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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뎨국신문 1898년 8월 10일 창간되었으며, 민족적인 자주정신의 배양과 대중의 지식 계발이라는 취지 아래 일반대중 및 부녀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한글 전용을 채택하여 한글의 일반화와 민족언어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
《일일신문》이 폐간되자 유영석과 이승만은 새로운 일간지 《뎨국신문(帝國新聞》을 창간하게 된다. 이 신문 발행은 이종일이 주축이 되어 1898년 8월 10일에 창간되었다. 같은 날 《매일신문》도 복간되었다.
《매일신문》은 《뎨국신문》(이하 제국신문) 창간을 지극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8월 12일자(제91호)부터 23일자(제100호)까지 10여 차례나 반복하여 다음과 같은 사고를 싣고 있다.
“근일에 제국신문이 새로 나왔는데 우리 매일신문과는 도무지 상관이 없으니 혹 신문 보시는 군자들이 제국신문을 매일신문으로 그릇 아실 듯하기로 자에 광고하나이다.” (매일신문 1898년 8월 12일자 잡보)
반면 이 광고를 게재한 후 보름쯤 뒤인 1898년 9월 5일에 창간된 《황성신문》에 대해서는 완전히 태도가 다른 광고를 내보낸다.
“황성신문이 그간 정지하였다가 일전부터 다시 확장되어 국문과 한문을 섞어 내는데 개명(開明)하는데 매우 유익하고 또 신기한 소문과 희한한 이야기가 많이 있으니 사방 첨군자는 많이들 사 보시오.” (매일신문 1898년 9월 5일자 잡보)
당시 신문들은 새로운 신문이 창간되면 많이 구독하라고 권유하는 기사를 싣는 것이 통례인데 《매일신문》은 《제국신문》에 대해서 편협하게 견제를 늦추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인쇄기 문제로 그만큼 감정의 골이 깊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승만이 《제국신문》의 주필이었기 때문에 논설 등에서 그의 글에 익숙해 있던 《매일신문》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킨 것 아닌가 여겨진다. 이것은 이승만의 논설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것을 반증한 것 같다.
《매일신문》은 자체 사옥과 인쇄시설이 없어 발행에 어려움을 겪다가 10월 10일에는 사옥을 다시 북촌에 있는 전에 중학교였던 건물로 옮겨 1899년 4월 폐간될 때까지 발행했다. 자체 인쇄시설은 1898년 12월 말에야 구비했다.
“우리 신문이 남의 활판에 박인고로(남의 활판으로 인쇄하는 고로) 혹 뒤지는 실수가 있으니 보시는 이는 참량들 하시오” (매일신문 1898년 11월 14일 잡보)
“매일신문사를 본월 초 10일에 북촌 이왕 중학 하였던 집으로 옮겼는데 그 집은 중학 다리 동편 안동 서편 북송현에 있으니 본사에 의논할 일이 있는 사방 염군자들은 북촌 중학 되었던 집을 찾아오시오”(매일신문 1898년 10월 10일자 잡보)
외세에 저항하는 한국 신문 전통 세워
《매일신문》의 가장 큰 공적은 한국 신문으로서 최초로 외세에 저항하는 전통을 심었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은 국력이 허약하여 외국의 이권 침탈과 간섭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시절이었다. 외국인들은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횡포를 일삼았다. 《매일신문》은 이런 외국의 행태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했다. 이런 문제는 《매일신문》 이전 《협성회회보》 시절에도 수시로 비판했었다.
〇…《인천신보》에 말하였으되 양인 찰례라 하는 놈이 요리집에서 술을 먹다가 우리나라 사람 수십 명이 구경하는 것을 총으로 놓으매 그 중에 한 사람이 맞아 탄알이 뼈를 뚫고 배로 들어가 거의 죽게 되었다 하니 그렇게 악한 오랑케 놈을 당장에 설문 못하였으니 듣는 자에게 분한 일이나 장차 정부에서 법률대오 조처할 일이어라.
〇…독립문 앞에 전 영은문 기둥 둘이 남아 있어 대단히 보기 싫으니 우리 생각에는 그것을 빼어 버리는 것이 좋겠고, 또 그뿐 아니라 전에 청국과 우리나라와 상관되어서 지금 독립국 권리에 관계되는 것은 무슨 물형이나 또 문자 상에 거리끼는 것은 일절 흔적도 없앰이 옳더라. (협성회회보 1898년 1월 22일자 제4호 내보)
러시아·프랑스의 무리한 요구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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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매일신문 창간호 지면 2), 《제국신문》의 창간에 대해 반감을 나타낸 《매일신문》 광고(매일신문 1898년 8월 12일자) 3), 《황성신문》이 유익한 신문이라고 구독을 권유하는 《매일신문》의 사고.(매일신문 1898년 9월 7일자) 4). 매일신문 편집인, 저술인, 발행인 겸 인쇄인을 공고한 지면(매일신문 1898년 5월 21일자) |
《매일신문》이 외세에 저항한 가장 두드러진 기사는 1898년 5월 16일자(제32호) 1면 논설에 실린 기사로 러시아와 프랑스가 이권을 요구한 외교문서를 폭로한 사건이다.
《매일신문》은 러시아가 목포와 진남포의 조계지의 사방 10리를 사겠다는 것과 프랑스가 평양의 석탄광 하나를 채굴하여 경의선 철도 부설에 사용하겠다고 정부에 요구한 사실을 폭로하였다. 프랑스는 이미 1986년에 경의선 철도부설권을 얻어 가지고 있었다. 이 기사는 같은 날자 일본인 신문 《한성신보》에도 게재되었다. 일본도 이권에 관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보도는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독립협회는 외부(外府·외교부)에게 사실의 전말을 밝혀달라고 요구하는 한편 외부대신에게 정부의 대책을 묻는 질의서를 보냈다. 이 보도기사에 놀란 러시아와 프랑스 공사관도 즉시 외부에 항의문을 보내왔다.
러시아 공사 마튜닌이 5월 16일 《매일신문》과 《한성신보》를 첨부한 항의 공문을 외부에 보내오고 프랑스의 플랑시 공사도 항의 공문을 보내왔다. 외교문서는 외부에 알려주면 안 되는 법인데 외부가 일부러 신문에 발설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배재학당은 정부의 보조를 받는 학교인데 그곳에서 발행하는 신문이 정부 외교문서의 기밀을 폭로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무례한 일이라고 하면서 신문을 규제할 법을 신속히 제정하여 이러한 사태를 미리 예방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러시아도 같은 논리로 정부를 계속해서 수차례나 압박했다. 그 항의 문서에는 《매일신문》의 해당 논설을 스크랩하여 첨부하여 보내왔다.
그러나 이런 열강의 압력에도 《매일신문》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5월 19일자 지면에 비판 논설을 실어 “어떤 사람은 저희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몇 만리타국에 와서 체면 불구하고 남의 토지를 얻어다가 저희 국가 밑에 속한바 되게 하며, 어떤 사람은 국은을 입어 벼슬을 하면서도 인심 좋게 남의 청을 잘 들어 말로라도 허락을 하려 하였는지, 사람의 경계와 의리는 다 마치 한 가지지만 이같이 등분이 있다”고 개탄하면서 국가의 이익을 지키지 못하는 한국 정부 고관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협성회는 5월 23일과 25일 특별회를 열고 프랑스 공사가 《매일신문》 기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한 사실을 규탄했다. 협성회는 양홍묵 등 5명을 총대위원으로 뽑아 만일 《매일신문》 기재원(기자)이 현저한 죄과가 있거든 의율징치(依律懲治)하고, 죄과가 없으면 죄 없는 이유를 프랑스 공사에게 밝혀 양국 교제상 체례에 서로 손함이 없게 하라는 편지를 외부대신 조병식에게 보내도록 했다.
최초의 신문 규제법(신문지법)
열강 공사들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외부는 마침내 ‘신문을 규제할 법률’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처음 외부는 한성부에게 이 법률을 제정하도록 의뢰했으나 한성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외부 독자적으로 제정하려고 작정했다.
바로 이 무렵 1898년 10월 30일 고종 황제가 내린 5개 항의 조칙 가운데 내부(내무부)와 농상공부가 외국 여러 나라의 예를 본떠 이 일 즉 신문지 규제법을 맡게 하라는 조항이 있어 내부가 맡게 되었다. 내부는 일본의 신문 조례를 모방하여 1899년 1월 전문 32조로 된 ‘신문조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신문조례’는 신문에 대한 가혹한 규제 조항이 너무 많다는 언론계의 반발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당시에 벌써 언론계(言論界)라는 친목회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신문조례’는 이 당시에는 무산되었지만 ‘최초의 신문지법’은 이보다 8년 뒤인 1907년 일제강점기에 제정되게 된다.
《매일신문》은 1899년 4월 3일까지 지령 287호로 폐간된다. 《협성회회보》의 지령 14호를 합하면 총 지령 301호이다. 폐간의 직접적인 원인은 경영난이었다. 이후 창간되는 모든 신문들은 경영난이라는 고질적인 병에 시달린다. 현재도 모든 신문사가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신문이란 생태적으로 경영의 문제를 타고 난 것인지 모른다. 경영은 영원한 숙제인 것이 분명하다. 또 한 가지는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정부에 의해 혁파된 것도 이들 젊은 개혁파들의 의기를 꺾는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 판단된다.
《매일신문》 인쇄기 황국협회 상무회사가 인수
아이러니하게도 《매일신문》의 인쇄시설은 상무회사로 넘어갔다. 상무회사란 독립협회를 혁파시킨 황국협회의 보부상들 회사이다. 1899년 4월 14일 상무회사는 이 인쇄시설로 상무회사의 기관지인 《상무총보(商務總報)》라는 상업신문을 창간했다. 그러나 30여 호를 발행하다가 재정난으로 직원의 임금도 지불하지 못하다가 휴간에 들어갔고 다시 9월에 제호를 《대한상무신보》로 바꾸어 국·한문 혼용체로 발행하다가 독자들의 반응을 얻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한국 신문사(新聞史)에 남긴 공헌도
언론학자 정진석은 《매일신문》에 대하여 언론사적으로 첫째, 타 신문에 자극을 주어 일간 신문 시대의 문을 열었고, 둘째, 《일일신문》, 《제국신문》, 《상무총보》 등의 창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며, 셋째, 한국 신문의 외세에 대한 저항의 전통을 수립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평가했다.
1989년은 《매일신문》, 《뎨국신문》, 《황성신문》 등 한 해에 3개의 일간지가 쏟아져 나온 해였다. 이것은 민간인도 자력으로 신문을 발행할 수 있는 사회 여건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최초로 ‘언론계(言論界)’를 형성했다. 최초의 언론단체인 ‘신문사 친목회’는 언론의 자유, 경영문제 등을 공동으로 논의하면서 1898년 10월 30일 정부가 러시아, 프랑스 등 외압에 의해 내부(내무부)에서 자체적으로 제정한 최초의 ‘신문지법’을 지나치게 언론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무산시키는 저력을 보였다.
민간신문이 급속하게 발전한 것은 ㄸ뚜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당시의 급변하는 정치 상황 때문에 국민의 새로운 정보에 대한 욕구가 분출하여 신문 창간을 촉진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경영상의 문제로, 비록 정부의 지원이 바탕이 되었지만 《독립신문》이 자립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민간 신문 경영도 잘만하면 자립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국사회가 드디어 신문이라는 미디어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