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예배 찬양이 좀 단단해지는 것 같아요. 뒤에서 들을 때도 그렇고 또 제 앞에서 성도님들과 같이 찬양할 때도 좀 찬양이 단단해진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오전 예배는 조금 푸석푸석한 찬양이라면 오늘은 좀 딴딴해져요. 그래서 제 생각에 그러니까 조금 더 힘을 모으면 오늘도 상보다 많이 오셨어요. 한 60명 가까이 오후에 오신 것 같아요. 많이 오셔서 감사한데 좀 더 힘을 모아서 코로나 이전으로 제가 본당에 한 80~90년을 이렇게 차도 예배가 훨씬 더 이렇게 은혜롭게 진행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있어요.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우리 예배에 대한 갈망을 갖고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성도와 성도가 다양한 모습으로 만나요. 목장이라는 모임에서도 만나고 또 어떤 사역을 위한 특별한 모임 가운데도 우리가 만나요.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그러니까 아마 사회 공동체 중에 인간적으로 사람을 가장 많이 부딪히는 데가 교회일 거예요.
그런데 교회 안에서의 사귐은 세상과의 사귐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오늘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임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인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의 만남은 동창끼리 만남이고 아니 기호에 따른 만남 족구를 좋아해서 이렇게 만남이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만남은 우리가 어떤 모습을 만나든지 간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만남이라는 거예요. 6절 하반절에 보면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귐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단순한 인간적인 만남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시기 때문인 겁니다. 성도의 만남에 뭐가 문제가 있다면 여기서 원인을 찾아야 돼요.
우리가 우리 만남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는가 우리의 만남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는가 여기서 찾아야 돼요. 세상에서 이 공동체나 만남이 잘못되었을 때는 뭐 다양하게 찾아야 돼도 우리가 진짜 좋아하는 걸 하고 있는가 이런 걸 찾아야 되겠죠.
그러나 교회 안에서 사임의 문제가 되었을 땐 우리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하신 자를 가장 먼저 찾아야 된다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열심히 모이고 교제하는데 하나님의 통치가 없거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공동체나 우리의 모임과 사임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는 것,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둠 가운데 행하지 않는 것,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모임과 성도의 교재가 악한 일을 하는 것을 결정하거나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한 일을 결정하거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하심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훌륭하고 큰 사역을 위해서 모였던 공동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사귐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 죄가 있으며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부인하거나 하면 이거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공동체가 아니고 교회의 사귐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빛 가운데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빛 가운데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사귐이 빛 가운데 있지 않으면 빛이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세상의 환략이나 쾌락을 경험하려고 우리가 교제를 만든 건 아니잖아요.
그럼 우리 교제 안에는 그 공동체가 빛 가운데 걸어야 빛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좋은 사임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죠. 우리 교회 통치자이신 우리 만남의 통치자이신 우리의 사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인데, 그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길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불의를 행하거나 우리가 악을 결정하거나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걸으면 빛이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성도가 빛 가운데 있기 위해서 우리의 모임과 교재와 사임이 빛 가운데 있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가 해결돼야 돼요.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오. 우리의 교제가 온전해지려면 자신의 죄를 살피고 만나야 돼요.
여러분 세상의 공동체는 빨리 지쳐요. 그리고 교회 공지 물론 교회가 성도들이 선교를 위해서 a라는 b라는 교회가 모여서 선교를 같이 하자는 그것도 교회의 공동 공동체이지만, 기본적인 이렇게 로컬 처치 목장 교회 안에 있어서 교재가 온전해지려면 교제가 오래 가고 재미있고 즐거우려면 죄의 문제가 해결돼야 된다는 거예요. 공동체가 함께 지은 죄도 있겠죠 그러나 자기 개인이 지은 죄가 해결돼야 사귐의 재미가 있어져요.
왜 교회에서 끊임없이 회개하라고 할까요? 그 회개가 기독교의 진수를 맛보게 하기 때문인 거예요. 우리가 죄로부터 회개하고 죄와 멀어져야 공동체의 진수를 맛볼 수 있고 예배의 진수를 맛볼 수 있어요. 우리가 죄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면 예배의 진술을 공동체의 진술을 맛볼 수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왜 공허할까요? 교회를 오고 다니는데 공허해요. 참됨을 경험하지 못하면 공허합니다. 사람이 참을 경험하면 공허함이 사라져요. 그래서 교회 생활은 정말 잘못하면 재미없고 지루하고 따분하고 막 괴롭고 막 짜증 나고 감사합니다. 아멘을 한 번도 안 해주셔가지고 아멘 할까 봐 마음이 좀 졸렸는데 한 번도 암에 안 하셔가지고 속으로는 아실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마음이 나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교회는 잘못하면 잘못하면 공허해져요.
교회가 공하다는 것은 우리와 우리가 진실로부터 참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참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곧 죄인 거죠. 죄가 있으면 우리 교회를 인도하시고 통치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이 계속 공허해져요. 예배도 공허해지고
여러분 실은 정상적이라면 어떤 걸까요? 오전 예배도 즐겁고 오후 예배도 즐겁고 성도들과의 모임도 즐겁고 청소하는 것도 즐겁고 이래야 되잖아요. 정상적이라면 이 따지고 보면 또 오후 예배는 왜 또 드리지 청소는 외부 업체들 불러서 시키지 뭐 등등 우리가 때로는 막 이런 불평과 불만이 나는 건 좀 지쳐서 그럴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타고타고 들어가 보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죄라는 거죠.
누군가를 때리고 누군가를 욕하고 누군가를 빼앗아야만 죄가 아닌 것은 아시죠? 하나님께 불순종해도 죄인 거잖아요. 그분의 통치 앞에 내가 무릎을 꿇지 않아도 죄인 거고, 그분이 그 심 앞에 내가 나를 내어드리지 못해도 죄인 거예요.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부르셔요. 어떤 사역으로 어떤 또 모양으로 이렇게 우리를 불러 이끌어가셔요. 우리가 그 앞에 그 통치 안에 있기에 순종하지 못한 것 또한 죄인 거죠. 이런 죄가 기독교의 진술을 맛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초대교회는 제자 훈련도 없었고 지금처럼 이렇게 갖춰진 예배도 없었어요. 우리처럼 많이 모여서 예배하는 장소도 거의 없었고 대부분 소규모 단위로 모여서 예배했어요. 아마 음식도 우리처럼 화려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성도들 각자 각자의 어떤 퀄리티, 개인적인 어떤 그런 것도 지금보다 훨씬 더 못했을 거예요.
근데 그들은 왜 함께 모이는 게 즐겁고 행복하고 모이기를 힘써 애썼을까요? 그들이 죄와 멀리하고 그래서 기독교의 진수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 십자가를 전할 수 있는 거죠. 그 십자가를 맛봐야 십자가를 아는 거고 알아야 내가 십자가를 전하게 되는 거잖아요.
형제의 말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그냥 가볍게 하면서 들은 이야기라서 어떤 우리 저희 목장의 형제가 자기는 오직 스리랑카 영혼에만 관심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좀 가볍게 하는 말이지만 내심 제 마음에 되게 깊었어요. 맞아 교회가 저래야지 내가 즐겁지나 즐겁냐 즐겁지 않냐보다는 우리가 정말 영혼에게 관심을 갖고 이 영혼들을 어떻게 자라고 구원하고 돌볼까에 교회가 정말 집중되어 있어요.
근데 우리는 항상 보면 어때요? 나는 피곤해 나는 지루해 나는 재미없어 나는 인정받지 못해 사람들이 나를 잘 안 알아줘 내 수고는 사람들이 무시해 막 이런 관점인 거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진수를 맛봐야 그런 좀 주변적인 것들을 좀 벗어날 수 있어요. 그 진수는 언제 맛보느냐 죄와 멀리할 때 맛볼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죄를 멀리해야 십자가를 맛보는 거고,
여러분 죄와 십자가는 상극이에요. 이거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도 경험한 일이 별로 없잖아요. 왜 없냐 하면 죄와 십자가는 상극이야. 그러니까 죄를 못 박아야 하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죄와 십자가는 화목한 모습으로 못 만나요. 그 모습을 박아야 되는 곳이니까 십자가가
우리가 여러분도 아마 교회를 다니며 꿈꿀 거예요. 우리 교회가 이랬으면 좋겠다. 우리 목사님이 이랬으면 좋겠다.
우리 성도님이 반대로 저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우리 교회 권사님들이 이랬으면 좋겠다. 우리 교회 집사님들이 이랬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저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는 우리의 사귐이 온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사귐이 온전해지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죄와 싸우고 죄를 멀리하고 기독교의 진술을 맛보아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 공동체가 아름다워지고 능력 있게 됩니다.
좋은 가정을 세우는 비법은 뭘까요? 그 가정이 죄와 싸우는 거고요. 좋은 교회를 세우는 비법도 그 죄와 싸우는 거예요. 좋은 공동체를 세우는 비결도 죄와 싸우는 거죠. 그래야 좋은 공동체가 됩니다. 죄를 방치하는 건 우리 몸에 암을 방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암이 발생했을 때 방치하지 않잖아요. 어떻든 해결해보려고 하잖아요. 특별히 신약들 한 번 투입하는 데 막 3천만 원씩 이렇게 드는 것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막 암 환자들이 결정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암을 벌리고 나면 막 빚을 수없이 지는 거예요. 환자들은 낫고 싶어 하고 어떤 의사들은 고치고 싶어 하고 물론 그 안에 뭐 이상한 경제적인 뭐가 있을지 잘 모르지만 이게 잘 만나가지고 엄청난 돈이 희생이 돼요.
이처럼 우리가 암을 방치하지 않듯이 공동체 안의 죄도 방치하면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사귐 안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거예요. 그래야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유익을 얻을 수 있어요. 단순히 즐거운 것의 이상의 유익, 단순히 좋은 것 이상의 유익을 공동체 안에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우리의 사귐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으려면 죄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됩니다. 왜냐하면 죄와 빛이 함께할 수 없고 죄와 하나님이 함께할 수 없고 죄와 진리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세우는 비결은 우리 스스로가 죄와 싸워서 죄로부터 멀어지는 겁니다. 그럴 때 크게는 우리 교회라는 공동체가 든든히 서가고 작게는 우리 가정 또 가정이 작은 건 아니죠. 그냥 규모로 따질 때 작은 두께 안의 소그룹들이 튼튼해지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은 그 진수를 맛보려고 자꾸 이렇게 오려고 해요.
나 데려가면 안 돼요. 사람이 신기하게 사람들은 자기 살 곳은 알아요. 사람이 신기하더라고요. 우리 막 맛있는 거 마치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우리 영혼도 자기 살 곳을 알아요. 바라건데 우리 교회가 많은 영혼들의 살 곳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죄와 싸워야 돼요. 그럼 여기는 살 곳이 되고 이곳에 오는 성도들은 살아나게 되는 거 그게 하나님이 마지막 이 때에 기뻐하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