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靑松) 심씨는 600년에 걸쳐 반남(潘南) 박씨와 혼인을 하지 않습니다. 세종대왕(1397~1450 )의 장인 심온(沈溫 1375~1418)이 역모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국문·사사(賜死)당하는 과정에서 반남 박씨 박은(朴訔)이 무고·참소에 앞장섰다는 악연 때문입니다. 상왕이 된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뒤 왕의 외척과 공신 등 척신세력의 발호를 척결(剔抉 살을 도려내고 뼈를 발라냄 / 모순·결함 등을 찾아내어 깨끗이 없앰)하려 한 왕권 강화책의 부산물입니다.
심온은 고려 말 벼슬길에 올라 조선 개국에도 간여해 대사헌과 형조·호조·이조·공조판서를 역임한 행운아였습니다. 태종과 사돈까지 맺고 사위 충녕대군이 1418년 왕위(세종)에 오르자 국구(國舅 왕의 장인) 신분으로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그해 가을 심온은 명나라에 사은사로 지명돼 뭇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떠났습니다. 최고의 관직과 권력의 정점에 선 그가 출국하는 날 ‘전송 나온 사람들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고 한 과장 표현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심온의 영예와 권세는 그날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는 사은특사 임무를 마치고 귀국길에 국경을 넘자마자 긴급 체포 투옥되었습니다. 압슬형(壓膝刑 죄인을 심문하기 위해 묶어 놓고 무릎 위를 압슬기로 누르거나 무거운 돌을 얹어 놓는 형벌) 등 고문을 당한 끝에 사약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명나라에 간 사이 동생 심정이 “군사에 관한 일을 상왕이 독단적으로 처리한다”고 불평한 것이 빌미가 되어 심온이 역모(逆謀)의 수괴로 지목된 것입니다. 동생은 참수, 아내는 관비가 되고 재산은 적몰당했습니다. 부덕(婦德)이 돈독했던 딸 소헌왕후는 폐비를 면했습니다.
당시 호조판서인 박은은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심온이 나라를 비우자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태종에게 그를 참소하고, 귀국 후 대질신문 없이 모반죄로 처벌할 것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심온의 가솔을 잡아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는 일에도 앞장섰다고 합니다. 이를 알게 된 심온은 죽기 전 “나의 자손들은 대대로 (반남) 박씨와 혼인을 하지 말라”(吾子孫 世世 勿與朴氏相婚也)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동성동본 결혼까지 허용된 오늘날에도 600년 전 그의 원한은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섬뜩한 권력암투의 앙금입니다.
요즘 ‘반역’이라는 말이 자주 매체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제일 관심을 끈 것은 미국의 소리입니다. 언론인 마이클 울프가 트럼프 백악관 인사들과 200여 차례의 인터뷰를 토대로 연초 출간한 책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는 “트럼프의 아들 돈 주니어와 러시아 변호사가 2016년 대선 기간에 만난 것은 반역적 행위”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를 두고 트럼프는 “배넌은 미치광이”라며 불같이 화를 내고 분노했다고 합니다. 그 사이 저자 울프는 인세 80억 원의 돈방석에 앉았습니다.
매년 교황청 최고 행정조직인 쿠리아를 질타해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다시 쿠리아를 비판했습니다. 교황은 지난달 21일 추기경·주교 등 고위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쿠리아 내의 파벌주의 폐해와 야심·허영심으로 타락하는 일부 관료들의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개혁 방해로 해임된 사람들은 희생양 행세 대신 반역자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쿠리아는 교황청의 비효율과 시대에 뒤떨어진 관료조직 개혁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구속하는 가장 강력한 멍에가 반역죄입니다. 형벌조차 가혹하고 잔인합니다. 반역(反逆·叛逆 ; 나라와 겨레를 배반함 / 통치자에게서 권력을 빼앗으려고 함) 반란(叛亂·反亂 ; 정부나 지배자에 대항하여 내란을 일으킴) 역모(逆謀 ; 반역을 꾀함) 모반(謀反 ; 국가나 조정 또는 군주를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킴 / 謀叛 ;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를 좇기를 꾀함) 등의 죄입니다. 반역자는 참수·화형·폐족(廢族 ;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됨) 아니면 3대(아버지·아들·손자)9족(고조에서 현손까지 친족의 범위)이 멸살을 당했습니다.
역(逆)은 ‘거스르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누구를? 나라와 겨레를 배반하거나, 군주나 통치자의 뜻과 체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따르면 흥하고 거역하면 망한다(順天者興 逆天者亡)거나 왕권신수설을 최고 준거로 내세우던 시절의 논리입니다. 거스르는 것이 이로운 경우도 많습니다. 빗물을 가둬 두었다가 필요할 때 쓰는 댐, 파도로부터 선박을 보호하는 방파제, 바람을 막아 풍해를 줄이는 방풍림, 낙뢰를 헛발질하게 하는 피뢰침 등입니다. 종교·민족·이념 갈등이 아닌 과학적 통찰과 연구의 과실들입니다.
이 나라엔 지금 '보복'과 ‘분노’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17일 검찰의 칼끝이 목전에 닥치자 (격앙된 어조로)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검찰 수사에 많은 국민이 보수 궤멸을 겨냥한 정치 공작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 보복으로 보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바로 다음날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분노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면서 “사법 질서에 대한 부정이고 정치 금도(襟度)를 벗어나는 일”이라고 반격했습니다. 전·현직 대통령이 정면충돌하는 모습은 또 다른 전운으로 비칩니다.
이러다가 박근혜의 본관인 고령(高靈) 박씨와 남평(南平) 문씨, 광주(光州) 노씨와 경주(慶州) 이씨 문중 간에 또 몇 백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한을 만들어 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암울한 심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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