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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유배지 거제도 19세기 정배(定配)죄인 형사잡범 10명의 장계(狀啓)>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는 최근에 발굴된 19세기 거제도 유배자, ‘형사잡범 10명의 정배죄인(定配罪人)’ 7건의 장계(狀啓)를 소개한다. 옛날 왕조시대에는 요즘처럼 감옥소가 없었고 현대의 구치소 격인 전옥서만 있었다. 그래서 징역형을 판결받는 자는 대부분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유배를 처음 접하는 분들은 양반, 사대부, 선비, 학자들만 유배를 간 걸로 아시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은 일반 평민(양인)이나 노비가 더 많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물론 이들의 죄는 거의 형사잡범이었다. 거제도는 우리나라에서 유배 죄인이 가장 많이 왔던 곳이다. 고려사절요 기록 1112년부터 독립운동가 유배 1912년까지 약 800년 간 이어져 왔다. 지금까지 명단(이름)으로 확인된 사람만 현재(2026년 3월) ‘520명’이나 된다. 제주도, 남해도 등은 기록상 아무리 따져도 300명과 200명을 넘지 못한다. 그래서 이번 편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최다유배지 거제도’의 19세기 형사잡범 유배인(流配人) 10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①「1863년 7월13일 3년 정배(三年定配) 송진칠(宋鎭七) 장계(狀啓)」는 조상 묘를 지키려다 남의 묘를 파헤친 죄로 거제부에 3년 정배(三年定配)되었던 전라도 흥양(고흥) 출신 송진칠의 문서이고, 두 번째로 ②「1842년 6월13일 절도위노(絶島爲奴) 조구철(趙龜哲) 장계(狀啓)」는 조구철이라는 자가 과거에 합격하고자 하는 욕심을 품고, 홍패(과거 합격증)를 몰래 사서 과거 급제를 사칭한 죄로, 절도위노(絶島爲奴, 먼 섬의 노비로 삼음) 형을 받고 경상도 거제부(巨濟府)로 정배되었다.
세 번째 ③「1863년 9월14일 노구위업죄(老嫗爲業罪) 장재석(張在錫) 유배 장계(狀啓)」는 장재석이라는 자가 사회의 질서와 풍속을 어지럽힌 노구위업죄(老嫗爲業罪)라는 죄로 거제섬 유배(島配)로 보내졌고, 네 번째 ④「1872년 4월20일 거제부 3년 유배 최귀록(崔貴祿) 장계(狀啓)」는 최귀록이라는 자가 채무를 갚지 않고 오히려 남의 집을 강제로 빼앗는, 부동산을 갈취한 죄로 곤장 100대를 맞고 3년 동안 거제도에서 유배 생활(강제 노역 포함)을 하는 처분을 받았다. 다섯 번째 ⑤「1872년 6월6일(음) 거제유배 4명 방송(放送) 장계(狀啓)」는 거제(巨濟) 유배 삼천리 죄인(流三千里罪人)이었던 고인근(高仁根), 양택중(楊宅中), 조흥석(趙興石), 지성학(池聖學)을 4월 30일(四月三十日)자로 방면)한다는 처분이 내려졌다. 여섯 번째 ⑥「1842년 6월27일(음) 거제, 충군죄인 이익선(李翼善) 방송(放送) 장계(狀啓)」는 경상도에 유배된 죄인 중에 도(徒)형이나 년(年)차에 해당하는 유배인을 석방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는데, 거제(巨濟)에는 충군죄인(充軍罪人) 이익선(李翼善)이 방면되었다는 「장계(狀啓)」다. 일곱 번째 ⑦「1842년 4월19일(음) 거제죄수 이맹순(李孟淳) 형문(刑問) 장계(狀啓)」는 거제 고을에 수감된 죄수 이맹순(李孟淳)의 형문(刑問) 상황을 정리하여 보고한 간단한 문건이다.
1) 「1863년 7월13일 3년 정배(三年定配) 송진칠(宋鎭七) 장계(狀啓)」
이 장계(狀啓)는 조선시대 송진칠(宋鎭七)이라는 인물이 조상의 묘소를 수호하려다 남의 무덤을 파헤친 죄(발총, 發塚)로 거제도로 유배 온 사건을 다루고 있다. 즉 조선시대 송진칠이라는 인물이 조상의 묘소를 지키려다 남의 무덤을 파헤친 죄로 거제도에 유배된 경위를 기록한 공문서다.
*주요 사건의 배경과 내용 : 전라도 흥양(고흥) 출신 송진칠은 자신의 13대조인 충강공(忠剛公)의 묘소 바로 앞에 선(宣)씨 가문의 무덤 5기가 들어서 압박하고 있는 것에 분개했다. 이에 관아에 여러 번 굴이(移葬, 무덤을 파서 옮김)를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냈으나, 상대측에서 이행하지 않자 송진칠이 직접 남의 무덤 5기를 파헤쳤다. 비록 관이 드러날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스스로 범죄임을 인정했다. 판결에서 《대명律》의 '발굴분총(發掘墳塚)' 조항을 적용받았다. 관이나 곽에 이르지 않았을 경우의 형량인 장(杖) 100대와 도(徒) 3년(강제 노동을 수반한 유배) 처분을 받았다. 이에 따라 癸亥(계해, 1863년) 6월 12일, 거제부로 압송되어 유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역사적 맥락 : 당시 조선 사회에서 조상의 묘를 지키는 문제(山訟)는 가문의 명예가 걸린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다. 송진칠의 행위는 유교적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나, 법적으로는 엄격히 금지된 '발총'에 해당하여 중형을 면치 못한 사례다.
*요약건대, 송진칠이 조상 묘 앞의 선씨 문중 무덤 5기를 무단으로 파헤침. 관아의 이장(移葬) 판결에도 상대가 움직이지 않자 직접 행동했다. 판결이 장 100대 + 유배(노역형) 3년이 확정되었고 거제도(1863년 도착)로 정배되었다.
* 덧붙여 이번 「1863년 7월13일 3년 정배(三年定配) 송진칠(宋鎭七)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경상감영(慶尙監營)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이다.
○ 다음은 조선시대 관청에서 상급 기관(주로 임금이나 중앙 부처)에 보고하기 위해 첫머리에 작성된 계목(啓目) 또는 첩보(牒報) 형식의 짧은 글이다. 이 장계(狀啓)의 도입부는 송진칠(宋鎭七) 죄인의 유배 관리 현황 보고서로, 죄인이 유배지에 잘 도착했는지, 누가 신변을 책임지는지(保授)를 확인하여 행정 공백이 없음을 알리는 절차다.
[도입문] "장계(狀啓)를 상고(相考, 참고)하시도록 보고드립니다. 도내 각 고을에 지난 6월 초하루(1일)에 배소(유배지)가 정해진 죄인들이 유배지에 도착한 날짜와 그들을 맡아 감시하고 돌볼 보수(保授) 인역(보호자)의 이름을 뒤에 목록으로 정리하여 올리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계해년(1863년) 7월 13일."[啓爲相考事. 道內各邑去六月朔定配罪人等 到配年月日及保授人役·姓名, 竝以開坐于後爲白臥乎事是良厼, 謹具啓聞. 癸亥七月十三日]
*거제 「1863년 7월13일 3년 정배(三年定配) 송진칠(宋鎭七) 장계(狀啓)」*
거제(巨濟). 전라도 흥양(興陽) 출신으로 도(徒) 3년의 형을 받은 죄인 송진칠(宋鎭七)에 관한 건입니다. 전라감사가 보낸 공문(이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낙안군에 갇혀 심문을 받은 죄인 흥양 사람 송진칠은, 자신의 13대조인 충강공(忠剛公) 묘소를 압박하는 자리에 선(宣) 씨 성을 가진 이들의 무덤 5기가 있어, 여러 차례 감영과 고을에 파서 옮겨달라고 청원하여 확답(판결)까지 받아냈으나 끝내 파가지 않았습니다. 조상을 위하는 마음에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해 다섯 무덤을 한꺼번에 파헤쳤는데, 비록 관(棺)이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스스로 범한 바를 돌아보니 어찌 마땅한 법률을 피하겠느냐며 아무 말 없이 처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죄에 대해 법률을 검토하게 한바, 검률(법률 전문가) 최석운의 보고서에 따르면 『대명률』 '발총(무덤을 파헤침)' 조항에 '무덤을 발굴하되 관곽에 이르지 않은 자는 장(杖) 100대에 도(徒) 3년에 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송진칠에게 장 100대와 도 3년의 사죄(私罪)를 적용한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위의 죄인 송진칠에 대해 해당 법률에 따라 장 100대를 친 후, 도 3년의 형을 정하여 귀도(전라도에서 본 경상도)의 거제부로 유배를 보냅니다." 이상의 근거에 따라 계해년(1863년) 6월 12일에 유배지에 도착하였으며, 보량인(신변을 돌보고 감시하는 사람)은 김용복입니다.
[巨濟, 全羅道興陽來徒三年罪人宋鎭七段, 全羅監司移文內, 樂安郡囚推罪人興陽宋鎭七矣, 矣身十三代祖忠剛公墓壓逼之地, 有宣哥五塚, 故屢呈營邑掘移之意, 至捧侤音, 終不掘去. 則爲先之心, 不勝憤惋, 一掘五塚, 雖未露棺, 自顧所犯, 焉逭當律? 無辭遲晩. 罪, 令檢律照律, 則檢律崔錫運手本內, 大明律發塚條云, 發掘墳塚, 未至棺槨者, 杖一百, 徒三年亦爲有臥乎等用良, 宋鎭七段, 杖一百, 徒三年私罪是乎味, 手本是置有亦. 上項罪人宋鎭七, 依右律決杖一百後, 徒三年定配於貴道巨濟府事據, 癸亥六月十二日到配. 保良人金龍福]
2) 「1842년 6월13일 절도위노(絶島爲奴) 조구철(趙龜哲) 장계(狀啓)」
이 장계(狀啓)는 조선시대 거제도로 유배 온 조구철(趙龜哲)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다. 이 내용은 당시 형조(刑曹)에서 내린 처분과 배소(유배지) 도착 사실을 알리는 문서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 기록은 조선시대 유배인의 인적 사항과 죄목을 적은 명부의 일부로 보인다.
*주요 사건의 배경과 내용(죄인 및 죄목) : 죄인 조구철은 허망하게 과거에 합격하고자 하는 욕심을 품고, 홍패(과거 합격증)를 몰래 사서 과거 급제를 사칭한 죄(망생과욕 매득홍패도과죄, 妄生科慾 買得紅牌盜科罪)를 지었다. 이에 법전에 따라 절도위노(絶島爲奴, 먼 섬의 노비로 삼음) 형을 받고 경상도 거제부(巨濟府)로 정배되었다. 임인년(1842년) 5월 1일에 유배지에 도착했다. 유배객을 관리하고 신변을 책임지는 보살핌 역할로 양인 전광이(全光伊)가 지정되었다.
*역사적 맥락 : 실력이 아닌 부정부패(대리 시험, 합격증 매매 등)를 통해 과거 급제를 훔치는 행위(盜科)는 조선 시대에 엄격히 처벌받는 중죄였다. 절도위노(絶島爲奴)는 단순히 거주를 제한하는 유배보다 무거운 형벌로, 섬에서 노비 신분으로 역을 수행하게 하는 처벌이다. 결국 이 문장은 조구철이라는 인물이 부정 과거 시험 사건에 연루되어 1842년(임인년) 봄, 거제로 유배와 노비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향토 사료 또는 행정 기록의 일부다.
*행정적 문서의 맥락을 살펴보면, 5월 1일에 유배령이 내려져 거제부 고을로 보내진 죄인이다.(5월 1일에 거제에 도착한 조구철). 죄인들이 각 유배지에 무사히 도착했는지 확인을 마친 후, 약 한 달 뒤인 6월 13일에 경상감사가 국왕에게 최종 보고를 올린 것이다. 유배인의 관리 상태(누가 감시하고 돌보는지)를 중앙 정부가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행정 기록이다.
* 덧붙여 이번 「1842년 6월13일 절도위노(絶島爲奴) 조구철(趙龜哲)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경상감영(慶尙監營)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이다.
○ 다음은 조선 시대 관청에서 상급 기관(주로 임금이나 중앙 부처)에 보고하기 위해 첫머리에 작성된 계목(啓目) 또는 첩보(牒報) 형식의 짧은 글이다. 이 문장은 조구철(趙龜哲)의 유배 기록(임인년 5월 1일 도착)을 포함하여, 당시 경상도 내 유배인 현황을 국왕에게 정식 보고하는 장계(狀啓)의 도입부다. 이 도입부는 죄인의 유배 관리 현황 보고서로, 죄인이 유배지에 잘 도착했는지, 누가 신변을 책임지는지(保授)를 확인하여 행정 공백이 없음을 알리는 절차다.
[도입문] “장계를 상고(相考, 참고)하시도록 보고드립니다. 도(道) 내 각 고을에 지난 5월 초하루(1일) 자로 배정된 유배 죄인들의 도착 연월일과 그들을 맡아 관리할 보인(保人)의 직역 및 성명을 모두 합하여 뒤에 목록으로 나열하여 보고하오니, 삼가 갖추어 살피어 주시옵소서. 임인년(1782년, 정조 6년) 6월 13일”
[啓爲相考事. 道內各邑去五月朔定配罪人等, 到配年月日及保授人役姓名, 幷以開坐于後爲白臥乎事是良厼, 謹具啓聞。壬寅六月十三日]
*거제 「1842년 6월13일 절도위노(絶島爲奴) 조구철(趙龜哲) 장계(狀啓)」*
거제(巨濟) 지역의 기록입니다. 형조(刑曹)에서 먼 섬의 노비로 삼는 형벌(절도위노)을 내린 죄인 조구철(趙龜哲)에 관한 건입니다.
형조의 공문 내용에 따르면, 조구철은 우포도청의 보고(移文)에 근거하여 처벌되었습니다. 그는 과거 급제에 대한 헛된 욕심을 품고 홍패(합격증)를 몰래 사서 과거를 훔친 죄(부정 합격)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법전에 따라 먼 섬의 노비로 삼는 형을 내려 경상도 내 거제부로 유배를 보냈으며, 임인년(1842년) 5월 1일에 유배지에 도착했습니다. 신변을 돌보고 감시할 보인(保人)은 양인 전광이(全光伊)입니다.
[巨濟, 刑曹來絶島爲奴罪人趙龜哲段, 刑曹關內, 趙龜哲當爲右邊捕盜廳移文據, 妄生科慾, 買得紅牌盜科罪, 依法典絶島爲奴, 定配於道內巨濟府事據, 壬寅五月初一日到配. 保良人全光伊.]
[주1] 절도위노(絶島爲奴) : 아주 먼 섬으로 보내 노비 신분으로 전락시키는 무거운 유배 형벌이다.
[주2] 망생과욕 매득홍패도과(妄生科慾 買得紅牌盜科) : "망령되게 과거 욕심을 내어 홍패를 사서 과거를 도둑질했다"는 뜻으로, 요즘으로 치면 '가짜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사서 공직에 나아가려 한 입시(채용 비리)'에 해당함.
[주3] 임인(壬寅) : 문맥상 1842년(헌종 8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주4] 보인(保人) : 보수주인. 유배 온 죄인이 도망가지 못하게 감시하면서 동시에 먹고사는 것을 돌봐주는 책임자를 말한다.
3) 「1863년 9월14일 노구위업죄(老嫗爲業罪) 장재석(張在錫) 유배 장계(狀啓)」
이번 장계(狀啓)는 앞서 조구철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거제도로 유배 온 장재석(張在錫)이라는 인물에 대한 처분과 도착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노구위업죄(老嫗爲業罪, 늙은 할미를 앞세워 업으로 삼았다)라는 죄는 사회의 풍속 사범이나 잡범에 대한 처벌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문서에서 장재석이 8월 8일에 거제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보고서가 바로 그 장재석의 도착 사실을 중앙 정부에 최종 보고하는 공문이기 때문이다. 8월에 유배령이 내려져 각 고을에 도착한 죄인들을 한 달간 취합하여, 9월 14일에 경상감사가 국왕에게 올렸다. 이 서두 뒤에는 '거제 죄인 장재석, 8월 8일 도착, 보인 김의주'와 같은 구체적인 명단이 나열(開坐)되어 있다.
* 덧붙여 이번 「1863년 9월14일 노구위업죄(老嫗爲業罪) 장재석(張在錫) 유배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경상감영(慶尙監營)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이다.
○ 다음 문장은 앞서 언급한 장재석(張在錫)의 유배 기록(계해년 8월 8일 도착)을 포함하여, 당시 경상도 내 유배인 현황을 국왕에게 정식 보고하는 장계(狀啓)의 도입부다.
[도입문] “장계를 상고(相考, 참고)하시도록 보고드립니다. 도(道) 내 각 고을에 지난 8월 초하루(1일) 자로 배정된 유배 죄인들의 도착 연월일과 그들을 맡아 관리할 보인(保人)의 직역 및 성명을 모두 합하여 뒤에 목록으로 나열하여 보고하오니, 삼가 갖추어 살피어 주시옵소서. 계해년(1863년, 순조 3년) 9월 14일[啓爲相考事. 道內各邑去八月朔定配罪人等到配年月日及保授人役·姓名, 竝以開坐于後爲白臥乎事是良厼, 謹具啓聞. 癸亥九月十四日]”
*거제 「1863년 9월14일 노구위업죄(老嫗爲業罪) 장재석(張在錫) 유배 장계(狀啓)」*
거제(巨濟) 지역의 기록입니다. 형조(刑曹)에서 유배 보낸 죄인 장재석(張在錫)에 관한 건입니다. 형조의 공문(관내) 내용에 따르면, 장재석은 늙은 할미(무속인이나 중개인 등)를 내세워 업으로 삼은 죄 “노구위업죄(老嫗爲業罪)‘를 지었습니다. 이에 죄목을 갖추어 형문(심문하며 매를 때림)을 가한 뒤, 경상도 내 거제부로 섬 유배(島配)를 보냈습니다. 그는 계해년(1803년) 8월 8일에 유배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를 관리하고 돌볼 보인(保人)은 양인 김의주(金義周)입니다. [巨濟. 刑曹來罪人張在錫段, 刑曹關內, 張在錫當爲老嫗爲業罪, 具罪目刑推, 島配於道內巨濟府事據, 癸亥八月初八日到配. 保良人金義周]
[주1] 노구위업(老嫗爲業) : '늙은 할미를 업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당시 부녀자들을 상대로 무속 행위를 하거나 가정을 어지럽히는 부당한 중개·사기 활동을 직업적으로 한 죄를 의미한다.
[주2] 형추(刑推) : 죄상을 자백받기 위해 정해진 절차에 따라 매를 치며 신문하는 과정이다.
[주3] 계해(癸亥) : 앞서 언급하신 장계의 연도인 1863년(순조 3년)에 해당함. 앞서 언급한 장계(狀啓)의 날짜(계해 7월 13일)와 연결되는 시기다. 8월 8일에 도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에 거제도로 유배객들이 집중적으로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주4] 도배(島配) : 유배지 중에서도 특히 섬으로 보내는 형벌로, 육지 유배보다 격리 수준이 높다.
4) 「1872년 4월20일 거제부 3년 유배 최귀록(崔貴祿) 장계(狀啓)」
이 장계(狀啓)는 거제도로 3년 유배(徒刑 3년)를 온 최귀록(崔貴祿)이라는 인물의 판결 내용과 배소 도착 사실을 적은 것이다. 이 기록에서 경기도 양근(양평)에서 죄를 짓고 거제도로 유배 온 최귀록(崔貴祿)이라는 인물의 판결과 도착 과정을 상세히 담고 있다. 당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벌어진 채무 관계와 부동산 갈취 사건이 어떻게 법적으로 처리되었는지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다.
*주요 내용 요약 : 채무를 갚지 않고 오히려 남의 집을 강제로 빼앗은 부동산 갈취 죄다. 이에 곤장 100대를 맞고 3년 동안 거제도에서 유배 생활(강제 노역 포함)을 하는 도3년(徒三年) 형을 받았다. 경기도 양근(양평)에서 2월 30일에 출발하여 경상도 거제부에 1872년 3월 26일에 약 26일 만에 도착했으며, 이는 앞서 보여주신 4월 20일자 보고서의 대상이 된다. 또한 이 기록은 당시 일반 백성들 사이의 채무 분쟁과 주거 침입에 대한 조선 시대의 엄격한 법 집행 사례를 잘 보여준다.
* 덧붙여 이번 「1872년 4월20일 거제부 3년 유배 최귀록(崔貴祿)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경상감영(慶尙監營)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이다.
○ 다음 문장은 유배인들의 도착 현황을 국왕에게 보고하는 장계(狀啓)의 도입부 부분입니다. 3월 1일에 유배령이 내려진 죄인들이 각 고을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 약 50일 뒤인 4월 20일에 경상감사가 최종 취합하여 보고한 상황이다. 임신년(壬申) 1872년에 해당하며, 이 시기 경상도 지역(거제 등)으로 유입된 유배객들의 명단을 보고하는 공문이다. 내용 중, '개좌(開坐)'라는 표현 뒤에는 구체적인 죄인 명단, 죄목, 도착일, 보인 이름 등이 상세히 이어지게 된다.
[도입문] ”상계(狀啓) 상고(相考, 참고)하시도록 보고드립니다. 도(道) 안의 각 고을에 지난 3월 초하루(1일) 자로 배정된 유배 죄인들의 도착 연월일과 그들을 맡아 관리할 보인(保人)의 성명을 모두 뒤에 목록으로 나열하여 보고하오니, 삼가 갖추어 살피어 주시옵소서. 임신년(1872년, 순조 12년) 4월 20일[啓爲相考事. 道內各邑, 去三月朔, 定配罪人等, 到配年月日, 及保授人姓名, 竝以開坐于後爲白臥乎事是良厼, 謹具啓聞. 壬申四月二十日]“
*「1872년 4월20일 거제부 3년 유배 최귀록(崔貴祿) 장계(狀啓)」*
거제(巨濟) 지역의 기록입니다. 경기도 양근에서 온 도형(徒刑) 3년 죄인 최귀록(崔貴祿)에 관한 건입니다. 경기도 관찰사의 공문 내용에 따르면, 양근군에 수감된 죄인 최귀록의 죄상을 법률에 비추어 검토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법률 전문가(檢律) 유석우(劉奭祐)의 보고서에 의하면, 죄인 최귀록은 본래 품행이 불량하고 도리에 어긋난 자입니다. 그는 서명손(徐命孫)에게 빚진 물건이 있었으나 여러 해 동안 갚지 않고 미루다가, 결국 상대의 집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최귀록은 자신의 범죄를 스스로 돌아볼 때 어찌 법을 피할 수 있겠느냐며,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죄를 인정하였습니다. 『대전회통』의 사천(私賤) 조항에 따르면, "남의 토지나 집을 강제로 점유한 자는 곤장 100대와 도형 3년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최귀록에게 곤장 100대와 도형 3년의 처분을 내렸습니다.
해당 죄인 최귀록은 위 법률에 따라 곤장 100대를 맞은 뒤, 귀 도(경상도)의 거제부로 유배되었습니다. 임신년(1872년) 2월 30일에 유배지로 출발하여 3월 26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를 관리할 보인(保人)은 양인 이은호(李殷浩)입니다.
[巨濟, 京畿楊根來徒三年罪人崔貴祿段, 京畿監司移文內, 楊根郡囚推罪人崔貴祿罪狀, 令檢律照律, 則檢律劉奭祐手本內, 罪人崔貴祿矣. 矣身本以乖悖之類, 徐命孫有所負之物, 而年久延拖, 終無酬償之意, 故勒奪家舍. 自顧所犯, 焉逭當律? 無辭遲晩罪, 大典會通私賤條云, 據執他人田宅者, 杖一百, 徒三年亦爲臥乎等用良, 崔貴祿段, 杖一百, 徒三年私罪是乎味手本是置有亦. 上項罪人崔貴祿身乙, 依右律決杖一百後, 徒三年定配於貴道巨濟府事據, 壬申二月三十日發配, 三月二十六日到配. 保良人李殷浩]
[주1] 도3년(徒三年) : 조선시대 오형(다섯 가지 형벌) 중 하나인 도형으로, 일정 기간 유배지에서 강제 노동을 시키는 형벌이다.
[주2] 거집타인전택(據執他人田宅) : 남의 땅이나 집을 강제로 빼앗아 차지하는 행위로, 오늘날의 부동산 갈취 또는 무단 점거에 해당한다.
[주3] 임신년(1872년) : 앞서 언급하신 상계(보고서)의 날짜(4월 20일)와 정확히 일치한다. 3월 26일에 도착한 최귀록의 사례가 4월 보고서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1872년 6월6일(음) 거제유배 4명 방송(放送) 장계(狀啓)」
1872년 06월 06일(음) (壬申六月初六日), 거제(巨濟) 유배 삼천리 죄인(流三千里罪人) 고인근(高仁根), 양택중(楊宅中), 조흥석(趙興石), 지성학(池聖學)을 4월 30일(四月三十日) 방송(放送, 방면)함.
* 이번 「1872년 6월6일(음) 거제유배 4명 방송(放送)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경상감영(慶尙監營)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이다.
6) 「1842년 6월27일(음) 거제, 충군죄인 이익선(李翼善) 방송(放送) 장계(狀啓)」
1842년 6월27일(음) (壬寅六月二十七日) 거제(巨濟), 충군죄인(充軍罪人) 이익선(李翼善), 6월 17일(六月十七日) 방송(放送, 방면) 되었다.
「경상도 유배자 방송(放送) 장계(狀啓)」 "아뢰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형조에서 온 공문에 따르면, 임금님의 재가를 받은 예조의 보고서 내용 중 지난 5월 29일의 전교(임금의 명령)는 다음과 같습니다. '판의금부사와 형조판서는 각 도의 유배인 명부(配案)를 가지고 가서 영의정 등 대신들과 상의하라. 그중 정상을 참작하여 석방(酌放)할 만한 자는 이름 위에 표식(付標)을 해서 보고하라'는 명령이 계셨습니다. 이에 삼가 전교를 받들어 대신들과 상의하고 유배인 명부를 상세히 검토한바, 경상도에 유배된 죄인 중에 도(徒)형이나 년(年)차에 해당하는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啓爲相考事。節到付刑曹關內, 啓下敎曹啓目內, 今五月二十九日傳曰, 判義禁·刑曹判書, 持諸道配案, 就議于大臣, 可以酌放者, 付標以入事, 傳敎是白有亦. 謹依傳敎, 就議大臣, 詳考配案, 而慶尙道定配罪人徒年秩中]
* 이번 「1842년 6월27일(음) 거제, 충군죄인 이익선 방송(放送)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경상감영(慶尙監營)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이다.
7) 「1842년 4월19일(음) 거제죄수 이맹순(李孟淳) 형문(刑問) 장계(狀啓)」
”삼가 아뢰옵니다. 도내 각 고을에서 지난 봄 석달 동안(1~3월) 동안 수감된 죄수들의 최초 수감 날짜와 심문 및 고신(형문) 횟수를 아래와 같이 정리하여 보고하오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임인년(1842년) 4월19일“[啓爲相考事。道內各邑, 去春三朔, 時囚罪人等, 始囚年月日及同推拷訊次數, 開坐于後爲白臥乎事是良厼, 謹具啓聞. 壬寅四月十九日]
[주1] 계위상고사(啓爲相考事) : "살펴보시도록 보고합니다"라는 뜻으로 보고서 서두에 쓰는 정형구.
[주2] 시수(始囚) : 처음으로 감옥에 가둠.
[주3] 추고(推拷) : 죄를 추궁하여 심문하거나 고문함.
[주4] 개좌(開坐) : 내용을 조목별로 벌여서 적음.
[주5] 위백와호사시량아(爲白臥乎事이良厼) : "~하옵기에"라는 뜻의 이두 표현.
○ ”거제(巨濟)의 이맹순(李孟淳)은 이전에 형문(심문 시 가하는 고문)을 440차례 받았으며, 최근 세 달 이내에 9차례 형문을 더 가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희상(李希祥)을 때려 죽인(撞殺) 사건의 경위를 추궁하기 위해, 무자년(1828년) 6월 2일에 구금되었습니다.“[巨濟, 李孟淳, 前受刑問四百四十次, 三朔內加刑九次. 右人段, 李希祥撞殺辭緣推覈次, 戊子六月初二日囚]
[주1] 형문(刑問) : 죄인의 정강이를 매로 치며 자백을 받아내는 심문 방식이다. 440회라는 횟수는 이례적으로 많은 수치로, 사건이 매우 해결되지 않았거나 피의자가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음을 짐작게 한다.
[주2] 당살(撞殺) : 몽둥이 등으로 때려서 죽이는 것을 의미함.
[주3] 추핵(推覈) : 죄상을 낱낱이 조사하여 밝히는 것이다.
* 이번 「1842년 4월19일(음) 거제유배 이맹순(李孟淳) 형문(刑問)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경상감영(慶尙監營)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이다. 이맹순의 형문(刑問) 장계는 이번 외에도 1842년 10월 19일 (壬寅十月十九日)과 1842년 07월 15일 (壬寅七月十五日) 2차례 더 있으나 내용이 유사하여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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