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전설 - 투금탄에서 조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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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0.12. 19:18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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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전설
투금탄에서 조강까지
옛 양천(陽川) 고을은 갈대숲이 우거지고 한가로이 물새가 노닐던 아름다운 한강변 마을이었다. 30여 년 전 서울로 편입되면서 오늘처럼 삭막한 도시 한복판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양천향교가 위치한 궁산 주변만은 지금도 옛 풍정이 남아 있다.
양천에 있는 구멍바위
영등포 공고 정문 앞에 지금은 동굴로 남아 있다.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양천 고을의 역사는 강변에 우뚝 선 두 개의 바위에서 비롯된다. 두 바위 중 공암(孔岩)이라 부르는, 구멍 뚫린 바위가 특히 이 고을의 특색을 잘 드러낸다. 그 옛날 원시인들이 조개를 채취하고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살았음직한, 이 동굴을 일러 고구려 때는 재차바위〔齊次波衣〕라 했고, 신라 때는 구멍바위란 뜻으로 공암(孔岩)이라 적었다. 현재 영등포공고 정문 앞에 동굴로 남아 있는 이 바위를 ‘허가(許哥)바위’라고도 부르는 것은 이곳이 바로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양천 허씨의 이름에서 외자를 택하고 있는 것은 성명 석 자에서 이 구멍에 해당하는 중간자를 없앤 데 연유한다던가.
공암 양천 고을 강변에 서 있던 바위 가운데 하나로, 옛날 원시인들이 조개를 채취하고 고기를 잡아먹으며 살았음을 짐작하게 해 주는 공암(孔岩)은 고구려 때는 재차바위, 신라 때는 구멍 뚫린 바위란 뜻으로 적었다. 지금 영등포공고 앞에 동굴로 남아 있는데, 이 바위를 가리켜 ‘허가바위’라고도 한다. 이곳이 바로 양천 허씨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
양천의 궁산에서 내려다 본 한강변
올림픽대로가 놓이는 바람에 물줄기는 물론 강변 풍경이 옛날과는 크게 달라졌다.
또 하나의 바위는 큰 홍수가 났을 때 경기도 광주에서 굴러왔다는 광주바위이다. 본래 강 가운데 있던 이 바위는 그 외곽으로 올림픽대로가 건설됨으로써 강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다만 주변이 아파트 단지로 변한 오늘에 와서 가까스로 구암공원이라 이름한 인공호수에 그 바위가 남아 있음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겸제(謙薺) 정선(鄭敾)이 그린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의하면 이 두 바위는 분명 강 한가운데 있었는데 세월의 흐름은 이처럼 명승지를 도심 속에 가두고 말았다.
양천 고을은 두 개의 바위와 함께 두 분 성인의 족적도 간직하고 있다. 한 분은 《동의보감》을 저술하여 의성(醫聖)으로 추앙받는 구암 허준(許浚) 선생이요, 다른 한 분은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한 화성(畵聖) 겸재 정선 선생이다. 겸제 선생은 한때 양천현감을 지낸 인연으로 지금도 향교에 그의 선정비가 남아 있다. 그러나 선정비보다 현감 재직시 궁산에 올라 강변의 절경을 화폭에 담아 오늘날까지 이곳의 옛 모습을 생생하게 남기고 있다는 점이 더 돋보인다.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지만, 이 고을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전설의 산실이다. 투금탄(投金灘)이라 불리는 곳, 다시 말해 형제가 우의를 위해 황금을 던져 버렸다는 여울이 바로 이 근처라 한다. 《성산이씨가승(星山李氏家乘)》에 전하는 이 형제의 전설은 그 짙은 교훈성으로 인해 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다.
고려 말 〈다정가〉란 시조의 작자로 알려진 이조년과 그의 아우 이억년이 바로 전설의 주인공이다. 이들 형제가 젊었을 때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덩이를 주워 둘은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다. 그런데 강을 건너고자 양천나루에서 배를 탔는데 배가 강 가운데 이르자 아우가 느닷없이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린다. 깜짝 놀란 형이 아우를 나무라자 아우는 이렇게 태연히 답한다.
“황금이 귀한 줄 전들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이 금을 갖는 순간부터 형님이 미워지려 합니다. 형님이 없었더라면 두 덩어리를 모두 제가 가질 수 있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이런 액물을 어찌 몸에 지닐 수 있겠습니까.”
듣고 보니 동생의 말이 옳았다. 그 아우에 그 형이랄까, 형도 자신의 것을 꺼내어 마저 물 속으로 던지고 말았으니 황금이 결코 만능이 아님을 이들 형제는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속인들이 되새겨야 할 이 전설을 두고 이곳 사람들은 ‘김포(金浦)’란 지명이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믿는 듯하다. 형제애를 위해 금을 버린 포구, 말 그대로 너무 아름답기에 그대로 믿고 싶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어쩌랴.
투금탄 고려 말 이조년과 이억년 두 형제는 어느 날 길을 가다 우연히 금덩이를 주워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양천나루에서 배를 탔는데 배가 강 가운데 이르자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에 던진다. 형이 이유를 묻자 금덩이 때문에 형제의 우애를 해칠 것 같아 버렸노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형도 자신의 것을 강에 던진다. 그 후 이 여울을 두고 투금탄이라 불렀다. |
김포는 그 옛날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하고 있을 때 이 일대를 검포(黔浦)라 했고, 신라 경덕왕의 지명 개칭시에 이미 김포(金浦)라 기록하고 있다. 전설의 주인공인 이들 형제가 고려 말 인사들이고 보면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또한 ‘검’이나 ‘금’은 황금을 뜻하는 금(金)이 아니라 방위상 뒤쪽에 있는 포구란 뜻으로 쓰인 말이다. 금을 버린 포구에서 명명되었다면 김포가 아니라 ‘금포’라 불러 주어야 마땅하다. 하긴 김포벌은 서해안으로 돌출한 반도로서 그 넓은 개펄이 황금 옥토로 변모하였고, 게다가 이곳에 국제공항이 생겨 우리나라의 관문이 되었으니 ‘황금의 포구’란 뜻으로 새겨도 그리 틀린 해석은 아닐 듯하다.
한강의 물굽이는 달라졌어도 강물은 여전히 양천 고을을 적시며 흐른다. 궁산의 소악루(小岳樓)에 오르면 강 건너 행주산성이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역사의 현장, 선열의 체취를 느끼며 민물 장어구이를 맛볼 수 있는 곳이 행주산성의 매력이다.
양천의 궁산에서 내려다 본 한강
강건너 행주산성 이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사생대회를 열고 있다.
행주(幸州)라 하면 우선 임진왜란 때의 맹장 권율(權慄)과 행주치마와의 연관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행주치마의 어원 역시 아름다운 착각이다. 금을 버린 포구라서 금포, 또는 김포가 아니듯 행주대첩 때 부녀자들이 앞치마로 돌을 날랐다 하여 행주치마란 말이 생긴 게 아니다. 행주(行廚) 또는 행자(行者)는 지명 행주(幸州)와는 무관하며, 행주대첩이 있기 70여 년 전에 출간된 《훈몽자회》에 이미 이 어사가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성 밑 행주나루는 예로부터 삼개나루〔麻浦〕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으로서 주변에 주막이 즐비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국밥에 모주 한 사발로 허기를 때우는 게 고작이었겠지만 지금은 장어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고급 식당들로 흥청거리고 있다. 산성을 오르면서 여러 쌍의 신혼부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들은 신혼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이곳 산성에 오르면 반드시 득남한다는 속신을 믿고 있었다. 그 속신이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장어구이로 미리 정력을 보강해 둔다는 의미는 아닐 터이다.
산성을 스쳐 행주대교 밑으로 흐르는 한강은 이내 민족분단의 상처를 안은 임진강을 만난다. 두 물줄기가 어우러져 서해에서 몸을 풀기 직전까지의, 이 드넓은 흐름을 우리는 할아버지의 강, 즉 조강(祖江)이라 부른다. 한강과 임진강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 조강은 지금 어떤 모습인가? 수많은 아들과 손자 강을 거느린, 이 할아버지 강은 이 시대에 이르러 분단의 현장, 다시 말하면 한민족 한탄의 강이 되고 말았다.
조강리와 가금리 사이에 있는 작은 동산 애기봉(愛妓峰)에 오르면 이 비극의 현장은 극명하게 우리 눈앞에 드러난다. 애기봉 전망대에 서면 지금은 갈 수 없는 북녘 산하와 동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어우러지는 장관을 함께 굽어볼 수 있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류(合流) 광경을 일러 두 강이 만나서 합친다는 표현보다는 두 강이 서로 어우러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실제로 두 강이 서로 어우러지는 지점을 일러 옛날 고구려 때는 ‘어을매〔於乙買〕’라 불렀고, 신라 경덕왕 때는 이를 한역하여 ‘교하(交河)’라 적었으니 지금의 파주 교하면(交河面)이 바로 그곳이다.
애기봉에서 본 조강
한강과 임진강이 어우러지는 이 할아버지 강〔祖江〕은 민족분단의 상처를 안고 흐른다. 애기봉 전망대에 서면 서쪽으로 자그마한 섬 유도(留島)가 보인다.
서해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조강 한가운데 작은 섬 하나가 위태롭게 떠 있다. 자칫하면 서해바다로 빠져들 뻔한 아슬아슬한 모습, 가까스로 조강의 끝 지점에 머무르게 된 이 섬을 ‘머므리섬’이라 부른다. 한자말로는 유도(留島)라 일컫는, 이 무인도가 얼마 전 한 마리의 소로 인해 세인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홍수로 강물에 표류하던 소가 어찌어찌하여 이 섬에 상륙하게 되었고, 사경을 헤매는 소를 구출하기 위해 우리 국군이 대대적인 작전을 펼친 그 사건 말이다. 사소한 일 같으나 유도 황소 구출작전이 상징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이제 얼마 안 있어 남북이 하나 되는 어울림의 합창이 이곳 조강에서 울려퍼질 것이니, 이런 염원은 전망대에서 조강을 내려다보는 필자만의 염원은 아닐 것이다.
조강 행주대교 밑으로 흐르는 한강이 임진강과 만나면서 두 물줄기가 어우러져 서해에서 몸을 풀기 직전까지의 드넓은 흐름을 할아버지의 강, 즉 조강이라 부른다. 조강리와 가금리 사이에 있는 애기봉(愛妓峰) 전망대에 서면 북녘 산하와 함께 한강과 임진강이 어우러지는 장관을 굽어볼 수 있다. 조강 한가운데 얼마 전 한 마리 소로 인해 세인의 주목을 받은 유도가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투금탄에서 조강까지 (물의 전설, 2000. 10. 30., 천소영, 김동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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