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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자 역학이 묻고 불교가 답하다. 책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김성구 저/불광출판)] 중에서~,
과학의 증명과 우주적 진리가 우리의 인생길을 꽃으로 수놓을 것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종교와 과학을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했다. 그는 종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래 종교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하며, 과학자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모두 만족시킨다면 그것이 우주적 종교가 될 것이다."
우주적 종교라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릇된 욕망의 허망을 깨닫고 정신과 물질 양쪽 측면에서 나타나는 질서의 신비와 장엄함을 느끼는 감정을 담고 있다. 젊음은 영원할 수 없다. 그러기에 그 젊음에는 늙음이 공존한다.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양자역학은 양극단의 상태가 중첩되어 나타나는 양자중첩의 현상을 다룬다.
이중적이지만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원리를 하나하나 살펴보다 보면 불교와 양자역학이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붓다가 깨달은 직후 말한 정법이란 바로 [연기법]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도 생긴다.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도 멸한다. 모든 존재하는 사물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상호 의존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존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상호 의존성은 인과관계를 설명한다. 이 세상에 원인없이 존재하는 사물은 없다고 말한다.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저것'이 '이것'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상호 의존성은 관계 또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나 저것 모두, 다른 것이 있기에 생기고 존재한다.
모든 사물은 다른 것 없이 독자적으로 생기지도 않으며, 그렇기에 독자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 이것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누구인가] 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하지 않고는 자기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려면 가족관계나 친구, 출신, 직장, 하고 있는 일 등을 통해 말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을 조금 더 깊게 가져가 보면,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이렇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온 우주가 나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된다. 생명이 있든 없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연기법에 대해 붓다는 이렇게 전했다. "연기의 법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법(法)계이며 법주이다. 사물에 내재하는 [불변의 이치]인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불변의 진리라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그 증명을 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는 환경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가고 물질계의 입자 역시 상호 작용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 세상에 다른 것과 상호 작용을 하지 않는 입자는 없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관찰자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상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관찰자가 그것울 관찰할 때 비로소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상호 의존하여 존재할 수 있다. 즉, 물리학적으로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을 갖는다. 미국의 생태학자 뮤어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것을 따로 끄집어 내려고 할 때, 분명한 것은 우주만물 삼라만상이 그것에 걸려 딸려 나온다는 사실이다"
인간과 자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인간의 진짜 주인은 사실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의 몸도 [나]라고 부르는 하나의 생명체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10% 정도 만이 인간의 세포이고 나머지 90% 정도는 인간의 몸속에 살고 있는 미생물의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몸 역시 여러 생명체가 공생하는 공생체이다. 연기의 표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것'이 '저것'을 원인으로 하여 발생했지만, '저것'은 '이것'을 원인으로 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인이 결과가 되기도 하고, 결과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인과율 또한 상호적인 것이다. 둘이 영향을 주고 받으면 둘 다 변하기 마련이다. 이것과 저것이 원인에 놓이든 결과에 놓이든, 그러니까 서로가 원인이 되기도 하고 결과가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일회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관계가 된다. 버섯을 먹고 탈이 나서 죽은 사람이 한 줌의 재가 되어 땅으로 돌아간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그 땅에서 다시 버섯이 자라난다. 생명이 있으면 죽음도 있다. 죽음이 있으면 생명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모든 물리적 존재와 그 운동을 관계론적이고 사건 중심으로 기술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물체의 운동은 시공간의 모양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시공간의 모양은 물질의 분포에 의해 결정된다.
즉, 시공간의 모양과 물질의 운동은 상호 의존적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분만을 보고 이 세상을 판단한다. 그리고는 다 이해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세상을 제대로 알려면 전체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이것과 다른 것들이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에 다른 것과의 관계를 떠나 이것만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체로 놓고 보면 세상사가 변하는 근본 이치가 [상호 인과율]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가리켜 '이것'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것들이 만들어 주는 조건에 의해 일정 기간 동안 생겨난 것일 뿐, 그 조건이 사라지면 그것 역시 사라진다. 이 말은 영원함 없이 일시적으로 인과율과 인과관계에 따라 존재하고 변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인식하고 관찰하는 세계에서는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한 그 일어난 일은 지속성이 없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제대로 알 수 있다면 이 세상을 바르게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원자보다 작은 미시적 세계에서는 소립자들이 원인 없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원인 없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소립자들을 포함하여 미시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존재와 사건들은 [관찰자와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관찰자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것도 관계를 벗어나 의미를 가질 수도 없고 존재를 드러낼 수도 없다. 과학으로도 증명하고 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와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어떤 것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무언가와의 관계와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어떤 무언가에도 관계되거나 필요하지 않았다면 존재될 수 없었다. 우리 각자의 모든 삶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고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의 합일이든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이든 그것은 머리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마음으로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부를 얻고 명성이 높아지면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였을 때, 계획하던 사업이 잘 될 때, 맡은 일이 잘 되어서 윗사람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을 때, 연구 결과가 좋을 때, 고시에 합격할 때, 그때가 가장 만족스럽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경험으로 알 것이다. 그러한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또한 그러한 바람이 매번 원했던 때에 맞춰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뇌는 아무리 기쁜 일이 생겨도 시간이 지나면 본능적으로 거기에 적응하게 된다. 그래서 더 이상은 그 기쁨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을 [쾌락 적응]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대학에 붙었다고 뛸 듯이 기뻐한 것도 잠시 다시 취업 문제에 시달린다.
취직되었다고 뛸 듯이 기뻐하다가 일이나 동료와의 문제에 시달린다. 승진했다고 뛸 듯이 기뻐하다가 사장과의 마찰에 시달린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슬픈 일이나 기쁜 일, 기분 나쁜 일이 생겨도 그것을 경험하는 순간 그것들로 인한 고통이나 충격을 완화하는 심리적 면역체계가 우리 마음속에서 작동한다. 이 심리적 면역체계는 기쁨이나 행복감에도 똑같이 작용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느끼는 어떠한 감정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 것이다. 과거의 성공 요인이 나중에는 실패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과거의 큰 성공 경험은 자만심을 부르기 마련이다. 환경과 조건이 변하는데 자만심 때문에 새로운 방법을 찾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안주하면 발전이 없고, 발전이 없으면 남보다 서서히 뒤쳐지게 된다. 곧 과거의 성공에 안주가 온갖 스트레스를 가져오는 요인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으로 행복감을 유지할 수 있는가? [평상심이 도]라는 말이 있다. 번뇌 없이 일상생활의 하나하나에 몰두할 수 있는 [평상시의 마음이 곧 도]임을 가르친다.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좋고 나쁨을 구별해서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그 양편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것이 바로 [평상심]이다. 이것이 곧 붓다가 말하는 부처의 마음이다. 이것은 결코 특별한 사람만이 깨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가장 먼저 자신이 하는 일과 삶에서 의미를 찾는 것에서부터 이 수행이 시작될 수 있다. 삶의 의미를 알게 되면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진실된 삶을 살겠다는 목표를 세우게 된다. 가까운 내 주변 사람부터 사랑하고 도우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현실에서는 남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한다"는 깨달음의 기본 정신을 생활속에서 구현해 내게 된다.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뜻이 무슨 뜻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우화가 있다. 세 사람의 목수가 있다. 절을 짓기 위해 세 목수가 열심히 목재를 다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대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나무를 다듬고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이 말했다. "저는 지금 부처님을 모실 성스러운 법당을 정성으로 짓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목수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나무를 다듬는 것이다. 돈을 벌면 그 뿐이라는 생각에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보람을 느낄리 없다. 이런 사람은 하는 일에 무슨 문제가 있거나 일이 잘 안되면 짜증을 낼 것이다. 그러면 그 짜증이 하는 일을 더 망치게 된다. 점점 그의 삶에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 적어지게 된다. 그러한 반복적인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목수는 집을 짓는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 하는 일에 충실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삶에서 큰 의미를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세 번째 목수는 자신이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정성을 다할 것이다. 그러한 것을 누가 알아주든 말든 자존감을 느끼고 자신의 일에 책임을 다할 것이다. 그러면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한 인정은 그가 원했던 삶을 살게 해줄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큰 의미를 찾고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선순환이 지속된다. 삶에 의미를 찾고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은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살아가다 보면 삶의 행복은 양보다는 질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기가 반드시 올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가장 가난한 빈곤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물질의 빈곤이 아니다.
경제적 빈곤보다 더한 빈곤은 정신적 빈곤이다. 실용적인 세속적 가치를 좇는 사람과 정신적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과의 삶은 질이 다르다. 세속적인 가치를 오직 돈벌이에만 전념하는 것보다는 삶의 의미를 찾고 마음 공부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선]에 이르는 경지는 절대 위대한 스승들만의 일이 아니다. 선은 보통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이런 말을 했다. "가만히 앉아서 내면을 들여다 보면 우리 마음이 불안하고 산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을 잠재우려 애쓰면 더욱 더 산란해 질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마음속 불안의 파도는 점차 잦아든다.
그러면 미묘한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는 여백이 생겨난다. 그때 우리의 직관이 깨어난다. 그리고 세상을 좀 더 명료하게 바라보며 현재에 보다 더 충실하게 된다.
마음의 평온이 찾아오고현재의 순간이 한없이 확장되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면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밝은 눈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수양이다. 이것은 지속해서 훈련해야 한다."
스티브 잡스는 마음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했던 사람이었다. 체험의 경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선] 수행은 일상생활울 영위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발전하는 인류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인간이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발전하는 힘을 바르게 쓰고 풍요를 누릴 정신력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주인이라는 것은 무의식과 의식이 하나로 통합되어 [우주와 내가 하나]로 된 경지를 뜻한다.
스티브 잡스가 큰 성공을 이루었듯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은 세속적 삶에도 이익을 준다.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최상의 이익]이란 마음의 평화일 것이다. 집착에서 벗어난 자유와 사물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지혜일 것이다. 마음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사는 것, 그 자체가 큰 이익이다. 현재의 이 순간이 넓어지는 경험을 해보라! 그런 사람의 삶은 그 질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정신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한 마음 수련을 할 때, 세속적 이익도 자연히 따라오게 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모든 결과 또한 원인이 된다. 정신적 빈곤은 모든 빈곤을 낳으며, 마음의 풍요는 모든 풍요를 낳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오직 관계망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하면 [우리가 곧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우주의 한 요소이자 우리가 곧 우주 전체이다.
우리는 각자가 정말 소중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 벌고 일한다는 그 매트릭스에서 벗어나자. 아무도 당신을 그 매트릭스에 올려놓지 않았다. 그렇기에 언제든지 스스로의 마음을 자각하고 바르게 세워 그 생각의 매트릭스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지금 가진 몸으로는 한 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 기왕이면 의미있고 목적있는 삶을 살도록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