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항모전단 한국 바다 방문 특별기고 - HMS트라이엄프의 한국전 참전기
작성자: 울프독
작성일: 2021-08-31 11:54:54
-영 항모 퀸 엘리자베스의 한국 해역 방문 특별 기고-
영항모 트라이엄프의 한국전 참전기.
6·25 전쟁중 영국군은 상당한 육해공의
병력을 파견해서 중요한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싸웠다.
1951년 봄, 임진강 전선에서 중공군 춘계 공세에 큰 피해를 입었던
얼스터 대대와 그로스터 대대의 용맹한 일화를 육군이 남겼고, 압록강 상공에서
호주 공군 소속으로서 성능이 한참 떨어지는 영국제 미티어 쌍발 전투기가
공산군 미그 15기와 힘겹게 벌인 공중전기도 한국 항공 전사에기록했었다.
영국 해군 역시 남침을 저지하기 위한 유엔군으로 김일성 남침 불과
며칠 후부터 적극적으로 참전했다.
남침 일주일 후인 1950년 7월 2일 미국 해군 순양함과 같이 동해안에서
남파 병력 호송대를 호위하던 북한 어뢰정 세 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었다.
6·25전쟁중 영국 해군은 황해를, 미군은 동해를 맡아서 3년간 작전했었다.영국 해군은
6·25전쟁 참전중에 여러 전투 기록을 남겼는데 그중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특이한 활동으로서 최초로 파견된 영 항공모함 트라이엄프의 활약을 소개한다.
트라이엄프는 2차 세계 대전 바로 후인 1946년 5월 6일 취역했다.
총톤수 17,000 톤인 경항모였다.
[영 항모 트라이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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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서 활약했던 미국의 에섹스급 항모들이 27,000톤의 대형이어서
80기의 전투기나 공격기를 탑재하는데 트라이엄프는 작전시에 단지 24기만
탑재했었다.트라이엄프의 함재기들은 이미 구식이 되어가는 프로펠러 전투기
씨화이어와역시 프로펠러 전투기인 화이어플라이 기들이었다.씨화이어 기는
유명한 스피트화이어기의 해군형이다.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고 착륙 장치가 강화된 것이다.
[씨화이어]
이 전투기는 빠르고 운동성도 좋지만 그 모양[실루엣]이 북한 공군의
야크 9와 비슷해서 전투 비행중 자주 오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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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1950년 6월 트라이엄프는 영국 해군
극동 함대에 이동 배치되었다.사령관은 죠지 앤드류스 소장이었다.
배속된 극동 해역으로 항해하던 중 홍콩 근해에서 트라이엄프와
다른 호위함들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받았다.
트라이엄프와 호위하던 구축함 코삭과 함께 최고의 경계태세를 유지하며
항해를 계속하여 일본 구레[吳]항에 기착했다.구레 항은 호주군 해군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작전해역으로 투입 전 트라이엄프는 호위하고 있던 구축함 코삭과 함께 이 군항에서
재급유와 재보급을 실시하였다,
이곳에서 비행하기 힘들만큼 상태가 안 좋은 네 기의 씨화이어와 두 기의
화이어플라이기를 내려놓았다. 작전을 위한 격납고내 여유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트라이엄프는 다시 한국 해역으로 출발하면서 다른 영국과 호주함들과 기동 함대를 구성했다.
[영 함재 공격기 화이어플라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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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함대를 구성했던 영국함들은 순양함 저메이카, 구축함 HMS 콘소트였다.두 함들은
6·25전쟁중에 활발한 활동과 전과를 거두게 된다.이 영국함들에 호주 프리게이트 함,
HMAS 숄하벤과 영국 급유함 웨이브 콘퀘러가 가세해서 6·25전쟁 참전 영연방 함대를 이루었다.
트라이엄프 함대는 출항하자 오키나와로 남하하여 급유를 받은 다음
미 7함대의 미 항모 부대와 함께 연합 함대를 구성 출동하였다.황해 작전 해역에 도착한
트라이엄프의 함재기[827 해군 항공대]들은
미 함대와 합동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3일 첫 출격이 있었다.미 해군 항모 밸리 포지[에섹스급 항모]와 협동 작전이었다.
트라이엄프의 12기의 씨화이어와 9기의 화이어플라이기들이 출격하였다.
[미 항모 밸리 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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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함재기들은 황해도 해주 비행장을 들이쳤다.유감스럽게도 적기는 한 대도 없었다.
공격대는 비행장 빌딩과 격납고를 파괴하고 귀함했다.
다음 날에도 트라이엄프의 공격대가 출격했다.
이 날에는 괄목할 전과가 있었다.연안과 해주 사이의 철교를 부수어 철로를 끊고 북한군 병영과
고사포 진지를 기총소사했다. 트라이엄프는 대지 공격이 없으면 주로 대잠 정찰과
대공 초계 업무를 맡았다.
평양 폭격이 있은 지 2 주 뒤인 7월 19일, 트라이엄프가 탑재한 구난기인
씨 오터 복엽기가 조종사 케인 중령이 조종하고 황해에서 한반도를 가로질러
동해 원산 앞 바다까지 장거리를 날아가 격추된 미군 콜세어 기의 조종사를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를 무릅쓰고 가까스로 구출해내는 위험한 구조 임무를
완료했다. 이 구난 업무는 구식 씨 오터 기들의 마지막 전투 출동 임무였다.
[항모 탑재 구난비행정 씨 오터. 1943년 취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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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8일 거의 비극으로 끝 날 뻔한 재난이 발생했다.씨 화이어 일개 편대가
함대 북동방 공역에서 함대의 레이다가 잡은 미확인 비행체들을 확인차 출격하였다.
씨화이어들은 그 미 확인 비행체들이 함대에 내습하는 적기가 아니라
미 공군의 B-29임을 발견하고 안심하였다.
마음 놓고 접근했던 씨 화이어 3번기는 300야드 거리에서
B29 한 기로부터 느닷없는 불 줄기의 세례를 받았다.
앞에서 말한 듯 멀리서 보는 씨화이어의 실루엣[외형]이
북한 야크기와 비슷했기 때문에 어느 B 29기의 기총수들이 오해하고
기관총들을 쐈기 때문이다.
[씨화이어들과 비슷하게 보이는 야크 9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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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화이어들이 일제히 회피 기동을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한 기의 연료 탱크에 기총탄이 명중했다.
기체에 불이 붙으면서 추락하기 시작했다.조종사 화이트는 크게 화상을 입었으나
기체를 뒤집고 자유 낙하하는 방법으로 낙하산으로 비상 탈출했다.
파도가 너무 거칠고 높아 항모에 탑재한 씨 오터 기로도 바다에
표류하는 그를 구할 수가 없었다.화이트 조종사는 속절없이 한 시간동안이나
파도에 떠밀려 다니다가 연락을 받고 현장에 달려온 미국 구축함 에버솔에 구출되었다.
이 사건 뒤 영국 전투기들은 동체와 날개에 검고 흰줄을 쳐서
야크기가 아님을 알렸다.
[식별 표식을 한 씨화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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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엄프는 계속 현장에서 대공 및 대잠 활동을 수행하고 다시
일본의 구레 항으로 돌아왔다.8일간 머무르며 재정비와 보급을 마친 트라이엄프는
7월 9일 영 순양함 케니아와 구축함 코머스, 그리고 두 척의 카나다 HMCS 아타바스칸 과
수우등의 전투함과 같이 출항했다.
이번에 주어진 주요 임무는 적 항구에 대한 집중적인 사진 정찰이었다.
함대는 적에게 점령당한 남한의 목포나 군산, 그리고 인천을 정찰했고
북쪽의 진남포까지 항공 촬영하였다.비행대장 맥라크란드 중령은 순양함 저메이카가
군산시에 위치한 대형 공장을 포격하는 것을 유도했다.
8월 14일 진남포 인근 대동강 하구에 큰 대형 선박 세 척이
정박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케인 중령 지휘 아래 오후에 6기의 씨 화이어기들과 6기의
화이어플라이기들이 로케트 탄으로 무장하고 출격하였다.
편대는 대공포화가 격심했지만 로케트 공격으로 이 선박들을 대파시켰다]
.나중에 격파된 한 척은 북한 해군 소해정이었고 한 척은 2,000톤 크기의 화물선,
한 척은 800톤의 연안선으로 밝혀졌다.며칠 간의 작전에서 기동 함대는
교묘하게 위장한 북한의 150톤 되는 무장선 한 척을 열 여섯 발의 로케트로 격침시켰다.
정찰 업무가 끝나고 트라이엄프는 계속 서해를 초계하며 작전을 이어 나갔다.8월 19일에는
영국 구축함 콘소트와 트라이엄프의 화이어플라이가 협동하여
군산에 있는 공장을 포격했다.
8월 23일 고장 사고 격추등의 이유로 작전 가능했던 24기의 함재기가
단지 9기만 남자 트라이엄프는 일본의 사세보 항으로 돌아왔다.트라이엄프는
일본 사세보로 돌아와 싱가폴에서 함재기들을 수송해온
항모 개조 공작선 유니콘으로부터 14기의 함재기를 인수받았다.
트라이엄프가 사세보에 기항해있는 사이 황해에서 초계 항해를 하던
구축함 HMS 코뮤스는 군산 서쪽 85마일 해역에서 북한 공군 IL-10 두 기의
공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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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기는 IL-10기의 기지 김포 비행장에서 출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피격 위치는
어청도에서도 중국 쪽으로 한참을 더 가야하는 곳인데
제공권도 없는 북한기들이 이렇게 먼 곳까지 출격을 나왔던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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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의 우현이 파괴되고 수병 한 명이 전사했고 한 명이 부상했다.함은 동료함 콘소트의
호위 아래 사세보로 돌아왔다.
[소련제 IL 10 공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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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6일 다시 출항한 트라이엄프는 한국의 서해안으로 출발하였다.북한 서해안에
정찰비행을 나간 두기의 화이어플라이기 들은 해변에서 숲으로 우거진 세개의 이상한 섬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잘 살펴보니 나무와 풀로 뒤덮어 위장한 세 척의 북한 위장선이었다.
세 척은 위장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이어플라이기에 즉각 파괴되었다.
이번 출동에서 적의 100톤짜리 어선을 비롯한 여러 척의 북한 배들을 파괴하였다. 트라이엄프는
통상의 초계업무를 했고 함대의 순양함 저메이카와 구축함 채리티의 연안 함포사격을 위한
사전 정찰과 탄착점 유도를 하는 지원 업무를 했다.
8월 29일 트라이엄프 함상에 큰 사고가 발생했다.함재기 화이어플라이 기가 꼬리에 달린
정지 후크없이 착륙하다가 항모 갑판을 미끄러져 안전벽에 부딪힌 사고가 발생했다.
나무 프로펠러가 떨어져 나가 함교로 날아가 작전실의 유리를 부수고
안으로 뛰어들어 맥라크란 중령을 후려쳤다.
맥라크란 중령은 800 해군 비행대의 대장이었다.
맥라크란 중령은 이 불운한 사고에서 얻은 부상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남한 해역에서 의식을 갖춘 장례식으로 수장되었다.
그는 6.25전쟁중에 사망한 유일한 영국 해군 조종사였다.
[영국 해군의 함상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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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일 출동한 트라이엄프 함대는 군산 비행장과 군산역을 포격한
저메이카를 위한 탄착점 유도를 했다.
9월6일 트라이엄프는 캐나다 구축함 아타바스칸, 아라뭉가, 그리고 바타안과
같이 황해를 떠나서 동해안으로 이동했다.
그 곳에서 작전하던 미 7함대 항모 부대의 작전임무를 인계 받았다.
7함대는 일시 휴식과 보급 그리고 정비를 위하여 일본의 모항으로
귀항해야만 했다.트라이엄프 함대의 동해안 작전은 9월 8일부터 시작했다.
첫 주요 목표는 철도였다.원산 남방으로 뻗은 철도를 따라 내려가던 6기의 씨 화이어와
6기의 화이어플라이는 한 작은 역에서 열차를 발견하고 공격해서 화차들을
모두 벌집이 되게 파괴하고 기관차는 완전히 운행불능인 고철이 되게
부수어 놓았다.
이어서 동해안 철도를 따라 계속 수색하여 고원 역에서 80량의 화차를,
영흥 역에서 40량의 화차들을 발견해서 모두 파괴해버렸다.
[유엔기의 공습을 받는 북한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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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 불순한 일기 때문에 트라이엄프는 단지 여덟 기의 출격 임무만을
수행했지만 4기의 화이어플라이들은 동해안 한 도시의 비행장을 파괴하였다.
동해 출동에서 트라이엄프의 함재기 화이어플라이와 씨화이어등은
연일 북한 땅의 목표들을 공습해서 북한의 전쟁 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했다.
역시 고장과 추락등으로 함재기가 단지 6기로 줄어든 트라이엄프는9월 10일 사세보로 돌아왔다.
9월 12일에 보급 및 재정비를 마친 트라이엄프는 호위하는 와라뭉가,채리티와
콕케이드, 콩코드등과 함께 기동 부대를 만들어 사세보를 출항했다.
목적지는 한국의 인천이었다.바야흐로 역사적 인천 상륙작전이 임박했던 것이다.
[폭격받는 인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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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대 승조원들에게는 행선지는 물론 비밀로 했다.
트라이엄프 기동부대의 임무는 상륙 작전 사전에 항공지원을
해주는 것이었다.
상륙작전 직전 함대는 화력지원과 정찰 업무를 개시했다.트라이엄프의
함포 사격 지원은 큰 성공을 가져왔다.
순양함 저메이카와 케니아의 함포는 화이어플라이가 지시한 고지의
북한군 목표를 포격해서 대폭발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 곳에 적 탄약고가 있었던 것이다.
산꼭대기가 날아가 버리고 엄청난 연기가 2,500미터 이상 솟구쳤다.
그날 저녁 영함대 사령관 앤드류 소장은 맥아더 원수로부터 치하 전문을 받았다.
인천 상륙 작전의 첫날 13,000명의 병력과 장비가 상륙했다.
다음 날 17일 새벽 북한 IL 10기 두 기가 인천 앞 바다의 상륙 함대를 공습했다.
두 기는 미 순양함 로체스터를 폭격하고 그중 한 기는 겁 없이 더 먼 바다에 있던
영국 순양함 저메이카에게 기총소사를 했다.수병 한 명이 전사하고
두 명이 부상했지만 IL-10기는 저메이카의 대공 사격에 격추되었다.
[영순양함 저메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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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엄프는 인천 상륙작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9월 21일
일본 사세보 항으로 귀항했다.이 번이 트라이엄프의 마지막 작전 항해였던 것이다.
함재기들의 손실도 많았고 함의 이곳 저곳도 손을 보아야 할 함들이 많아
한국 파견 임무를 종결해야했다.트라이엄프는 이틀간 사세보 드라이 독크에 들어가
작전 중 입은 파손 부위를 긴급 수선했다
9월 25일 트라이엄프는 일주일 뒤에 극동 해역에 도착할 다른 항모
테세우스에게 작전 임무를 인계하고 홍콩으로 떠났다.
[영 항모 테세우스 - 트라이엄프와 같은 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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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엄프는 그 후 영국 해군에 장기간 더 봉사했다.
50년대 말에는 함정 수리를 전담하는 공작함으로 변신해서 재 취역을 했다.
퇴역한 트라이엄프는 1981년 스페인 고철 업자에게 팔려 해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