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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아 나오너라
함석헌
씨알 여러분 정신 바짝 차리는 것이 안녕이라고 했는데, 정신 차리고 있습니까? 정신 차림에는 과거도, 과거완료도 없습니다. 불연속으로 연속하는 영원한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나와 싸우자고 했는데,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까? “군중(軍中)에 무희언(無戲言)”입니다. 싸움에는 농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 편지 끝에 “씨알아 나오너라” 하고는 … 나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숨을 쉬었으니 다시 합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싸움은 끝날 수도 없고, 한 찰나도 쉴 수가 없습니다.
싸움에는 농담이 있을 수 없지만, 시(詩)조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디 사람들은 시로 싸움을 노래하기도 합니다마는 시는 아무래도 싸움은 아닙니다. 싸움을 싸우고 나서 시를 지을 수는 있겠지만, 시로 싸움을 싸울 수는 없습니다. 만일 싸움 그것이 곧 시라면, 그것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이른바 시는 시가 아니고 시의 죽은 것일 것입니다.
예수는 싸운 이지 시인이 아닙니다. 그의 말씀에 붙는 화산보다 더하고 반짝이는 별보다 더한 시가 있지만 그것은 그의 싸움의 쟁기 소리였지 시를 읊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사탄과의 싸움으로 시작됐고 사탄과의 싸움으로 끝났으며, 끝났으면서도 지금도 끝이 나지 않고, 또 언제도 끝이 날수 없이, 이어갈 싸움입니다. 그의 싸움터는 씨의 가슴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가 시 중의 시임에는 틀림이 없겠지만, 그리고 어느 시인도 거짓 없이 그것을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런다고 사탄이 정말 누구에게서나 다 물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싸움이 들이마실 숨이라면 시는 내쉴 숨입니다. 어느 시인도, 웅변가도, 음악가도, 숨을 들이마시지 않고 내쉴 수는 없으며, 숨이 나가지 않고 말이나 울음이나 노래가 나올 수는 없습니다. 숨을 들이마시려면 성대는 늘어져야 하고 밥길은 막혀야 하고 전신의 근육을 한데 묶어 가슴을 진공상태로 텅 비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고 심정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막아낼 수 없는 외침으로 시가 터져 나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아무리 흉악한 사탄이라도, 총, 칼, 핵무기, 간악한 속임수에는 아니 물러갈 수 있을지언정, 이 내쉬는 숨에 견디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 태세를 갖추는가, 죽을 힘을 다해 생명의 숨을 들이마시느냐 말입니다.
왜 이것을 물을 줄도 모르느냐?(闔不赤問是已)
내가 우선 싸움 거는 말은 이것입니다. 왜 이것을 물을 생각조차도 아니 하느냐? 이것은 장자(莊子, 徐無鬼)의 말입니다. 2백 년 전 중국 전국시대에 소위 정치가라, 영웅이라 하는 이들이 부국강병(富國強兵)을 외치며, 죄 없고 불쌍하고, 말 못하는 씨을 맘대로 마구 짜먹고, 부리고, 짓밟고, 고기탕을 치는 것을 보고, 그리고 소위 선비니 글하느니 말하느니 하는 자들이 거기 비겁하게 꾸부릴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서 그것을 찬양하고, 변명하고, 전문지식을 악용하여 더 악한 꾀를 가르쳐주는 것을 보고 견디다 못해 그 슬프고 분한 것을 붓대에 부쳐서 지성인에 대해 싸움을 돋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좔좔 흐르는 시내 같은 통쾌한 긴 말을 다 옮길 수는 없지만, 그 결론적인 것을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지식과 재능만 믿고 그것만 가졌으면 못할 것이 없는 듯 서로 경쟁을 하지만, 생각해보아라, 어느 나라도 어느 백성도 그러다가 다 망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 될 듯하면서 세상을 망치는 그 꼴을 보고 “이것이 왜 이러냐?” 하고 물을 줄도 모른단 말이냐, 그보다도 빈 마음으로 보아라, 정말 이 우주를 버티고 이 만물을 생성 발전해 갈 수 있게 하는 것은 누구의 지식, 지혜도 아닌, 누구의 힘도 아닌 이 우주 큰 생명이 스스로 하는 지혜 아닌 지혜, 힘 아닌 힘으로 되는 것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시험 삼아 위에 끌어 낸 “합불역문시이(闔不亦問是已)” 라는 귀절이 있는 서무귀(徐無鬼) 장의 끝 부분의 말을 몇 마디 인용한다면 이렇습니다.
옛날 참사람은 하늘이 허락해주는 것을 가지고 가만히 기다렸지 사람의 지식이나 재주를 가지고 하늘이 주는 자연의 조화를 어지럽히려 하지 않았다(以天待之 不以人入天). 옛날 참사람은 뜻대로 돼서 살고 뜻대로 아니 돼서 죽기도 했고, 뜻대로 돼서 죽고 뜻대로 아니 돼서 살기도 했다(그 경우에 따라 살아야 할 때면 살고 죽어야 할 때면 죽어서 지금 사람처럼 갖은 지능을 다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려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약이란 것은 실속대로 되는 것 아닌가? 부자(附子)니, 길경(桔梗)이니, 계옹(雞癰)이니, 시령(豕零)이니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어느 것도 때에 따라서는 군약(君藥) 노릇을 할 수 있다.(한약 짓는데 君, 臣, 佐, 使의 법이 있다. 나라 일이, 임금이 아무리 잘났어도 혼자서는 할 수 없고, 그 옆에 신하도 있고, 보좌하는 놈도 있고, 심부름하는 놈도 있어서야 되듯이, 병도 한 가지 약으로만은 고칠 수 없고 여러 가지 약이 화합이 되어서만 될 수 있다. 그런데 군약은 결코 고정되어 어느 한 가지 약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병에는 이 약이, 저 병에는 저 약이, 병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 그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느냐?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역사에서 실례를 들어보자.) 월나라 임금 구천(句踐)이 오나라와 싸우다 패하여 쫓겨 회계산(會稽山)에 가서 숨었을 때 남은 군사가 겨우 3천밖에 되지 않았다. 그 다 망한 월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대부(大夫) 문종(文種)과 범여(范蠡)의 재주로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문종도 후에 제 망할 것을 알지는 못하였다.(후에 오나라를 쳐서 멸하고 나서 같이 일했던 범여가 할 일 다한 담에는 물러나는 것이 도리라고 일러주는 말 듣지 않고 제 재주와 공로만 믿고 부귀를 탐해 앉아 있다가 종래 구천의 의심을 사서 사형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사람의 생각으로만 되는 것 아니다. 자연 속에 보아라.) 올빼미 눈은(낮에 보지 못하니 그것으로는 아니 될 것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또 맞는 데가 있어서 살아가고, 두루미는 다리가 너무 길어서 불편할 듯이 생각되지만 그것은 또 그것대로 알맞은 데가 있으므로 잘라주마 하면 겁낸다. 그러므로(사람의 작은 지혜보다 더 큰 지혜와 뜻이 자연 속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냇물을 볼 때 바람이 불어도 냇물에는 손해이고, 햇볕이 쬐어도 냇물에는 손해지만 바람과 햇볕이 끊임없이 냇물 위에 불고 쬐어도 냇물은 그것을 조금도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러냐? 냇물은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다하지 않는 근원을 믿고 바람, 햇볕을 대하니 아무 걱정이 없다.
그러므로(자연에는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법칙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이 흙을 지키는 데 빈틈이 없다. 그림자가 사람을 지키는 데도 빈틈이 없다. 물건과 물건은 서로 지켜 빈틈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밝히 보자는 눈이란 위태한 것이고, 밝히 듣자는 귀란 위태한 것이며, 알겠다, 하겠다고 추구하는 마음이란 위태한 것이다. 무릇 재주(能)는 다 제 몸에는 위태한 것이다.(한이 있는 제 재주로 한이 없는 자연에 겨뤄대기 때문이다). 위태란 한번 위태하다고 돼놓으면 미처 고칠 수 없는 것이고, 화(禍)는 자라기 시작하면 (막으려 할수록) 점점 더하는 법이다. 한번 그렇게 된 다음에 그것을 돌이키려면 공력이 들어야 하는 것이고, 그 효과가 나려면 오래 기다려서야 된다.(인위로 인해 파괴된 자연의 조화가 회복되려면 그렇게 힘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지식, 재능을 제 보배로만 알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느냐? 그러기 때문에 이날껏 나라 망하고 사람 죽는 것이 그칠 줄을 모른다. 왜 그러냐? 이것을 물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아는 것이 결코 아는 것이 아니다.) 발이 뭐냐? 땅을 디디잔 것이지. 그러나 (디디는 것만이 디디는 것 아니다.) 아무리 디뎌도 그 밟지 않는 데를 믿고 난 다음에야 오래 서고 멀리 갈 수가 있다. 사람의 (지식도 그렇다.) 아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얼마 되지 않는 지식이지만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믿고 난 후에는 하늘이 일러주는 것을 능히 알 수 있다. 큰 하나(大一)를 알고, 큰 그늘(大陰)을 알고, 큰 눈(大目)을 알고, 큰 고름(大均)을 알고, 큰 모(大方)를 알고, 큰 믿음(大信)을 알고, 큰 결정(大定)을 알면 다시 더 할 것 없다. 큰 하나는 뚫는 것이요, 큰 그늘은(겸손한 마음으로 나를 없음의 자리에 놓으면) 모든 풀 수 없는 문제를 푸는 것이요, 큰 눈은(눈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참 실상(實相)대로를 보는 것이요, 큰 고름은(만물을 각각 다 그 본바탕대로 보아주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제자리를 따르게 하는 것이요, 큰 모는(여기에도 저기에도 붙지 않기 때문에) 전체를 한 몸으로 봄이요, 큰 믿음은(굳어져 죽은 말을 믿는 것 아니라 영원한 미완성이면서 완전인 생명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요, 큰 결정은(내가 결정하는 것 아니라 하늘의 스스로 하는 결정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며, 전쟁이 일어나도 까딱 흔들림이 없이 나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제 하늘(天然)이 있는 법이며, (그것을) 쫓으면 밝게 비침이 있는 법이며, 오묘한 가운데 거기 하나 되면 가장 요긴한 지두리(樞)를 붙잡을 수 있는 법이며 ‘그’는 처음부터 계신 법이므로 그 푸는 것은 풀지 않는 것 같고, 그 앎은 알지 않는 것 같다.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알지 못하고서야 아는 것이고, (그것은 무한의 문제이므로) 그 물음에는 한정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또 (상대의 세계에 살며 제 분을 가지고 있는 인생이니) 그 물음에 한정이 없을 수도 없다. 그와 같아서 모든 것이란 종잡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속에 참이 있으며, 그러기 때문에 예와 이제가 서로 바뀔 수 없으며, 없어질 수도 없다. 그러니 거기 어떤 한 큰 얼거리(大揚摧)가 있지 않으냐? 그러니 어찌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지도 않는단 말이냐? 무엇을 이럴까 저럴까 하고 있단 말이냐? 이럴까 저럴까 함은 이럴까 저럴까 아니함으로 만 풀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럴까 저럴까 함 없음에 돌아간다. 그러면 그것이 정말 크게 이럴까 저럴까 함 없음이 아닐까?
(故足之於地也踐, 雖踐, 恃其所不蹍而後善博也. 人之於知也少, 雖少, 恃其所不知而後知天之所謂也. 知大一, 知大陰, 知大目, 知大均, 知大方, 知大信, 知大定, 至矣. 大一通之, 大陰解之, 大目視之, 大均緣之, 大方體之, 大信稽之, 大定持之.
盡有天循有照, 冥雨樞, 始有彼. 則其解之也似不解之者, 其知之也似不知之也, 不知而後知之. 其問之也, 不可以有崖, 而不可以无崖. 頡滑有實, 古今不代, 而不可以虧, 則可不謂有大揚搉乎! 闔不亦問是已.奚惑然爲! 以不惑解惑, 復於不惑, 是尙大不惑)
고민하는 문명
씨알 여러분, 씨알은 계절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씨알은 때를 아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자연 속에 심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또 자연의 아들입니다. 자연이 무엇입니까? 스스로(自) 그런 것(然)입니다. 그것은 어째서 그런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연은 때(時) 속에 있습니다. 때는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돌아가는 바퀴를 두었습니다. 거기서 계절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인간이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계절이었습니다. 계절은 되풀이하는 가운데 영원히 새로운 나감이, 나(我)의 감(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절을 알아야 합니다. 계절을 살기 때문에 계절을 알아야 합니다. 뜻을 살기 때문에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을 살려 하기 때문에 계절을 살아야 합니다. 계절은 길(道)을 말하는 바퀴요, 하나를 말하는 여럿이요, 전체를 말하는 부분입니다.
봄, 여름, 갈, 겨울을 아는 것이 사람입니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아는 것이 사람입니다. 낳는 줄, 늙는 줄, 앓는 줄, 죽는 줄 아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니 낳으려는 놈, 아니 늙겠다는 놈, 아니 앓고, 아니 죽겠다는 놈, 사람 못된 놈입니다. 씨알은 그것 아는 것입니다.
씨알은 눈을 가집니다. 두 눈깔이 아니라 외알 눈(隻眼)입니다. 그 알갱이가 곧 눈입니다. 그것을 예로부터 영(靈)의 눈이라, 마음 눈이라 합니다. 그 눈은 과거, 미래, 현재와 안팎을 다 뚫어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 때에 나고 필 때에 피고, 열매 맺을 때에 맺고 떨어져 돌아갈 때 돌아갑니다.
그럼 이때는 무슨 때입니까? 고민하는 때, 앓을 때입니다. 관세음보살처럼 세상의 소리를 보십시오. 그 끙끙 앓는 소리, 몸부림하고 쥐어뜯는 소리를 한눈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4,5백 년 동안 아노라고, 자연 정복했노라고, 장생불사하노라고, 우주의 비밀을 파헤치노라고, 자랑하던 문명이 외아들 죽게 된 과부 모양으로 허둥지둥, 사형선고 받은 강도 모양으로 창황망조(蒼黃罔措), 몸 둘 곳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놈은 돈에 미쳤거나, 권력에 미쳤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 잡아먹고 피에 미쳤거나 하는 놈뿐일 것입니다. 날마다 나는 신문, 시간마다 하는 라디오, 탤레비가 그것을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문명은 망할 것이요, 이 문명을 좋다하는 놈도 망할 것입니다. 그때에 가서 이 잘못된 문명의 지식을 악용하고, 그 기술을 간악하게 써서 사람의 생명을 해치고 자연의 법칙을 우습게 알던 이 세상의 사람들, 과학, 종교를 악용하여 권력자의 이빨노릇, 나팔노릇을 했던 거짓 종교자와 거짓 과학자들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하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以人入天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해서 “이인입천”, 사람의 지식과 재주를 가지고 하늘에 마구 들어갔던(亂入) 죄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동산이겠습니까? 이 우주란 하나님의 동산입니다. 물질세계를 바깥 동산이라면 사람의 생각하는 정신의 세계는 안 동산 입니다. 지금 그 안팎 동산이 다 인간한테 침입을 당했습니다. 구약 창세기에 당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거기 동산을 베푸시고 인간을 거기 두셨다는 것은 이 안팎 두 겹의 동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판에 생명나무가 있다 했고, 이것은 먹지 말라 하는 옳고 끓고를 아는 나무를 두었다 했습니다. 옳고 끓고는 그것을 제 마음대로 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를 지켜보기만 함으로써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딴 생각이 뱀처럼 사르르 기어들어 가지고 제 나름의 해석을 붙여가지고 따먹었으니, 하나님의(그의 이름은 억지로 붙여서 ‘있어서 있는 이’) 동산(그 이름은 ‘스스로 그럼’)에 마구 난입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 평화와 사랑과 아름다움의 동산에 있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쫓겨났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사람 제가 스스로 달아난 것이지 하나님이 쫓아낸 것 아닙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강제를 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 우주의 근본원리는 ‘스스로 함’입니다. 생명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선을 해도 스스로 제가 하는 것이고 악을 해도 제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제 스스로가 먹었듯이 그 동산에 있지 못하고 쫓겨난 것도 제 스스로 한 것일 것입니다. 이른바 자업자득입니다. 있으려 해도 있을 수 없어 그 고민에 못 견디어 뛰쳐나가 두루 헤맨 것입니다. 그렇게 벌하는 권세는 물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집행하는 방법은 스스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하십니다. 인간의 부모도 참으로 벌할 때는 잘못한 아들 제가 스스로 자기를 벌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어진 부모는 스스로 자기를 벌합니다. 스스로 아파하고 스스로 밥을 아니 먹고 스스로 자기를 괴롭힙니다. 그러면 아들은 자연 못 견디어 스스로 죄 값을 제 몸에 지워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것이 온전히 된 벌입니다.
우리는 말하기를 세상이 이렇게 악하고, 역사가 이렇게 그릇된 길에 빠져들고 있는데 왜 하나님이 가만 계시냐 하지만, 모르는 말입니다. 벌함에 있어서까지 사랑으로 할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은 잘못한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벌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를 벌함으로써 다시 옳음에 스스로 돌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해, 지금 자기를 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벌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고 애매한 자연이 해를 입는 것이 곧 그것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모든 악한 것들을 당장 벌하여 시원히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는 한 우리는 아직 우리 잘못을 채 모른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는다면서 악한 자를 미워하고, 제 손으로 벌하려 하고, 그들이 벌을 받기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것은 잘못 안 것입니다. 까닭 없이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 그보다도 정말 죄를 짓고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범죄자들을 그저 보고만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생명의 원리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거기 대해 마땅히 나 자신을 벌할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악과 싸우는 가장 나중의 가장 좋은 길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하는 말은 이 뜻에만 할 수 있습니다.
씨알 여러분, 여러분은 문명인이 하나님의 동산에 어떻게 어지러이 뛰어들어 짓밟고 있나 그 모양을 살펴본 일이 있습니까? 대도시란 곧 그것입니다. 그들은 우주의 만고 곡조를 노래하던 푸른 숲을 찍어 넘기고 거기 자기네 손으로 시멘트와 금속의 숲을 세웠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그 그늘에서 시듭니다. 일찍이 바람이 춤추고 새가 노래하던 거기서 이제는 얽매인 노예와 인권을 잃은 동물의 미친 부르짖음과 어지러운 춤이 있을 뿐입니다. 그뿐 아니라 연구라는 이름 아래 물질과 생명의 신비의 전당을 곁쇠질을 하고 도둑질해본 그들은 나라를 지킨다는 구실 아래 원자무기를 만들어 인간과 동식물의 대량학살을 하고 있고, 범죄 수사라는 이름 아래 약물과 전기로 인간 양심을 파괴하고 있으며, 우생학이라는 주제넘은 생각 밑에 생명의 신비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연구가 잘못은 아니지만, 선례후학(先禮後學)입니다. 먼저 도덕의 힘이 선 다음에 지식은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한 아담을 보고 “네가 네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세계 간곳마다에서 고문으로 인권을 짓밟는다는 말이 많습니다마는 이것은 결코 그 몇 사람의 독재자의 모진 성격이나 그의 종들의 무지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천 년 숭배해온 지능주의의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以天待之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했습니다.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 만일 짐승 치는 생활만 했더라면 정신 발달이 퍽 더 더디었을지 모릅니다. 농사를 하는데서 사람은 계절을 알게 되었고, 계절을 믿고 기다리는 데서 생각하는 힘이 늘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말, 참 좋은 말입니다. 불교에서 이 세계를 참는 곳, 인토(忍土)라 하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장자가 시내를 가리켜 “그 근원을 믿고 가는 이다”(恃其源而往者也) 한 것, 공자가 냇물을 굽어보다가 “잘도 간다, 밤낮이 없구나(逝耆如斯, 不舍晝夜)”한 것, 맹자가 그것을 풀이해서 “근원 있는 샘이 솰솰 솟아, 밤낮을 쉬지 않고 흘러, 웅덩이를 채우 고 나서, 큰 바다로 나가니, 근본이 있는 사람은 이렇다는 말이다.(源泉混混, 不舍畫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有本者如是)” 한 것은 다 생명의 진리를 체험한 말들입니다. ‘근원’이라 ‘근본’이라 했는데 무엇이 근원이요 근본이겠습니까? 생명이요 하나님 자체지 다른 것 아닙니다.
그런데 현대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급한 것입니다. 문명은 곧 다른 것 아니고 ‘빨리’라는 한 말에 있습니다. 이것은 삶이 정신에 있지 않고 물질에 있으며, 뜻에 있지 않고 맛에 있으며, 영원에 있지 않고 말초신경의 자극에 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 병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생명의 근원을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누가 그 잘못을 가르쳤습니까? 지능주의 학자들입니다. 누가 그 가장 열심 있는 신봉자입니까? 첫째 정치가요 둘째 사업가입니다. 그러고 보면 현대가 정치 중심, 기업 본위로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빨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지구는 여전 365일 들어야 한 바퀴를 돌고, 뱃속의 아기는 열 달이 차야 나옵니다. 현대인의 급한 생각으로 한다면 제 기르는 강아지 모양으로 석 달쯤 해서 낳아 팽개치면 시원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해방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물학자인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은 주제넘은 생각입니다, 왜? 생명에서 인간이 나왔지 인간이 생명을 낳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큰 생명의 생각은 그와는 정반대인걸요. 미생물은 1초 동안에도 무수한 번식을 합니다. 진화의 과정이 올라갈수록 번식 방법은 어렵고 그 기간은 늘어났습니다. 진화의 맨 앞에 서는 인간은 어느 동물보다도 미성년, 자립하지 못하고 있는 기간이 깁니다. 인간지식의 생각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면 잘하자는 연구의 결과가 인류 멸망의 징조로 나타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나는 세상의 정치가와 그 정치가의 심부름을 하는 학자들이 제발 이 점에 깊이 생각해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들 개인으로야 잠깐 맘대로 장난을 해보다 가겠지만 그들이 해놓고 간 일은 길이 영향을 끼칩니다.
제발 영성(靈性)을 가진 인간답게 이천대지(以天待之)를 해주기 바랍니다. 장자의 말이 얼마나 옳습니까? 지능은, 인위는 위대한 것이 못됩니다. 자연은 지층의 운동처럼 서서히 움직이기 때문에 거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 시간에 가면 폼페이시를 삽시간에 묻어버리던 화산의 폭발 같은 일이 일어나고야 맙니다. 최후심판만 아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내리는 심판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기 때문에 최후심판이 있습니다.
대음해지(大陰解之)란 말 얼마나 좋습니까? 나는 우리야말로 이 말을 알아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처지를 아는 것이 대음(大陰)입니다. 양(陽)이 강한 줄 모를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양(陽)을 따라서 양(陽)은 잡히지 않습니다. 지음(至陰)의 들에 가야 지양(至陽)의 들을 만난다고 했습니다. 지금 말로, 절대의 마이너스(-) 자리에 서야 절대의 플러스(+)를 얻는단 말입니다. 과학적 진리입니다. 그런데 장자는 그러한 지음의 들에 이르려면 어둠컴컴한 문(窈冥之門)으로 들어가야 한다 했습니다. 내버려야 얻는다는 말이요, 죽어야 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야 있겠습니까? 이것을 실지로 깨닫는 것이 요긴합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땅과 사람으로 보아서, 예와 이제의 역사로 보아서, 안과 밖의 관계로 보아서, 요명(窈冥)의 문으로 들어가도록만 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천대지(以天待之)가 무엇입니까? 천(天), 하늘이 무엇입니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자면 크고 작고 살고 죽고가 없습니다. 다 십자가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이치에 틀리는 일만 일어나는 이 현실은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십자가로 몰아치는 길이지.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구레네 시몬은 피하려 해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위치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십자가입니다. 질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못 피했습니다. 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는 터무니 때문에 터무니없는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졌습니다. 그 일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야말로 터무니없는 십자가를 진다는, 십자가야말로 본래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터무니없는 짐을 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터무니없는 짐을 지우는 것이 하늘이요, 그 짐을 고스란히 지면 사람, 곧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예수는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누가 제 이웃입니까 했을 때, 터무니없는 사마리아 사람을 끌어다 댔습니다.
터무니없는 일을 당했으니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기다리는 일이 곧 근원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 믿음입니다. 절대의 무조건 긍정입니다. 사는 길은 죽음을 무조건 긍정함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어디로 갔습니까? 해골터로 갔다 했습니다. 장자의 말로 하면 요명(窈冥)의 문입니다. 지옥문이란 말입니다. 거기 들어가면 지옥이 있고 지옥을 참고 기다리는 믿음으로 가로질러 건너면 그 다되는 끝이 하늘나라의 시작입니다.
우리도 이 터무니없는 지옥 길을 걸어야 합니다.
대양각(大揚搉)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런 터무니없는 일을 당하면서도 왜 그것을 물을 생각도 아니 하느냐 그것입니다. 터무니없다는 것은 사람의 작은 지식 잔재주 때문에 눈과 귀와 마음이 병들어서 하는 말입니다. 터무니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천지 시작될 때 무슨 터무니 있어 된 것 아닙니다. 장자는 그것을 아예 아무것도 없는 자리(未始有物者)라고 합니다. 도(道) 곧 진리는 이 아예 아무것도 없는 자리를 생각지 않고는 모릅니다. 지능(知能)에 병든 사람, 터무니의 종이 된 사람은 제 생각에 뜻이 통하고 수지가 맞는 것만 찾습니다. 그러므로 큰 것(大)은 모릅니다. 그래 장자는 지식은 작은 것이고, 알지 못하는 것을 믿어서만 하늘이 일러주는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소위 거물이라는 사람들 진리의 세계에서 하면 아직 어린애도 못됩니다. 장자는 그것을 시슬(豕蟲)이라고 했습니다. 성긴 귀밑털을 넓은 궁전 큰 동산같이 여기고 밭샅, 젖통, 다리샅을 평안한 저택으로 알고 있다가 하루아침 그 돼지가 잡혀 불로 털을 끄슬릴 때 그만 죽는 줄도 모르게 타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소견으로 사람을 대하고 나라 일을 하기 때문에 항상 문제만 생깁니다. 그런 사람들은 제 세계만 알기 때문에 바다에서 온 자라를 보면 미쳤다고 하는 우물 안 개구리 같아 문제를 문제 삼을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장자로 하여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느냐?” 하고 한 숨을 쉬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소한 욕심에 병이 들지 않은 씨이야 어찌 물음이 없을 수 있습니까? 이게 왜 이렇지 하고 마땅히 물어야 합니다. 이 현실을 놓고 물을 생각도 아니 하는 것은 죽은 씨입니다.
예수는 물은 이입니다. 시험 받았다는 것은 곧 물었다는 말입니다. 성령에 충만하여 빈들로 가서 시험받았다는 것은 가지가지 생각에 잠겼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로 요약되어 있는데 셋 다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 풀었습니다. 다 현실에 관한 문제인데 예수께서는 셋 다 무정함으로 이겼습니다. 상대적인 세계에서 가지고는 못 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버려야 얻는다, 죽어야 산다 했습니다. 현실의 살림이 의미 없단 말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을 긍정해 ‘현실과 이상’ 두 주인에 다 충성하려는 태도로는 못 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려고 현실을 부정하면 현실까지도 건져지지만 두 주인을 다 섬기려면 이것도 저것도 다 충실치 못해 다 잃어버린단 말입니다.
장자는 그 자리를 여기서는 대양각(大揚搉)이라는 말로 표시했습니다. 양각(揚搉)이란 어떤 극한점, 얼거리, 윤곽, 테두리 그런 의미입니다. 이 세상 만물을 보면 종잡을 수 없는 것이지만 가만히 빈 마음으로 보면 그런 가운데 어떤 부정할 수 없는 큰 무엇이 있지 않으냐 그 말입니다. 소소한 지식에 잡히지 말고 멀리 보면 어찌 이것이 어째 그러냐 묻지 않을 수 없고, 물으면 풀리는 데가 있지 않느냐? 그러나 풂으로 푸는 풂이 아니라 풀지 않음으로 푸는 풂이라는 말입니다. 왜? 욕심 없는 마음으로 보면, 내 마음이 아니고 ‘그이’의 마음으로 보면 본래 혹할 것이 없다, 그 혹할 것 없는 태도로 풀면 참 혹하지 않도록 참 풀 수 있다, 그 말입니다.
씨알 여러분, 여러분의 선 자리는 이럴까 저럴까 할 줄 모르는 부지(不知), 불혹(不惑)의 자리입니다. 믿는 자리, 사랑하는 자리, 참고 기다림으로 이기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이것이 왜 이러냐 물어보시오! 그러면 대불혹(大不惑)의 자리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씨알의 소리 1977. 6 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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