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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역사에 새벽을 가져온 사람
성경본문 : 느헤미야 5: 1-19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우리는 느헤미야서 5장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13절까지와 14절부터 19절까지 해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가왔던 밤중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그들이 당했던 시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번째 부분은 느헤미야에게 찾아오기 시작한 새로운 아침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부분은 고난의 밤이며 둘째 부분은 승리와 희망의 새 아침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저녁이 되며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했던 것처럼 2장에서 4장까지는 예루살렘 성벽을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중건하면서 밖으로부터 많은 반대와 압력이 있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벽 건축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5장은 이스라엘 백성들 내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갈등과 시련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3 1절이 되면 일본인을 규탄하기가 바쁩니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우리가 나라를 잃어버리는 설움을 당했는가,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잘못이 없는가 등 민족사적인 조명은 하지 않고 일본을 규탄하기에만 바쁜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가 나라를 바로 지켰더라면 그런 설움을 당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었던 잘못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면서 그러한 잘못은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야 비로소 3 1절에 대한 올바른 민족사적인 반성이 가능하리라고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려움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엇습니까?
예루살렘 성의 건축을 위해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먼저 인구 집중이라는 문제가 야기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인구가 한 곳에 모여 있으므로 자연히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또, 성벽 건축을 하다 보니 그 일에 모든 손이 집중됨으로 인해서 농사를 하는 사람들의 수도 적어지게 되어 식량 증산이 크게 감소되엇습니다. 또, 지금은 전시 태세입니다. 밖으로부터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인접 지역의 부족들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루살렘 성문을 열고 밖에 나가서 농사를 짓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엇습니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찾아옵니다.
또한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인 메대 바사 정부는 그들에게 속한 모든 속국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압력을 견딜 수가 없었던 이스라엘의 민중들은 포도밭과 짐승을 전당잡혀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녀들을 노예로 팔아야 했습니다.
인구 집중, 식량 부족, 과도한 세금 징수등의 문제점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본문 1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때에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하는데 혹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곡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우리의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전당잡히고 이 흉년을 위하여 곡식을 얻자 하고 혹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어 세금을 바쳤도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저희 자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으나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니 속량할 힘이 없도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1-6절).
이런 원망의 소리를 듣던 느헤미야는 크게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단순히 백성들에게 분노한 것이 압닙니다. [그들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를 생각하며 그들이 이 지경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느헤미야는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는 그 사실에 대해 그는 지금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 나라 안이 이렇게 어려운 지경에 빠져서 있는데 이 고난의 시기를 틈타서 오히려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을 노예화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동족과 동족이 서로가 서로를 노예와 종으로 삼는 끔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비극에 대해 그는 분노한 것입니다.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 (9절).
다시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주의 백성의 간증을 파괴한다는 사실 때문에 느헤미야는 분노하지 않고는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의로운 분노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속상해 하는 분노인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범하고 주의 진리를 역행하고 있는 우리 주변의 모든 부도덕과 잘못된 삶의 태도와 모든 어둠의 상황들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마음 속에 의로운 분노가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즉 그들이 부도덕하게 살든 범죄하며 살든 무관심하다는 데 있습니다.
2. 암흑을 헤쳐 나가려면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는 의로운 분노가 일아났습니다. 그러면, 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첫째로, 그는 중심에 계획했습니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중심에 계획하고..." (6,7절).
당신은 분노하면 어데게 합니까? 우리는 분노하면 이 분노라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폭밤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 민족의 커다란 결점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들에 비해 너무 감정적인 것 같습니다.
함석헌 선생님도 그의 저서에서 이 점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민족]이라고 많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감정 속에 빠져 들어가 감정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분노했을 때 그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계획했습니다. 이 '중심'이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자세를 강조한 단어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consulted with myself"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곰곰이 생각하면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계획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분노하자 그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진정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 앞에 다다랐을 때, 뒤에는 애굽까다이 말을 고 달려오고 잇고 앞에는 바다가 가로놓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을 때 그들은 모세에게 불평을 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출 14:11).
그들은 분노를 터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던져 준 멧세지가 무엇입니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너희는 가만히 있을찌니라" (출 14:13,14).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감정이 상해서 폭발할 때 취할 수 있는 놀라운 처방이 하나 잇습니다. 그것은 조용한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젠 더 이상 그렇게 핏대를 올리며 성질부리지 마십시오. 대신, 하나님앞에서 생각을 시작하십시오. 생각하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따라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계획하십시오. 중심에 계획하십시오.
둘째로, 그는 문제의 원인을 파악했습니다.
7절 이하 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중심에 계획하고 귀인과 민자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를 하는도다하고 대회를 열고 저희를 쳐서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속량하였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저희가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
느헤미야는 당시의 지도자들이 부당하게 백성을 착취하게 때문에 이 시련이 더 심각하게 되엇다고 지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어려운 시기를 이용하여 돈을 빌려 주고, 갚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녀들을 노예로 삼는 [형제의식]의 결핍을 지적합니다. 또한 이방인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느냐고 지적하고 잇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자외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또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헤미야는 문제의 원인을 잘 파악하고 있엇습니다. 당신에게 어떤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도 먼저 그 원인을 찾아내십시오.
세째로, 그는 문제의 원인을 치료했습니다.
10절 이하 1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며 문제의 원인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회개란 애통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부흥회에 참석하여 눈물을 많이 흘리고 있다면 우리는 그가 회개하고 잇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회개라는 의미 안에 애통하는 마음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누물이 쏟아집니다. 그러나 '눈물을 얼마만큼 많이 흘렸는가'가 회개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러면 회개란 무엇입니까?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곡식을 백성에게 취하여 주나니 우리가 그 이식 받기를 그치자 그런즉 너희는 오늘이라도 그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취한 바 돈이나 곡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지 일을 돌려 보내라 하였더니" (10,11절).
즉, 회개란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앗으면 그것을 즉시 까가만두고 변상할 수 잇는 일이면 변상하는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눈물흘리며 가슴 치고 통곡하는 것, 그것만이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란 잘못하고 잇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언제 시작해야 합니까? "오늘이라도" 죄를 버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 쉽습니다.
"선생님, 이제 예수 믿고 그런 행동을 차차 고치십시오."
{저도 차차 교회에 나가야지요. 그러면서 이것을 차차 끊어야지요.} 죄는 차차 끊을 수 없습니다. 죄라는 것은 단번에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확 돌아서야 합니다.
어느 부흥회에 참석했을 때 들은 말씀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지옥이란 어떤 곳입니까? 차차 고치자고 하면서 미루다가 결국 그 결심을 실현치 못해 [아차차]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이제, 그 다음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 보내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저희에게 그 말대로 행하리라는 맹세를 시키게 하고" (12절).
백성들은 이제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차츰 고난이 극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옷자락을 떨치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떨치실찌니 저는 곧 이렇게 떨쳐져 빌찌로다 하매 히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대로 행하였느니라" (13절).
우리는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에 자신의 잠못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닥친 어려움은 인구 집중 현상과 식량의 부족, 그리고 과도한 세금 징수의 압력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이용하여 당시의 권력자들이 백성을 괴롭혔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들의 소행에 분노하였으나 곧 마음을 진정하고 마음 중심에 계획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 문제의 원인을 치료했습니다. 그 문제의 치료는 백성이 모두 회개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민족사의 어두움을 물리쳤습니다.
우리니라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우리 가정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내가 왜 이렇게 되엇는가, 누구 때문인가? 이런 질문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잘못이 있으면 깨닫고 그것을 회개하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그런 후,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저녁은 지나가고 새 아침이 밝아 옵니다.
3. 아침이 되니
이제 느헤미야가 맞이하게 된 새로운 아침을 보십시오. 14절을 봅니다.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이십 년부터 삼십이 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제, 느헤미야는 총독에 임명이 되엇습니다. 즉, 형편이 나아졌습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보다 형편이 나아질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가 더 어렵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역사가이며, 철학자였던 토마스 카알라일 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역경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백 명쯤 된다면 성공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이 성공하고 출세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가 더 어렵다는 인간성의 약점을 잘 지적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도 보통사람들과 같았을까요?
느헤미야는 보다 나아진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민족을 잘 영도했습니다. 어떻게 잘 해 나갈 수 있었을까요?
첫째로, 그는 자신의 특권을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14절을 다시 봅니다."내가 유대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이십 년부터 삼십이 년까지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총독이 왕의 녹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않았습니다. 그가 왜 월급을 받지 않았을까요?
17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일백오십인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사면 이방인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하나와 살진 양 여섯을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아니하였을 찌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 (17,18절).
매일, 자기의 식탁에 자기가 대접해야 할 손님이 150명 이상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식객들을 대접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녹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백성의 부역이 너무 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백성들은 그렇게 고생하는데 혼자만 호의호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총독이 왕으로부터 녹을 받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사양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백성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특권 의식보다 종의 의식에 더 크게 지배를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나라의 지배 계층과 비교해 보고 크게 반성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하면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벌까?'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우리 민족 역사를 온통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백성을 먼저 생각했었더라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밝아졌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권위자들은 왕노릇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장관, 국회의원 또는 장군 노릇하려고 애씁니다.
그렇게 자기들의 특권을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생각하지 못하는 세태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그러면 앞으로 우리 세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특권을 주장하기에 앞서서 사람들이 나에게 걸고 있는 기대에 대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특권을 남용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진 권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우리가 번 돈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지키고 유용하게 써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특권을 마음대로 이용하지 마십시오.
둘째로, 그는 전통적인 과오에서 벗어났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솨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예 총독들과 그 종자들은 다같이 백성들에게서 토색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그같이 행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총독이 되는 날 틀림없이 그의 참모들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 각하, 옛날 각하들도 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각하도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지요."
그런데 그는 그러한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우리는 좋은 전통은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범죄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될 때, 그리고 악습이 공공연하게 전해질 때 이를 방관한 채 선조들이 행한 대로 그저 따라 하면 됩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데도 누구나가 다 하니까 하면 되는 겁니까? 우리는 전통의 물결이 아무리 도도하게 흘러내려도 그 전통이 범죄와 실수 투성이라면 그것을 과감하게 잘라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세째로,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15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직위가 올라간다든가 지위가 향상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우리가 높은 감투를 쓰게 되면, 그 감투가 하나님보다 크게 보 하나님을 외면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 감투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자기가 사업에 성공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외면하게 된다면 그것은 삶의 승리도 출세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저주이며, 실패입니다. 가난하더라도 맑은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축복이고 그것이 승리입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엡 6:9).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예부터 하던 "하늘 무서운 줄 알라"는 말은 매우 타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아무리 높아져도 내 삶을 책임지셔야 할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그 분을 경외하는 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형편이 좋아져서 편안할 때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네째로,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도리어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나의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를 하였으며."
이처럼 그는 해야 할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특권을 남용하지 않았으며 전통적인 악습에서 떠나기로 결단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 주신 이레 열중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 역사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백성들의 말을 충실히 듣는 열린 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놀지 않는 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웃의 이야기에,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허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성 역사에 몰두해서 자기의 정열과 사랑과 시간을 바쳤습니다.
당신도 느헤미야를 본받아 당신이 해야 할 일, 하나님이 당신에게 맡기신 그 일을 계속 하십시오.
다섯째로,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19절).
무슨 일이든 희생적으로 하다 보면 좀 손해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일을 고생스럽게 하는가 ? 도대체 그 대가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느헤미야는 사람들에게 대가를 기대하지 않앗습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말합니다. 그는 보상을 하나님께 기대한 것입니다. 수고하며 애쓰면서도 응분의 대가나 보상을 받지 못하고 고생에 허덕이는 종들에게 성경은 이런 말씀을 기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골 3:23,24).
사람들이 나에게 대접하지 않더라도 염려하지 말고 힘써 일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천막에 사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 11:10).
그는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자그마한 천막으로도 만족하면서 사람들을 섬기고 더욱 가치있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그가 있던 곳에 평안히 머물러 있엇다면 장차 왕이 될 수 있엇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더 좋아하고...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니라" (히 11:24-26).
그럭저럭 만족한 돼지처럼 살기보다는 가치있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을 찾으며 어떠한 고난이라도 기꺼워하는 하나님의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전 생애를 더 높은 가치, 더 귀한 생명, 더욱 아름답고, 더욱 영광 스러운 일을 위하여 전력투구하며 하나님이 알아 주실 것만 기대하고 소처럼 묵묵히 걸어가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보십시오.
우리 나라에도 이런 지도자들이 나오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살지 못하는 지도자들을 위하여 가슴 아파하며 사랑의 충고를 하십시오. 그러나 그들을 향해서 '손가락질하며 충고를 하기 전에 먼저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자문해 보십시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살 때, 그리고 그런 삶을 기대할 때, 우리의 역사는 그리고 이 세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바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는 사람의 예를 한 가지 더 들겠습니다.
오늘의 제가 있도록 저를 후원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미국 오하이오 주에 살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은 한 때 국제 기독 실업인 협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대부분의 우리 교우들과 같은 중류층이 살고 있는 집보다도 더 못한 집에서 지금도 살고 계십니다. 얼마 전에 그 분의 아드님이 큰 집을 지었다고 그 아들을 몹시 꾸중하시면서 불쾌해 하고 있는 모습을 제가 보았습니다. 그러한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쓰면 더욱 보람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 분은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재물을 가지고 세계 선교와 구제와 교회를 섬기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저 조촐하고 검소하게 살아 왔습니다. 그런 삶을 살면서 그는 아내와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며 주의 말씀을 따라 평화스럽게 살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녁의 어둠이 지나가고 아침이 되면 저녁의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외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앞에 넓은 길이 펼쳐져 있어도 자신의 특권을 남용하지 않고 절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공연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악습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며 자기가 노력하고 절제한 대가를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기대햇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잘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또한 앞서간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인간에게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열심히 생할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책임져 주시고 밝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출처 한서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