그가 직접 라이벌보다 뛰어나고 싶은 미덕을 말로 칭송할 수 있고, 아니면 시인이나 전령을 통하여 그런 미덕을 칭송하게 할 수 있다. 이처럼 말로서 자신이 상대방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할 경우 그것은 상대방을 깔보는 오만무례함으로 변질될 수 있고, 이것이 그 나름대로 하나의 경기가 될 수 있다. 허세부리기와 조롱하기 시합이 다양한 문화권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런 시합이 놀이적 특성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런 허세와 조롱의 시합이 놀이의 한 형태임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어떤 소년들의 행동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반적인 허세 시합과 무기를 들고 싸우기 전에 벌어지는 허풍 시합을 잘 구분해야 한다. 비록 그 둘의 경계를 명확하게 긋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고대 중국의 텍스트들에 의하면 대치전은 과장, 모욕, 이타심, 칭찬이 뒤범벅된 혼란스러운 말잔치였다. 그것은 무기를 들고 싸우는 싸움이라기보다, 도덕적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싸움 혹은 손상당한 명예들끼리의 충돌이었다. 모든 종류의 행동들은 그런 행동들을 저지르는 사람 혹은 당하는 사람에게 수치와 명예의 표시가 되고, 그리하여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로마 역사의 초창기에 레무스가 로물루스의 벽을 뛰어넘는 경멸의 제스처를 취한 것은, 중국의 군사적 전통에 비추어 보면, 필요한 도전 행위가 된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는 중국의 전사가 적의 성문 앞까지 말을 타고 가서 채찍으로 성문의 널판을 헤아리는 행위를 들 수 있다. 공격자들이 모(Meaux:프랑스 파리 북동부의 도시)성 안으로 대포를 쏘아댄 후에, 모 시민들이 성벽에 서서 모자의 먼지를 털어 보이는 행위도 이와 유사하다.
• 무파카라와 무나파라
험담과 욕설 시합은 이슬람 도래 이전의 아라비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우리는 앞에서 낙타의 발목을 베어 버리는 무아카라를 언급한 바 있다. 무아카라가 세 번째 뜻으로 소속된 동사 원형은 “상처를 주다”, “훼손하다”의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무아카라의 의미 중에는 이런 것도 들어 있다. conviciis et dictis satyricis certavit cumaliquo(험단과 조롱의 말로써 상대방과 싸우다), 이것은 이집트 집시들끼리의 파괴 시합인 방타르디즈를 연상시킨다.
무아카라 이외에 이슬람 도래 이전의 아라비아에서는 험담 시합과 그 유사한 형태를 가리키는 두 개의 전문 용어가 있었는데, 즉 무나파라와 무파카라이다. 이 세 단어는 동일한 방식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 단어들은 모두 같은 동사의 세 번째 형태에 소속된 명사들인데, 비방 시합의 가장 흥미로운 특징을 보여 준다.
인생의 가장 큰 요구 사항은 자신의 명예를 안전하고 흠결 없이 보존하는 것이다. 반면에 당신의 적은 모욕으로써 당신의 ‘이르드(ird)’를 훼손하고 파괴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간주된다.
자기 자신의 이즈(izz:탁월함)를 높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적수에 대한 욕설과 조롱이 뒤따르게 된다. 이렇게 상대방을 조롱하는 것은 히드자(hidja)라고 한다.
• 그리스, 게르만, 프랑스의 전통
• 경기(아곤)는 문화의 보편적 요소
• 문화를 추진하는 아곤의 요소
어린아이 같은 놀이-의식이 다양한 놀이 형태 속에서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표출되었을 것이다. 그 놀이는 의례에 뿌리를 박고 있었고, 리듬, 조화, 변화, 교대, 대조, 클라이맥스 등을 바라는 인간의 생래적 요구가 충분히 개화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문화를 생산했다. 이런 놀이- 의식에 명예, 위엄, 우월함,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정신이 결부되었다. 주술과 신비 의례, 영웅적 동경, 음악, 조각, 논리의 예시는 고상한 놀이 속에서 형태와 표현을 얻으려 했다. 이러한 열망을 갖고 있던 시대를 후대는 ‘영웅적’시대라고 부를 것이다.
따라서 놀이는 처음부터 문명의 대립적 . 아곤적 기반을 그 안에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놀이는 문명보다 더 오래되었고 더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아곤의 기능은 고대 시대에 이르러 가장 아름다운 형태, 가장 뚜렷한 형태의 아곤적 기능을 획득했다. 문명이 더 복잡해지고, 더 다양해지고, 더 과부하가 걸리면서, 또 생산 기술과 사회생활 그 자체가 더욱 정교하게 조직되면서, 오래된 문화적 토양은 서서히 아이디어들, 사상과 지식의 체계, 교리, 규칙과 규정, 도덕과 관습 등의 무게에 눌려 질식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체계들은 놀이와의 연계를 잃어버린 것들이었다. 뭐라고 할까, 문명은 좀 더 진지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놀이하기에는 부차적 지위밖에는 부여하지 않았다. 영웅의 시대는 끝났고 아곤의 단계 또한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 듯하다. p155
4장 놀이와 법률
법률이 실제 집행되는 현장 즉 소송 사건을 살펴보면 법률과 놀이 사이에 일정한 상관성이 있다. 법률의 이상적 기반이 어디서 연원 하든 가에 소송은 경기와 상당히 유사하다.
• 소송은 놀이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경기는 곧 놀이를 의미한다.
• 사행성 게임, 경기, 말싸움
원시와 고대 문화에서 놀이와 법률의 밀접한 관계는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곧 사행성 게임, 경기, 말싸움이다.
• 신부를 얻기 위한 경기
때때로 고대 사회의 법적 다툼은 내기 혹은 경주의 형태를 취했다. ~~~내기의 개념은 경기에 반드시 등장했다. ~~~포틀래치의 경우, 상호간의 도전이 계약과 부채의 원시적 제도를 정착시켰다. ~~~우리는 원시 사회의 법적 관습에서 정의를 얻기 위한 경기를 발견하게 된다.
• 법적 절차에서 발견되는 내기의 두 가지 요소
내기는 맹세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법적 절차에서 발견되는 내기 요소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소송의 주역은 ‘자신의 권리를 두고 내기를 건다.’ 즉 상대방에게 vadium(내기)을 걸면서 자신의 주장을 반박해보라고 도전하는 것이다. 19세기까지 영국 법은 민사 소송의 두 가지 형태를 유지했다. 한 형태는 ‘싸움의 내기(wager혹은 wager of battle)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소송을 시작한 자가 법률적 싸움을 제안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법률의 내기(wager of law)인데 소송 당사자가 어떤 특정한 날짜에 정화의 맹세를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형태는 오래 전부터 사용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공식적으로 철폐된 것은 1819년과 1833년에 이르러서였다.
둘째, 소송 그 자체에 대한 내기와는 병도로, 영국에서는 일반 대중이 법정에서 혹은 법정 바깥에서 소송의 결과를 두고서 내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헨리 8세의 왕비 앤 불린과 간통남으로 추정되는 자가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타워 홀에서 내기가 벌어졌는데 앤 불린의 오빠 로치포드가 적극적인 변호로 인해 석방될 가능성에 대하여 10대 1의 판돈이 붙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소송의 세 가지 놀이 요소 중 사행성 게임과 경기를 언급해 왔다. 그러면 나머지 하나인 말싸움을 살펴보기로 하자. 소송은 놀이의 특징을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잃어버렸을 때에도 여전히 말싸움의 특징은 유지했다. 아무리 문명이 진화하더라도 외양으로는 여전히 말싸움인 것이다.
고대의 말싸움에서 결정적 승기를 안겨주는 것은 잘 고안된 법적 논증이 아니라, 가장 악랄하고 무자비한 욕설이다. 이 경우 아곤은 어떻게 하면 상대방보다 세련된 욕설을 개발하여 우위를 유지하느냐, 이것이 주안점이다.
• 그린란드 에스키모의 분쟁 해결 방식
어떤 에스키모가 누군가에게 불평할 것이 있으면 그는 상대방에게 드럼 시합을 하자고 도전한다(덴마크어 Trommesang).그러면 씨족이나 부족은 화려한 옷을 떨쳐입고 즐거운 기분으로 축제의 대회에 모여든다. 두 명의 소송 당사자는 번갈아 가며 드럼(북)을 치면서 상대방을 향해 야비하고 상스러운 노래를 불러댄다. 그 내용은 주로 상대방의 비행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이 근거 있는 비난인지, 풍자적인 말인지, 관중을 웃기기 위한 말인지, 순전한 중상 비방인지는 따지지 않는다. 가령 상대방의 아내와 장모가 기근 때 이런 저런 사람들의 살을 뜯어먹었다고 비방한다. 그러면 청중들은 갑자기 눈물바다를 이룬다. 이런 비난의 노래에는 상대방을 향한 모욕적인 동작이 수반된다. 가령 상대방의 얼굴을 향해 숨을 내뿜거나 콧방귀를 뀌고, 이마로 상대방의 이마와 충돌하고, 상대방의 입을 쫙 열어보기도 하고, 그를 텐트 기둥에 묶기도 한다. 이런 행위를 당한 피고는 평온하면서도 냉소적인 태도로 견뎌내야 한다. 관중들은 노래의 후렴구에 가담하면서 피고와 원고에게 더욱 대담한 노래와 행동을 재촉한다. 이런 관중들은 거기 앉아서 졸아 버리기도 한다. 후식 시간에 원고와 피고는 다정한 어조로 대화를 나눈다.
이러한 경기 형식의 법정은 수년간의 기간에 걸쳐 계속되기도 하는데 이 기간 중 양측은 새로운 노래와 새로운 비위 사실을 생각해 낸다. 마침내 구경꾼들은 누가 승자인지 결정한다. 대부분의 경우 판결 즉시 우정이 회복된다. 하지만 때때로 가족 전체가 시합의 패배에 수치심을 느끼고 이사를 가기도 한다.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건의 드럼 시합을 벌이기도 한다. 이 시합에는 여자들도 참가할 수 있다.
5장 놀이의 전쟁
우리는 전투를 가장 열정적이면서도 정력적인 놀이 형태라고 할 수 있고 동시에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원시적인 놀이라고 말해 볼 수 있다.
• 문화적 기능을 담당하는 싸움
중세의 토너먼트는 언제나 가짜 전투, 즉 놀이로 간주되었으나 그 초창기 형태인 주스팅(iousting)은 아주 진지하게 수행되었으며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한 형식은 아브넬과 요압 앞에서 젊은이들이 벌인 ‘놀이하기(삼하2:14)’와 유사했다.
문화적 기능을 담당하는 싸움은 언제나 일정한 규칙을 필요로 했고 어느 정도까지는 그 싸움의 놀이 특성을 인정했다. 쌍방이 서로 동등한 자 혹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적대자라고 생각하는 영역에서 벌어질 때, 비로소 전투가 문화적 기능을 담당한다. 달리 말해서 전쟁의 문화적 기능은 그 놀이 특성에 달려 있다. 전쟁이 동등한 사람들의 영역 바깥에서 벌어질 때 이런 조건은 바뀌게 된다. 가령 전쟁의 상대방을 인간이 아니라 야만인, 악마, 이교도, 이단자, 법률도 모르는 하등 종족 등 인간적 권리가 박탈된 자로 여길 때, 그러한 전쟁은 놀이가 아니고 또 놀이의 특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전쟁의 당사자가 상대방의 명예를 존중하며 일정한 제약 사항들을 받아들일 때, 전쟁은 문명의 영역 안에 머물게 된다.
• 단 한 판의 싸움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용사들은 상대방 용사에게 도전을 걸었다. “싸움은 운명의 테스트였다. 첫 번째 싸움은 의미심장한 전조였다. 단 한 번의 싸움이 전투 전체를 대신하기도 했다. 반달족이 스페인에서 알레민족과 싸움을 할 때, 양측은 단 한 판의 싸움으로 전쟁을 결판내기로 합의 했다. 이것을 신성한 전조로 본다거나 불필요한 유혈극을 피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조치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전쟁의 간편한 대용품이었고, 아곤의 형태를 갖춘 간단한 증거였으며, 어느 일방의 상대방에 대한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대인의 이러한 전쟁관은 단 한 판의 싸움을 불필요한 유혈극의 회피 수단으로 여기는 기독교적 논증에 의해서 잠식을 당했다. ~~~중세 후기에 들어와, 전쟁에 나선 왕이나 왕자들이 그들 사이에 단 한 판의 싸움을 벌여 싸움을 종식시키려 했던 것이 아주 관례적이었다.
• 사법적 결투
• 일반적 결투
• 전쟁의 아곤적 요소
문화의 초창기 단계에서 싸움은 우리가 말하는 페어플레이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싸움은 비 아곤적이었다.
• 적에 대한 예의
• 중세의 군사적 관습
• 국제법은 아곤에서 유래
• 중세의 기사도 정신
• 러스킨의 전쟁 예찬
6장 인식(지식)의 수단이 되는 놀이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행위와 모험은 그냥 힘이었지만 지식은 주술적 힘이었다. 고대인들은 모든 특별한 지식을 신성한 지식으로 여겼다. 다시 말해 신비하면서도 경이를 일으키는 지식으로 보았는데, 무엇을 안다는 것은 곧 우주 질서 그 자체와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 베다의 수수께끼 게임
보름달과 반달은 어디에서오고 그것들이 속한 해는 서로 연결이 되는가? 계절의 기둥은 어디에서 오는지 말해 달라! 낮과 밤이라는 두 처녀는 다양한 형태의 욕망을 보이며 어디로 달려가는가? 어떻게 바람은 멈추지 않을 수 있으며 정신은 휴식을 취하지 않는가?
• 철학의 탄생
존재의 신비에 대하여 깊이 명상하며 환희를 느끼던 고대인들의 사상은 신성한 시기, 심오한 지혜, 신비주의, 순전한 말장난의 경계선상을 왕복했다. ~~~~그 안에서 철학이 탄생한다.
베다 찬가의 수수께끼 질문은 우파니샤드라는 심오한 철학을 유도했다. 그러나 우리는 신성한 수수께끼의 철학적 깊이 보다는 그 놀이적 특성과 문명에의 기여도에 더 관심이 많다. 수수께끼 경기는 결코 리크레이션이 아니었다. 그것은 희생제의의 필수적 부분이었다. 수수께끼의 해결은 희생 그 자체만큼이나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것은 신들의 손을 비틀어 답을 알아내려는 행위였다.
• 수수께끼의 본질
수수께끼는 신비한 힘을 가진 신성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연 위험한 것이었다. ~~~아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내놓는 자는 가장 높은 지혜를 획득한 자이다. 이 두 모티브가 야니카왕에 대한 고대 힌두 이야기에 잘 융합되어 있다. 왕은 그의 희생 축제에 참가한 브라민들에게 신학적 수수께끼 풀기 경기를 개최했다. 부상은 1,000마리의 암소였다.
그리스 전승에서도 수수께끼 풀기와 죽음의 징벌이라는 모티브가 있었는데 예언자 칼카스와 모프소스의 스토리가 대표적이다. 칼카스에게 하나의 신탁이 내려지는데 만약 그 자신보다 더 현명한 예언자를 만나면 죽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모프소스를 만나서 수수께끼 시합을 벌이게 되는데 패배한다. 칼카스는 슬픔과 분노로 자살을 해버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모프소스를 따라간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목을 내놓는 수수께끼 시합이 약간 변형된 형태들로 등장하고 있다.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명상이나 논리적 사고에 의해서는 발견하지 못한다. 그 해답은 문자 그대로 갑작스러운 해결이 되어야 한다. 질문을 던진 자가 상대방을 꼭 옥죄던 매듭을 갑자기 풀어헤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확한 대답은 질문을 던진 자를 무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원칙적으로 모든 질문에는 단 하나의 해답만이 있다. 게임의 규칙을 잘 알아야만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 그 규칙은 문법적인 것, 시적인 것, 의례적인 것이다. 전문가의 비밀 언어들을 알고 있어야 하고 바퀴, 암소, 새 등 각 현상의 카테고리를 분류하는 상징을 잘 알아야 한다.
• 수수께끼의 사교적 역할
수수께끼 혹은 제기된 문제는 그 주술적 효과 이외에도 사교적 역할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 철학적 질문과 답변
마하바라타의 한 이야기는 아주 대표적이다. 판다바족은 황야를 방황하다가 숲속의 아름다운 연못에 도작한다. 연못 속의 정령은 질문에 다 대답하기 전에는 물을 마시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이 경고를 무시한 사람들은 목숨을 잃고 따에 쓰러진다. 마침내 유디스티라가 정령의 질문에 대답하겠다고 나선다. 이렇게 하여 질문과 답변의 게임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힌두 윤리학의 모든 체계가 다루어진다. 신성한 우주적 수수께끼가 재치 있는 말놀이로 옮겨가는 진귀한 사례다.
• 수수께끼와 철학의 관계
7장 놀이와 시
• 신들린 시인 바테스
• 시는 놀이에서 생겨났다
시는 의심할 바 없이 신성한 놀이지만 그런 거룩함 속에서도 특유의 즐거움, 분방함, 환희, 쾌활함이 있다. 원시적 형태의 시는 미적 충동의 만족이라는 문제가 없었다. 시는 여전히 의례적 행위의 체험 속에 잠재해 있으며 그 행위의 열광 속에서 찬가나 송시의 형태로 창조되어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만 시가 창조된 것은 아니다. 시적인 기능은 사회적인 놀이 그리고 씨족, 일족, 부족의 격렬한 경쟁에서도 꽃 피기 시작한다. 새로운 계절을 축하하는 것보다 시를 풍부하게 하는 계기는 없는데 특히 봄철은 시의 창작을 부추기는 계절이었다. 이때 젊은 남녀가 환희와 자유 속에서 만났다.
부루 섬 중앙 지역(라나라고도 함)주민은 <잉카 푸카>로 알려진 의례적인 교창(번갈아가며 노래 부름)형태의 노래를 즐겨 부른다. 남녀는 마주 앉아 짧은 노래를 드럼 반주에 맞춰 부르는데 일부는 즉흥곡이다. 이 노래는 흉내 내거나 조롱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고 다섯 종류가 있다.
야자수 꼭대기에 앉아 수액을 채집하면서 남자들은 슬픈 노래나 혹은 조롱하는 노래를 이웃 나무에 올라가 있는 동료를 대상으로 부른다.
• 사랑의 법정
즉흥적으로 시를 만들어내는 것은 극동 지역에서는 거의 누구나 갖춰야 하는 자질이었다. 베이징으로 가는 베트남 사절단의 성공은 때로는 사절단의ㅐ 즉흥시 제작 능력에 달려 있었다. 사절들은 모든 종류의 질문에 지속적으로 대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고, 황제나 중국 고위 관리들이 적합한 대답을 아는지 시험하기 위해 내놓은 무수한 난제와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것은 가히 놀이를 통한 외교였다.
문명은 공동체의 중요한 삶을 표현하는 주요 수단으로 시를 선호해 왔고, 그 시적 형태를 아주 후대에 가서야 포기했다.
• 교훈 시
• 신화, 시가, 놀이
원래 신화와 시는 모두 놀이 영역에서 나왔다.
• 신화의 본질
신화가 하나의 문헌으로 정착될 때, 다시 말해 원시적인 상상력에서 한발 더 성장한 문화 속에서 전통적 설화로 자리매김 될 때, 비로소 신화에는 놀이와 진지함의 구분이 스며들어 신화의 전반적 효과를 제약하게 된다.
전승에 의해 후대에 전해진 이 모든 신화적 인물들은 야만스러운 사회의 유물이며 더 이상 그 이후에 달성된 정신적 수준과는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신화가 문헌으로 정착되는 시대에 들어와서는, 그것(신화)이 성스러운 전설로 명예롭게 받들어지기 위해선 성직자의 손에서 신비스러운 해석을 부여받거나, 아니면 하나의 문헌으로 순수하게 가공되어야 했다.
신화를 잇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줄어들면서 최초부터 신화에 잠재되었던 놀이 요소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증가되었다. 이미 호메로스 생존 당시에도 철저한 믿음의 단계는 지나갔다. 하지만 신화는 우주를 이해하는 상징의 가치를 잃은 후에도 여전히 시적 언어를 통하여 신성함의 표현 기능을 유지했다. 이것은 신화의 미학적 기능이라기보다 의례적인 기능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들의 철학의 정수를 후세 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힘찬 방법으로 표현하길 바라면서 신화를 그 수단으로 선택했다. 두 철학자는 세상의 제1원인(조물주)을 이렇게 설명했다. 플라톤은 그것을 영혼의 신화로 설명했고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의 신화로 설파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움직이지 않는 움직이는 자(조물주0에게서 흘러나온 영혼의 변주이거나, 아니면 그 조물주를 향하는 사랑의 변양이라는 것이다.
신화를 문자로 정착시킨 이들은 기독교인, 그것도 기독교의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었다. 그들이 신화적인 사건들을 나름대로 개작했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명백한 익살과 유머의 어조가 남아 있다. 그것은 자신의 신앙이 무찌른 이교도 사상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이교도적 풍물을 조롱하려 하는 기독교인들의 어조도 아니며, 과거를 악마 같은 암흑의 시대라고 저주하는 개종자의 어조는 더더욱 아니다. 그보다는 놀이와 진지함의 중간쯤에 위치한 어조, 옛적부터 모든 신화적인 사고에서 울려 퍼졌던 원시적 어조였다.
• 시는 말로 하는 놀이
• 시는 존재와 생각을 이어 준다
시와 문학의 중심 주제는 일반적으로 갈등이다. 즉 영웅이 수행해야만 하는 임무, 그가 겪어야만 하는 시련, 그가 극복해야만 하는 장애물 등으로부터 갈등의 상황이 빚어진다.
특정한 기술의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시인이라는 호칭을 얻는다. 이 기술 언어는 누구나 이해하는 것은 아닌 특별한 용어, 이미지, 상징 등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언어와는 다르다. 구체적 실체와 추상적 생각 사이의 까마득한 거리는 오로지 상상이라는 무지개에 의해 연결될 수 있다.
시적 언어가 이미지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그 이미지를 가지고 놀이를 하기 때문이다. 시적 언어는 이미지에 스타일을 부여하고 신비스러움을 주입해 모든 이미지가 수수께끼를 풀어헤치는 대답이 되도록 한다.
• 시는 놀이 정신의 최후 보루
시는 절대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대단히 정밀한 규칙을 따르지만 거의 무한한 변형을 허용한다. 시의 이러한 기능은 대대로 보존되었고 고상한 지식 체계로서 후대에 전해졌다.
가령 고대 노르웨이의 완곡 대칭법이 그것이다. 시인이 ‘혀’를 “발언의 가시”로, ‘땅’을 “바람의 전당의 바닥”으로, ‘바람’을 “나무 늑대”로 말할 때 시인은 암묵적으로 풀어야 할 시적 수수께끼들을 청중에게 내놓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과 청중은 그런 수수께끼를 수백 개는 알고 있어야 한다.
시와 수수께끼 사이의 밀접한 연관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8장 신화 창조의 요소들
은유는 생명과 변화의 견지에서 사물이나 사건을 묘사하는 수사법인데, 이것으로 효과를 내려고 할 경우 필연적으로 의인화를 하게 된다. 형체 없는 것과 생명 없는 것을 사람으로 나타내는 의인화는 모든 신화 창조와 거의 모든 시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의인화 과정은 정해진 규칙을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처음에 무언가 생명이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을 상상한 뒤 그것을 신체, 부분, 열정을 가진 무언가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인지된 것은 처음부터 생명과 변화를 기지고 있는 것으로 상상되며, 은유는 그것(인지된 것)의 일차적 표현이며 나중에 생각된 것(생명이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된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의인화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필요를 느끼자마자 떠오르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은 상상과 동시에 태어난다. 이런 생래적인 마음의 습관, 살아 있는 존재들의 상상적 세계(혹은 살아 움직이는 생각의 세계)를 창조하려는 경향을 가리켜 “마음의 놀이” 혹은 “심리적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 의인화는 놀이의 한 요소
의인화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를 생각해 보자, 그 형태는 세계와 사물의 기원에 대하여 신화적으로 가상하는 것이다. 그 신화 속에서 천지창조는 세계만큼이나 거대한 어떤 거인의 사지(四肢)를 사용하여 특정 신들이 만들어냈다고 상상된다.
• 의인화는 마음의 습관
• 서정시, 서사시, 드라마
9장 철학에서 발견되는 놀이 형태
• 소피스트의 기술
• 소피스트리와 프로블레마
• 플라톤과 아모스
• 철학이 발전해 온 단계
철학은 먼 과거의 성스러운 수수께끼 놀이에서 시작되었고 동시에 의례와 축제의 여흥이었다.
10장 예술에서 발견되는 놀이 형태
놀이는 시의 본능 같은 것이며, 모든 형태의 시적 표현이 놀이의 구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그 유대는 끊을 수 없다. 심지어 더 높은 단계, 즉 놀이와 음악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유대가 발견된다.
• 음악과 놀이
앞에서 우리는 놀이가 실용적인 생활의 합리성 밖에 존재하며 따라서 필요성, 실용성, 의무 혹은 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했는데 이런 설명은 음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시, 음악, 놀이는 리듬과 하모니를 공통 요소로 취한다. 하지만 시에서는 일부 시어(詩語)의 의미가 시를 순수한 놀이 밖으로 나오게 하여 관념화와 판단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하는 반면 음악은 그 비구상성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놀이 영역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시가 고대 문화에서 그토록 중요한 의례적. 사회적 기능을 발휘했던 이유는 음악적 낭송과 밀접한(또는 떨어질 수 없는)관계였기 때문이다.
모든 진정한 의례는 노래 부르고, 춤추고, 놀이하기를 동시 다발적으로 수행했다. 현대인들은 의례와 신성한 놀이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 우리의 문명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너무 정교해졌다. 하지만 음악적 감성은 여전히 그런 감각을 되살려 준다. 우리는 음악의 분위기를 타는 순간 의례를 느끼게 된다. 음악을 즐기면서, 그것이 종교적인 개념을 표현하는 것이든 아니든 아름다움의 감각과 성스러움에 대한 느낌이 하나로 합쳐지고 놀이와 진지함의 구분이 살라져서 하나로 융합된다.
• 그리스의 음악 사상
놀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 파이디아는 포괄적으로 놀이 현상을 가리키지 못하고 아이들의 놀이, 유치한 것, 하찮은 것이라는 의미만 내포했다. 따라서 파이디아는 더 높은 형태의 놀이는 아곤(경쟁적 경기)이나 스콜라제인(여가 시간을 보내다), 디아고게(시간을 보내다. 의 뜻이지만 대략적으로 오락, 취미) 같은 단어로 표현해야 되었다. 하지만 이런 단어들은 놀이의 요소를 배제했다.
• 디아고게
디아고게라는 그리스 어는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문자 그대로는 시간을 보내는 것 혹은 소비하는 것이지만 이를 취미로 표현할 때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과 여가에 대한 사상을 전제로 해야만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즐거움을 위해 음악을 연습하지만, 옛 사람들은 파이데이아(교육, 놀이와는 다른 단어)를 위해서도 연습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빈둥거림, 즉 여가는 우주의 원칙이었다. 빈둥거리는 것은 일하는 것보다 나았으며, 실제로 그 자체가 모든 일의 텔로스(목적)였다. 일을 중시하고 여가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우리의 노동관을 전도시킨 이러한 사상은 분명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에서 자유민은 생계를 위해 일할 필요가 없었던 만큼 교육적 성격의 고상한 직업에서 인생의 목표를 추구할 여가가 있었으므로, 이런 사상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리스의 자유민에게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그의 디아고게, 즉 자유 시간을 선용할 것인 가였다. 하지만 파이디아에는 자유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놀이가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파이디아가 단지 아이들의 놀이였기에 그런 생활 목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파이디아는 일에서 받는 긴장을 완화하고, 정신에 휴식을 제동하는 일종의 강장제로 여겨졌다. 하지만 여가는 그 자체ㅔ에 모든 즐거움과 인생의 기쁨을 담고 있었다. 평상시에 자기에게 없는 것을 열심히 추구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 그런 노력을 중단함으로써 얻게 되는 행복, 그것이 삶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같은 것에서 행복을 찾지 않는다. 더욱이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장 선량한 사람이고 또 그들의 열망이 가장 고상할 때 행복은 최고가 된다. 따라서 이 디아고게를 얻고, 또 특정한 것들을 배우기 위해 자기 자신을 교육해야 한다고 그리스 인들은 생각했다. 그 특정한 것들은 어떤 실용적 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특정한 것들 자체를 위해서 배워야 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 인들은 음악을 파이에디아(교육, 문화)라고 간주했다. 읽기와 쓰기는 실제 생활에 반드시 필요하거나 유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유 시간을 보내는 데에는 아주 적절한 기능으로서 이것들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파이에디아의 특징이었다.
• 미메시스
이러한 음악 사상은 음악을 고상한 놀이와 예술을 위한 예술의 중간쯤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 음악의 본질과 중요성에 대한 그리스 사상을 대표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더 대중적인 견해에 따르면 기술적으로, 심리적으로, 무엇보다도 도덕적으로 굉장히 분명한 기능을 음악이 발휘한다는 것이다. 음악은 모방 예술에 속하며, 이러한 미메시스(모방)의 효과는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종류의 도덕적 감정을 일깨운다는 것이다.
• 음악의 기능
음악의 본질과 기능을 정의하려는 과정에서 인간의 생각은 언제나 순수한 놀이의 영역으로 기울어졌다. 모든 음악적 행동의 본질이 놀이라는 근본적 사실이 항상 명료하게 표명되지 않더라도 모든 곳에서 암묵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음악이 그 가치를 인정받고 공개적으로 고도의 개인적인 체험, 마음 깊은 곳의 감성적인 경험의 원천, 그리고 인생의 가장 훌륭한 축복 중 하나로 인지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랫동안 음악의 기능은 순전히 사교적이고 놀이적인 것이었으며 비록 연주자의 기술적인 능력은 굉장히 찬사를 받았으나 정작 음악가 자신은 경멸당했고 음악은 비천한 일로 분류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가들을 비천한 사람들이라고 했고, 음악가들은 거의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요술쟁이, 곡예사, 광대 등과 같은 부류로 취급받는 방랑자였다.
• 무용은 순수놀이
• 조형 예술의 비 놀이적 특징
• 예술 작품의 의례적 성질
• 실러의 놀이 본능
• 조형 예술의 아곤적 요소
11장 놀이의 관점으로 살펴본 서양 문명
놀이적 경쟁 정신은 사회적 충동이라는 측면에서 문화 그 자체보다 더 오래된 것이며, 실질적인 효소가 되어 삶의 모든 측면에 배어들었다. 의례는 성스러운 놀이에서 성장했고 시는 놀이에서 태어났고 길러졌다. 음악과 춤은 순수한 놀이이다. 지혜의 철학은 종교적 경기에서 유래한 말과 형태로 표현된다. 전쟁의 규칙, 고상한 삶의 관례는 놀이 양식에서 세워졌다. 따라서 문명은 초기 단계에서 놀이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문명은 놀이의 정신 속에서 놀이의 양태로 생겨나며 결코 놀이를 떠나지 않는다.
• 로마 제국 시대
• 중세시대
• 르네상스와 휴머니즘 시대
중세 시대에는 놀이 정신이 멋지게 이상화 된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전원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기사도적인 삶이다.
• 바로크 시대
17세기를 말할 때 ‘바로크’라는 영어를 원래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 확대 적용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바로크는 원래 건축과 조각의 특정 양식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17세기 문명의 본질을 묘사하는 여러 관념들의 커다란 복합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 로코코 시대
음악은 한정된 한계 내에서 유효한 계약이며, 실용적 목적에 이바지하지 않으면서도 즐거움, 기분 전환, 정신의 고양을 가져온다. 치열한 연습의 필요성, 허용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을 규정하는 규범, 아름다움의 효과를 얻기 위한 엄격한 음악적 요구 사항, 이 모든 것들이 놀이 특질의 전형이다.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더 엄격하게 법칙을 만드는 것이 음악의 놀이 특질이다. 이러한 규칙을 위반하면 그것은 더 이상 음악도 놀이도 아니다.
고대의 사람들은 음악이 정서를 환기하는 신성한 힘이며 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훨씬 뒤에 와서 음악은 비로소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가물, 삶의 표현, 더 나아가 본격적 의미의 예술로 인정받게 되었다.
후대에 생겨난 학문인 음악 심리학은 어쩌면 18세기 음악의 놀이 내용과 미학적 내용 사이에 균형이 잡혀 있었음을 밝혀낼지도 모른다.
•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
로코코 직후의 시대에는 그 어떤 놀이 특질도 없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일지 모른다. 신고전주의와 신흥 낭만주의 시대는 음침하고 우울한 인물들,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우울함, 슬픈 진지함 따위를 연상시킨다. 이 모든 것은 놀이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듯하다.
신고전주의의 바로 뒤를 잇는 낭만주의는 많은 목소리와 얼굴을 가지고 있다. 낭만주의를 1750년 즈음에 일어난 운동 혹은 조류인데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운동은 모든 정서적, 미학적 삶을 이상화된 과거로 회귀시키려는 경향을 갖고 있는데 그 과거는 모든 것이 흐릿하고, 구조가 없으며 신비와 공포로 가득 찬 그런 시대였다. 생각이 뛰어놀 수 있는 이상적 공간을 만들자는 낭만적 계획은 그 자체가 하나의 놀이 과정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우리는 문학적, 역사적 사실인 낭만주의가 놀이 속에서 태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낭만주의의 출생 증명은 영국의 소설가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의 편지들이 제공한다. ~~~~낭만주의라는 사조에 구체적 형태와 내용을 그 누구보다 많이 제공한 월폴이었지만 낭만주의라는 사상은 그저 하나의 취미에 지나지 않았다. 월폴의<오트란토 성>은 중세를 무대로 하는 스릴러 소설인데 절반은 변덕스러운 심정으로, 나머지 절반은 우울증의 심정으로 썼다고 한다. ~~~<오트란토 성>이라는 소설은 낭만적 분위기와 공상을 내세워 놀이를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괴테가 달빛이 비치는 교회 묘지에서 춤추고 있는 해골들을<죽음의 춤>이라는 시에서 묘사했을 때 그는 일종의 놀이를 한 것이었다. ~~~비록 괴테는 <죽음의 춤>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놀이를 했지만, 쥘 리가 등장하는 루소의 <신 엘로이즈> 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독자들은 진지하게 감상주의의 이상에 따라 살아가려 했고, 종종 그런 감상을 구체적으로 실천(자살)하기도 했다.
• 놀이를 배척한 19세기
19세기는 놀이의 공간을 별로 남겨두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놀이라고 표현했던 모든 것들에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경향들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심지어 18세기에도 무미건조한 효율성과 사회적 복지의 부르주아적 이상인 -모두 바로크에는 치명적이다- 공리주의가 사회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런 경향들은 산업혁명과 그로 인한 기술 분야의 발전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노동과 생산이 시대의 이상이자 우상이 되었다. 유럽 전역은 작업복을 입었다. 따라서 사회적 의식, 교육적 열망, 과학적 판단이 문명의 지배 요소가 되었다.
이처럼 물질문명을 중시하는 사상이 팽배해지면서, 마르크시즘이라는 창피스럽고 잘못된 사상이 등장했고 심지어 신봉되기까지 했다. 마르크시즘은 경제적인 힘과 물질적인 이익이 역사의 진로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경제적인요소를 과대평가하는 태도는 기술의 진보를 숭배하는 심리가 팽배해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런 숭배 심리는 합리주의와 공리주의의 결과물인데, 이 두 사상은 인간으로부터 신비한 의례를 제거하고 인간을 원죄 의식과 죄책감으로부터 방면해 주었다. 하지만 인간은 두 사상(합리주의와 공리중의)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음과 근시안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지는 못했고 그런 진부한 패턴(어리석음과 근시안)에 맞춰 세계를 형성해 나갔다.
19세기 사상의 커다란 조류는, 어느 측면에서 바라보든, 사회적 삶 속의 놀이 요소를 적대시하고 배제했다.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는 놀이 요소를 적대시하고 배제했다.~~~~실험과 분석 과학, 철학, 개혁주의, 교회와 국가, 경제학 등 모든 것이 오로지 진지함만을 추구했다. P364
문화는 놀이되는 것을 중단했다. 더 이상 겉으로 드러난 형태는 픽션의 외양을 꾸미지 않았다. ~~~놀이 요소가 쇠퇴하는 가장 놀라운 증상은 의복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이후 남성복에서 상상적이고 공상적인 요소가 모두 사라졌다. 많은 나라에서 농부, 어부, 항해사의 전통족 복장이었던 긴 바지-코메디아 텔라르테 쇼에서 나오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가 갑자기 신사의 패션이 되었다.
의복의 관점에서 말해 보자면, 신사들은 더 이상 영웅, 전사 혹은 귀족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신사들이 쓰는 중산모는 그들의 진지함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화사한 색깔은 완전히 사라졌고 좋은 재질의 옷감도 음침하고 편리한 스코틀랜드산으로 대체되었다.
12장 현대 문명에서 발견되는 놀이 요소
우리가 이제 대면해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문명은 어느 정도까지 놀이 요소를 발전시켰는가? 놀이 정신은 현대 문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어느 정도까지 지배하는가? 11장에서 언급했지만 19세기는 예전 시대들이 갖고 있던 놀이의 특징을 많이 잃어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20세기에 들어와 더 심해졌는가, 아니면 완화되었는가?
• 현대 스포츠
기술, 힘, 지구력의 경쟁은 의례는 물론이고 재미나 축제와 관련된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극적 무대 효과와 귀족적 장식을 자랑하는 토너먼트는 오늘날 스포츠라고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연극의 기능을 수행했다. ~~~기독교 사상은 스포츠 행사의 조직이나 신체 단련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신체 단련은 교양 교육 정도로 치부했다.
르네상스 시대도 완성을 위한 신체 단련의 사례가 많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수준의 일이었고 단체나 계급별로 조직되지는 않았다. 휴머니스트들은 학문과 교양을 중시하기는 했지만 예전의 신체 폄하 경향을 그대로 계승했다. 종교 개혁과 반 종교 개혁 시대에도 도덕과 지성을 강조했지 신체 단련은 저평가했다. 이런 식으로 18세기가 끝나갈 때까지 게임과 신체 단련은 문화적 가치로서 낮게 평가되어 있었다.
놀이적 경쟁의 기본 형태는 시대를 막론하고 늘 거기에 있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는 현상은 가끔씩 벌어지던 오락 행사가 조직된 클럽 혹은 대회의 시스템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 놀이와 분리된 스포츠
19세기 후반부터 스포츠라는 게임은 점점 더 진지한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경기 규칙은 점점 엄격하고 까다로워졌다. 잔보다 더 빠르고 더 높고 더 날렵한 스포츠 기록들이 수립되었다.
스포츠가 조직화, 제도화 하면서 순수한 놀이 특질은 점점 사라졌다. 우리는 아마추어와 프로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현상에서 이것을 간파할 수 있다. 놀이 집단은 놀이하다가 더 이상 놀이가 아닌 사람들을 따로 구분했고, 그들이 놀이 정신에서는 열등하지만 기량의 측면에서는 월등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전문 선수의 정신은 더 이상 순수한 놀이의 정신이 될 수 없었다. 프로에게는 자발성과 무사무욕의 정신이 없었다.
프로는 점점 더 스포츠를 놀이의 영역으로부터 밀어냈고 그리하여 스포츠는 그 자체로 특별한 종이 되었다. 프로 스포츠는 놀이도 진지함도 아니다.
• 카드놀이의 폐해
문명이 시작된 이래 많은 반상(盤上) 게임이 생겨났다. 어떤 게임들은 원시 사회에서 생겨났는데 그 사행성 특징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획득했다. 행운을 다투는 게임이든 기량을 다투는 게임이든 모두 진지함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즐거운 분위기는 거의 없다. ~~~~행운이 작용할 여지가 없는 게임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최근에 들어와 이런 게임들이 챔피언십이나 세계 토너먼트니 하는 체육 대회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각종 전문지와 언론들은 이런 대회들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는데, 순수한 외부인들이 볼 때에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카드놀이는 반상 게임과는 달라서 행운의 요소를 완전 배제하지는 못했다. 행운이 지배할수록 도박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어 클럽 조직이나 공식 대회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나 머리를 많이 쓰는 카드놀이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경향이 강하다.
최근의 신문 보도에 의하면 직업 브리지 선수인 컬버트슨 부부의 연간 소득은 20만 달러 이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브리지 게임에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가 투입되고 있지만 상금이 이 사람 저 사람 손으로 옮겨 다니는 것 이외에 아무런 구체적 성과도 없다. 이런 있으나 마나한 활동에 의하여 사회는 덕을 보는 것도 없고 손해를 보는 것도 없다.
진정한 놀이가 되려면 어른이 동심으로 돌아가 놀이하는 그런 게임이 되어야 한다. 브리지에서 이런 동심을 발견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게임에서 놀이 정신의 미덕은 사라진 것이다.
• 현대의 상거래
• 현대 예술
예술은 여러 세기에 걸친 점진적 과정에 의하여 탈기능화 해왔고 점점 더 예술가 개인의 자유롭고 독립된 정신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해방을 증명하는 이정표 중 하나는 패널과 벽화 대신에 캔버스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로부터 개인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한 유사한 사례는 르네상스 시대에도 발견된다. ~~~예술은 점점 더 독립적이면서도 중요한 가치의 스케일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다. 예술은 특권층 사람들이 즐기는 장식품 정도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사진 기술에 힘입어 예술 감상의 기회가 덜 교육받은 일반 대중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예술은 공공의 재산이 되었고 예술을 사랑하는 태도는 교양 있는 좋은 태도가 되었다. 예술가가 우월한 존재라는 사상이 힘을 얻었고 일반 대중은 스노비즘(대중이 귀족인체 하는)의 세례를 받았다. 동시에 독창성에 대한 동경이 창조적 충동을 왜곡시켰다.
• 현대 과학
놀이의 광의적 정의를 적용하면 어떤 행위가 놀이라는 명칭을 얻기 위해서는 제약과 규칙 이상의 것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게임은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고 우리는 앞에서 말했다. 게임 이외의 다른 현실과는 접촉하지 않으며 그 게임을 놀이하는 동안에만 존속한다. 일상생활의 긴장으로부터 기분 좋게 이완되는 그런 즐거운 느낌이 수반된다. 이런 것들은 과학에 적용되지 않는다. 과학은 유용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현실과 접촉해야 한다. 또 현실에 응용될 수 있어야 한다. 순수 과학으로 인정받으려면 보편타당한 현실의 패턴을 수립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과학이 하나의 게임에 불과하다는 결론은 너무 손쉽게 얻은 값싼 주장으로 폐기되어야 한다.
우리는 잠정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현대 과학이 정확성과 진실성의 엄격한 요구를 준수하는 한 놀이의 영역으로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 유치하고 그릇된 놀이
우리는 이제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그 전에 현대 사회 생활(특히 정치)의 놀이 요소를 언급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오해 사항을 경계해야 한다. 첫째, 어떤 놀이 형태는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의도를 위장하기 위해 의식, 무의식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그것은 이 책의 주제인 영원한 놀이 요소와는 무관한 것이 되며 거짓된 놀이라고 명명할 수 있으리라. 둘째, 피상적으로 사태를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놀이가 항구적인 놀이 경향을 갖고 있는 현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놀이가 아닌 경우도 있다. 현대의 사회생활은 점점 더 놀이와 비슷하여 놀이 요소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지배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유치한 놀이puerilism"라고 명명하겠다.
• 정치의 놀이 요소
• 국제 정치와 현대의 전쟁
[맺는 말]
진정한 문명은 특정 놀이 요소가 없는 곳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명은 자아의 제약과 통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이기적 경향을 더 높은 궁극적 목표와 혼동해서는 안 되고, 자신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일정한 한계에 의해 둘러싸여 있음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어떻게 보면 문명은 일정한 규칙에 의거하여 놀이되는 것이며, 진정한 문명은 언제나 페어플레이를 요구한다.
페어플레이는 놀이의 관점으로 표현된 신의 성실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속이거나 놀이 정신을 망치는 행위는 문명 그 자체를 동요시킨다. ~~~~진정한 놀이는 프로파간다를 모른다. 놀이 자체가 그 목적이며 놀이 정신은 행복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이 책의 1장에서 소개했던 플라톤의 심오한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자.
「“인간의 일은 아주 진지하게 대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행복은 별개의 것이다..... 나는 인간이 진지한 사항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대해야 하고 그 반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최고의 진지함을 행사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놀이를 놀아 주는 자이고 그것이 그의 가장 좋은 역할이다. 따라서 모든 남녀는 이에 따라 생활하면서 가장 고상한 게임을 놀이해야 하고 지금과는 다른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쟁을 진지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에는 놀이도 문화도, 진지한 것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것도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가능한 한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올바른 생활 방법은 무엇인가? 인생은 놀이처럼 영위되어야 한다. 일정한 게임들을 놀이하고, 희생을 바치고, 노래하고 춤춰야 한다. 이렇게 하면 인간은 신들을 기쁘게 할 것이고,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것이며, 경기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자연을 따라 살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대부분의 측면에서 꼭두각시이나 진리에 약간의 몫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플라톤의 친구는 이렇게 답한다. “그렇게 말하다니 인간을 전적으로 나쁘게 말씀하시는군요.” 플라톤이 다시 말했다. “나를 용서하시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하나님에게 내 눈을 고정시키고 그 분으로부터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인간은 전적으로 나쁜 존재는 아니고 약간의 배려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요.”」
인간의 마음은 궁극적인 것으로 시선을 돌릴 때 놀이라는 마법의 원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다. 논리적 사고 방식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고상한 정신과 장엄한 업적을 모두 살펴보아도, 진지한 판단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문제적인 어떤 것이 남아 있다.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리의 언명이 절대적으로 확정적인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우리의 판단이 이처럼 동요할 때, 이 세상은 진지한 어떤 것이라는 믿음 또한 동요한다.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예전의 격언 대신에, “모든 것이 놀이다”라는 더 긍정적인 결론이 우리를 압박해 온다. ~~~~플라톤은 “인간은 하나님의 놀이를 놀아주는 자”라고 말했을 때 이런 지혜(모든 것이 놀이)에 도달했다. 이런 독특한 이미지는 구약성경 <잠언>에서도 발견된다. ‘지혜’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 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나는 그 분이 세상을 지을 때 그 옆에 있었다. 나는 날마다 그 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 분 앞에서 뛰놀았다. 나는 그 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놀이란 무엇인가? 진지함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으로 우리의 복잡한 머리가 현기증을 느낄 때, 우리는 윤리의 영역에서 다시 한 번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점을 발견한다(논리로는 그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 책의 앞에서 놀이가 도덕의 바깥에 위치한다고 말했다.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우리가 의지를 발동하여 하려고 하는 일이 진지한 의무인지 아니면 합당한 놀이인가, 하는 난처한 질문에 답변을 하려고 할 때, 도덕적 양심이 다시 한 번 시금석을 제공한다.
진리와 정의, 동정과 용서 등이 우리의 행동에 결정적 동인이 될 때, 그 난처한 질문은 의미를 상실해 버린다. 일말의 동정이라도 가미되면 우리의 행동은 그런 지적 구분의 범위를 훌쩍 벗어난다. 정의와 신의 은총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긴 하지만, 양심 혹은 도덕적 의식은, 끝까지 대답하기 난처한 그 질문을 제압하여 영원히 침묵시킨다.
[Review]
이 책 <호모 루덴스>는 "놀이하는 인간"이란 뜻으로 저자인 요한 하위징어가 이 책을 쓰면서 제창한 개념이다.
“인간과 동물에게 동시에 적용되면서 생각하기와 만들어내기처럼 중요한 제 3의 기능이 있으니, 곧 놀이하기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르 바로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 (본문)
과학과 문명이 있기 전 인간의 삶의 형태는 놀이였다. 희노애락이 놀이 속에서 생겨났으며 놀이의 형태가 보다 조직화되고 미적 형태로 포장되면서 문화와 문명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활동은 놀이이며 문명의 각 분야는 놀이의 범주 속에서 특정되어진 용어일 뿐이라고 말한다.
“놀이와 문화의 쌍둥이 조합에서 놀이가 먼저이다. 놀이는 객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확정적인 것인 반면, 문화는 후대의 역사적 판단이 특정 사건에 부여한 용어일 뿐이다.~~문명은 놀이의 정신 속에서 놀이의 양태로 생겨나며 결코 놀이를 떠나지 않는다.” (본문)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오늘날 문명이 놀이 형태에서 벗어나 본연의 특징인 재미를 상실하였고 육체적, 도덕적 의무감에 빠짐으로 자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추진력을 잃어버렸고, 놀이 정신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놀이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fun(재미)의 요소라 할 수 있다.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놀이는 언제라도 연기되거나 정지될 수 있다. 육체적 필요나 도덕적 의무에 의해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본문)
이러한 생각은 굳이 이런 어려운 책을 통해서 알기보다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놀이 형태로 일어나던 지난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쉽게 마음에 닿는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놀이 문화가 지난 날 여러 나라에서 특징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소개하였고. 오늘날 광범위한 범주의 문명, 스포츠, 게임, 예술, 공연, 전쟁, 법, 지식과 철학, 종교 등이 시대별로 어떤 형태로 변모되어 왔는지를 풍부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일반 독자는 저자가 의도하는 놀이 문화를 어떻게 이상적인 형태로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할 수밖에 없다. 어떤 면에서 특이한 관점에서 문화를 해석한 인문 교양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놀이란 무엇인가? 진지함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짐으로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진리와 정의, 도덕적 양심의 기준에서 포괄적으로 구분할 수 밖에 없다고 답하고 있다.
“놀이란 무엇인가? 진지함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으로 우리의 복잡한 머리가 현기증을 느낄 때, 우리는 윤리의 영역에서 다시 한 번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점을 발견한다(논리로는 그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 책의 앞에서 놀이가 도덕의 바깥에 위치한다고 말했다.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우리가 의지를 발동하여 하려고 하는 일이 진지한 의무인지 아니면 합당한 놀이인가, 하는 난처한 질문에 답변을 하려고 할 때, 도덕적 양심이 다시 한 번 시금석을 제공한다. ~~진리와 정의, 동정과 용서 등이 우리의 행동에 결정적 동인이 될 때, 그 난처한 질문은 의미를 상실해 버린다. 일말의 동정이라도 가미되면 우리의 행동은 그런 지적 구분의 범위를 훌쩍 벗어난다. 정의와 신의 은총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긴 하지만, 양심 혹은 도덕적 의식은, 끝까지 대답하기 난처한 그 질문을 제압하여 영원히 침묵시킨다. ” (본문)
이 책은 얼마 전 읽은 토마스 무어의 책 <나이 공부>에서 “노년의 시간은 놀이하는 것처럼 보내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서 그 의미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 보게 된 책이다. 노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총체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어떤 행위가 가치 있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인생이 무엇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
<본문>
“놀이는 자유로운 행위이며 자유 그 자체이다. 놀이의 두 번째 특징은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점이다. 놀이는 ‘실제’ 생활에서 벗어나 그 나름의 성향을 가진 일시적 행위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놀이는 일단 시작되면 적절한 순간에 종료된다. 놀이는 어느 정도 벌어지다가 스스로 종료한다. ”
“우리는 예식, 주술, 전례, 성사, 신비 예식 등이 모두 놀이 개념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부루 섬 중앙 지역(라나라고도 함)주민은 <잉카 푸카>로 알려진 의례적인 교창(번갈아가며 노래 부름)형태의 노래를 즐겨 부른다. 남녀는 마주 앉아 짧은 노래를 드럼 반주에 맞춰 부르는데 일부는 즉흥곡이다. 이 노래는 흉내 내거나 조롱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고 다섯 종류가 있다.”
“놀이 집단은 놀이하다가 더 이상 놀이가 아닌 사람들을 따로 구분했고, 그들이 놀이 정신에서는 열등하지만 기량의 측면에서는 월등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전문 선수의 정신은 더 이상 순수한 놀이의 정신이 될 수 없었다. 프로에게는 자발성과 무사무욕의 정신이 없었다.”(본문)p372
“놀이적 경쟁 정신은 사회적 충동이라는 측면에서 문화 그 자체보다 더 오래된 것이며, 실질적인 효소가 되어 삶의 모든 측면에 배어들었다. 의례는 성스러운 놀이에서 성장했고 시는 놀이에서 태어났고 길러졌다. 음악과 춤은 순수한 놀이이다. 지혜의 철학은 종교적 경기에서 유래한 말과 형태로 표현된다. 전쟁의 규칙, 고상한 삶의 관례는 놀이 양식에서 세워졌다. 따라서 문명은 초기 단계에서 놀이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19세기 사상의 커다란 조류는, 어느 측면에서 바라보든, 사회적 삶 속의 놀이 요소를 적대시하고 배제했다.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는 놀이 요소를 적대시하고 배제했다.”
“실험과 분석 과학, 철학, 개혁주의, 교회와 국가, 경제학 등 모든 것이 오로지 진지함만을 추구했다.”
“전문 선수의 정신은 더 이상 순수한 놀이의 정신이 될 수 없었다. 프로에게는 자발성과 무사무욕의 정신이 없었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많은 반상(盤上) 게임이 생겨났다. 어떤 게임들은 원시 사회에서 생겨났는데 그 사행성 특징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획득했다. 행운을 다투는 게임이든 기량을 다투는 게임이든 모두 진지함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즐거운 분위기는 거의 없다. ~~~~행운이 작용할 여지가 없는 게임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진정한 놀이가 되려면 어른이 동심으로 돌아가 놀이하는 그런 게임이 되어야 한다. 브리지에서 이런 동심을 발견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게임에서 놀이 정신의 미덕은 사라진 것이다.”
“놀이의 광의적 정의를 적용하면 어떤 행위가 놀이라는 명칭을 얻기 위해서는 제약과 규칙 이상의 것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게임은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고 우리는 앞에서 말했다. 게임 이외의 다른 현실과는 접촉하지 않으며 그 게임을 놀이하는 동안에만 존속한다. 일상생활의 긴장으로부터 기분 좋게 이완되는 그런 즐거운 느낌이 수반된다. 이런 것들은 과학에 적용되지 않는다. 과학은 유용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현실과 접촉해야 한다. 또 현실에 응용될 수 있어야 한다. 순수 과학으로 인정받으려면 보편타당한 현실의 패턴을 수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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