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공장 자주관리운동이 우리의 운명을 갈랐다.
1945년 8.15 해방 이후 미군정은 재조선 일본인들을 쫓아냈고 그들의 조선 내 자산의 반출도 불허했다. 일본인 사업가와 관리자들이 자기네 나라로 철수하자 노동자나 지역 인민위원회가 공장과 사업체를 관리하였으나
그해 12월 6일에 미군정은 군정법령 33호를 공포해 일본인 재산을 귀속시킨 뒤 노동자 관리위원회를 와해시키고 자본가들을 관리인으로 임명해 관리토록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이승만 정권은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해서 대부분의 적산을 사기업에 귀속재산 불하하였는데, 이 과정이 상당히 불투명했고 불하방법은 일반 경매나 비공개 입찰 방식이었다.
이때 남한에만 불하된 적산 기업은 2700여개였으며, 1인당 1개 사업체 이상을 불하받을 수 없도록 했다. 특히 대부분의 토지와 공장이 헐값에 인수해갔다. 현재 대한민국 재벌들의 상당수는 미군정기와 이승만 정권 시대 혼란한 상황속에서 주먹구구로 진행된 적산불하로 한몫 잡아서 기반을 다진 곳들이다. 당시 귀속사업체의 불하에는 불하대상인 적산의 이해당사자를 우선으로하고, 적산매각대금의 약 20%에 해당하는 계약금을 선납입해야하는 등의 기본조건이 달려있었지만, 정치인과 커넥션이 있던 기업들은 정치인과 정권의 관료들에게 뇌물을 먹여 해당 적산의 매각대금규모를 대폭 낮추는식으로 속여 터무니 없는 헐값에 불하받거나, 이해당사자가 전혀 아님에도 불하받는 일이 상당히 많았다.
물론 식민지 체제에 협력했던 재산가나 관련자가 정경유착으로 들러붙어 한 몫 챙긴 경우도 허다했다.
또한 한국전쟁이 끝난이후 3.8선 이북지역을 일부 수복하면서 국토면적이 증가했는데, 이때 구 일본계적산+공산치하의 건설 개간된 협동농장의 토지,공장,사업체 ,부동산, 광산, 어항 시설 등의 자산도 정부로 귀속되었다.
일본인들은 별 수 없이 돌아갔던 것일 뿐이지 소유권 자체를 포기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의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한일수교 얘기가 나오게 되었을때 말 그대로 기를 쓰고 찾으려고 했다.
한일수교 이전에는 일본 정부에서 종종 "한국 정부가 몰수한 일본인 자산에 대한 청구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었는데,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한국 여론의 분노를 일으켰음은 물론이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위반이라 논란이 있었다.
결국 한일기본조약을 맺으면서 일본 정부가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남긴 이른바 '적산'에 대한 청구권을 완전히 포기함을 명시해 이 문제는 끝났다.
일본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하고 남아있는 것 중에는 재산뿐 아니라 금전적 가치가 별로 없는 것도 많았고 이런 시설들은 방치되거나 6.25 전쟁통에 대부분 훼손되었다.
예를 들면 부산광역시의 아미동 비석마을은 바로 일본인 공동묘지 자리 위에 6.25 전쟁 피난민촌이 형성되어, 일본 무덤의 비석을 마을 계단, 건물 부재 등으로 사용하였다. 지금도 비석마을에 가면 쇼와 몇 년에 누가 죽었다 같은 일본어가 새겨진 비석이 계단으로 쓰이는 것을 조금만 걸어다녀보면 수십개씩 찾아볼 수 있다.
일본에 협력했던 조선 자본가들은 대부분 생산을 기피했고 인플레를 틈탄 투기행위가 만연했다. 공업부문 생산은 75.2퍼센트나 감소했고 실업률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생산을 재조직하기 위해 공장을 접수해 통제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도입은 일본의 조선 식민화와 함께 진행됐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일본의 식민통치는 민족적 억압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를 뜻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일본의 패배는 자본주의적 착취 질서의 폐지를 뜻해야 했다.
군산 종연조선 노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를 위한 해방이고 누구를 위한 독립이냐? 노동자에게서 직장을 빼앗고 빵을 주지 못하는 독립이라면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의의가 있으랴. … 우리 6백 명 공원은 … 노동자 대중에게 완전한 해방을 가져오는 그 날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기를 여기에 맹서한다.”
자주관리운동은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집단화·조직화돼 있던 공장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공장뿐 아니라 운수업, 상업, 어장, 극장, 학교 등으로 확산됐다. 1945년 11월 4일까지 16개의 산별노조에 7백28개의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됐다.
물론 자주관리운동의 성격은 불균등했다.
대부분의 사업체에서는 그 사업체의 노동자들이 단독으로 접수·관리했지만, 일부 사업체에선 노동자와 자본가가 공동으로 운영하기도 했고, 지역 인민위원회가 관리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노동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공장관리에 개입했고,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관리위원회조차 노동자들의 협조 없이는 공장을 운영할 수 없었다.
공장자주관리운동은 일본인 사업장뿐 아니라 화신백화점·경성방직·조선비행기 등 조선인 자본가의 사업장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화신백화점 노동자들은 “재래의 중역진 전부 배척, 박흥식 사장 절대 배척, 화신의 관리는 자치위원회에서 하겠다”며 투쟁했다.
노동자들의 공장 통제가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띠자마자 미군정은 이 운동을 탄압했다.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공장관리운동’이 미군정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킨다 며 투쟁을 자제시켰다. 심지어 조선공산당 중앙 간부인 이관술은 공장관리운동이, 중앙간부로서 귀찮으니 자본가한테 넘겨줌이 어떠냐, 고 하기도 했다.
사실, 조선 노동자들의 급진화는 전 세계 차원에서 벌어진 급진화 물결의 일부였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남부 유럽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접수하는 등 급진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서방 제국주의 국가와 협력하고 있었다. 전후 세계질서를 놓고 서방 제국주의 국가와 흥정하는 게 그에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에 충실했던 조선공산당은 이에 따라 단계혁명론과 진보적 민주주의론을 내세웠다. 현재 조선의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이기 때문에 조선 정부의 성격은 계급연합 정권인 인민전선 정부여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양심적 자본가와의 협력’이 중요해졌다. 공장관리운동은 조선인 자본가에게도 관리 문제를 제기하여 그들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결국 노동자들의 공장관리운동은 1946년 9월 총파업의 패배 이후에는 거의 의미 있는 구실을 하지 못한 채, ‘인민정권’과 노동조합의 보조기구로 문서상으로만 존재하게 됐다.
자주관리운동은 노동계급의 변혁적인 정치 없이는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역시 없음을 교훈으로 남겨 줬다.
해방 후, 공장 자주관리운동이, 미군정의 압력에서 피해가고, 노동자들과 공산당의 잘못된 판단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통일된 나라가 되었을 것이고, 지금 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물론, 625 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이 우리의 행복된 미래를 빼앗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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