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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
저- 윤덕노
출- 더난
독정-2017.10.7.
· 건빵과 별사탕
물기 하나 없는 건빵만 먹으면 목이 메지만 별사탕과 함께 먹으면 입에 침이 고여 쉽게 먹을 수 있다. 18세김ㅁ만해도 100% 설탕으로 만든 별사탕은 귀족의 전유물로 일반 백성에게 사치품. 차 마실 때 곁들여 먹는 최고의 사치품. 일본 황실에서 별사탕을 특별한 행사의 기념품으로 선물했다. 만주와 시베리아는 겨울철에 눈 내니렴 흰색 지평선에서 건빵 속에 들어 있는 흰색 별사탕도 얼음덩어리처럼 보여 병사들이 질려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노란, 파란, 분홍, 보라, 녹색 다섯 색 별사탕을 만들어 전쟁터으 긴장감 해소 효과. 건빵에 별사탕 넣기는 1920년대로 추정. 건빵 먹는 고참은 건빵을 한두 개씩만 먹는다. 신참은 허겁지겁 건빵 먹가 급기야 물 찾아 고지를 내려가다 적 총탄에 죽거나 다쳤다. 그때 별사탕이 침샘을 자극해 물을 급히 안 찾도록 별사탕을 건빵에 함께 넣었다. 높은 온도에서 구운 별사탕은 순수 설탕 결정체라 날씨 변화에도 변질않고 보존기간이 3년이라 습기만 주의하면 2~30년까지도 본존이 가능하다. 전투식량의 보존기간으로 안성맞춤. 일본군에 입대하면 별사탕을 먹을 수 있으니 병사들 입장에서는 일왕이 직접 자신들에게 하사품이라도 내려준 것 같아 사기를 높였다.
·연유- 남북전쟁 일어나기 전에 연유가 개발되었다. 우유를 절반 농축시킨 후 설탕 첨가하면 부피도 줄고 통조림에 담은 후 뚜껑만 열지 않으면 몇 년씩 장기보관도 가능하다. 1850년대에 미국 사업가 게일 보든이 식품회사를 운영하면서 소고기를 가공해 비스킷을 만들어 팔려다 실패해 파산 직전에 소고기 건조 기술을 응용해 우유를 농축기술로 개발해 1856년 특허를 받았고 연유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신선한 우유가 있는데 굳이 농축할 필요 없고 장기보관도 필요 없었다. 남은 것은 버터나 치즈로 가공해 보관하면 편리하기 때문, 그가 특허를 받고 파산 직전이 된 지 5ㄴ연 후.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섬터 요새 구출작전이 필요했는데 섬터 요새는 미 남동부 해안 오새라 남군에서는 적군이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격 고립된 요새라 맹공을 퍼부었다. 식량과 탄약이 떨어진 섬터 요새 수비대는 워싱턴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구원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포격을 견디지 못해 항복하고 말았다. 이 섬터 요오새 전투를 계기로 북군이 군용식량의 개발의 필요성을 느껴 연유를 전투식량으로 사용했다.
· 참호 속 작은 행복 커피 믹스
“지금 진지 건너편에서는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지만 나는 지금 아주 행복합니다. 물만 끓이면 1분 안에 조지 워싱텉 커리를 타서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밤마다 조지 워싱텅을 위해 기도합니다. 조지 워싱턴이 복 받고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소원합니다.”
1차 세계디전 당시 유럽 전선의 미군 병사가 고향에 보낸 편지다. 인스탄트 커피가 널리 퍼진 것은 1차 세계 대전 무렵 군인들에게 지급되면서다, 그전에는 원두를 갈아 끓여 마셨다. 커피는 농부가 뜨거운 뙤약볕에서 일하다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헌 사발, 춥고 배고플 때 한기를 녹여주는 뜨거운 국 한 그릇 이상의 음료다. 특히 남북전쟁은 병사들이 매일 커피를 마시며 싸운 최초 전쟁이었다. 커피는 활력소이자 전쟁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는 유일 식품. 남군이 해안을 봉쇄당하자 커피 공급이 차단 평소 20센트였던 것이 60달러까지 치솟았다. 무려 300배. 북군에서 인스턴트커피를 만들었다. 상한 우유를 납품 받아 만들어 맛이 없고 잘못 먹은 병사들이 설사에 시달렸다. 널리 퍼진 계기는 1차 세계대전 때였다. 1901년 물에 녹는 커피 분말이 처음 만들어졌다.(일본계 과학자 사토리 카토 박사가 만들었는데 특허도 받지 않고 상업화도 하지 않았다) 조지 워싱턴은 바로 이 분말 커피를 응요유해 사업으로 발전. 원두를 갈갈아 끓일 때 수증기와 함께 나온 커피 가루가 주전자 주둥이에 분말로 엉겨 붙는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그는 이 기술로 특허를 받은 후 1910년 회사를 차려 조지 워싱턴 커피 브랜드고 사업 시작. 1917년 미국이 유럽 전선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을 대 대량의 분말 커피를 주문. 당시 미국 국방부에서는 전쟁부에 별도로 커피 담당 부서가 있었다. 미국은 혈장을 진공상태에서 동결 건조하는 기술을 개발, 부상병에게 수혈할 응급ㄷ용 형장을 냉동보관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기술은 항생제인 페니실린과 스토랩토마이신의 생산에도 활용. 구급약 생산 시설 역시 이 기술을 식품 생산에 활용.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현재 우리가 마시는 커피믹스다. 동결 건조된 커피 분말에 역시 같은 방법으로 생산한항 우유 분말, 설탕을 혼합한 것이다.
· 치클 껌
멕시코를 비롯 중남미에 풍부한 사포딜라 나무에 상처를 냈을 때 나오는 수액인 천연 치클을 이용, 고무나무 수액을 굳혀 만드는 고무를 대체할 합성수지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로 다량의 천연 치클을 수입했으나 실패- 토마스 아담스 역시 실패했다며 치클을 강물에 쏟아버리려 했다. 그 직전에 약국에 껌을 사러 온 소녀를 보고 고무를 대체할 합성수지 대신 십는 껌을 만들겟다는 아이디어로 고무처럼 딱딱하게 굳지만 씹기에 적당할 만큼 물렁물렁해 고무바퀴로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지만 씹는 껌으로 안성맞춤. 1871년 껌 만드는 기계로 특허를 받아 오랜지 향을 첨가해 식후 디저트용으로 껌을 개발. 사업에 성공함. 심심풀이로 기호식품에도 전쟁과 갈등의 역사가 숨어 있다.
· 술이 솟는 샘(주천)
강원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가 있지만 중국 서부 간수성에도 주천이 있다. 기원전 2세기 한 무제 때, 흉노를 물리친 곽거병 장군에게 한 무제가 술 한 병을 하사. 병사의 사기를 올릴 필요가 있어 곽거병은 “병사들이여, 여러분의 용기과 불굴의 투지 적분에 우리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적을 물리쳐 대승을 거두었다. 황제께서 여러분 노고를 치하해 여기 술 한 병 내렸다. 황제께서 보내신 술을 마시자!”며 샘물에 쏟아부었다. 곽 장군이 한 바가지 떠 마시고 이어 병사들이 샘물를 떠 마셔 사기가 하늘까지 치솟았다는 지명이 유래된다. 곽 거병이 귖족 출신이라 병사의 애로를 몰라 덕장은 아니었지만 자기중심적이라도 장병에게 인기가 높은 것은 곽거병 휘하 부대에서는 특진하거나 포상 받는 장교와 사병이 많았다. 평소에는 부하의 어려움에 관심 없지만 사기 올려야 할 때는 화끈했다. 샘물에 쏟아 부어 장병과 함께 마신 것도 마찬가지다.
· 눈칫밥을 먹으며 온갖 천대와 멸시를 받았던 한신은 유방을 만나 그를 도와 천하를 통일했다. 유방의 대장군 한신과 대립했던 제나라를 도우려고 항우가 20만 대군을 보냇지만 한신은 이를 대파하고 제왕에 봉해졌다. 한신의 능력에 두려움은 느낀 항우는 무섭이라는 사신을 보내 한신을 포섭하려고 유방으로부터 독립해 항우의 초, 유방의 한, 한신의 제, 세 나라로 천하를 삼분하자고 제안하자 한신이 거절하며
“내가 항우를 섬길 때는 벼슬이 낭장에 불과해 겨우 창을 들고 문지기 노릇을 했소, 그래서 한날라로 귀순했는데 유방은 내게 장군의 허리띠를 내리고 수만의 병력을 맡겼으며 자기 옷을 벗어 내개 입혔고 자기 밥을 나누어 주었으며 내 계책을 받아주었소, 그래서 내가 지금에 이르렀서ㅗ. 남이 나를 깊이 신뢰하는데 내가 먼저 배신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죽더라고 그 뜻을 바꿀 수 없소.”
<<사기>>의 <회음후 열전>에 실린 이야기다 자기 옷을 벗어주고 자기 밥을 나누어줄 정도로 각별하게 챙기는 것을 ‘解衣((해의)推(추)食(식)’이라 한다. 한신의 충성 또한 밥 한 그릇, 옷 한 벌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알아주는 것이라 한다. 라면 중 가장 맛있는 라면은 함께 라면이듯
·하늘에서 낙하한 빵, 만나
1945년 4월 29일부터 5월 7일까지 9일 동안 미국과 영국 공군은 네델란드에서 대규모 공습작전을 펴며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한 5월 8일에도 계속 이 폭격기가 폭탄 대신 빵을 네델란드 하늘로 날아가 빵을 투하했다. 영국 작전명은 ‘만나 대작전’이었다. 만나는 구약성경의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출발해 황야를 헤맬 때 하늘에서 내려준 빵의 이름이다. 영국 공군은 이 작전으로 6680톤의 식료품을 네데란드 땅에 ㄸ덜어ㄸ드렸고 미국 공군은 4천 톤의 빵을 공중에서 뿌렸다. 합쳐 10만 톤의 식료품이다. 굶주린 네델란드 주민에게 식량 제공이 목적이지만 자칫 독일군에게 군량을 대줄 수 있는 작전이었다. 또 폭격기가 격추될 가능성도 높았다. 이때 네델란드에는 450만 명이 살며 즈중 300만 명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상시 굶어 사망한 사람이 2만 2천명이었고 영양실조로 아사 직전이 3만명이었다. 유명 헐리우드 여배우 오드리 햅번 역시 소녀 시절 그 무렵 네델란드에서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때 처참 기억으로 오드리 햅번은 전쟁 영화에는 절대 출연하지 ㅇ낳았다. 이에 연합군은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굶어 죽는 대참사 앞이었다. 1944년 9월 17일 영국군이 펼친 마켓 가든 작전에서 몽고메리 원수는 영국 공수부대가 독일 점령지인 네델란드 후방으로 낙하해 라인 강을 잇는 다리를 점령함으로써 연합군의 진격 교두보를 확보할 계획으로 네델란드와 독일에 있는 독일군을 둘로 분히, 독일 코앞인 네델란드에 독일 본토를 공격할 거점을 마련하면 1944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겠다는 계획이었다. 영화 <라이언일병 구하기>와 <멀고 먼 다리> 배경이며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도 등장한 작전이다.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영국에 피신해 있던 네델란드 망명정부도 적극 도왔다. 나치 점령지에 있는 네델란드 철도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지시. 철도망을 마비시켜 독일군 탄약과 보급품의 수송을 지연하려고, 철도 노동자들은 장비를 내려놓고 지하로 잠적. 독일군 사령관은 1944년 10월에 네델란드 농촌에서 주요 도시로 들어가는 식료품과 연료 공급 루트를 차단해 버렸다.날씨는 추워지고 음식과 연료의 공급이 끊기면서 대도시 주민 450만 명이 죽게 되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독일군은 식료품 공급 루트 차난 조치를 6주 만에 철회했다. 그러나 철도운송 체계가 장상으로 돌아오지 않자 일주일 동안 감자 한 개만 배급되는 날도 많았다. 식량을 구하려고 숨겨둔 보석과 귀중품을 들고 하루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 시골 농장으로 가도 대개 썩어가는 순무와 튤립 뿌리만 얻었다. 연합군은 결국 폭격기로 대규모 식량을 투하하는 작전을 세웠다. 문제는 독일군의 반격이었다. 독일과 협상했지만 싶패로 끝나자 영국 공군이 모험을 감행. 4월 29일 먼더 두 대의 폭격기를 출격시켜 빵을 투하했다. 독일군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100~ 200미터 정도의 초저공비행으로 날아 낙하산 없이 그대로 빵 상자를 떨어뜨렸다. 만약 폭탄이라면 떨어진 폭탄 파편에 맞아 폭격기가 추락할 수도 있고 보병이 소총으로 격추시킬 수도 있을 정도의 낮은 고도였다. 순수 식료품임을 확인한 독일군도 대공포를 쏘지 않았다. 그 결과 9일에 걸쳐 1만 톤의 빵과 식료품을 공중에서 투하, 덕분에 수백만의 네델란드 주민이 죽음을 면했다.
· 포탄 대신 떨어진 초콜릿 사탕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고전 중이던 미국 해병대에 성탄절 선물 아닌 뜬금없는 초콜릿이 공수됐다. 수송기가 날아와 초콜릿 사탕을 잔뜩 뿌리고 돌아갔다. “지금 투시 몰이 바닥나기 직전이다. 더 이상 남은 초콜릿 사탕은 없다. 긴급 지원 바란다.” 중공군과 치열하게 교정 중인 제 1 해병사단의 박격포 부대 통신병이 다급한 목소리로 무전을 쳤다. 숨넘어가는 소리로 긴급하게 초콜릿을 지원해달라고 소리 질러대니 후방 통신부대는 어이가 없었다. 중공군에 포위되어 악전고투하는 상황에서 긴급하게 요청한 것이 지원 폭탄이나 탄약, 의약품이 아닌 초콜릿 사탕이었으니. 이유를 따져 물을 상황도 아닌 전투 현장이라 공군 수송기들이 수백 상자의 초콜릿 사탕을 싣고 출격, 장진호 주변을 에워싼 중공군의 대공사격을 피해 낙하산으로 초콜릿 사탕을 투하했다. 보급품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박격포 부대원들이 서둘러 낙하산으로 투하해온 보급품을 가져와 상자를 여는 순간 해병대원들 역시 기가 막혔다. 초콜릿 사탕이 들어 있었으니. 통신병이 요청한 것은 분명 투시 롤이라는 특정 상표의 초콜릿 사탕이었다. 하지만 투시 롤은 기다란 생김새가 포탄을 닮았기 때문에 해병대 대원들 사이에서 박격포 포탄이라는 은어로 쓰였다. 그래서 통신병이 무전이 도청 당할 까봐 이 박격포 포탄을 초콜릿이라고 은어를 썼는데 무전을 받은 통신병은 신참이어서인지, 해병대원이 아니어서였는지 은어를 몰라 다량의 초콜릿 사탕을 공수했다. 하지만 개마고원에 위치한 장진호의 추위에서 영하 30도 이하 기온에서 기관총은 얼어붙어 쏠 수 없고 적군이 있건 없건 주기적으로 총을 쏘아대어야 하니 부대 위치가 그대로 노출될 위험에 소총은 손질할 기름조차 얼어붙었다. 낙하산으로 떨어뜨린 보급품이 얼어붙은 땅에 부딪치면서 깨져 탄약과 식료품은 25%만 사용 가능했다. 통조림을 녹여도 겉만 녹아 속은 얼음 그대로였다. 이런 상황에서 초콜릿 사탕이 공수되자 하루 세끼를 초콜릿 사탕으로 때웠다. 한 참전용사는 한국이 통일된 후 북한 땅이 된 장진호 주변을 파보면 엄청난 숫자의 초콜릿 사탕 포장지가 묻혔을 거라 했다. 사탕은 고열량 식품인 만큼 작전 중 병사에게 빠르고 간편하게 에너지를 공급하고 혹독한 추위에서 딱딱하게 얼어붙어 급하게 못 먹으니 입에서 천천히 녹여 먹어야 했다. 연료통이 총알에 맞아 구멍이 생겨도 초콜릿 사탕을 입에 녹여 구멍을 틀어막으면 바로 얼어붙었기에 용접 이상의 효과를 봤다.
톱밥으로 만든 빵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옇화 대사 중 톱밥으로 만들었다는 빵은 독일군에게 지급되던 K(군대라는 뜻)- 브로트라는 군용 빵이었다. 말린 감자 분말과 거친 호밀, 톱밥, 지푸라기 등으로 만들어서 장기 보관이 가능했다.
·동서양에서 천덕꾸러기 였던 아귀가 한국 전쟁 때 배고픔을 달래주던 고마운 생선으로 바뀌었다. 영국도 2차 대전 당시 생선이 귀해져 간단하게 소금만 뿌려 구운 아귀 소금귀이가 명룸 음식으로 떠올라 바다 가재보다 귀한 대접을 받았다. 개천에서 용나듯 아귀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승천한 격. 아귀찜이 발달한 과정도 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이겨낸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
· 영국에서 1차 대전 때 학교에 공문이 왔다. “선생님은 학생을 독려해 도토리를 수집할 것 도토리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긴급 필수 군수품이니 ㅊ외대 많이 주울 것.”이었다. 탄약 만드는데 쓰는 아세톤이라는 화학물질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전선에 공급할 포탄과 총알을 만들려면 3만 톤의 아세톤이 필요한데 3천 톤밖에 없어 탄약이 떨어져 대포는 물론 소총 모든 무기가 무용지물이 될 판이었다. 하루 속히 목재 이외 물질에서 아세톤을 만드는 방법이 필요했다.(아세톤은 박달나무, 밤나무, 단풍나무와 같은 목재를 건조 증류시켜 만들었다) 전선에 공급할 포탄과 총알을 만들려면 3만 톤 이상의 아세톤이 필요했다. 1910년, 와이즈만 박사는 인조 고무를 만드는 실험을 하던 중 우연히 설탕을 분해해서 순수 아세톤을 만드는 박테리아를 발견. 영국은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나 사탕무를 직접 생산하는 나라가 아니라 감자, 귀리, 밀 둥으로 아세톤을 만들었으나 양이 적었다. 옥수수 전분으로 아세톤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으나 전쟁이 길어지자 물량이 모자랐다. 아세톤 생산에 쓰려고 비축해두었던 옥수수를 비롯해 감자 전분까지도 식량 배급으로 돌려야했다. 대체품으로 도토리를 모으면서 전쟁에 필요한 물자라고만 해서 전시의 수급 상황이 기밀로 되어(당시 독일 역시 화약 만드는 데 필요한 아세톤 부족 현상을 겪고 있었기 때문) 영국은 도토리를 이용해 아세톤을 만드는 제조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우려해서 그냥 아이들에게 도토리를 모아라고만 했다. 후일, 와이즈만 박사가 이때 영국 정치 지도자와 쌓은 친분은 훗날 유태인이 모여 독립국가 이스라엘을 건국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와이즈만은 1949년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영국의 1차 세계대전 승리와 이스라엘 건국 배경에 엉뚱한 공통점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