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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혜영은 와인 한 병을 가지고 내려왔다. 천정의 등은 꺼져 있고 벽난로 옆과 탁자 가까이에 스탠드 조명이 쾌 큰 거실을 어둡게 밝히고 냉기 서린 공기가 두 사람의 오랜만에 만난 낯선 어색함은 마치 첫 찬 서리가 새벽 공기와 합쳐 저 싸늘함이 더 느껴 애절한 무엇들이 저 멀리 아득한 소원(疏遠)으로 느끼는 듯했다. 어딘가 안정감도 없었고 서먹한 미련이 방 안을 감싸 안았다. 혜영은 벽난로에 불을 지핀 후 태준의 팔에 팔짱을 끼고 조용한 미소로 태준을 의자로 안내해 앉히며 나직이 말한다.
"오늘 밤새도록 형 이야기 듣고 싶어! ……"
사실 태준은 아까 이장 집에서 혜영을 만나지 않고 근처 펜션으로 가 하룻밤을 지낸 뒤 아침 일찍 그곳을 떠날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녀에게서 도망칠 이유는 없었지만 혹 만나면 영전 소식을 알게 돼 비통이나 아픔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리고 만남 자체가 어설프고 형식에 빠질 것 같은 두려움에서였다. 겨우 자신을 새롭게 시작해 보려는 의지에서 박차고 일어났는데 뜻하지 않은 상황으로 그녀의 이끌림에 순순히 따라온 것이다.
"그냥 그렇게 지냈어 그냥!"
분위기가 어정쩡해 자기의 처지를 밝히고 싶지 않아 쓴웃음과 정색으로 순간을 회피하고 싶은 듯 무덤덤하게 말한다.
"……"
호롱 박만큼이나 큰 와인 잔에 은근한 붉은 조명이 비친다. 뻘쭘하게 서 있는 스탠드 전구색 등이 분위기에 알맞고 적당하게 비쳐 두 사람의 8 년 만의 그림자가 잔잔하게 흰 회벽에 그려진다. 태준은 의자 뒤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아버린 모습이 어떤 어려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듯 조금은 긴장된 표정이다. 난감해하는 그의 모습에 혜영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하고 잔을 입에서 떼지 못한 채 잠시 침묵으로 분위기를 진정한다. 그들은 지금 각자의 서먹하고 어색한 마음 밖으로 나와 허심 탄하게 대화할 수 있는 여건이나 분위기가 아닌 것이다. 망가져버린 오래전 옛날이 조금은 꺼끌꺼끌한 둘 사이를 쉽게 옛날 친구처럼 만들어 주지 못했다. 조금 서둘렀다는 혜영이 금방 인지하고 은박지에 싸인 조각 치즈를 벗겨 포크로 적당한 크기로 잘라 태준에게 건넨다.
"형 이거"
입속에 넣어주는 치즈를 조용한 웃음과 함께 받아먹는다. 그러면서 태준은 혜영이 변해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예전에는 귀엽기는 했지만 꼭 선머슴아 같이 자기 멋대로 말하고 주저 없는 행동에 항상 태준을 난처하게 하곤 했었다. 영전이나 혹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도 태준의 목을 끌어안는다든가 흉허물 없는 행동 등으로 태준을 곤란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쉽게 여자들에게 보이는 적당한 새침은 전혀 찾을 수 없었고 멈출 줄 모르는 솔직 담백한 쾌활이 양념으로 섞여, 문학을 전공한 그녀와는 정 반대되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지금 혜영의 모습은 그녀답지 않게 소심한, 실제의 본모습이 아닌 그녀 마음속에 숨어있던 태준에 대한 애증을 어떠한 방식으로 든 표현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녀를 애태우던 그를 다시 찾은 안도하는 모습과 그를 또다시 놓칠까 봐 두려워하는 불안이 동시에 머물고 있는 듯한 안타까운 모습도 보였다. 루비 색깔의 와인이 입안에 머무를 때 입안 가득히 달콤하고 기분 좋은 향이 그의 기분을 나른하게 한다. 태준은 그동안의 겪었던 일과 삶의 어려움 등을 그의 부모에게조차 소상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가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허무하기도 했지만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모질기만 했던 지난날들이 그에게 큰 상처와 아픔, 어리석음으로 엮어져 굳이 자기 일을 모르는 다른 이에게 못남을 보이기가 싫었다. 영전이와 헤어지고 바로 서울을 떠나 그의 고향 근처인 산골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리고 궁금해하는 혜영이를 위해-- 오래전부터 애타했고 지금도 애타하는 분위기에서-- 대답해 줄 의무(?)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조용히 말을 건넨다.
"넌 S 대에 나가는 걸로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거야?"
"으응, 고만뒀어, 실력도 없고…… 형 잘 알잖아, 그쪽이 얼마만큼……"
혜영은 꾸준한 활동과 아버지의 도움으로 S 여대 강사로 나갔지만 전임이 되기까지는 그녀의 속된 것들과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 그 과정을 수용하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녀는 실력으로 모든 걸 이루어 보겠다는 의지가 충만했지만 뜻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런 원치 않는 상황에서 환멸도 느꼈지만 시인으로서 그녀 성격대로 데데한 현실을 벗어나 한쪽 변두리에서 야인답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혜영은 이곳에 돌아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고 있었다. 언젠가는 태준이 여길 찾아와 꼭, 만날 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서……
혜영은 그녀가 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녀의 후배 김 교수가 이끄는 춘천 문학 그룹에도 참여하고 이곳 '산머루 시 낭송' 모임도 주재하고 있었다. 계절 따라 한 번씩 서울에 가 옛 동료들과 발표도 하며 그녀 말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꽤나 부유한 부모 밑에서 좋은 환경에 자랐지만 워낙 성격이 소탈하고 수더분해 어디든 쉽게 적응하고 어울렸다. 그녀는 그녀 밖으로 나가 자신을 과시하거나 들어날려는 그 흔한 허식도 없이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조건 없이 상대방을 포용하는 깊은 배려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직 편견이 많은 세상에서 개성과 소신이 뚜렷한 여자였고,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이 확실했다. 그녀의 이런 모습들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가르침에서 오는 만들어진 습관 탓도 있겠지만, 삶 속에서 자신에게 충실하려는 그녀의 의지가 단호한 성격 탓이 더 많았다. 그런 혜영에게 일방적인 예외인 게 딱 하나 있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태준에 대한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이었다. 결코 집착이 아닌 순수한 바라봄이었고 그녀만의 변하지 않는 정의였다.
"나는 네가 서울에 사는 줄 알았어…… 그래도 네가 해보고 싶었던 건 학교에 남는 거잖아?"
그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의 직장을 다니며 거의 매일 만났다. 퇴근 후 거의 셋이서 밥 먹고, 술 먹고, 영화 보고하며 그들의 싱그러운 젊음을 맘껏 즐기며 최대한 이용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태준은 말수가 적고 얌전한 영전에게 마음이 쏠렸다. 밀려오는 파도의 잔물결이 가장자리에 닿아 모래에 스미 듯 다가 가 둘만의 사랑을 시작 한 것이다. 한 번에 일렁이는 큰 파도의 다급함이 아니고 조용히 정해 저 있었던 것처럼 둘만의 사랑이 싹텄다. 그런 과정에 혜영은 아픔이 컸지만 자신과 그 둘의 관계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태준에 대한 마음이 영전보다 혜영이 더 노골적이고 적극적이었지만, 흔히들 남자는 까불대는 여자보다도 얌전한 여자에게 더 흥미를 느낀다는 것을 세상 흐름이나 경험 속에서 혜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돌이키지 못할 아픔이지만 도리 없고 피하지 못할 허전한 씁쓸함이었다. 처음으로 자기의 활달하고 누구에게나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이 연애 감정에서는 맞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내면으로 만 외로움을 느끼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을 혹독한 아픔의 공간으로 몰아갔다. 태준이 영전에게 다가갈 때 아무 일 없듯이 자기감정을 속여 어찌할 수 없는 친구, 둘 앞에서는 늘 초연했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여자였다. 그 감정을 조율하지 못하고 때로는 복받치는 그리움이나 서러움이 몰아칠 땐 그녀답지 않게 혼자서 술을 마시거나 베갯머리에서 조용히 흐느끼고는 했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도리 없이 무미건조하고 쓸쓸한 자신을 발견할 때는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그녀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자신을 만들어 준 그녀의 부모를 원망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영전에게는 부담을 주지 않으려 그녀 나름대로 무진 애를 다 썼다. 영전과 몇 번의 부딪침도 있었지만 그녀는 한 발짝 물러나기도 했고 자기 스스로가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했다. 그녀는 영전이 어려움이나 어려운 길에서 헤맬 때 자신의 입장에서 아무런 차이나 구분 없이 충고도 했고 도움이 돼야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 특유의 질투나 시기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게 달라졌다. 우선 태준에게 자기 마음을 충분히 전달하고 싶었다. 친구였던 영전과 그와의 사랑은 자기와 상관없는, 흔이 일어날 수 있는 세상사의 한 편이다. 지금 당장 그가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자기가 다가 가 그녀만의 사랑 방법으로 붙잡고 싶을 뿐이다.
"여기 사는 게 정말 좋아, 심심치는 않아, 아까 그 친구 은영이와 시 낭송회도 같이 하고 …… 가끔 어떤 떨거지 자식들이 못나게 훼방 놓기도 하고 하지만 작년 봄부터 죽 이어 저 왔어. 나름 바쁘게 살아."
"시 낭송?"
"응 작년 봄부터 시작했는데 지금은 호응이 좋아 서울에서도 오기도 한다."
맑고 활기차고 시원한 말대답은 태준도 기분 좋게 한다. 태준이 그녀를 처음 만날 때부터 구김 없고 거칠 것 없는 솔직한 자기표현은 생리에 의해 의존하듯 거짓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것은 누구한테나 호감을 느끼게 하는 그녀의 매력이었다.
"그래, 대단하구나. 바쁘게 사는 것 같아 보기 좋은데…… 다시 강의할 생각은 없고?"
왠지 태준은 할 일을 다 못하고 있는 자신이 작아지고 초라하다는 느낌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벽에 걸려있는 스피커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거슬리지 않는 재즈 음악과 혜영의 솔직한 말투가 그의 마음을 눙치게 한다.
그는 가끔 혜영을 생각했었다. 자기를 열렬히 좋아한 한 여자의 속내나 진심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영전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와의 거리는 늘 떨어져 있었고 분명하게 한계를 두었다. 어떤 때는 그녀에게 한없이 미안하기도, 짠하기도 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모르는 척했었다. 지금 진심으로 혜영이 안정돼 있는 게 태준은 반갑고 고마웠다.
"아냐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학교에 남는다는 건 나한테는 맞지 않고 이런 데서 사는 게 좋아, 차암! 형도, 이곳이 좋아 여기 에서 내가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던 걸 알잖아."
홍조를 띤 그녀의 얼굴이 조명과 어우러져 한 잔을 비운 태준의 눈에 스스럽게 다가와, 경직되고 무뚝뚝하기만 했던 태준을 느슨하게 만들어 더 여유를 갖게 한다.
"혼자 지내는 게 무섭지 않아?"
혜영은 그가 조금은 여유를 찾은 것 같아 반가움에 남은 잔의 와인을 후딱 마시고 생글거리며 태준의 잔에 와인을 적당히 채운다. 그리고 자기 잔에도 와인을 따른다. 그런데 혜영은 졸졸거리며 병에서 쏟아지는 자줏빛 액체 소리에 묘한 서러움에 빠진다. 가슴속 저 밑 깊숙이 숨겨져 있던 아련한 그리움에서 벗어나 갑자기 현실의 애틋함으로 다가올 때 느껴지는 복받치는 서러움과, 무섭지 않느냐는 안위를 묻는 태준의 말이 섞여 갑자기 설레는 서러움에 빠져 조용한 흐느낌으로 어깨를 들썩인다. 이어 병을 내려놓은 채 얼굴을 숙이며 노골적으로 울어 버린다.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워했던가! 태준은 혜영에게는 삶의 원천이었고 사는 보람이었다. 늘 다른 사람 앞에서는 명랑 쾌활했지만 남들에게는 절대 자기의 허전함을 내 보이지 않았었다. 가지가지의 마음들이 보상이라도 받아야겠다는 심정인지 혜영은 심하게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순간 태준은 어찌할 바 몰라 그런 혜영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한 손을 내밀어 탁자 위에 있던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또 다른 손을 모아 감싸 쥐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물끄러미 보기만 한다. 이제 와서 또 다른 태도로 그녀를 대하는 것은 그에게도 당치 않고 있을 수 없는 처사라 생각했다. 옛날에 태준의 사랑이 너무나 영전에게 충실했었기 때문에 지금 혜영에게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CD 인지 한 곡이 지날 즈음까지 흐느낌은 계속되었다. 분명 그녀의 서러움은 잠재된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청신함이었고 순수한 애태움의 잔재였다.
"미안해요."
주체할 수 없는 자기감정에서 겨우 빠져나온 듯 혜영은 감싸 쥔 태준의 손을 그녀가 다시 감싸 쥐며 조금은 아쉬운 듯하며 말한다. 이어 태준이 머뭇거리며……
"…… 아니!?……"
태준이 40 중반이고 혜영이 초반인 지금 둘의 감정이나 여러 모습들이 그만큼 성숙되고 무겁게 변해 있었다. 17 년 전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풋풋했던 것이나 발랄함은 그동안의 모질고 안쓰러운 지나 간 세월들이 좀먹어 버리고, 가슴에 심어 두었던 파란 싹들은 빛이 바래 다시는 돌려지지 않는 추억이 되어 버렸다. 처음부터 어긋났던 혜영과의 관계에서 태준은 냉정해지려고 되도록 말을 아꼈다. 태준이 이제 와서 혜영에게 애틋한 감정을 가질 수도 없고 또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지성이 깊은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막돼먹은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구차함에 빠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혜영은 달랐다. 태준과 영전이가 헤어지고 이제는 언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태준이 말도 없이 사라진 뒤 사방팔방 찾으려고 수소문했지만 친한 친구들에게도 철저하게 숨어버린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오랜 나날들을, 10 년은 혼자 속만 태우고 또, 7 년 이상은 그를 애태우며 찾기도 하며 꼭, 만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해바라기의 지고지순함 같은 것이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아냐 괜찮아, 아까 거기서 정말 잘 먹었어."
거실 안 공기는 따스했다. 벽난로에 장작은 균형 있게 포개져 불은 잘도 타고 있었다. 생뚱맞게 연기가 굴뚝으로 잘 빠져나가고 있다고 태준은 생각할 때 혜영은 태준의 손을 잡고 벽난로 앞으로 이끌어 간다. 혜영이 태준이 준 이 그림을 원할 때부터 알고 싶어 했고 확인하고 싶은 그림의 내력, 뒷이야기를 알고 싶어 했다.
"난, 형 그림 중에 이 그림이 제일 맘에 들어!"
조금 전 서럽게 울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내가 언제 그랬냐 하듯이 혜영의 쾌활하고 깜찍한 본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 태준은 그나마 남아있던 긴장이 다 풀린 것 같았다.
"난 그저……"
"형 만나면 꼭 알고 싶은 게 있었어, 대답해 줄 거지?"
혜영을 다시 만나고 처음으로 태준은 입가에 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뭔데?"
"이 그림 제목이 왜 기다림이야!?"
혜영의 입장에서는 진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묘하게 현실과 맞아떨어져 가는 자기 처지를 대변하는 내용 같아 궁금했었다. 지금 혜영은 태준에 대한 자기 모든 것들이 일부러 만들어진 어색함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움으로, 아름답고 조화롭게, 태준과 재회를 순수함으로 이끌고 싶어서 확인하듯 물어본 것이다. 조금은 속되지만……
"그림이란 시와 마찬가지로 어떤 대상을 감성으로 느낄 때 자기주장이 또 다르게 내포되 새롭게 해석되고, ……"
혜영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기에 그의 말을 가로채 애원하듯 말한다.
"그런 것 말고 제목이 왜 기다림이야? 으-응."
이성적인 혜영은 이 순간만은 복잡하지 아니하고 단순하게, 자기와 태준과의 관계 정립을 무엇인가로 이끌고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 태준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혜영은 너무 행복했다. 여자로서 체면이나 도사림의 마음이 있을 수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애교까지 섞인 그녀의 말투에 태준은 멋쩍어 벽난로 속의 장작을 발로 살짝 밀어 넣는다. 날리는 불똥이 벽난로 밖으로까지 날려 와 곧 사라진다. 혜영이 다가와 태준에게 팔짱을 끼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살며시 기댄다.
"말해 줘, 으-응."
그의 어깨에 혜영의 얼굴이 닿을 때 화끈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듯 급히 그걸 그렸던 동기를 이야기한다.
"음,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를 고 2 땐가 읽었어. 내가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릴 때 꼭, 책 속의 어떤 장면을 그리려고 했는데, 그림에 줄거리가 있으면 재미는 없지만 말야, 그때 그 장면은 거기 책 속의 대화에서 아마 잘 기억이 안 나지만, …… 으음… '가령, 네가 항상 오후 4 시에 온다면 나는 3 시부터 벌써 행복해질 거야. 그러다가 4 시가 다가오면 더 행복해질 거야. 그러다 4 시가 되면 안절부절못하며 뛰어다닐 거야. 그때 내가 얼마나 기쁜지를 너한테 보여줄 수 있을 거야……' 하는 대화에서 행복을 위해 기다려지는 기다림의 순간들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이 아닌가 해? 그게 어떤 이에게는 헛된 봄꿈이 될지언정…"
아무 감동 없이 말해주는 그의 이야기에 혜영은 가슴속에서 뭔가가 타오르는 것 같아 벽난로 상판 벽돌 위에 있던 잔을 들어 와인을 단숨에 마셔 버린다.
"어! … 어!, 혜영아, 천천히, 천천히!"
오래전부터 술을 잘 못 마시는 편이었지만 술 마시는 분위기가 좋아서 꼭 여러 친구들, 특히 태준이 어울리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빠지지 않았다. 그녀에겐 소주 반 병이면 딱 알맞은 주량이었다.
"형, 오늘은 이까짓 와인 열 병도 마실 수 있어."
그녀의 호언이 실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준은 걱정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태준에게 업혀서 집에 들어 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그래도"
혜영의 불그스레한 뺨과 살짝 흘기는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소에 하고 싶거나 꿈꾸어 왔던 어떤 감정이 되살아난 듯했다. 그리고 현실에서 동떨어지거나 잊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근대 형, 왜 여자로 그렸어?"
"으응, 여인상으로 표현한 건 내가 남자니까 자연스레 여자로 그린 것뿐이야!"
혜영은 더 확인하고 싶은 게 많은 지 질문은 계속된다.
"내가 알기론 기다림 작품이 시리즈였고 4 개를 그린 걸로 아는데 왜 네 작품을 그렸어?"
이쯤 되면 형사가 피의자에게 문초하는 조사 수준이지만 태준은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음, 어린 왕자, 그가 느끼는 행복이 시시각각 조금씩 달랐기 때문이야. 「기쁨이 싹틀 때, 3 시 전, 」 「그리고 기쁨이 무르익을 때, 3 시부터, 」 「또 기쁨이 환상일 때, 4 시 즈음, 」 「 그리고 마지막 그것의 완성일 때, 무한의 행복 완성, 」 뭐, 그런 거야."
그러면서 태준은 벽에 걸린 그림을 떼어 뒷면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기다림'이라는 타이틀 옆에 (4)라는 숫자가 있었다. 그것은 그린 화가만이 아는 권리였고 암호였다.
"이 그림은 '행복의 완성'의 부제를 가진 그림이야"
혜영이도 몰랐던 사실에 그녀는 가슴이 울렁거리게 놀랐다. 이 그림은 기다림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청색과 적당히 짙은 푸른색이 간간이 밤색과 노랑, 빨강이 바탕을 채웠고 기형적으로 숙인 엘로 오카 계통의 얼굴, 다홍과 녹색, 바이올렛이 적당히 섞인 상반신, 어느 곳은 굵고 어디는 가늘어 날리듯 분명치 않은 검은 선들이 행복과 애절함이 동시에 엿 보이는 그림이었다. 안목 있는 혜영이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이다. 그녀는 또 울기 시작했다. 이번엔 소리 내어 울고 있다. 여북 답답했기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태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다. 이리되면 혜영의 입장도 생각해 주어야만 하는 걸 태준은 알고 있기에 잠시 혜영을 말리지 않고 있었다. 그의 한 손은 혜영의 어깨에 한 손에는 액자가 아직 들려져 있다. 잠시 후, 태준이 혜영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그에게서 떼어 놓으며 말한다.
"자, 혜영아 그림 좀 걸자."
자신이 없는 맥없이 산다는 것은 늘 그늘 속에서 사는 것이다. 태준이 그랬다. 한 실패자가 타락한 주위의 환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현실에 고상한 교양을 갖춘, 어떤 아련한 희망을 발견할 때 그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양으로 그 희망에 매진하려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또 누구는 자신을 멋쩍게 하는 관용에서 빠져나와 스스로 존귀함을 망각해 버린다. 그것 또한 태준이었다. 자꾸 혜영을 밀어내려 한다. 도저히 자신에게 허락할 수 없는, 수월하게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혜영이 알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그가 말할 수 있는 만큼 이야기해 주었다. 그동안 시골에서 살다가 2 년 전에 서울로 올라와 방배동에 살고 있는 거라든가, 지금은 후배가 운영하는 미술 학원에 나가 일주일에 두 번 일을 한다든가 하는 소소한 일들을 하는, 그런 말만 해 주었다. 그러나 삶 속에서 이는 분노의 연민과 몰인정이 드러날 때 지나간 나날들을 후회하며 허망 없이 그의 앞날을 절망하며 쇠진시키는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는 절대 할 수 없었다. 여기 방문도 여행 중 지나치는 길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혜영이도 신문사에 다니다가 운수골에 살고 있을 때까지 태준이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대충은 혜영의 삶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학교에 강사로 나간다는 것이나 그녀의 동향이나 활동은 친구나 후배에게 들었거나 인터넷을 통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절대 알지 못하는 한 가지는 그녀가 백방으로 그를 찾고 있었다는 것과 사무치게 태준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은 전혀 몰랐었다.
"혜영아, 그만 쉬어야지 피곤하지 않아?"
"형 나는 아직 괜찮아, 한 병만 더?"
아직 와인이 잔에 조금씩 남아 있었다. 혜영은 석 잔 째이기 때문에 태준의 말림에도 충분히 변명할 여지가 있었다. 그의 편안한 웃음으로 혜영을 감싸며 호응해 준다.
"그래, 한 병만, 넌 한 잔만 해 내가 마실 테니까."
"아냐, 나도 마실 거야, 이건 술도 아닌데 뭐!"
하며, 혜영이 와인을 가져 오려고 일어선다.
"아냐 아냐, 어딨어? 내가 가져올게."
급히 일어서며 혜영을 말리며 손사래를 친다. 혜영이 환하게 웃으며,
"2층, 싱크대 수납장 위 작은 냉장고, 올라가면 정면으로 보이는 데 있어요. 참, 그러구 CD 좀 갈아 줘, 플레이어는 오른쪽 방에 있어."
20여 평쯤 되는 2 층에는 가운데 거실 겸 주방으로 돼있고 방 두 개가 양쪽으로 나누어 저 있다. 태준은 우선 CD를 갈려 방문을 열고 들어가 플레이어 앞에 서서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서재로 짐작되는 방에 창가로 책상 하나와 빙 둘러 책장에 많은 책이 있었고 한쪽 귀퉁이 CD 플레이어 옆 수납 장에는 꽤 많은 디스크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플레이어 옆에는 금방 들었던 것처럼 "바흐"의 '골드 베르크'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이 음악은 오래전 태준이 혜영이와 영전이가 작업실에 놀러 왔을 때 가끔 들려주었던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이었다. 멍한 가슴에 처음으로 혜영에 대한 안쓰러움이 스쳐 애틋함으로 느껴졌다. 주로 재즈나 팝을 좋아했던 그녀였는데 태준이 좋아하는 것 등에 그녀도 똑같은 관심이나 취향을 가지려 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여러 가지를 공유하고 이해함으로 뭐든 같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태준은 두 CD와 금방 눈에 띄는 "오스카 피터슨"의 재즈 CD로 교체하고 주방으로 가 와인을 가지고 내려왔다. 내려왔을 때는 이미 골드 베르크가 들려오고 있었다.
"형, 나 재우려고?"
태준과 어울릴 때 클래식에 조예가 없었던 혜영은 깔깔대며 재치 있게 말하며 어색함을 무마하려 한다. 바흐가 한, 백작의 수면을 위해 작곡했다는 이 곡은 주제에 의한 변주가 끊임없이 연주돼 하품이 나올만한 음악이었다.
"응 그래 너, 그만 자라고!"
"형 영전이 안 궁금해?"
기어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혜영은 하고 말했다. 어쩌면 거쳐야 할 과정이기도 했지만 혜영은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였고 어떤 결론이든 짖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