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 [만세전 ] 논문 요약 보고서
한만수 만세전과 공동묘지령, 선산과 북망산
염상섭의 [만세전]에 대한 신역사주의적 해석을 읽고
제출자 조미경
염상섭의 [만세전] 은 식민지 조선을 공동묘지로 인식하면서 근대화을 통해 그 묘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작성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근대화적 상징물 또한 공동묘지였다. 미신의 산물이면서 비 생산적인 전통적 매장풍습을 버리고 근대화 산물인 공동묘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묘지는 벗어나야 할 장소이면서 동시에 저항해야 할 장소로서 나타나 있는 셈이다.
염상섭의 묘지에 대한 인식을 제정비하고자 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염상섭의 전통 묘제에 대한 비판은 선산으로 집중되는 바. 이는 일리 있는 비판이다. 그러나 선산은 주로 중류층 이상이 활용했던 것이었을 뿐이다.무산층은 일종의 중세적 공유지라고, 할 수 있는 북망산의 무료 사용권한을 진텅적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묘지령 이후에 그들은 죽어도 묻힐 곳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들째, 이소설에서 근대화의 모델로 상정한 공동묘지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염상섭이 유학시절에 자주 찾았다는 도쿄의 조시가야 묘지일 가능성이 높다. 셋째 일제는 산림조사사업과 묘지령을 통해서 식민지적 근대하를 위해 토지의 생산성을 극대화하겠다는 목적으로 1물1주권의 배타적 소유권 제도를 도입한다. [만세전]에서는 '생산에서 면제된 '공간'을 극소화 하는 정책이라는 점에서 적극 찬성 하면서 오직 그 새로 늘어난 땅이 주로 이라본인에게 넘어간다는 점만을 문제라고 인식 한다.
[만세전]의 주된 소재인 묘지를 당대의 사회현실과 대조하면서, 식민화및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가장 고통받는 무산계급에 대한 인식이 모자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 작품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은 대체로 민족과 근대성의 문제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계급과 자본주의의 문제를 소홀히 한 셈이다.
1. 들어가며
[만세전]의 원래 제목은 다들 아는 바와 같이 묘지였으며,작품속에서 묘지는 식민지 조선의 상징으로서 자주 동원되고 있다.
염상섭은 작품 구조를 통해 또는 직설화법을 구사 하면서 이 극단적인 찬반으로 갈라진 조선인의 견해중에서 소수 의견을, 즉 총독부의 묘지 근대화 정책을 명백하게 편들고 있는 셈이다. 만세전에서 무덤이란 단순한 식민현실을 지시하는게 아니라, 근대와 봉건의 부조리한 결합, 기형적 현실로서의 조선을 가르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논문은 묘지에 대한 인식을 종식시켰다.
그렇다면 적어도 묘지제도에 관한 한 염상섭은, 조선의 모든 것= 전근대적= 야만적이라고 인식하면서 전면적이고 급진적인 식민지화와 자본주의화를 추진했던 총독부의 오리엔탈리즘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조선인의 반발이 '봉건 유제'에의 집착에 불과하다는 염상섭의 비판은 선산을 보유하고 있던 ' 중류층 이상' 에 주로 해당되는 것이었을 뿐, 무산층들이 묘지령에 반발한 것은 '죽어도 묻힐곳이 없이 되어 ㅂ린 현실적인 이유가 더 컸다.
적어도 문학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는데 익숙한 자들에게는 그러하다 하지만 그런 평가는 다른 경쟁적 독법들과의 충실한 대조를
통해서 얻어진 결과 인가 나는 의문스러웠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 그 당시에 산출된 여러가지 비문학적 자료들을 이 텍스트와 나란히 놓고 견주어 보는 일, 즉 선택사주의적 접근을 시도 한다는 것이다.
2. 선산과 북망산의 거리
1920년 나다니엘 페0퍼는 소위 문화 통치의 개량 정책을 다섯가지 꼽으라면서 헌병제도 철페에 이어 두번째로 공동묘지제 완화를 들고 이를 비판 했다. 이문제가 당시에 얼마나 커다란 사회적 관심사였는지, 또한 지식층을 중심으로 공동묘지 철회에 대한 비판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잘 전해 준다. 고래의 매장법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묘지령을 지지하는 것이니[만세전]에서 이인화의 인식과 거의 일치 한다. 그들이 말하는 전통적 매장법의 폐해란 무엇을 말함인가. 또한 상해의 미국인 폐퍼와 동경 유학생 이인화가 묘지령에 대한 만가를 합창하는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인가.
2-1 선산과 공동묘지
조선의 유산층에게 공동묘지 제도의 도입은 독립된 가족묘역, 즉 선산을 더 이상 가질수 없게 됨을 의미했다. 자기 가문의 묘역을 따로 소유하고 이르르 위엄 있게 치장하는 일은 중요한 '구별 짓기'의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묘지령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풍수지리설의 신봉자로서 '명당'을 차지 하므로써 가문의 경제력과 사회적 위신이 세습되리라는 믿음 또한 지니고 있었는데, 공동묘지령은 이 맏음까지를 동시에 무너뜨릴수 밖에 없었다.
화장 이후 유골을 공동묘지에 매당하는 일본식 장례법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좀더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그 주장을 언표하는 방식이다. 김천형님한테 늘 조심스러운 이인화로서는 매우 보기 드믄게 강력한 언사를 동원하여 핀잔을 주고 있지만, 그러나 이 핀잔을 여러가지 보완장치에 의해 감싸고 있다. 선산을 옹호하는 형님에 대해 독자들이 지니고 있을 막연한 지지를 선제적으로 제압 하는 것이다. 종합하면 이인화는 화장후 공동묘지 매장이라는 일본식 장제를 지지하지만, 폭넓게 퍼져 있는 공동묘지에 대한 거부감을 고려 해서 자신의 주장을 완곡하게 표현했다.
이 계급적 기반 덕분에 이인화는 일본에 머물면서 민족의 차별을 느끼지 않아도 좋았는데-를 보장해 주는 김천형님 앞에서 그는 위출된다. 묘지 논란은 어느새 사촌에 대한 비난으로 치환된다. 가문의 재산을 축낸 '공동의 적'을 목전에 두자 두 형제는 모처럼 의기투합하고 껄끄러운 봉건-근대 농쟁을 끝낸다.
2-2 북망산과 공동묘지
이인화의 발언은 당대 갓장수들이 놓인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능라주의, 넓은 묘지, 동상, 송덕비 등이 모두 '헛된 일'이라는 훈계는 갓장수로서는 전혀 들어야 할 이유가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오히려 갓장수로 대표되는 무산층이 '애가 말라' 하는 것은 이 소설에서 들을 수 없는 목소리지만, '죽어서 공묘동지에 갈까봐' 가 아니라 '죽어도 묻힐 곳이 없을까봐 였다. 물론 그들이라고 조상 숭배가 없지 않았고 풍수를 믿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풍수 좋은 매장처를 차지할 현실적 가능성은 매우 낮았으므로 그들이 묘지령에 반발하는 주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공동묘지 매장은 무산층에게 적지 않은 경ㅇ제적 문화적 부담을 주었다.
먼저 사망진단서만 발급받으려 해도 의사의 왕진이 필요하니 적지 않은 돈이 드는데다가 번거로웠다.
게다가 그 진단서를 지참하고 매장허가를 받는 일 또한 적지 않게 부담스러웠다. 반민들의 대부분은 문맹인데다가, 설혹 누군가 글아는 자의 도움을 받는 다고 치더라도, 고나공서에 드나드는 일 자체가 가능하면 삼가고 싶은 일이었다.
결국 염상섭의 공동묘지에 대한 감각은 총독부 행정 관료의 그것과 유사한 셈이니. 중간계층으로 오랜 유학생활까지 거친 그의 체험과 생활감각의 한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에 '매장 장소로서 양반들이나 부유층은 선산을 활용하였지만. 빈민층은 지방마다 풍수지리에 걸맞은 국유지를 무료 장례공간으로 활용하면서 이를 '북망산 또는 무주공산이라고 불렀다. 국가에서 빈민층의 장례를 위한 공간을 적극적으로 제공하기도 하여서 혈연관계를 불문하고 매장 하는 장소로서 집장지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당대 무산층이 공동묘지에 반대했던 것은, 이인화의 지레짐작처럼 풍수나 산소차례. 조상숭배등. 때문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으로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그는 중간층이 관심을 기울이는 권력과 금전 문제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하게 조선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예컨대 권력지형도의 변화를 꿰/뚫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추원 부찬의가 철겨운지 언젠데 라는 대사를 비롯해서 땅값이 전쟁통에 얼마나 올랐는지등이 있다.
염상섭은 대단한 작가였지만 자기 계급의 세계와 생활감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조선의 공동묘지에 대해 하층민이 왜 반발하는가를 정확하게알지 못하면서도, 그들을 근대미달로 비판하는 오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3. 묘지의 근대화와 계급성
3-1. 묘지의 '문명과 야만'
상징적 의미로 사용할 때 공동묘지는 그냥 묘지나 무덤이라는 단어로 대체될 수 있지만 맨 마지막의 축자적 공동묘지는 다ㅔ불가능하다. 그런데 축자적 공동묘지는 식민화 이후 조선에 새로 조성된 공동묘지 라고 보기 어렵다. 아마도 축자적/모범항의 공동묘지로서 염상섭은 일본의 공동묘지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들은 일본의 공원같은 공동묘지를 근대화의 상징 중 하나로서 인식했던 것이다. 특히 당시 조선인들에게 묘지가 깨끗하고 산뜻한 꽃일수 있다는 것은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이었는데, 게다가 장례경비도 대폭 절약할 수 있었고 풍수등 미신을 타파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 했을 것이다.
묘지 근대화의 주장에 급급한 나머지 작품의 무리를 불러오는 양상은 이런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특히 이인화의 아내 매장 장면의, 즉 '시체를 청주로 끌고 간다는 데는 절대로 반대를 하였다.
염상섭은 무산층의 북망산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조선의 전통적 장례법에 대해 비판하였으며, 총독부가 도입한 공동묘지의
1918년 현실태 역시 잘 몰랐다. 그저 문명과 야만이라는 낯익은 관념적 이분법만을 되풀이 할 뿐, 조선의 현실에 터잡은 인식은 부족했다.근대화가 지니는 명암 중에서 밝은 부분만을 이인화는 바라본 것은 아닐까 묘지에 있어서도 역시 그대화는 하층민들에게는 훨썬 더 커다른 어둠을 던져준 것이 아니었을까.
3-2 '공동묘지'의 비극
대부분의 묘지가 자리 잡고 있는 산림은 조선시대에는 공유자였다. 최병택에 따르면 "조선시대 산림천택은 여민공리의 대상자로 구성 되어 사점이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조선시대 분묘제도는 풍수지리에 의존하는 '중류층 이상'의 가족묘제와, 집장지에 무료 입장 할 수 있던 무산층의 공동체 묘제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유산층의 선산은 분묘금양을 핑계로 광범한 임야를 사점하여 이윤을 축적할 빌미까지 되어 주는 일거양득의 묘제였다.
이인화와 염상섭이 지지했던 것은 단순한 미신타파에 그치는 게 아니며 바로 이 묘제의 환금화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이인화와 공동묘지 제도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시행하라는 것인지는 나로서는 알고 싶지도 않고, 그까짓 것은 아무렇거나 사완이 없는 일' 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증간층 작가로서. 더구나 오랫동안 일본유학을 거친 염상섭은 하층민들이 왜 묘지에 대해 저항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북망산은 선산과 부당하게 동일시될 수 밖에 없었다. 중세적 공유묘지의 존재와 그 긍정성은 전혀 인식되지 못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만세전]을 민족적 저항이나 리얼리즘의 성취라는 측면에서만 해석하기는 어렵게 된다.
3-3 . 구더기에는 입이 없다
공동묘지라는 문제를 안에서 이인화는 조선의 유산층과 무산층을 구별하지 않는다. 모두 식민지 치하에서 점점 가난에 쪼들려가면서도 어리석은 대응만을 하고 있는 '구더기일 뿐이다. 심지어' 향긋한 머리내를 풍기는 '기생아씨'까지를 구더기로 인식한다. 조선인들이 구더인 것은 근대미달이기 때문이다. 계급에 상관 없이 조선인 모두를 일괄해서 구더기로, 조선을 공동묘지로 가가 인식하다. 이 작품에서 '구더기'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는 대목을 살펴 보자.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없는, 젖먹이기까지 딸린 채 결박된 조선 여인을 보면서 이인화는 물론 연민을 느끼지만 동시에 구더기를 연상한다. 그 기상천외한 연상의 이유를 분명히 알 수는 없으되 '구더기'라는 용어는 근대미달및 근대성취 노력의 부재를 가리키고 있음은 분명하다. 염상섭은 작품 곳곳에서 계급적 차이를 환기시키는 인식소들을 배치 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데 '나는 형님에게 하고 싶던 말을 아무 것도 모르는 이 자를 붙들고 한참 푸념을 하였다.'는 대사를 통해 이인화의 이중성을 자백하도록 만든다. 노동계급에 대한 선망은 일본에서만 작동 된다. 이 시기에도 염상섭은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을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간헐적으로만 제기되며 민족이 전면화된다. 민족의 어리석은 대응에 대한 안타까움도 토로되지만 어리석음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압도적이다.
4. 나오며
이 작품에서 공동묘지는 관념적이고 압축적으로만 그려졌으며 조선의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만 되풀이 될 뿐이었다. 그 시기 공동묘지 제도가 긍정적일 수 있다면, 유력가문의 배타적 매장공간을 배제하고, 백정등 천민계급까지 공동의 공간에 묻힐 수 있는 매장이 평등을 구원할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럴수 있었을터이다. 북망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니 중세적 공유지로서의 의미에 대해서도 전혀 의식 하지 못함은 분명하다. 염상섭은 묘지령에 적극 찬성한다. 중간층 출신으로서 7년 동안이나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온 그의 세계관과 생활감각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식민지적 자본주의화 속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아야 했던 무산층을 문학적으로 다시 한 번 소회시킨 셈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를 통해 [만세전] 에 대한 또는 초기 염상섭에 대한 이해는 좀더 진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