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젊은 개혁자들에게(4)
동북아시아의 <악의 축 axis of evil>에 꿰인 쳇바퀴와 그 쳇바퀴의 다람쥐 상(像)은 거듭 우리 역사와 시대의 두 얼굴이 되고 있다.)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는 접어두고라도) 1997년 국가외환위기 이래 소인배들과 촌뜨기들의 (모든 천박하고 부패한) 화해와 타협은 낡고 부패한 자들의 참된 몰락을 요구하는 현실의 필연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개혁의 중심이 되려는 민중의 의지에 대해서도 유죄이다. 위대한 투쟁과 혁명의 정신에게 가장 천박한 비웃음을 던지는 자는 앞에 마주선 적들이 아니라 뒤에 쪼그리고 앉은 지적 개들과 정신적 하인배들이다. 이들은 <우리의 부패함을 공유하는 적들>과 <적의 부패함을 공유하는 우리 자신들> 사이에서 태어나는 시대의 열등아들이다. 이 무리들이 (만들어내는 회색의 미적지근함과 흐리멍덩함이) 한국정치를 겹겹이 둘러싸는 누더기 구실을 하고, (그 누더기 위에 사군자(四君子)를 점잖게 치고 장밋빛 시를 적어 넣는) 우리의 도학군자(道學君子)들이 늙은 정치꾼들의 열두 폭 십장생 병풍 노릇을 한다.
(김용옥은 <소리치고 침묵하는 것에도 때가 있다 語黙有時>라고 말한 바 있는데, 나는 오늘 ‘유시비(有是非)’를 말하고 싶다. <외침과 말없음의 때있음>을 넘어 그 선함과 아름다움을 다 이루려고 분투하는 선비들 중의 하나는 강준만일 것이다. 강준만은 한국정치의 비천한 세계상의 심연과 우리 안의 <내적 궁핍함>을 꿰뚫어보고 그것들이 만들어낸 ‘지옥(Inferno)'을 떠돌며 미래의 새싹들을 찾아서 노래한 존재이다. 한국정치사의 신곡(神曲)에서 그가 담당한 <지옥>편은 <선비다운 학문함>의 수많은 좁은 문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는 (철학의 형제로서는) ‘망치를 든 자(Nietzsche)’이며, (시의 자매로서는) ‘얼어붙은 영혼의 바다를 깨부수는 도끼(Kafka)’같은 존재이다. 그는 촌놈들의 개와 노새가 돼버린 한국정치를 세계정신의 주인과 마부(馬夫)로 만들어가는 길을 예비하는 시대의 일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예언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는”(잠언) 바, 선비가 말을 하지 않으면 누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말을 하겠는가? 우리가 되새겨야 할 말이 곧 <어묵유시비 語黙有是非>이다.)
이 한국적 자화상 아래에서 젊은 선비들의 <정치함>은 언제나 정치하는 거리마다 ‘뜻을 잃게 하는 玩物喪志’ 두 가지 괴물들과 맞서 싸우게 되는 바, <노예적인 속물들의 안락한 잠에 싸인 죽은 과거>와 <그 잠이 만들어내는 꿈을 정부(情婦)로 삼아 노는 미래>가 그것들이다. 현실은, 한편에서는 이리저리 불꽃을 퍼뜨리는 변덕스러운 열정과 공포가 지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쥐떼들의 얼어붙은 의식이 지배한다. 그리고 시대의 황혼이 무르익으면 잠들어 버린 주인들을 대신하여 자신들만의 저녁만찬을 즐기는 하인배들이 모든 영웅들과 투사들을 조롱하며 군림한다. 이 놀이판을 바라보며 꿈의 대가인 한 시인의 경구를 음미해보자.
“잠은 기적들로 가득 차 있다.” (Baudelaire)
그리하여 (고대 중국 철학에 대한 몽상의 꽃밭과 한국의 현실세계에 대한 몽상의 꽃밭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우리의 지적(知的) 나비[蹀]들이 왕정(王政)과 민주정(民主政)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몽상으로 비약하고, 속물들과 정치적 아첨꾼들의 모든 기회주의적 비판과 양비양시론(兩非兩是論) 따위가 철학과 현실의 성난 얼굴을 대신하여 가장 현학적인 위안거리와 무지한 정치 놀음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역사가 노무현이 능력 있는 대통령이 아니라는 사실보다는 노무현이 왕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 본질적인 주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는 분명 민주라는 패러다임을 이 땅에 구현하는 최초의 대통령임에 틀림이 없다. (---) 그는, 내가 국정의 부동(浮動)에 대한 책임을 묻자,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자제하는 것이 개혁의 시작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러한 그의 자세를 무위(無爲)의 철학이라고 표현했는데, 요즈음 우리 국민은 그의 무위를 단순한 무능력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 같다.” (김용옥) "노무현은 시대정신이 낳은 미숙아이다. (---) 왜냐하면 그런 시대가 오기 전에 먼저 나왔기 때문에(---)그래서 실수도 오류도 많다.” (유시민) “한나라-민주 통합은 매우 고무적이다. 우리 정당사에 지역구도의 가장 본질적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20세기 한국 정당사의 종료를 의미하기도 한다. (---) 그러나 정치인 박근혜는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무엇을? 결코 그녀는 ‘박정희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김용옥) “호남 소외론이 더 확산되고, 구주류가 신주류를 더 공격해야 한다. 호남 쪽이 흔들흔들해야 영남 유권자들로부터 표를 달라고 할 수 있다.”(신기남)
그러나 (촌뜨기들이 자기 몽상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토해내는) 정치적 헛소리들이, 노무현을 한국 최초의 민주정의 대통령으로 추켜올리고, 우리의 박근혜에게 (하늘이나 땅으로도 피로도 지울 수 없는) 자신의 아버지 박정희를 부정하는 역사적 투사가 될 것을 엄숙히 요청하며, 신기남 같은 비천한 자들이 촌뜨기정치꾼들로 하여금 전라도와 한국인들을 널판 삼아 밟으며 경상도를 높이 들썩거리게 하도록 선동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마땅히 그러한 바>를 <스스로 그러하게> 드러내고 실현할 것이며, 이런 무리들 또한 무자비하게 징벌할 것이다.
(<모든 때와 곳에 하나의 왕이 있음>에서 <모든 때와 곳에 만인의 법이 있음>으로 변하는 세계상을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정치와 관련하여 ‘무위(無爲)’에 대한 나의 비유적 설명은 이렇다. <널리 행하여 온 나라의 삶터에 가득함>도 무위(無爲)이고, <스스로 그러하지 않음이 없음>도 유위(有爲)이다. 더 단순하게 비유하면, 고대 중국의 우(禹)가 천하의 모든 농사를 자기 뜻대로만 지으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德스러운) ‘무위’를 말할 수 있으며, 모든 백성들이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큰물을 잘 다스렸으므로 그의 (仁한 ) ‘유위’를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문명사의 보다 높은 척도는 (<무위의 德스러움>이든 <유위의 仁함>이든 그 무엇이든) 그 주체인 민중의 보편적인 지적 정신적 세계상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하느냐 안 하느냐보다는) 자신이 민중의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민중의 현실이 자신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참되게 정치함>의 진실한 바탕이다.
몽상의 혁명은 현실의 반동(反動)에게 패배하고, 몽상의 반동은 언제나 현실의 혁명에 의해서 분쇄된다. 그러므로 뛰어난 리얼리스트(realist)는 먼저 반동을 (그 현실적 기반에서 드러내어) 하나의 몽상으로 만듦으로써, 그리고 그 몽상이 (시대의 회색빛 속에 숨어 속삭이거나 변신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안가(安家)에서 기어 나와 끝없이 헛소리를 지껄이게 하여 자신의 실체를 스스로 폭로하게 함으로써, 현실로 하여금 정확하고 철저하게 그것을 분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대들이 본질적으로 하는 것은 없다. (현실이 그대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대들이 현실을 통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현실 그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다.
노병 덩샤오핑이 현대 중국을 향하여 <사실 스스로 자신의 그러함을 드러내게 하라 ‘Let the facts speak for themselves.’>라는 단순한 말 하나를 용기 있게 실천했을 때에 그 자신도 뛰어난 개혁자이자 가장 젊은 영웅적 투사가 될 수 있었음을 보라. 북한의 촌뜨기 공산주의자집단이 (중국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모든 것에 대한 <독재적인 몽상의 유위> 속에서 허풍을 떨다가도 비천한 <시대현실의 무위>로 거듭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라. 아마도 이 말을 (<어쨌든 현실의 결과가 모든 걸 말해준다.> 라는 의미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타락한 정치상으로 보여준 자들이 남과 북의 그리고 세계의 여러 촌뜨기 독재집단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헛된 자기몽상과 독선의 덫에 사로잡혀서도 안 되며,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딛고 선 땅, 자신이 위치한 세계현실의 진실과 거짓을 살피는 것이고, 자신들을 낳고 키워준 현실의 진실한 힘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며 더 높고 크게 발전시키는 일을 가장 먼저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을 창조적으로 만들어가는 힘의 참된 중심이 곧 중도(中道)이다. 중도는 뜀뛰는 널판 가운데에 오뚝이처럼 서서 자기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 그 자신 안에 참된 중도가 있으며, 중도는 자기중심과 뿌리를 움켜잡은 혁명의 실용주의이며, 현실을 현실 그 자신의 힘으로 이끄는 리얼리스트들의 전략과 방법론이다. 따라서 김근태의 숨은 고뇌와 충직함이, 겉으로 드러난 <바보 온달>의 고뇌로 과장되고 그 충직함으로 미화(美化)된 노무현 속의 또 다른 경상도 촌뜨기 상(像)보다 열 배는 더 아름답고 더 솔직하다. 나머지는 위선과 배신과 기회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중도파를 강경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나는 신주류 강경파와 구주류 보수파들의 입장을 모두 아우르는 원칙을 고집했다. 그 원칙이란 새로운 정당의 탄생이, 80년 광주사태부터 노무현 정권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공헌을 한 지역민중과 더불어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호남 대중은 어떠한 다른 지역 대중보다도 민주화에 헌신했으며 뚜렷한 정치의식을 견지하였다. DJ의 정치적 그늘에 숨어 역사를 도태시키는 소수 호남 정치인들에 대한 미움 때문에 호남 대중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김근태)
유위나 무위 그리고 덕치(德治)나 인치(仁治)에 대한 현학적인 헛소리들은 이제 집어치워야 할 때이다. 보잘것없는 촌뜨기들이 겸허하게 귀 기울이지도 않고, 염치와 신의도 없으며, 지혜와 능력도 없으며 성실하게 노력하지도 않는다면, 유위나 무위를 따지기 전에, ‘도대체 너는 무슨 할 일과 어떤 쓸모가 있어서 그 자리에 있느냐’고 물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장관 따위가 되겠다고 여기서 큰소리치고 저기서 노래 부르는 자들에게도 같은 물음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진실하고 올바른 답과 그것을 실천할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무식하게 총칼을 휘두르거나, 긴 혀로 말만 잘하거나, 자신을 따르는 정치적 촌놈들의 머릿수가 상대적으로 많으면)누구나 할 수 있는 권력자>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주체정신 및 그 세계정신의 좁은門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주체정신과 세계정신을 가진 지도자들이 우리 한국인을 대표할 때에만 세계인들 앞에서 우리의 인격적 존엄과 양심, 우리가 만들고 기록할 민족의 세계사를 꿈꾸는 우리 자신의 힘과 정신적 아름다움을 당당하게 내보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고대 이래 한 지배계급이나 어떤 정치집단이 자의적으로 채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정치적 방법론이나 도구가 아니며, 더구나 한 인간의 행위가 어떠하냐에 따라 왕정과 민주정이 위아래로 춤추고 좌우로 오락가락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한 귀퉁이에서는 (충직한 <바보 온달의 옛 탈>을 벗고 <경상도 하회탈>로 새로 바꿔 쓴) 소영웅주의자가 이 사람 저 사람 욕하고 이 집단 저 집단과 좌충우돌하며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투덜거릴 때, 미국 촌뜨기 상(像)의 텍사스 카우보이인 부시(Bush)조차도 “대통령이라는 직책은 대통령 그 자체보다도 위대하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몽상가들을 뛰어넘는다.
(김대중을 포함하여) 노무현은 이제 정동영이든 김근태든 그 누구든 뒤에서 그들과 싸우는 영웅적인 주체도 아니고 그들 앞에 계속 버티고 서 있어야 할 장승이나 말뚝도 아니다. 노무현은, 그 자신에 대하여 더 많이 투덜거리고, 자기 종복들의 부패와 장밋빛 몽상의 큰 입과 긴 혀를 더 많이 꾸짖으며, 자신 속의 위선이나 또 다른 경상도 촌뜨기 근성과 더 많이 싸우는 자가 되었다면, 좋은 일을 좀 더 많이 하는 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고, 한국인의 정신과 꿈을 섬기는 충직한 <바보>로서 역사 가운데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하늘이 오늘날의 우리를 이미 다 보았듯이 시와 철학과 역사 또한 촌뜨기들의 시작과 끝을 다 보았다. 한국 민주주의와 그 세계정신은 (옛 역사의 낡은 쳇바퀴를 시대의 다람쥐들에게 장난감으로 남겨두고) 그 자신의 세계사의 새로운 큰 맷돌을 돌릴 것이다. 옛 것의 씨알이 썩어 죽지 않으면 어떻게 새 열매를 수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오늘날의 대통령선거이든 내일의 세계상이든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한 나의 비유이자 나의 소망이며 동시에 나의 예언이다. (知友와 더불어) 1997년 12월 한국인과 한국 민주주의가 자신들에게 닥친 국난(國難)과 시대의 인동초(忍冬草)라고 일컬어지던 김대중의 고난을 통해서 힘겹게 승리하는 역사의 첫 걸음을 내딛을 것이라고 믿고 예언했으며, (늙은 김대중이든 젊은 노무현이든) 그 누구든 한국인의 새로운 세계정신 속에서 다시 거듭나지 않으면 몰락할 것임을 경고하고 예언했듯이, 오늘날에도 하늘이 천 년의 비극과 투쟁을 품에 안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의 꿈을 거듭 사랑하여 그 피와 땀을 헛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으며 예언한다.
젊은 개혁자들이여, 정치하는 선비들이여, 밤이나 낮이나 민중 속에 있는 사람이 되라. 민중만큼 큰 사람이 될 것이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시와 철학과 역사 안에 있어라. 시와 철학과 역사만큼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맑은 사람이 될 것이다.
하늘을 보되 <백성 안의 하늘>을 보라. 네 머리를 남쪽이나 북쪽 그 어디에 두든, <백성 밖의 저 까마득한 하늘>을 이리저리 더듬으며 거짓말과 헛소리를 주절대지 말고, 오늘 이 땅 이 길 위에 서서 <백성 안의 그 검고 푸른 하늘>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며 일하고 또 일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
따라서 모든 빛깔 좋은 말장난들은 현실에 대한 단 한 번의 깊은 통찰만으로도 그리고 벌거벗은 현실 그 자신의 단 한 번의 ‘드러남’만으로도 썩은 짚단처럼 무너지고 흩어져 버린다. 우리가 말장난으로 꾸며낸 거짓과 환상의 모래밭 위에 어떤 주춧돌을 놓고 무슨 기둥을 세워 누구의 집을 지은들 그것이 온전하게 남을 것인가.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된 짓이 될 것이다.
(좌파적이든 우파적이든) 촌뜨기 몽상가들은 (참된 개혁자나 진정한 혁명가와 달리) 현실에 대한 몽상에서 몽상의 현실로 날아다니는 자들인 바, 이들의 개혁에 대한 몽상은 자신들의 몽상 그 자체를 개혁해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조차 새로운 몽상의 현실로 비약한다. 촌뜨기들의 몽상 뒤에 숨겨진 것은 언제나 (위대한 권위가 아닌) 자기몽상의 권력에 대한 천박한 현실적 집착이며, 자기 권력의 현실에 대한 불성실한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촌뜨기 몽상가들이 사이비 리얼리스트(realist)들과 같은 점은, 그들이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몽상에 대한 도취 때문에 현실을 경멸한다는 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자신의 몽상의 높이로 끌어올리는 것이 곧 현실을 구제한다고 판단함으로써 (사실 이것은 현실의 구제가 아니라 자기 몽상의 현실적 구제에 대한 또 다른 몽상인 바) 현실과 몽상 사이의 부패하고 천박한 불륜을 통하여 몽상뿐만 아니라 현실 그 자체마저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사이비 리얼리스트들이 그런 불륜의 사생아이자 열등아인 그것만큼 촌뜨기 몽상가들 또한 그러하다. 이것이 노무현과 그 종복들에 대한 나의 비유적 표현이다.
또한 밤새도록 자신의 잠이 만들어낸 꿈의 현실 속에서 길고긴 탁상논쟁을 벌이던 우리의 젊은 돈키호테(Don Quixote)들은, 민중들이 시대의 아침을 향하여 영웅적인 삶의 투쟁을 시작하려 할 때에는 늙은 말 로지난테(Rosinante)가 되어 주저앉아 버리고, 민중들이 현실의 무거운 짐을 자신들의 등에 지우려 할 때에는 재빨리 로지난테에서 돈키호테로 변신하여 자신의 창을 들고 언덕 저편의 세계로 달려가 버린다. 우리의 민중들은 산초 판자(Sancho Panza)가 되어 힘겹게 시대현실을 맨발로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이것이 한국 민주화 운동 내부의 일부 촌뜨기들과 몽상가들에 대한 나의 비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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