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리는 1895년(고종 32)년 지방관제 개편에 의해 예안군 의동면의 지역이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촌동, 천곡동, 이곡리를 병합하여 원촌과 천곡의 이름을 따서 원천동(리)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1976년 안동댐으로 인해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원천리에는 원원천 마을인 원촌 마을과 내살미 마을이 있으며 50여가구가 살고 있다.
◇ 원원천(原遠川)‧말맨대‧원원대(遠遠臺)‧원대(遠臺)‧원촌(遠村) 내살미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도산면 토계리의 하계(下溪)에서 북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으면 원원촌 즉, 원촌 마을이다. 이 마을은 진성이씨(眞城李氏) 집성촌으로 일제강점기 때 항일시인(抗日詩人)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 선생의 고향으로 시(詩) 「청포도」에서 말한 ‘내 고장’의 마을이기도 하다. 옛날 퇴계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청량산(淸凉山)에서 수양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갈 때 천사, 단사, 매내, 올미재, 가사리, 너분들,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산행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곳에 말을 매어 놓았다고 하여 말맨대라 하던 것이 변하여 말만대, 말먼대라고 불렀으며, 원원대, 원대, 원촌 등으로도 부른다. 원촌 마을의 입향조는 퇴계 선생의 5대손인 이구(李榘, 1681~1761)공이다. 공은 원촌에 처음 정착하여 평생을 부화(浮華)한 생각을 버리고 겸양과 청허(淸虛)로 일관하여 세상사람들로부터 원대처사(遠臺處士)라고 일컬어졌는데 공은 ‘부끄러운 것을 멀리하라’란 뜻으로 ‘멀 원(遠)’자와 주역(周易)에서 부끄럽다는 의미의 ‘마을 촌(村)’자를 취해 마을 이름을 ‘원촌(遠村)’이라
하였다. 현재 마을 경내에는 육사의 집터자리에 세워진 ‘청포도’ 시비(詩碑)를 비롯하여 이구 공의 원대구택(遠臺舊宅), 목재(穆齋) 이만유(李晩由, 1822~?)공의 목재고택(穆齋古宅), 사은(仕隱) 이귀운(李龜雲, 1774~1823)공의 사은구장(仕隱舊庄)을 비롯하여 칠곡댁(漆谷宅), 원호정사(遠湖精舍), 감천댁(甘泉宅) 등의 가옥들이 자리잡고 있다.
◇ 내살미‧천사미(川沙美)‧천사(川沙)‧천곡(川谷) 내살미는 원천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이 수려하고 넓은 강변에 쌓인 모래가 정결하고 광채가 아름답다 하여 예로부터 천사미라고 하였으며, 내살미 또는 천사, 천곡이라고도 불렀다. 안동댐 축조 전에는 마을 앞 모래 강변에 서식하는 은어(銀魚)가 별미여서 예로부터 귀족들의 선사품으로 올려지기도 하였다. 예안읍지인 선성지(宣城誌)를 보면 교수(敎授) 이현우(李賢佑)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으며 외손인 금제순(琴悌荀)이 이어 살았는데,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로 인하여 예안의 경치 좋은 곳(14曲) 가운데 제 8곡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천사곡(川沙曲):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청량산(淸凉山)과 건지산(騫芝山)의 두 틈새를 뚫고 흘러내리면서 9곡(九曲)을 이루면서 천하의 절경을 이루었는데, 천사곡은 내살미 앞에 있는 낙동강의 굽이로 청량(淸凉), 고산(孤山), 단사(丹砂), 천사(川砂), 탁영(濯嬰), 분천(汾川), 오담(鰲潭), 월천(月川), 운암(雲巖)의 구곡 가운데서 제 4곡을 이루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였다.
◦ 삵실, 싹실, 이곡(狸谷), 이드리:옛날 삵이 많이 살고 있었다 하여 삵실, 싹실 또는 이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 왕모산성(王母山城):왕모(王母)가 머물렀던 산성이라 전해지는 곳으로 원천 마을 뒤 왕모산(王母山)에 있다. 1361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의 난리를 피해 안동으로 몽진 왔을 때, 안전을 위해 그 어머니를 이곳 원촌 부근에 머물게 하고, 만일을 대비하여 산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산성은 흙과 돌로 축성하였는데 서쪽은 자연석으로 된 석성이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약 360m이고 석축이 잘 남은 곳은 약 50m쯤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왕모가 홍건적의 난을 피해 복주(福州; 안동의 옛 지명)에서 동쪽으로 임동(臨東)까지 행차하여 다시 북쪽으로 돌며 낙동강변을 거슬러 상행하다가 천사(川沙)에 있는 이곳에 자리잡고 피난을 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때 적의 공세에 부득이 목적지 청량산을 향해 왕의 행차가 거동하기를 왕모산성 우측 낙동강을 도강(渡江)하여 단사(丹砂) 모래사장을 지날 때 강 건너편 삼송정(三松亭)에서 불의에 천지를 진동시킬 만큼 말울음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난 데 없는 백마(白馬)가 무명의 장수를 태우고 쿵 소리를 내자마자 왕 행차 앞에 뛰어와 멈췄다. 이때 몸집이 보통 장수보다 크고 백발이 성성한 구인토룡(蚯蚓土龍)이란 노장수가 말에서 성큼 내려서 문안 올리며 ‘성왕을 도우려 왔으니 싸움에 한 몫을 담당하도록 윤허하여 주신다면 동행할 것이며, 소인에 대하여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말아 주십시요’ 하고는 곧 길을 떠났다. 항곡(項谷) 입구 맞은 편을 통과하여 백운지(白雲池), 면천(綿川), 맹개, 월명담(月明潭)을 우측으로 끼고 소두들에서 가사리를 건너다보며 배사무(봉화군 명호면 관장리) 나분들에 도착하니 여기가 청량산 입구 강변이라 잠시 노독을 풀고, 청량산 의성봉(義城峰)에 진을 치고 수일 후 싸움이 벌어졌는데 신출노장(神出老將)이 활 쓰고 칼 쓰는 기량이 비호같이 날쌔어 거의 전멸되고 싸움은 끝났다. 어느 날 아침식사 시간에 노장이 보이지 않아 전원이 여기 저기 찾기 시작하여 법석인데 군량미와 소금을 쌓아 놓은 옆에 투구와 갑옷만이 덩그렇게 남고 몸집이 있던 자리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굵고 긴 지렁이가 점점 녹아지고 있더라 해서 혹자가 말하기를 ‘이 지렁이가 천 년 이상 묵어서 인간으로 화신(化身)하여 우리 성군을 도와주라고 보내 주신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백마는 죽은 곳도 없이 행방이 모연하였으며 이로써 공민왕 피난길은 여기서 끝나게 되었다고 한다.
◦ 왕모산성 성황당(王母山城城隍堂):성의 동쪽에 공민왕의 어머니가 기거했다는 약 100평 남짓한 터가 남아 있는데 이곳에는 공민왕의 어머니를 위하는 성황당이 있어 내살미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을 위해 매년 동제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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