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점검’을 통한 ‘기쁨’
-이소연의 『거의 모든 기쁨』을 읽고-
진기환
이소연은 폭력으로 황폐해진 세상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평화를 이야기”(「철2」)하는 세상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주된 정서 삼아왔다. 그러한 정서를 통해 이소연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은 거대한 폭력을 견뎌내는 삶의 의지다. 상처를 추구하며 삶에 가까워지려는 태도를 보인 것인데, 이는 이소연의 첫 번째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가 보인 주된 특징이자 시적성취라 할 수 있다. 이소연의 두 번째 시집 『거의 모든 기쁨』 또한 큰 맥락에서는 이러한 특성과 성취가 이어지는 시집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상처를 통해 삶에 가까워지려한다는 큰 맥락에서 그러할 뿐, 그것을 표현하는 세목들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폭력과 비극의 위치가 다르다는 데 있다.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에서는 폭력과 비극이 시의 표면에 위치한다면, 『거의 모든 기쁨』에서 폭력과 비극은 시의 표면이 아닌 시의 내부, 다시 말해 시를 쓰게 하는 동력에 위치한다.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의 화자들이 폭력과 비극의 순간을 살아가는 화자들이라면, 『거의 모든 기쁨』의 화자들은 폭력과 비극 이후를 살아가는 화자들이다. 두 시집의 분위기와 어조가 다소 다르게 읽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차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의 모든 기쁨』이라는 시집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시집의 세목들을 통해 이소연의 시가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되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우선 눈에 띄는 건 『거의 모든 기쁨』의 화자들이 무언가에 지속적으로 시달리며(「주먹」), 반성하는 등(「페미니즘을 너무나 잘 이해하는 남자라는 괴물」) 자신들의 삶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외부적 환경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자신이 비판하고자 하는 세계의 폭력과 비극에 자기 자신이 연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적 태도에 기인한다.
유리창을 통과하는 노을을 부러워한 적이 많았다
나는 통과가 잘 안 된다
빌딩 문을 통과할 때마다 경보음이 울린다
총기를 소지한 자거나
흉기를 소지한 자거나
한 번도 소지해본 적 없는 세계의 문을 열었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기분
나는 나를 통과할 수도 없고 설명할 방법도 없다
경보음이 울리는 동안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여러 번 생각한다
제목이 「철」이라는 시를 몇 편 썼을 뿐
마음이 피와 살로 뜨거워진다
경비원을 기다리면서는 계속 오줌이 마려웠다
얼마 전엔 친구가 금속탐지기를 샀고
그날 밤엔 운석이 날아와 내 몸에 박힌 꿈을 꿨다
무릎이 삐그덕거린다
웅덩이에 핀 붉은 녹을 보면
철은 물이 된다
-「실핀」, 전문-
인용한 시의 화자는 유리창을 통과하는 노을을 부러워한다. 노을은 공간적 제약 없이 빌딩을 넘어가지만, 자신은 경보음이 울리기 때문에 경비원의 허가 없이는 빌딩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의아한 건 화자는 총기나 흉기같은 물건을 가지고 세상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를 썼을 뿐, 그것을 직접적으로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보음은 울리고, 화자는 그런 상황에서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여러 번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로 화자는 경보음이 울리는 상황과 무관할까? 어쩌면 “운석이 날아와 내 몸에 박힌 꿈을” 꾼 날, 자신도 모르게 “총기”나 “흉기”같은 것들이 자신의 세계 속에 들어왔던 것은 아닐까. 그러한 연유로 화자는 “나를 통과할 수도 없고 설명할 방법도 없”는 사람, 자신이 비판하고자 했던 세상과 자신이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그럴 경우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는 기분”을 들게 한 누군가는 자신이 설정한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러한 다짐은 이소연의 산문과 겹쳐 읽으면 보다 분명해진다. 이소연은 시집에 수록된 산문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성적 표현에 있어서 매우 자유로웠다. 젠더 의식이 매우 희박했으며 차별적 언행을 마주한 경우에도 젠더와 연관 지을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여성으로서 차별받고 있는가의 문제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다만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나’가 부당함을 느끼는가 아닌가의 기준에 의해서만 열심히 저항해온 것이다.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 85쪽-
여러 차별적 언행을 젠더라는 포괄적 개념 안에서 저항하지 못하고 ‘나’라는 개인의 차원에서만 저항해왔던 것, 그것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차별과 폭력을 굳건하게 만드는 인정한 태도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일차적으로는 ‘나’의 문제에서 벗어나 전체의 차원으로 눈을 돌려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의 행동들과 마주하며 그것이 전체의 차원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점검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 때문에 이소연은 과거 혹은 오늘의 자기 자신들과 마주하며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죄를 짓고 싶다”(「해석의 갈등」)고 다짐한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세계의 폭력과 비극을 유지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점점 그 간극을 줄여나가겠다는 것, 그럼으로써 종국에는 그러한 “폐허에서 나오는 방법”(「경계면」)을 익혀 “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싶”(「장작 패는 사람」)은 사람의 마음들에 대해 말하겠다는 것. 그것이 『거의 모든 기쁨』이 표방하는 ‘기쁨’이다.
그러한 ‘기쁨’의 세계에선 무엇보다 삶이 가장 중요하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중요한 건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시간이 존재를 찌르”(「존재와 수산」)는 순간에만 죽는 것이다. 강제된 죽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 “누구도 쉽게 죽지 못”하는 세상에서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그러한 세상이야말로 폭력과 비극으로부터 벗어난 세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숨이 멎지 않는 것들을 너무 많이 봐왔어요
누구도 쉽게 죽지 못합니다
젖은 빨래처럼 세상 밖으로 꺼내진 나도
그냥 덮어둘 수는 없어서 페이지를 넘기며 살아갑니다
가끔 귀여운 것들을 안으며 꾸역꾸역
작고 알록달록한 양말들을 집게로 집으며
버리고 갈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해요
쓰레기통 앞에서 고꾸라지며 들어요
주워, 네 거잖아
그러면 한 번쯤은 뒤집어 말리고 싶은 것들이 생겨요
탁탁 턴 질투의 어깻죽지를 집어 넌다든가
지체되는 밤을 소매부터 뒤집어 본다든가
밤을 널었더니 새벽 첫차를 기다리고 있다든가
-「빨래집게」, 부분-
살아있어야만 시의 화자처럼 “질투의 어깻죽지를 집어” 넣을 수 있고, “밤을 소매부터 뒤집어” 볼 수 있으며,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꿈꿀 수 있다. 이소연의 시는 그러한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반성하며,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 주목한다. 비록 “총구를 마주보”며 “더 이상 우리를 참아주지 않는 세계”가 “이미 건설되고 있”을지언정 “여름 아닌 곳에서 해변이 내밀어주는 햇볕을 믿”(「여름 옷장」)어보는 것, 그럼으로써 “우리의 피를 빠는 것들과 곤란한 사랑에 빠지고 마”(「고사목」)는 것, 그것이 이소연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마치 “사랑을 멈추지 못하는 저주에 걸”(「팽」)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거의 모든 기쁨』의 시들이 폭력과 비극에 함몰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태도 덕분이다. 일상에 만연한 폭력과 비극의 순간을 주시하면서도 그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자세, 그것이 이소연이 추구하고자 하는 윤리적인 그리고 시적인 지향점일 것이다. 그러한 지향점에 도달하기 위해 이소연은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 쓴다. 요컨대 그에게 삶은 사랑을 발견하는 무대이며, 시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인 셈이다.
삶이 사랑을 발견하는 무대인 이상 그에겐 무대 위의 모든 것들이 시가 된다. 시집에 수록된 또 다른 산문 「세상 모든 게 시로 보이는 병」은 그러한 시인의 ‘병’에 대해 쓴 산문인데, 인용한 대목은 ‘자기점검’을 통해 ‘기쁨’에 도달하려는 이소연 시의 특징을 시인 스스로 설명하는 부분처럼 읽힌다.
그가 보라고 한 것은 개가 아니라 시 같다. 서로가 본 것을 이야기할 때면, 심심찮게 하게 되는 말이 있다. “시 같다!” 그 말 때문에 무엇인가 시가 되려고 꿈틀거린다. 서로의 말에서 시를 발견하는 삶이 재밌다.
친구가 그냥 뱉은 말속에서도 시를 만난다. “이거 완전 시다!” 내가 시로 써도 되냐고 묻고 싶지만 관둔다. (중략) 친구가 그걸 시로 쓸지 안 쓸지는 몰라도 내 마음속에서 시 한 편이 비눗방울처럼 떠올랐다 사라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종종 시를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시가 있던 순간들은 소중하다. 시는 목적이 아니다. 시는 시를 쓰는 나를 지속하게 하는 동력일 뿐이다. 이 연속성 위에 내 삶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 모든 게 시로 보이는 병」, 93~94쪽-
우리가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소연에게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다. 그는 우리의 말 속에서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소연에게 중요한 건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시를 씀으로써 일상에 숨어든 여러 사랑들을 계속해서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 위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점검하고 검토하며 ‘기쁨’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읽은 한 편의 시집은 바로 그 과정을 거쳐 태어난 산물이다. 이 산물은, 시가 이소연 삶의 동력이 되었듯 우리로 하여금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약력
202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평론활동을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