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1-6
주님의 성채
얼마 전에 지진이 우리를 놀라게 했지요.
터어키, 그리이스, 대만, 멕시코 등 세계 동서남북 여기저기서 재난의 소식이 끊이지를 않는데 여기 지진대 위를 사는 우리에게는 참 실감있게 들리는 뉴스입니다.
특히 터키라는 곳은 성경에는 소아시아라고 소개된 초대교회의 흥왕지였는데 그래서 이 곳의 지진을 보면서는 밀레니움 세기를 앞두고 어떤 징조와 연결지어 관심들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 우리들이 경험했습니다마는 저 나성에서 지진이 났을 때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배를 타고 여행하다가 심한 멀미를 할지라도 조금만 참으면 흔들리지 않는 육지에 도착한다는 기대가, 육지에 도착하면 이 고통은 사라질 것이라고 하는 소망이 확실하기에 참아낼수 있습니다.
지붕위에서 페인트칠을 하거나 비스듬히 사다리에 서서 높은 곳에서 현기증 나게 일할지라도 조금만 참으면 흔들리지 않는 땅에 밟아 설수 있기에 어려워도 인내하게 되고 든든한 땅, 나를 안정시켜줄 땅을 바라보면서 안도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틸리히가 일찌기 "흔들리는 터전"을 말했지요. 이 세상은 영원한 터전이 못된다고요. 오직 하나님께만 참 안전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터전으로 하여 잘짓고 잘지어야 됩니다.
그런데 지진이 일어나니까요.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터전 자체가 흔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더 두려운 겁니다.
문자 그대로 요동천지라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린다는 말 그대로 였습니다.
어항의 물이 쏟아지고 TV가 굴러 떨어지고 아 지구 전체가 흔들리니까 불과 몇초의 시간이었지만 참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사람은 저보다 훨씬 담대하더라고요.
새벽에 지진이 마구 흔들어대는데 집이 사각으로 선것 같은 느낌이었죠.
땅이 두쪽으로 쫙 갈라졌나 싶은 느낌. 뭐 심하게 요동치는 비행기도 타보고 널뛰는 배도 타 봤지만 이렇게까지 크게 흔들어버리진 않았지요.
근데 부분이 아니고 지구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 어디 기댈 곳이 없으니 그래서 지진이 무섭다는 것 아닙니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저는 침대 밑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가 있더라고요. 본능이 무섭더군요. 근데 우리 집 사람을 보니까 어느새 아이들을 자기 몸으로 감싸 안고 있습디다.
그 일 이후 우리 부부 사이의 힘의 균형이 갑자기 여자 쪽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이나 집사람이 지진 이후 조금 가장인 아빠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을 느꼈습니다. 위기 때의 관리능력이 중요한 것인데..
이것이 지진이 일어난 다음 우리 집의 지각변동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이 세상은 피난처가 못된다고 하는 것을 지진을 통해서 배웠지 않아요?
오늘 여호수아서 20장에 보면 도피성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죽이게 되는 경우. 과실치사, 그런데 이렇게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 할지라도 사람이 죽게된 가족들은 어떻습니까? 원통하지요.그래서 복수할려고 합니다.그러니까 그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얼떨결에 어찌 하다가 사람을 죽인 그런 사람을 보호하는 처소가 도피성입니다.
이스라엘 전국에 여섯 군데 요단강 이쪽에 3곳. 저쪽에 3곳. 여섯군데 도피성을 마련해 두었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우발적으로 과오로 사람을 죽이게 되었을때는 이 주님의 성채에만 발을 딱 들여놓으면 안전합니다. 누가 손 못댑니다. 정당한 재판을 거치게 되어 있고 대제사장이 죽기 전까지 도피성에서 보호받고 있다가 대제사장이 죽고나면 어떤, 누구를 죽였던지 해방됩니다.
왜냐? 내가 죽어야 될 그 피 대신에 영적으로요. 누가 죽었다고 해석을 했느냐 하면은 대제사장이 벌써 죽었으니 벌써 허물에서 다 해방이 됩니다. 이게 도피성에 대한 영적인 교훈입니다.
군대에서 가장 군기가 센 데가 어디냐면 총쏘는 훈련을 하는 곳입니다. 이 사격장은 사람을 살상하는 훈련을 하는 곳이니까 오발해서 엉뚱하게 사람이 다치는 수도 있고 자칫 목숨을 잃는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격장 규율은 엄격합니다.
바로 이 사격장에서 어느 병사가 억울하게 죽은 일이 있습니다.
사격장에는 사격 표적지 근처에 개인 호가 있어서 사격할 때 이 개인호에 들어가 있다가 사격이 끝나면 나와서 표적에 명중했는지 빗나갔는지를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을 감적수라고 합니다. 사격하는 데, 사선이라 그러지요.
사선과 표적지와의 거리가 200미터 이상되니까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감적수는 이 표적지를 식별하고 통제부에다 알려주는 일을 합니다.
사격을 마치고 이제 감적수가 확인할 때가 되었는데 한 병사가 나타나질 않는 거예요. 찾아보니까 낙엽더미 뒤에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나중 확인된 사실은 이 감적수가 사격하고 있는 동안에는 개인호에 들어가서 몸을 숨겨야 됩니다. 피신하고 있다가 사격이 끝나면 나와서 표적판을 확인해야 하는데 이 친구는 사격할 때 개인호로 피신하지를 않고 바위 같은게 옆에 있으니까 그 뒤에 숨었습니다. 요령을 핀겁니다.
개인호는 좀 멀리 있고 또 거기 들어가면 덥고 힘듭니다. 그래서 시원한 그늘이 진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그 장애물이 정말 바위 같아요. 그런데 그건 낙엽더미였습니다.
낙엽들이 많이 쌓여서 바위 돌같이 단단해진 것인데 그걸 바위인줄 알고 그 뒤로 피신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 친구는 동료들이 쏜 총탄에 고만 벌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 친구가 왜 죽었습니까?
그 이유는 정말 숨어야 할 데를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분별력이 없어서 죽음을 자초하고 만 것이지요. 사격장에서는 바위라 할지라도 거기에 몸을 피신해서는 안되게 되어있습니다. 반드시 개인호에 들어가야만 됩니다. 그런데 바위도 아니고 낙엽더미에다 몸을 맡기고 결국은 아까운 청춘을 보내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 게 그렇습니다. 나를 숨겨줄 곳이 여기다 저기다 생각되서 거기에 나를 맡겨 보지만 그것들이, 그 사람들이 나를 보호해 주지 못하고 나를 막아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진정한 피난처가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보장. 신분보장 해 주고 복수할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로 부터 그사람을 지켜주는 하나님의 보호장소. 이것이 주님의 성채입니다. 이 도피성의 교훈이 오늘 우리들에게 무슨 교훈을 줍니까?
하나님께서 이 도피성 제도를 제정해 주신 것은 피의 보복보다도 생명의 보전을 중시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즘 우리 주변에서는 너무도 끔찍한 금수보다 못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지를 않습니까? .
단지 몇푼의 용돈을 구하기 위해 살아있는 어린생명을 생매장하는가 하면, 어제도 우리 교포가 저 LA 쪽에서 피살당한 신문기사가 우리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돈을 뺏았으면 죽이지는 말았으면 좋을텐데 돈뺏기고 요즘은 돈주고 뺨맞는다는 식으로 그냥 방아쇠까지 당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을 살상하는게 죄인지 뭔지 생각도 안하게끔 되어 버렸습니다. 생명경시 현상이 극에 달한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는 거예요. 돈 때문에 어린이, 부녀자등을 납치당하고 인신매매까지 서슴치 않고 있는 시대입니다
여호수아 20장(350) 6절 "그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나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하다가 그후에 그 살인자가 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성읍에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사람을 죽였던 허물이 언제 없던 걸로 된다는 겁니까? 대 제사장이 죽고 나면 완전히 없던 걸로 되는 겁니다.
그게 뭘 말해줍니까?
히브리서가 말합니다.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교회는 이 시대에 이 땅에 도피성이 되야 됩니다.
누구든지 상처받은 사람. 막막한 일 당한 사람. 그러면 그런 사람을 구약시대에는 도피성으로 가서 보호받았는데 지금은 구약시대 아니고 이스라엘 땅도 아니고 어디가서 보호받고 영혼의 감격과 자유함을 누려야 될것이냐?
"야 오렌지카운티 제일교회로 가자" 교회가 도피성이다. 교회에 가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보호를 받고 거기서 자유함을 얻고 감격스럽게 살아가자. 이렇게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그것이 교회예요.
교회는 어느 시대에나 백성들 속에서 도피성이 되어서 재난당한 사람. 억울한 일 당한 사람. 앞길이 막막한 사람. 그런 사람이 와 가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게 바로 주님의 성채요 도피성으로 사람들이 찾아가듯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이 교회와서 "아버지" 하나님 찾고 눈물 펑펑 쏟으면서 위로를 얻는 그런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교회냐 이 말입니다.
여러분. 이 사회에 얼마나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습니까?
특별히 이민생활에, 얼마나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서 위로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는 주님의 성채 외에는 없다는 거예요.
"샬롬"이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사를 합니다. 여호와께서만 진정한 평화를 주신다는 것인데 이것은 참 평안을 말합니다. 이 평안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채에만 참 평안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평강이 있을지라" 평강이 있기를 바래서 유대인들이 인사를 하였지만 평화보다는 전쟁이 더 많았습니다.
신약으로 오며는 좀 바뀝니다. 평강 하나만이 아니고 평강 앞에 은혜라는말이 붙어서 나옵니다. 그렇지요, 은혜가 있어야 평강이 오는 것입니다.
은혜없이 예수 없이 평강을 찾는게 무의미한 거예요.
주안에서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성채안에서 누리는 평화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우리는 평안과 편안을 우리는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편안한 것이 진짜 평안인줄 알아요.
편안과 평안의 차이가 무언지 아십니까? 편안은 펴에 니은이 붙어있고 평안은 앞글자에 펴에 이응이 붙어있어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현대인들은요 참 편한 것을 좋아해요. 편안한게 복인줄 알고 이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편안한 것을 추구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편안한 것은 물질이 많을 때 이루어 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편안이 아니라 평안하라고 하십니다. 평안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속아서 편한 것이 곧 평안인줄 알고 삽니다. 물질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편안이지요. 침대가 있으면 푹신푹신한 잠자리가 우리를 편하게 하고 자동차가 있으면 우리를 편안하게 라이드해 줍니다. 힘들게 걷지 않고 딱딱한 바닥에서 안자고 편안하게 지낼수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이 편안한 상태가 곧 평안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이 주는 것은 편안이예요. 그러나 이 물질이 평안은 못주는 거예요. 참으로 영적인 것이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물질을 추구하고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는 물질을 최고의 복으로 알고 우리가 살지만 그러나 물질은 편안은 줄 수있을지 몰라도 평안을 주지는 못합니다. 사격장에서 개인호까지는 좀 멀고 또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한 것만
추구하느라고 낙엽더미 위에다 몸을 맡기는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오늘 현대문명이 얼마나 우리를 편안하게 합니까? 그러나 이전에 불편하게 살던 때 보다, 없이 살던 때보다 여러분의 삶이 더 평안을 누리며 산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편안해졌다는 것이 평안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성으로 들어오면 평안을 누릴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정말 다른 것보다도, 평안이 넘치는 교회, 상처 받은 사람. 막다른 골목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와서 주님의 성, 교회에 가서 은혜받자. 평안을 힘입자.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