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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28"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30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개역개정, 마 11:28). 이 말씀을 통해 지금 주님께서는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죄인이든 의인이든 상관치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당신 품에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무거운 짐 때문에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4)라고 탄식할 때, 주님께서는 기꺼이 “내가 너의 품이 되어 주마” 하시며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아무리 여러 번 반복해서 들어도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언제 들어도 은혜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까지도 세상의 온갖 근심과 걱정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과,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도 참 평안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즉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초청에 “아멘”으로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참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인생의 무거운 짐 때문에 번민하고 있을까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이미 주님의 품에서 참 평안을 맛보며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텐데, 왜 우리는 그렇지 못할까요?
주님의 초청은 아편인가?
그 대답 가운데 하나를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까르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를 보면 주님이 재판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고발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대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대에게서 누구 한 사람 진정으로 무거운 짐을 벗고 편히 쉰 사람이 있는가? … 결국 그대는 대중을 기만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대중을 현혹한 것이 아닌가? 이처럼 대중을 기만하고 현혹한 사람을 우리는 휴머니스트로서 용서할 수 없다. 그대처럼 대중을 기만하고 현혹한 사람은 화형에 처하든지, 십자가에 매달아야 할 것이다.
이 고발 내용은 “주님의 품에서 얻는 참 평안”이란 한낱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달콤하고 멋진 말이긴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거짓 환상이요 꿈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했습니다. 거짓 환상으로 사람들을 현혹해서 불의한 현실을 변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몽롱하게 흐려놓는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물론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리스도교가 때때로 아편 역할을 해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불의한 현실변혁에 누구보다도 앞장섰고, 그로 인해 십자가에서 처형됐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마르크스의 주장은 우리가 주님의 품에서 참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
저는 진짜 이유가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씀을 우리가 간과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복음말씀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는 초청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분명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는 당부가 이어집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희가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초청에는 아무런 전제 조건이 붙지 않지만, 초청 받은 자는 마땅히 해야 할 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에게 배우는 일”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멍에’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요 주(主)로 인정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멍에를 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모세의 율법을 배우는 사람은 ‘토라의 멍에를 멘 사람’이라고 했고, 율법에서 명하는 계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계명의 멍에를 멘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멍에를 멘 사람’이란 예수님을 자기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주님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려 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말씀은 이런 각오를 한 사람들, 이런 길을 걷는 사람들이 주님께로부터 안식과 행복을 선사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뿔싸, 속았구나!’ 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누구나 십자가를 지기 두렵습니다. 그것은 너무 힘든 길이기에, 너무 아픈 길이기에, 또 우리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막 8:34)는 주님의 명령보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조건 없는 초청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말이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내용이라니, 결국은 주님이 걸었던 그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는 말이라니, 속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주님의 그 다음 말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30). 정말 주님의 멍에는 세상의 멍에보다 메기 가볍고, 주님의 짐은 우리 인생의 짐보다 가볍습니까?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에게 한 선교사가 “예수님을 알게 되어서 얼마나 좋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가 “좋긴 뭐가 좋아요. 예수를 몰랐으면 내 인생이 좀 편했을 텐데, 그를 알게 되어서 힘들어 죽겠소”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의 대답 역시 우찌무라 간조의 대답과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주님을 (잘)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미 발을 들여놓았으니 물러설 수도 없고….” 이것이 솔직한 우리의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를 보면 이런 투덜거림이 우리의 모습만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히브리들이 신 광야에서 모세에게 대들었던 모습을 보면 우리와 매우 흡사합니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투덜거리며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대듭니다. “이게 뭐냐? 이게 그 잘난 해방이요 자유냐? 목마르고 배고프고 굶어 죽는 게 너희가 약속한 새로운 인생이냐? 우리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는 비록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굶지는 않았다. 고깃국 끓는 가마솥 곁에서 빵을 배불리 먹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딘지도 모르는 이 낯선 들판에서 굶어 죽게 되었다. 말해 보아라. 이게 너희가 약속한 해방이냐?”
지난날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하며 되돌아가려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 출애굽의 대장정은 외부의 적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 때문에 그렇게 힘들었고 또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필요로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우들 가운데 다시 종살이의 멍에를 메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처럼 ‘이미’ 초청에는 응했지만 ‘아직’ 주님의 멍에-하나님 나라의 멍에는 메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멍에를 그리워하는 미완의 자유인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이 내세웠던 613개 조항의 율법준수의 짐을 말합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율법준수를 통해 구원이 온다고 굳게 믿었고, 그것을 생활로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저들의 주장은 언뜻 보기에 훌륭해 보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구원이 온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생활화하자”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들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내 공로에 따라 구원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연이요 엑스트라입니다. 내가 주인공입니다. 내가 주체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초청은 이것을 부정한 것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연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자신이 하나님 역할을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내버려두는 것,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기를 그만 두고 하나님께서 자기 속에서 일하시도록 개방하는 것, 이것이 주님 초청의 핵심입니다. 이제까지 내 삶의 주체는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살아야 할 삶에 대한 의논상대일 따름이요, 주님은 도우심을 주실 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주연이고, 주님은 조연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이 어찌 힘들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내 멍에를 주님이 함께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멍에를 내가 함께 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누가 주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의 생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9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20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갈 2:19-20).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제부터 바울의 삶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호칭하는 것도 그분이 우리 삶의 주인이요, 우리는 그의 분신임을 고백하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시련을 겪을 때마다 그런 내 형편과 처지를 외면하는 주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 삶의 주인이 사실은 나 자신이 아니고 주님임을 깨달을 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련 또한 내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지금 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 바울은 그 누구도 감당 못할 역경을 헤쳐 나가야 했고, 그의 일생은 고난으로 점철되었지만 그의 서신 어느 구석에도 “힘들다”는 말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빌립보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갇혀 있는 자의 기쁨을 구구절절 표현하고 있고, 편지 끝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11b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13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 4:11b-13)
삶의 모든 조건을 뛰어넘어 자유한 사람, 그 조건에 달관한 사람, 그러기에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할 줄 아는 사람-그가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환난 속에서도 감사하고, 옥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인생이기에 주님께서 책임지실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는 그냥 주님의 멍에를 함께 지고 가는 조연에 불과하기에 주님께 모든 걸 맡기고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내게 맡겨진 일만 성실히 한다. 결과는 신경 쓰지 않는다. 성패는 이미 결정 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한 가지 태도를 굳게 지킴으로써 자유롭고 담대해 질 수 있습니다. 자족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삶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시인하는 자의 자유요 행복입니다. 그래서 과연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주님의 짐은 가벼운 것입니다.
나는 진짜 행복합니다!!!
오래 전에 박경철이라는 의사가 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서울과 대전에서 외과전문의로 일하다가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약속대로 40세에 낙향해서 경북 안동에서 한 작은 병원을 운영하고 있던 그의 환자 중에 정말 팔자가 기막히게 기구한 아주머니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풍산의 어느 작은 마을 이장댁이었는데, 어느 날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산에서 귀한 버섯을 따는 바람에 버섯전골 잔치를 열었다가 그 버섯이 독버섯이어서 큰 화를 당했습니다. 큰아들을 잃었고, 남편은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년 뒤에는 작은 아들이 경추골절 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아들 살려보려다가 가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그런데 불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더니 그 해 겨울 끝내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자 한 방에 누워 아버지와 위로를 주고받던 총명하던 작은 아들에게 정신적인 퇴행이 왔습니다. 다른 사람 위해서 사는 사람도 많은데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하는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아무 불평도 없던 신앙심이 깊은 딸은 결국 수녀원행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그 딸마저 일 년 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큰아들과 남편은 죽고, 작은아들은 불구에 정신지체자가 되고, 하나 남은 딸은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갈 희망마저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아무 희망 없는 지옥 같은 나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이웃집 할머니가 두 살배기 손자를 남겨두고 돌아가셨습니다. 아주머니는 상가 마당에서 이러 저리 기어 다니던 그 아이가 눈에 밟혀 도저히 고아원에는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두어다가 정성 들여 키웠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딸아이의 원인 모를 병이 싹 나은 것입니다. 아이와의 만남을 통해 놀라운 치유의 은혜가 일어난 것입니다. 나중에 좋은 사람이 나타나 아이를 입양해 간 후 아주머니 가족은 안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버려진 아이가 또 눈에 띄어 데려다 키우고 입양시키기를 열 차례가 넘게 했습니다. 하지만 세 살 된 장애아는 여덟 살이 되도록 아무도 입양해 가질 않았습니다. 호적이 없어 학교에 보낼 수도 없고, 복지시설에 보내기에는 너무도 가슴 아팠고, 그래서 모녀는 고민하다 어려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직 시집 안 간 딸아이 앞으로 그 장애아를 입적시킨 것입니다. 할머니뻘인 자기 호적에 입적하면 나중에 자기가 주워온 아이임을 알고 마음 상할까봐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원장님요, 사람들이 죽어서 천당엘 갈라꼬 애들을 많이 쓰지예. 하지만 살아서 천당을 만들지 못하면 죽어서 천당은 없답니다. 그저 오늘이, 여기가 천당이거니 하고 살아야 안 되겠능요. … 나는 진짜 행복합니더.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기 감사하고. 내가 그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는 기 또 감사하고, 내 자식 남의 자식칼 거 없이 내 곁에서 돌볼 수 있어 감사하고…. 그래서 노상 웃고 다니지예. 안 웃을라꼬 해도 너무 좋아서 자꾸웃어지지예.”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습니다. 동시에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굳게 믿고 사는 참 신앙인을 만나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정말 이 아주머니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멍에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거운 것이 아니라 편하고 가벼운 것임을 자신의 생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자유, 이런 행복 누려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오늘 여기를 천당으로 살아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네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주님의 초청에 “아멘”으로 응답하십시오. 그리고 내 삶의 새 주인이 주님임을 시인하고, 내 멍에를 내려놓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우십시오. 그러다가 시련이 닥치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임을 깨닫고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십시오. 고난 중에도 삶을 긍정하며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어떤 처지에서든지 자족하십시오. 그러면 오늘 여기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축복 누리시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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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제 강의 중에 약속한 옛 설교문입니다. 동영상도 링크하겠으니 필요하면 보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Pw44fg5Cc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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