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잘 써지지 않아 뒤척이다가
가을무 사다가 섞박지 김치도 담그고
메줏가루 쌀조청 사다가
보리고추장도 담그고
세탁기도 돌리고
고구마도 삶는다
유난 떨어봐야 원래 그 자리다
찌륵찌륵 헛도는 LP판 소리도 정겨운 오후
까악 까악 까마귀가 운다
도회지에 웬 까마귀가 극성스럽게 울어대는지
옛날 귀신 영화에나 나오던 새다
타국에서는 길조 라던데
아무튼 뭔가 혼재되어 서성거리는 오후다
오늘도 창공에는 천국의 계단이 보인다
맑고 고운 가을 하늘이다
혹시 지옥으로 가는 문도 보일까
자세히 바라본다
계단 숫자를 세다가 포기한다
문밖에 우체국 택배가 왔다
심쿵 할인의 묵은 김치 배달이다
묵은지 찜을 끓인다
천 번도 더 들은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이 선율 타고 흐른다
기타 울림이 죽은 친구 손가락 닮았다
나는 브람스가 좋다
음악을 들으면서 무청을 말려 시래기를 만든다
한겨울 구수한 시래기 된장국을 생각하면서
티브이 홈쇼핑에서 '세부' 여행상품 방송이 나온다
같은 상품이 199,000 원에서 1,390,000원까지 금액 차이가 엄청나다
무슨 조화 속일까
호핑투어에 아로마 오일 마사지까지 포함이다
아, 가고 싶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아
이것저것 두리번거리고
딴짓을 감행한다
그분이 올 때까지 딴 일에 몰두한다
옷가지를 정리해 버릴 것을 골라낸다
스테인리스 찜통, 곰국 들통도 버려야겠다
혼자 먹을 일인용 냄비 하나면 족하다
턴테블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LP판을 돌리는 오늘
삑삑 힘겹게 돌아가는 음반 돌아가는 삼각지마냥 조선시대 음악을 듣는다
'사의 찬미'는 곡소리 같다
'돌아오지 않는 강'은 콰이강의 다리밑 물길처럼 깊다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나는 혼자다
나를 부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부유한다
그 소리가 마치 타임머쉰을 탄 시공처럼
아주 먼 시대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