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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330. [역경의 열매] 김석봉 (1-20) ‘토스트 노점상’ 창업 3년만에 연 매출 1억원을
1997년 안양 성결대 목회학과 졸업 아내 “1주일 후엔 집에 쌀이 떨어져요”
김석봉 대표는 요즘 토스트를 직접 굽지 않는다. 2005년 도시개발로 노점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토스트 굽는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지난달 31일 서울 상암동 한 체인점에서 시범을 보여주고 있다. 허란 인턴 기자
내가 ‘노점상 연봉 1억 신화’의 주인공이 된 것은 누가 뭐래도 아내 하영숙(55) 덕분이다. 1997년 내가 경기도 안양 성결대 목회학과를 졸업했을 때 아내는 “공부를 마쳤으면 이제 돈을 벌어오라”고 내 어깨를 떠밀었다. 교육전도사로 받는 사례 10여만원 말고 진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했다. 아내는 “오늘부터 나는 일을 안 할 거야. 1주일 후면 우리 집에 쌀이 떨어져”라고 잘라 말했다.
그때까지 가정경제는 아내가 책임지고 있었다. 나는 변변한 직장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과 용접 일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했다. 결혼 전에는 유치원 교사를 했고, 결혼 후에는 돈 없는 나를 대신해 놀이방을 운영하며 돈을 벌었다.
아내는 돌보던 아이들을 다 집으로 돌려보내고 200만원이 든 통장을 하나 내밀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200만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고민하고 고민하다 중고 스낵카를 사서 토스트를 팔기 시작했다.
경험은 없었다. 노점상은 그 자체 불법이었다. 경쟁업체라고 할 수 있는 주변 상인들과 거리의 깡패들도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나는 당시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주문받고 계산하고 토스트를 구워서 건네는 모든 과정이 모두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해야 하는 일인데도 내겐 너무 어려웠다. 그만큼 내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하지만 노점상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연간 매출 1억원을 달성했다. 주식회사 석봉토스트를 세워 대표이사가 됐고 지금까지 전국에 가맹점 300여개를 냈다. 홈플러스 등 대형 할인점에도 입점했다. 기업체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국강사협회 대한민국 명강사 95호, 중소기업청 지정 ‘YES리더 기업가 특강’ 강사를 지냈다.
아내와 함께 지금의 내가 있도록 만든 분은 소천하신 반석성결교회 김용련 원로목사다. 김 원로목사는 나의 영적인 멘토셨다. 아내와 김 원로목사를 만나게 하시고 오늘날의 김석봉을 만드신 이는 물론 하나님이시다. 나는 사업가가 안 됐다면 목회자가 됐을 것이다.
사업으로 승승장구할 때 나는 이제 사업을 접고 목회의 길을 가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가서 ‘이제 사업을 그만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은근히 기대하며 금식기도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목회가 아닌 사업을 하라는 확신을 주셨다. 이후 나는 사업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는 전북 정읍 내장산 기슭에서 8남매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1950∼60년대에는 어렵지 않은 가정이 드물었지만 우리 집은 더 어려웠다. 방 한 칸짜리 초가집에 열 식구가 살았다. 농지는 없었다. 산을 개간해 고구마를 심었고 겨우내 고구마만 먹었다. 고구마도 떨어지면 정부에서 지원받는 밀가루로 연명했다. 밀가루를 담았던 포대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신발도 없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한마디로 표현해 ‘절망’ 그 자체였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석봉 (1) '토스트 노점상' 창업 3년만에 연 매출 1억원을
* [역경의 열매] 김석봉 (2) 가난한 열네살 소년 "아이스케키 사세요!"
* [역경의 열매] 김석봉 (3) 제삿날 덥석 무릎 꿇고 기도하자 온 집안 '발칵'
* [역경의 열매] 김석봉 (4) 예수 영접한 아버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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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58년생. 전북 정읍 내장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 거쳐 91년 경기도 안양 성결신학대 졸업. 97년 노점 ‘석봉토스트’ 창업, 2005년 국제코스타 강사, 2009년 ㈔한국강사협회 대한민국 명강사 95호, 2011년 중소기업청장 YES리더 기업가 특강 강사 역임. 현 ㈜석봉토스트 대표, 극동방송 운영부위원장.
***[역경의 열매] 김석봉 (2) 가난한 열네살 소년 “아이스케키 사세요!”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 진학 꿈 포기… 車 정비공장·세차장… 생활 전선으로
시골집을 배경으로 찍은 어머니 배금순, 아버지 김길택씨 사진.
가정형편상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꿨다. 나는 중학교에 가고 싶어 3개월 가까이 울었다. 결국 일을 배우기로 했다. ‘기술이 있으면 밥은 굶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기술을 배우려다 죽을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기술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기술자 밑에서 ‘시다바리(조수)’를 하다 얻어맞기만 했다. 초등학교만 나온 14세 청소년이 겪는 사회생활은 밑바닥 순례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형님을 따라 경기도 성남으로 갔다. 형님이 일하러 가면 나는 또래 아이들과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2주 동안 연습한 것 같다. “아이스케키, 5원에 얼음과자 2개.” 돈도 벌어 좋았지만 아이스케키 가게에서 주는 비빔국수가 아주 좋았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다. 비 오는 날은 장사하기 가장 나쁜 날이었다. 아이스케키가 팔리기도 전에 녹아서 흘러내렸다. 우리는 안 녹은 것처럼 보이려고 빨아 먹어 가며 아이스케키를 사라고 외쳤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가 이런 모습을 보고 당장 때려치우라고 했다. 어머니는 “기술을 배워야지 밥 먹고 산다”며 나를 한 자동차 정비공장에 넣었다.
요즘은 자동차정비 학원이 있지만 그때는 그냥 기술자 밑에서 배웠다. 하지만 기술자들은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명목으로 우리를 혹독하게 다뤘다. 정비공장에는 내 또래가 다섯 명 정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공구를 가져오라고 시키고 잘못 가져오면 그 공구를 사람에게 던졌다. 바닥에 던진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직접 던졌다. 사람을 맞췄다.
저녁에 몸을 씻기 위해 옷을 벗으면 온몸이 파랬다. 다들 똑같았다. 멍이 든 몸을 서로 보며 서러워 울곤 했다. 그래도 우리는 군말 없이 일했다. 월급은 없었다. 그저 비누 값 정도만 받았다. 우리가 아니어도 기술을 배우려는 애들은 충분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정말 큰일이 일어났다. 일과를 끝내고 청소를 할 때였다. 카바이드(탄화칼슘 덩어리)로 용접을 한 이후에는 카바이드 용접기 통을 비우고 깨끗이 닦아야 했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에도 예외가 없었다.
이 통을 청소하다가 그날 배수구가 막혔다. 카바이드 찌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물이 역류해 바닥이 엉망이 됐다. 이를 알게 된 공장장은 “니들 다 죽었어”라고 소리 지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주변에 있는 공구들을 던졌다. 쇠뭉치가 달린 고무호스도 휘둘렀다. 또래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갔는데 나만 얼떨결에 남았다. 그리고 그 호스에 등을 맞았다.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죽은 것처럼 바닥에 뻗었다. 공장장은 그런 나를 발로 밟았다. 나는 살겠다고 몸을 움직여 자동차 밑으로 피했다. 이어 화장실로 숨었다. 그날 도대체 어떻게 집에 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1시간 이내의 거리를 거의 서너 시간 걸려 기어갔던 것 같다. 이를 안 부모님은 내 손을 잡고 경찰서에 가서 공장장을 고소했다. 공장장이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공장장은 이튿날 멀쩡하게 출근했다. 알고 봤더니 공장장의 형님이 경찰서장이었다. 결국 내가 정비공장을 그만뒀다.
소득은 있었다. 1년 반 정도 있으면서 산소용접 기술을 배웠다. 나는 누나가 사는 인천으로 가서 세차장에 취직했다. 그곳에서도 혹사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선임은 내가 교회 가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교회에 갔다 오면 긴 용접봉으로 나를 많이 때렸다. 그나마 사장님은 나를 잘 봤다. 어린애가 고생하는 것이 측은했던 것 같다. 나 먹으라고 생선을 사서 끓여주곤 했다. 그러나 그 세차장도 선임기술자 때문에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 그때 다닌 교회가 인천 숭의감리교회였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3) 제삿날 덥석 무릎 꿇고 기도하자 온 집안 ‘발칵’
초등 3학년 때 큰누나가 교회로 인도… 불교 집안이었던 탓에 온 가족이 반대
큰집 막내 누나가 결혼하는 날 가족들과 함께 찍었다(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김석봉 대표).
독실한 불교 집안을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거듭나게 한 이는 큰누나였다. 누나는 돈을 벌려고 도시에 나갔다가 복음을 접했다. 가끔 집에 들러 교회에 가자고 했다. 그러면 어른들이 단호하게 말했다. “동생들은 건드리지 마라.” 그렇다고 동생들을 가만히 놔둘 누나가 아니었다. 큰누나는 가족 중에 가장 먼저 나를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회에 데려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우리 집은 물론이고 바로 윗동네에 사는 큰집 어른들이 쫓아왔다. 집안이 망한다는 둥, 동생을 망쳤다는 둥,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정작 누나는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갔다. 내 안에서도 난리가 났다. 교회에서 들은 지옥 이야기가 너무나 무서워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친인척 중에는 주지 승려가 있었고 어머니는 보살이었다. 어머니는 내 이름을 대웅전에 올려놓고 좋은 승려를 만들겠다고 치성을 드렸다. 그래서 나는 극락에 가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극락이 아니라 천국이라고 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천국에 가고 싶었다. 절대로 지옥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손가락만한 구더기가 몸을 뒤덮고 파먹는다는 이야기는 끔찍했다. 생생했다. 왜냐하면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구더기였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지옥에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방법은 예수를 믿는 길뿐이라고 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이것이 가짜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1년간 교회에 다니면서 집요하게 질문했다. 왜 부처가 아닌 예수만 믿어야 천국에 가는지 등의 의문점을 물고 늘어졌다. 어른들이 모이는 구역예배에도 참석해 천국과 지옥이 어떤 곳인지 궁금한 것은 다 물었다. 그러면서 확신이 들었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부모님을 전도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고 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탄이 방해했다. 아버지는 내가 주일에 교회에 못 가게 밭일을 맡겼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일 아침 일찍 밭에 나가 맡은 일을 하다가 교회에 갔다. 예배가 끝나면 몰래 돌아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우리 집의 반대는 그런대로 무시할 수 있었다. 문제는 큰집의 반대였다. 큰집은 딸만 있었기 때문에 나를 양자로 삼았다. 대를 이을 장손이라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집안 어른들은 내가 교회에 가는 것을 더더욱 반대했다. 제사를 주도해야 할 장손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앞으로 제사상을 받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나는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하지 않기로 했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어른들의 눈치를 보느라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절을 하고 술을 따랐다. 이후에 많이 자책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절대로 절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제삿날이 다가왔다. 결심은 했지만 절을 안 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쩔쩔매는데 큰아버지가 “석봉아, 인사드려라”라고 준엄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절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냥 서 있는 편을 택했다. 선 채로 호되게 야단맞고 그날은 지나갔다.
또 다른 제삿날이 왔다. 나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앞뒤 가리지 않고 무릎을 꿇고 기도해버렸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큰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놔둬라. 이미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으니 제삿밥 얻어먹기는 틀렸다.” 그 다음부터는 절을 강요하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4) 예수 영접한 아버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
몽둥이찜질 각오하고 전도한 아버지 간암으로 운명… 장례 준비 중 기적이
큰집의 양자가 된 후 찍은 가족사진이다. 앞줄 아이가 김석봉 대표다. 김 대표 뒤가 큰어머니. 앞줄 세 분 중 오른쪽 첫 번째가 어머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내 육신의 아버지 이야기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 형제들은 3일간 금식했다. 아버지는 눈을 뜨셨고,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시다 3개월 후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내가 전도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전도하라고 했다. 그것이 효도라고 했다. 하지만 불가능할 것 같았고 일단 열심히 기도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선생님은 “기도만 해서는 안 된다. 전도는 직접 말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들은 시키는 대로 한다. 나도 그랬다. 나는 아버지에게 “예수 믿고 천국 가자”는 말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말을 하기로 정한 그날 나는 아침과 점심을 금식했다. 작전도 세웠다. ‘저녁식사 중에 말을 꺼내자. 한마디만 하자. 아버지 예수 믿고 함께 천국 가요.’ 칼국수를 먹었는데 처음에는 입이 안 떨어졌다. ‘그래 30번 세고 말하자. 그래 50번 세고 말하자. 100번만 세고 말하자’며 스스로 독려했다. ‘그래 순교는 아주 복되다는데 내가 전도하다 아버지에게 맞아 죽으면 그것도 복이겠지’라고 위로도 했다.
그리고 큰마음 먹고 “아버지, 예수 믿고 천국 가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제 순교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동생들은 ‘형은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주변이 조용했다. 폭풍전야였다. ‘밖으로 나를 집어던지실까,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실까, 몽둥이찜질로 이어질까’라고 생각했다.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 집 빚을 다 갚으면 엄마하고 같이 갈게.” 기적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하나님, 그 빚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빨리 갚아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아버지는 이후 7년이 지나서야 교회를 가셨다. 빚을 갚아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아버지가 며칠 못 산다고 했다. 어머니는 굿을 했고, 절에 가서 불공을 했다. 절망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큰누나가 말했다. “지옥 가면 고생하고 너무 힘들대. 엄마, 우리 아버지 모시고 교회 한번 갑시다.” 당시 조용기 목사님이 시무하던 서대문교회에 갔다. 생애 첫 예배를 드린 아버지는 “여기가 천국이구나”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몇 달 후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 큰누나, 그리고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주무시는 것처럼 꾸며 택시를 탔다. 어머니는 수술도 못 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그래도 수술은 한번 받게 해 드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우겼다. 우리는 전북 정읍으로 가는 길에 전주예수병원에 들렀다. 의사는 장례를 치르라고 했다.
집에 도착하자 큰형이 공연히 난리를 피웠다. 우리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큰누나는 먼저 인근 교회의 전도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자고 했다. 또 앞으로 3일간 금식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기도 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렇게 3일이 지났을 때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눈을 뜨셨다. 가족들은 모두 방언이 터졌다. 아버지가 눈을 뜨자 큰누나는 “아버지, 일어나세요. 기뻐하며 찬양합시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췄다. 집안 어르신과 동네 사람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갔다.
또렷이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는 그때 도망가지 않고 남은 당숙에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살아계시네. 동생, 누가 뭐래도 예수님 잘 믿게.” 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시면서 3개월을 더 사셨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5) 고된 막노동에도 “성경공부·전도가 내 삶의 길”
7년여 성경공부에 믿음의 눈 활짝… “체계적 신학 배우자” 신학교 입학
김석봉 석봉토스트 대표(왼쪽)가 인천 선목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섬길 당시 한 상가 앞에서 어린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 신수동 마포소방서 근처에 내가 20대부터 지금까지 섬기며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국어린이전도협회 서서울지회 사무실이 있다. 어린이전도협회는 미국에서 시작한 어린이전도사역단체로 한국에는 1957년에 들어왔다. 현재 전국에 49개 지회가 있고 한 해 평균 어린이 40만명 이상을 전도하고 있다.
나는 서울 은평구 역촌동 반석성결교회(이길우 목사) 장로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훈련하셨다. 나도 신앙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우리 가족은 모두 인천으로 이사했다. 나는 용접 일을 계속했다. 조선소, 자동차공장, 컨테이너 공장 등에서 용접했다. 막노동도 했다. 매일 고된 일을 반복했지만 그 와중에도 성경을 공부하고 싶었다. 나는 누나가 섬기던 서인천교회(현 선목교회)에 다니면서 청년 대여섯 명과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우리는 토요일마다 모였다. 성경공부는 7년간 이어졌다. 그러면서 성경을 바라보는 내 눈이 열렸다. 성경을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때 함께 한 청년들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지금 각 교회의 장로나 권사가 됐다.
말씀을 공부하면 할수록 전도를 하고 싶었다. 교회는 각 가정을 방문해 문틈에 주보를 꽂아 놓는 식으로 전도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효과가 없었다. 나는 교회 전도사에게 전도하려면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 전도사는 내게 한국어린이전도협회를 소개했다. 전도에 대한 내 열정을 바로 봤던 것 같다. 나는 협회에 소속된 청년 7명과 한 팀을 이뤘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어린이들을 전도했다. 소속 교회도 소속 교단도 달랐지만 인천에 사는 어린이는 한 명도 빠짐없이 복음을 듣게 하겠다는 열정으로 전도했다. 아이들에게 복음을 쉽게 전하기 위해 재미있는 그림책도 개발했다.
인천 주안에 있던 시민회관(현 옛시민회관 쉼터)을 빌려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전도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각자의 호주머니를 털어 대관비를 마련하고 지역 아이들 3000여명을 초청했다. 인형극을 보여주고 복음을 전했다. 또 이렇게 알게 된 아이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말씀으로 양육했다.
거주지를 서울로 옮겼다. 공장에 취직했고 막일을 했다. 배운 게 없어 하는 일은 비슷했다. 나는 항상 무시를 당하는 것 같았다. 월급도 안 올랐고 승진은 꿈도 못 꿨다. 상황을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성경을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신학을 공부하자고 생각했다. 당시 다닌 교회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반석성결교회다. 현재는 역촌동으로 이전했다. 나는 고 김용련 원로목사를 만나 상의하고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측의 무인가 신학교에 입학했다.
김 원로목사는 내게 특별한 분이다. 나의 영적인 멘토일 뿐만 아니라 나와 아내를 연결해 준 분이다. 아내도 이 교회를 섬겼다. 대학에서 유아교육과를 전공한 아내는 이 교회의 관인유치원인 반석유치원 교사였다. 나는 주일학교 교사로 섬겼다. 그래서 가끔 일로 만나곤 했다. 유치원의 이런저런 것을 고쳐야 할 때 아내는 내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유치원 아이들 사진도 내가 찍어줬다. 그러면서 친해졌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교제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이지만 아내는 대졸 출신이었다. 학벌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를 극복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학벌을 놓고 볼 때 우린 다른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6) 대졸 아내의 결혼 조건 “도와줄테니 검정고시를”
교회 유치원 교사였던 믿음의 아내… 목사님, 초등졸인 내게 배우자로 소개
김석봉 석봉토스트 대표가 1991년 경기도 안양 성결대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쓴 채 가족들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안경 쓴 이가 아내.
초등학교를 졸업한 남성과 대학을 졸업한 여성의 만남. 영화에서나 있을 것 같은 일이다. 나는 초등학교만 나왔고,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마친 것은 한참 후였다. 아내는 대전 배재대 유아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보통 영화에서는 첫눈에 반한 고학력자가 상대의 학벌을 무시하고 결혼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아니었다. 아내를 사랑한 나머지 내가 아내를 납치하다시피 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먼저 아내와 장모님에게 감사하고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31세, 그때도 여전히 나는 용접과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야간에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측의 무인가 신학교에 다녔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아주 좋게 봤던 것 같다. 하루는 내가 섬기던 반석성결교회 김은호 목사가 좋은 자매가 있으니 만나 보라고 권했다. 지금의 아내였다. 나는 말로만 한 번 만나보겠다고 했다. 교회의 유치원에서 아내를 자주 보곤 했지만 여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내는 교회 관인유치원 교사였다. 3개월이 지났다. 김 목사는 또다시 “결혼할 때가 됐으니 마다하지 말고 한 번 만나 보라”고 했다. 나는 싫다고는 못하고 기도해 보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반석성결교회 김용련 원로목사가 새벽예배를 마치고 잠깐 보자고 했다. 목양실에서 무릎을 꿇고 한참 기도하던 김 원로목사는 “결혼 시기가 지나가고 있는데 결혼해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했다. 그는 “태어나서 자라는 모든 과정을 내가 봐 왔는데 이렇게 준비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매는 내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내였다. 처음에는 두 목사가 상의한 끝에 내게 권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김 원로목사는 일단 기도하고 느낌이 오면 이야기하라고 했다.
며칠이 지났다. 아내가 일하는 유치원의 한 교사가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불렀다. 당사자에게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며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다. 또 아내였다. 그제야 아내를 다시 보게 됐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저를 위해 준비해 주신 자매가 이 자매입니까?”
아내는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 내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펄쩍 뛰었다고 했다. 아내는 내 주변에 여자가 너무 많다고 했다. 사실 어린이전도협회나 신학교를 다니며 알게 된 자매들을 일 때문에 만나곤 했다. 아내는 그것을 본 것이었다. 김 원로목사는 “결혼하면 너한테 정말 잘해 줄 사람”이라고 아내를 설득했다. 이런 상황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솔직히 아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동생이 대뜸 “형,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해 봤어. 형 처지에 그런 여성이 온다면 대박 아니야?”라고 나를 혼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해서 아내와 마주 앉았다. 나는 내 상황을 솔직히 모두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돈이 없어 전세는커녕 월세도 못 살고 공장 안에 있는 빈방에서 산다고 했다.
아내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그러면 유치원 옆에 집을 얻어 살자고 했다. 단 하나, 조건이 있었다. 아무리 학벌을 안 따져도 고등학교는 마쳐야 하는 것 아니냐며 도와줄 테니 검정고시를 보라고 했다. 이어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결혼 허락을 구했다. 나는 장모님에게 넙죽 절을 하고 “제게 딸을 허락하신다면 밥은 굶기지 않겠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없지만 제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니 저는 부자입니다. 결혼해서 하나님 나라의 공주로 모시며 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7) ‘토스트 스낵카’ 노점상 사업… 출발과 함께 시련이
검정고시 거쳐 안양 성결신학대 졸업… 장사가 잘되자 주변 상인들 항의 빗발
석봉토스트 스낵카가 2001년 서울 중구 세종대로 22길에 위치한 모습.
아내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남편이 시간 관리를 잘하게 해주세요”였다. 반석성결교회의 금요기도회 때마다 이 기도제목을 내놨다. 나도 나름 전도사였는데, 이런 기도제목을 공개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계획 없이 살았다. 아내의 결혼 조건대로 검정고시를 마쳤지만 그뿐이었다. 남편으로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했다.
둘째를 낳기 전 아내가 다니던 유치원이 문을 닫았다. 아내는 어린이집 교사로 갔다. 그즈음 나는 고졸 검정고시를 마쳤다. 이어 경기도 안양 성결신학대에 들어갔다. 셋째를 낳았다. 학비와 셋째 양육비 등 돈 쓸데가 많아지자 아내는 학교 근처로 이사해 놀이방을 하겠다고 했다. 상가를 임대했고, 반쪽은 살림집, 반쪽은 놀이방으로 꾸몄다. 먹고사는 문제는 그렇게 해결했다.
신학대를 마치자 아내는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를 불러 앉혔다. 그리고 200만원이 든 통장을 내밀면서 “그동안 공부하느라 고생했어요. 다 마쳤으니까 이제 돈을 벌어 우리를 먹여 살리세요. 나는 오늘부터 일을 안 합니다. 곧 쌀도 떨어지고요.” 아내는 놀이방 아이들을 다 돌려보냈다.
200만원으로 시작할 만한 일은 없었다. 웬만한 가게 보증금도 3000만원 이상이었다. 이때 이길우 전도사(현재 반석성결교회 목사)가 “홍대 앞에 토스트 파는 포장마차가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몰리더라”고 했다. 홍대 근처 노점상에 가서 토스트를 사 먹으며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며칠 동안 사장과 이야기도 하고 멀리서 동향도 살폈다. 토스트를 사다가 내용물이 무엇인지 일일이 핀셋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다른 음식을 파는 노점상도 둘러봤다. 그러면서 마음을 굳혔다. 조그만 차를 마련해서 토스트를 팔자. 새 차는 당연히 비쌌다. 800만원은 줘야 했다. 그러던 중 230만원짜리 폐차 직전의 스낵카를 판다는 신문 광고를 봤다. 차를 사 놓고 2개월간 토스트 만드는 연습을 했다.
노점상은 쉽지 않았다. 자리를 찾는 것부터 문제였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야 했고, 지나가면서 사 먹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어떤 곳은 사람은 많은데 그냥 바쁘게 지나갔다. 시청역을 시작으로 웬만한 지하철역 인근은 다 가 봤다. 그러다 녹번역에 자리를 잡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척 많았다. 좁은 장소지만 차를 대기에 안성맞춤인 곳이 있었다. 그러나 장사가 안됐다. 역 안에 사람은 넘치는데 토스트를 사 먹는 이들은 없었다. 첫날 5000여원을 벌었다. 일주일을 버텼다.
이번에는 홍대입구역 주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루에 3만여원을 벌었다. 재료비도 안 되는 돈이었다. 이유가 뭘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생각해 보니, 다들 출근길에 지하철 타러 가기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을 쳐다볼 겨를이 없었다. 초를 다투는 출근 시간에는 나도 안 사 먹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하철로 들어가는 곳보다 나오는 곳, 출근이 아닌 퇴근하는 이들이 많은 곳, 사람들이 여유가 있어 보이는 곳을 물색했다.
서울시청 건너편 더 플라자 호텔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대박이었다. 불티가 났다. 첫날 30분도 안 돼 준비한 재료가 다 팔렸다. 다음날은 재료를 준비한다고 준비했는데도 2시간도 안 돼 다 팔렸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반갑지 않은 손님이 닥쳤다. “당신 뭐 하는 거야, 당신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어디서 온 거야.” 주변 상인들이었다. 바로 옆 가판대 아주머니는 긴 철사를 들고 와 위협했다. 빨리 치우라고 아우성이었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과 파출소에 갔다. 경찰은 “얼굴을 보니까, 선하게 생겼는데, 왜 여기까지 왔어요? 처음이니까 오늘은 봐 드려요”라며 가라고 했다. 이런 일이 계속됐다. 호떡 장사 아저씨는 오전 11시에나 문을 열면서 오전 6시부터 11시까지 토스트를 파는 내게 와 당신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방해했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8) 깡패 행패·단속에도 “한국 최고 노점상 되겠다”
서울시청·세종대로 매일 쫓김의 연속… 선행 안 깡패, 다른 깡패들 방해 막아줘
김석봉 석봉토스트 대표가 지난해 말 극동방송이 주관하는 서울 상계동 연탄배달 봉사에서 연탄을 나르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노점상은 좋은 자리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좋은 자리일수록 이런저런 문제가 많다. 경쟁이 치열하다. 그러다 보니 훼방꾼이 있고, 주변 상인들의 견제도 상당하다. 그래서 돈 없고 백 없는 노점상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쉽지 않다. 내 뒤에는 돈 많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셨다.
서울 더프라자호텔 인근에서 토스트를 파는 것은 주변 상인들의 방해로 포기했다. 서울시청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이 없었다. 토스트가 잘 팔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세종대로 큰길가로 나왔다. 서울파이낸스센터와 서울시청 사이에 스낵카를 댔다. 토스트가 잘 팔렸지만 1주일 후 서울 부시장이 와서 “장사를 하시는 것은 좋은데 시장도, 장관도 이곳을 왔다갔다 하니까 다른 곳으로 옮겨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뉴국제호텔과 공사 중이던 서울파이낸스센터 사이에 차를 댔다. 앞에는 코오롱 사무실 건물이 있었다. 이번에는 코오롱 회사의 경비가 정색하며 “여기서 장사하면 어떡하느냐”고 말했다. 조금 후 검은색 세단이 들어왔는데 코오롱 회장이 탄 차 같았다. 난리 칠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1주일을 눈치 보며 버텼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다. 코오롱 회사의 한 과장이 오더니 “회장님이 젊은이가 밥 먹고 살려고 하는데 그냥 놔두라고 했다”고 전했다.
문제는 장사가 잘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공사 중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는 1주일만 더 해보고 자리를 옮기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코오롱 직원 두 명이 토스트를 사면서 ‘이 집 토스트가 맛있다’는 소문이 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열심히 사 먹을 게요. 우리 회사 직원들 많아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조금 더 버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깡패의 행패, 단속이 문제였다. 구청 단속반이나 경찰에 걸리면 장사도 못 하고 과태료와 벌금만 10만∼20만원 나갔다. 벌금 한 번 내면 장사해봐야 손해였다.
어느 날은 장사를 나가려고 시동을 켰는데 겁이 덜컥 났다. “아빠, 이것 좀 사줘”라고 아이들은 뒤에서 조르는 것 같았고, “얼른 자리 빼세요”라고 단속반은 윽박지르는 것 같았다. 2시간여를 꼼짝 못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제게 용기를 주세요. 음식 솜씨도 좀 주세요.” 이때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머리를 스쳤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나는 이 말씀에 큰 위로를 받고 정면돌파를 결심했다. 먼저 옷부터 바꿨다. 남대문시장에서 호텔 주방장 옷을 사서 입었다. 이전에는 누더기를 걸쳤다. 없어 보여야 돈이 적게 뜯길 것 같았다. 또 창피하니까 넓은 챙의 모자를 썼다. 이 모자도 벗었다. “이왕 창피 당할 거면 확실히 창피 당하자. 비록 노점상이지만 한국에서 토스트 굽는 프로가 돼 보자”고 결심했다.
주방장 옷을 입었다고 오던 깡패가 안 오는 것은 아니었다. “여긴 원래 내 자린데 감방 갔다 오니까 당신이 있네. 다른 말 않겠어. 내 자리니까 돈 내놔.” 나는 이 문제도 프로답게 대처하자고 생각했다. 방법은 미소였다. 묵묵히 식빵을 구우며 사내와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욕하고 위협하며 자릿세를 요구했지만 나는 “아, 오늘 또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깡패의 태도가 바뀌었다. “형씨 알고 보니 가난한 사람 많이 돕는다며. 원래 여기 내 자리인데, 당신이 그냥 해”라고 했다. 그 뒤부터 이 깡패가 다른 깡패들을 막아줬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9) “첫 손님에게 판 수익은 무조건 선교 예물로”
“하루 수익 십일조는 불우이웃에” 등 나만의 노점상 원칙 만들어 지켜나가
석봉 토스트의 김석봉 대표가 2004년 서울 상암동에 있는 구세군 서울후생원에서 아이들에게 떡볶이를 만들어 주고 있다.
노점상이었지만 내게 몇 가지 소소한 원칙이 있었다. 먼저, ‘첫 손님에게 판 수익은 무조건 선교 예물로 드린다.’ 첫 손님이 여러 명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돈을 별도로 모았다가 극동방송에 전파선교기금으로 보냈다.
또 ‘하루 수익의 십일조를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한다.’ 이 돈으로는 고아원, 독거노인, 노숙인 등 불우이웃을 도왔다. 이를 통해 내게 있던 거지 근성을 없애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번 돈으로는 생계만 유지하고 적금도 들지 않았다. ‘장사는 오전까지만 한다’는 원칙도 지켰다. 오후에는 주변의 다른 상인들이 돈을 벌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주변 상인들이 처음에는 이 마음을 몰라주더니 나중에는 단골이 됐다. “장사하러 나오느라 항상 아침을 못 먹고 오는데 아침을 챙겨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또 ‘단속반이 와서 자리를 빼라고 하면 무조건 뺀다’도 원칙 중의 하나였다. 이 원칙을 지켰더니 단속반원이 내 편이 됐다. 단속반원이 어느 날 내게 사무실에 들르라고 했다. 갔더니 커피를 타 주면서 “보통 단속을 하면 소리 지르면서 ‘저쪽은 놔두고 나만 갖고 그런다’며 생떼를 쓰는데 당신은 아무 소리 없이 가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고 했다. 그냥 살아온 이야기를 했더니 “단속을 안 할 수는 없고…”라며 안타까워했다.
청결하고 몸에 좋은 재료만 쓰겠다는 원칙도 있었다. 단속에 걸려 법원에 들락날락할 때였다. 법원은 항상 위생법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나는 억울했다. ‘내가 노점상이지만 청결을 하나의 원칙으로 세우고 굽는 판을 철이 아닌 스테인리스로 교체했고, 건강을 생각해 설탕과 조미료를 없앴는데 위생법 위반이라니….’
나는 또 영어 일어 중국어 등 한 국가마다 20문장을 외워 외국인 고객에게도 토스트를 팔았다. 토스트를 한 개라도 더 팔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한국의 토스트를 알리겠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나는 재판장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최후진술을 위해 밤새 준비했다. 그리고 재판장에게 “재판장님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라고 허락을 구한 뒤 이렇게 말했다. “제 노점이 불법인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항상 청결하게 유지했고 시청 부근이라 외국인, 특히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노점상에 대한 인식을 좋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무교동 5대 명물로 인정받고 일본의 가이드북에도 올랐습니다.”
재판장은 이렇게 시작한 내 말을 가로막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5분여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얼마나 긴장했던지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재판장은 “그래도 노점은 불법입니다. 하지만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청결하려는 원칙과 외국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는 마음을 잃지 마세요. 그래도 벌금은 물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벌금을 4분의 1로 깎아줬다. 그때 나는 큰 용기를 얻었다. ‘미리 고민하고 겁낼 필요 없구나. 정면 돌파도 길이구나.’
노점상 연봉 1억 신화로 나는 언론에 여러 번 노출됐다. 첫 번째는 정말 의외의 일로 신문에 났다. 1998년 ‘스포츠서울’의 사회면에 게재됐다. 게릴라성 폭우로 길이 안 보일 정도였지만 그날도 스낵카를 끌고 같은 자리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손님도 거의 없었다. 한 손님이 오더니 “폭우 때문에 사람도 없는데 오늘은 쉬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이 시간에 이 자리를 지키는 것도 고객과의 약속”이라며 “단 한 분이 와도 그분을 위해서 토스트를 팔겠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전화번호를 적어갔다. 그 손님이 서울신문 기자였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10) ‘이웃에 도움 주는 노점상’ 언론 스포트라이트
언론들 성공·섬김 스토리 집중 보도 외환위기로 고통 받은 이들에 희망 줘
석봉 토스트의 김석봉 대표가 2007년 8월 연예인 박미선 원미연 김지선씨(왼쪽부터)와 KBS2 ‘경제비타민’을 촬영하고 있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이 그렇게 부담스러운지 몰랐다. 서울신문 사회면에 고객과 약속을 지키는 노점상으로 보도되고 무교동의 토스트 맛집으로 소문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나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데 성공한 사람으로 비치는 게 부끄러웠다. 처음에는 방송에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하지만 노점상 ‘석봉 토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SBS의 다큐 ‘세상이 아름다워’의 피디가 방송을 찍자고 했으나 고사했다. 세 번을 찾아왔다. 그래서 내가 방송에 출연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달라고 했다. 그는 “외환위기 이후 많은 사람이 힘들다며 자살하고 있다. 그런데 노점상이지만 열심히 일하면서 남들까지 돕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큰 힘을 얻겠느냐”고 했다.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일주일 동안 촬영하고 방송에 나갔다. 전국에서 전화가 왔다. “대단하다” “감사하다, 너무 큰 힘이 됐다”등의 내용이었다. 그중에 특별한 분이 있었다. 그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끊지 마세요”라고 절규하듯이 말했다. 여성이었다. 큰 기업을 운영했던 회장이었다. 외환위기로 회사가 망하고 너무 큰 고통을 받고 있었고 거의 폐인이 됐다고 했다.
“자살을 두 번 시도했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자살을 시도하려는 차에 텔레비전에서 당신을 봤어요. 그리고 노점상을 하는 당신도 열심히 사는데 나도 살아야겠다. 당신 때문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너무 고맙습니다.”
울먹이면서도 연신 고맙다고 하면서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멍했다. 순간 피디가 내가 왜 방송에 출연해야 하는지 설명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앞으로 방송 출연도 열심히 하자고 결심했다. 이후 이 방송, 저 방송을 탔다. 다큐뿐 아니라 뉴스에도 여러 번 등장했다. 2002년 MBC 11시 뉴스, 2004년 SBS 8시 뉴스가 ‘돈을 벌어서 이웃을 돕는, 희망과 꿈을 전달하는 사람이 있다’는 요지로 나를 소개했다. 어릴 때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라고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찬양이 생각났다. 본의 아니게 그대로 된 것이 꿈만 같았다.
SBS 뉴스는 집에서 식사하며 봤다. 내 이야기인데도 감동했다. 그때는 제3자의 입장에서 보게 됐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내가 살아온 과정이 머리를 스쳐 갔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지나치지 말라고 하셨던 아버지의 가르침, 성경의 가르침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일하러 나가시면서 “거지가 우리 집에 오면 빈손으로 보내지 마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우리도 감자, 보리쌀 등으로 연명하다시피 살았지만 거지가 오면 있는 것을 나눠줬다. 방송이 나온 날 나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당시 나는 내게 너무 비관적이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너는 매일 왜 그러냐.”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하고 상처받았다. 그날 저녁에는 “너 정말 잘했다, 계속 이렇게 잘 가보자”고 내게 칭찬하고 격려했다.
2004년 KBS2 ‘VJ 특공대’에도 나왔다. 그 방송의 여파도 대단했다. 5시간 동안 일하는 모습,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 손님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 화장실은 언제 어떻게 가는지까지 다뤘다.
그 고객 이야기도 하고 싶다. 단골손님으로 매일 토스트를 드시러 오셨는데, 몇 개월 만에 노점을 찾았다. 그는 그동안 결혼하고 임신하고 많은 일이 있었다면서 석봉 토스트의 맛을 도저히 잊지 못해 벼르고 별러 남편 출근시키고 왔다고 했다. 나는 토스트 몇 개를 선물로 싸드렸다. 이때부터 고객 만족 서비스에 대해 더 연구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11) 성공 1원칙 “내 시간의 진짜 주인공이 되자”
하루 5시간 자기·남에게 베풀기 등 습관 바꾸기로 내 삶의 이정표 마련
김석봉 석봉토스트 대표가 2004년 서울 탑골공원에서 점심을 거른 한 노인에게 토스트를 나눠주고 있다.
노점상이 안정되자 나를 돌아보게 됐다. 나의 부족하고 부끄러운 점, 치부, 상처 이런 것들이 보였다. 가장 부끄러운 것은 ‘게으름’이었다. 나는 10시간 이상 자야 만족했다. 성공한 이들은 어떤가 알아봤더니 5시간 이상 자지 않았다.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10시간을 못 자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낮에 낮잠을 자서 보충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낮잠도 자지 않았다. ‘나도 다섯 시간 이상 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성공하려면 잠부터 줄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힘들었다. 어느 책에 보니 습관을 바꾸려면 21일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21일간 5시간만 자기로 했다. 중간 중간 실패도 있었지만 21일을 지냈다. 이번에는 3개월 동안 5시간만 자기로 했다. 이어 3년에 도전했다. 이렇게 잠자는 습관을 바꿨다. 이렇게 바뀐 습관이 다시 나를 바꿨다.
두 번째로 부끄러운 것은 ‘나만 알았다’는 점이었다. ‘짠돌이’였고 얻어먹기만 했지 베풀 줄 몰랐다. 그런 내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노점상을 통해 번 돈에서 우리 집 생계를 해결한 나머지는 이웃에게 베풀자고 결심했다.
먼저 주변의 보육원을 찾아가 토스트를 구워줬다. 11시쯤 장사를 마친 후에는 서울 사직공원에 가서 노인들에게 토스트를 나눠드렸다. 노인들은 대부분 혼자 사는 이들로 점심을 걸렀다. 집에 가도 아무도 없거나 집까지 가기가 귀찮아 그냥 굶는다고 했다. 굶어도 공원에서 햇볕 쬐며 친구들과 있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토스트를 만들어 드려도 처음에는 “나 돈 없어”하며 받지 않았다. “돈 받으려는 게 아니에요. 식사하시라고 드리는 거예요”라고 하면 그제야 고마워하며 받았다. 아예 동사무소에 찾아가 도움이 필요한 분을 연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노인 10여명에게 매달 용돈을 드렸다. 그런데 이 용돈을 자녀들이 와서 빼앗아 간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용돈 대신 계란을 한판씩 선물했다. 용돈을 드릴 때보다 더 많은 이들을 섬길 수 있었다.
세 번째로 부끄러운 것은 ‘시간 개념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시간관리를 하자고 결심했다. 하루는 24시간밖에 안 되는데 엉망으로 살 순 없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늘 시간이 부족했다. 시간 관리를 위해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다 시간관리법을 가르치는 곳을 알게 됐다. 한국리더십센터였는데, 프랭클린 플래너를 통해 시간관리 하는 법을 가르쳤다.
핑계겠지만 기계처럼 살까 봐, 써 놓은 것에 억매일까 봐 일정을 쓰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래도 리더십센터에서 효과적이라고 가르치니 따르자고 결심했다. 다른 것은 못해도 일과를 미리 정리하는 것만은 하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3년을 했다.
지금은 내가 내 시간의 주인공이 됐다. 이전에는 약속을 거절할 줄 몰랐다. 늘 바빴고 시간에 쫓겼다.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시간 안에서 자유로운 나를 발견하고 있다. 소개하면 이런 식이다. 매일 아침 10분 내에 그날 일정을 정리한다. 그리고 우선순위를 정한다. 일정을 마치면 체크한다. 처음에는 체크된 게 거의 없었다. 며칠 동안 체크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습관이 되니까 안 쓰면 오히려 불편하게 됐다.
일주일이나 한 달 일정도 마찬가지다. 일정을 정리한 뒤 우선순위를 정하고 진행된 것은 체크를 한다. 요즘은 일정 정리를 위한 스마트폰 앱이 많이 있지만 나는 사용하지 않는다. 한두 번 써봤는데, 배터리가 다 되면 볼 수 없었고 잘못 조작하다 저장한 것을 다 날린 적도 있다. 힘들어도 그냥 아날로그 방식의 프랭클린 플래너를 쓰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12) 노점상도 서비스업… 청결한 ‘웰빙 토스트’ 개발
호텔 조리사 복장에 설탕량 확 줄이고 불판도 철판 대신 스테인리스로 교체
김석봉 석봉토스트 대표가 극동방송 바자회에서 토스트를 굽고 있다.
노점상도 서비스업이다. 토스트 노점상은 음식 서비스업이다.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서비스를 했다. 업계의 프로가 되고 싶었다. 노점상에서 토스트를 팔았지만 그렇다고 프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나는 옷도 호텔 조리사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니 업계의 프로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업을 마치면 오늘 아침은 어땠는지 한 장면 한 장면 떠올리곤 했다. 오늘 오신 분들에게 최선을 다했는가, 불편해한 일은 없었는가, 서비스는 괜찮았는가 등을 생각했다. 또 어떻게 하면 고객들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프로는 확실히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메모지에 적었고, 1주일 안에 적용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바꾼 것이 설탕을 줄인 일이었다. 웰빙 토스트, 요즘은 웰빙이라는 말이 흔하지만 당시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였다. 토스트 안에는 계란이 들어간다. 그 계란에 설탕, 조미료 등을 뿌려야 맛이 났다. 하지만 나는 건강을 챙긴다고 집에서는 설탕을 먹지 않았다. 나도 안 먹는 설탕을 토스트에 뿌려도 되는 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모지에 ‘설탕을 줄이자’고 적었다.
각종 책을 사서 설탕 없이 단맛을 내는 방법을 찾았다. 답은 채소에 있었다. 특정 채소를 식초에 절이면 단맛이 극대화됐다. 새로운 방식으로 조리한 토스트를 먹은 고객들은 갸웃거렸다. 맛이 깔끔해졌는데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비법을 설명하자 놀라면서 이것은 그냥 토스트가 아닌 웰빙토스트라고 이름을 붙여줬다.
두 번째는 불판을 바꿨다. 이전에는 철판이었다. 철판은 녹이 생겨 지저분했다. 그래서 나는 길거리에서 음식을 사 먹지 않았다. 내가 사용하는 철판도 오래 사용하자 녹이 나고 지저분해졌다. 감사한 것은 내가 용접기술이 있다는 것이었다. 15년간 용접을 하면서 철, 구리, 스테인리스 등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이 중에 ‘스테인리스 27종’은 녹이 안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2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비싸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불판 판매업체는 스테인리스 제품을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만들면 어떠냐고 했더니 팔리지도 않을 것을 왜 만드느냐고 핀잔을 줬다. 나는 직접 도안을 만들어 제조업체에 주문했다. 그 업체 사장도 “다른 사람도 이것을 만들어 달라고 해 만들어줬는데 버리더라. 당신도 결국에는 버릴 것”이라고 했다.
돈을 낼 테니 일단 만들어 달라고 했다. 사장은 100만원을 요구했다. 당시 철판은 7만원이었다. 스테인리스 불판으로 토스트를 굽는 연습을 한 달 내내 했다. 낮에는 기존의 철판을 장착해 토스트를 구워 팔고, 일을 마치면 스테인리스판을 올려놓고 토스트를 구웠다.
스테인리스는 적정 온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불판의 일정한 온도 유지는 맛있는 토스트를 굽는데 필수 요소였다. 온도를 맞추기 위해 유리 온도계를 붙였더니 깨졌다. 나는 레이저 온도계를 사서 수시로 불판에 대지 않고 레이저를 발사해 온도를 측정했다. 그러면서 빵이 가장 맛있게 구워지는 온도를 찾아냈고, 불을 줄였다 켰다 하면서 적정 온도를 감으로 유지했다. 밥 먹는 것도 잊고 연구하고 연습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더욱 청결해졌을 뿐만 아니라 맛도 달라졌다. 불판이 유리판처럼 반질반질하고 깨끗해지자 사람들이 더 많이 왔다. 또 불판을 바꾼 이유를 설명해줬다. 그랬더니 입소문을 퍼뜨렸다. 그때 매출이 크게 올랐다. 한 단계 점프한 시기였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13) 서비스는 얼굴 파는 것… 아침마다 웃는 연습
웃는 것 습관 붙자 매출이 배로 껑충… 손님들에게 작은 칭찬, 장사 더 잘돼
김석봉 석봉토스트 대표가 서울 무교동 스낵카에서 토스트를 굽고 있다.
노점상에서 흔히 보는 장면이다. 예를 들어 토스트를 만든 손으로 돈도 받고 잔돈도 준다. 잔돈은 기름이 묻어 지저분해진다. 누가 봐도 위생적이지 않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토스트 빵, 채소, 소스 통 등을 손으로 만지다가 돈을 받고 잔돈을 드렸다.
‘토스트 굽고 주는 손과 계산하는 손을 달리할 수 없을까.’ 1주일 동안 개선 아이디어를 고민했다. 처음에는 깨끗한 수건을 쌓아 놓고 수시로 손을 닦았다. 토스트를 만들어 드리고 손을 닦고 돈을 받아 잔돈을 드렸다. 돈을 주고받고는 또 손을 닦고 토스트를 만들었다. 그랬더니 손님들이 좋아했다. 깨끗해 보이고 손님에게 성의를 다하는 것 같다고 했다.
어떤 손님들은 반대의견을 내놨다. 시간 낭비라고 했다. 출근 시간에는 초를 다툴 정도로 바쁜데, 언제 손을 닦고 빵을 주고 계산하느냐고 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고민했다.
그러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셀프 계산. 고객들이 직접 계산하게 하자.’ 대개는 단골손님이고 또 줄을 서서 토스트를 받고 계산을 하니까 가능할 것 같았다. 100원짜리, 1000원짜리 잔돈을 넣어 셀프 계산대를 놨다. 어떤 분들은 계산을 하지 않고 가거나 잔돈을 많이 집어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나자 정착이 됐다. 손님들은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계산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했더니 토스트를 더 많이 만들 수 있게 됐다. 셀프 계산대를 놓은 뒤에는 토스트를 배가량 더 팔 수 있었다.
가끔 장난치는 분도 있었다. “저 이 돈 갖고 튑니다.” 그럼 나는 맞장구를 쳤다. “저는 마라톤 선수였어요.”
또 하나, 고객을 위해 아주 중요한 것을 바꿨다. 어느 날 거울을 보는데 깜짝 놀랐다. 내 얼굴이 밝고 환한 얼굴이 아니라 긴장하고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이었다. ‘토스트를 맛있게 만들고 깨끗하게 만들면 뭘 해, 이 얼굴 보고 맛있게 먹겠어?’라고 생각했다. 서비스는 얼굴을 파는 것이다. 연습해서라도 얼굴을 바꾸자고 결심했다.
아침마다 웃는 훈련에 들어갔다. 거울을 보면서 5분씩 웃었다. 기준은 ‘윗니의 8개가 보이도록 웃는다’였다. 노점을 펼치고 판매 준비를 하면서도 웃는 연습을 계속했다. 토스트를 팔면서도 내가 지금 웃고 있는지 점검했다. 그렇게 3개월을 했더니 웃는 것이 습관이 됐다.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하루 매출이 배 이상 올랐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울상이었다. 화난 표정이었다. 토스트를 먹으면서도 ‘나 건들지 마세요’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때는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좀 고쳐보자고 생각해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안부도 물었다.
그러다 또 다른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이들을 웃게 하고 용기도 주면서 성경 말씀도 읽게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노점상 앞에 ‘금주의 메시지’라는 팻말을 붙였다. 두 종류의 문장을 적었다. 위에는 일반적인 명언을 적었고, 아래에는 잠언의 말씀을 적었다. 위부터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래까지 읽게 하자는 것이었다. 말씀만 있거나 순서를 바꿔 위부터 말씀을 적으면 거부 반응을 보일 것 같았다.
또 하나는 이들을 칭찬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칭찬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토스트를 먹는 동안 머리, 메이크업, 안경, 넥타이, 스카프, 양복 등 어떤 포인트를 찾아 슬쩍 칭찬하는 말을 했다. 손님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입이 귀에 걸렸다. 장사는 더 잘됐다. 칭찬을 들은 손님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데려왔다. 보통 스낵카 안쪽에 10명, 바깥쪽에 40여명이 줄을 섰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14) 日 방송서 인터뷰 쇄도… 서울의 명물로 소개
외국인들 위해 日·英·中 언어 공부… 일본인들 귀국한 뒤 맛집으로 소문
김석봉 석봉토스트 대표가 2005년 경기도 평촌에서 매장 오픈 기념이벤트를 벌이면서 고객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서울 무교동의 토스트 노점상에는 외국인 손님도 많았다. 아침 손님 중 3분의 1이 외국인이었다. 손님은 많아서 좋은데
마음이 불편했다. 국졸에 검정고시 출신이 외국어를 알 턱이 있나. 토스트를 들고 ‘이거냐’고 몸짓하면서 장사를 했다. 그냥 팔면 팔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온통 국제화를 외치고 있는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이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원에 찾아갔다. 외국어를 배울 요량이었다. 그러나 학원비가 비쌌고, 무엇보다 시간이 안 맞았다. 나는 서점에 가서 책 3권을 샀다. 일어 영어 중국어. 그리고 장사를 하면서 몇 마디를 쓰면 될까 생각했더니 많이 써야 20문장이라고 생각해 일어 영어 중국어를 20문장씩을 외웠다.
손님 중에는 일본인이 제일 많았다. 그 다음이 영어권, 이어 중국인 순이었다. 자기 나라 말을 사용하자 손님들이 아주 좋아했다. 특히 일본인들이 좋아했다. 어떤 일본인은 팁까지 줬다. 제일 비싼 토스트 2000원짜리를 하나 먹고 만원을 냈다. 8000원을 거슬러 줬더니 도로 주는 것이었다. 4개 더 달라는 줄 알고 4개 더 주느냐고 했더니 팁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이 귀국한 뒤 소문을 냈다. 한국에 가면 무교동 토스트 노점상이 있는데 정말 맛있는 집이라고 소개했다. 또 일본인들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들이 꼭 나랑 사진을 찍자는 거였다. 토스트는 구워야 하는데 자꾸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나중에는 거의 자동이 됐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각도에서 포즈를 취하고, ‘이치 니 산(하나 둘 셋)’이라고 외치면 토스트를 굽다 말고 얼굴을 내밀었다. 많을 때는 아침에 평균 30컷을 찍었다. 1년이 지나자 내 사진이 일본 내 한국 소개 사이트에 엄청나게 돌아다녔다.
가끔은 국내 가이드가 일본인 단체손님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 30여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일본인들은 꼭 여기를 가야 한다고 해서 왔다고 했다. 소문이 나자 일본 NHK 방송이 인터뷰를 했다. 일본의 간사이 TV도 서울의 명물로 석봉토스트 노점상을 소개했다.
심지어 토스트만 먹으러 일본에서 오는 이들도 있었다. 하루는 인근에 있는 뉴서울호텔 지배인이 오더니 “호텔 옆에서 장사하셔서 아주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혹시 아침에 일본인 두 분이 토스트를 먹고 토스트 서너 개를 싸가지고 가신 분이 있지 않았느냐”고 했다. 지배인에 따르면 이분들은 어젯밤 늦게 투숙해서는 오전 8시에 모닝콜을 부탁했다. 그리고 나갔다 오더니 토스트를 몇 개 싸왔고 바로 체크아웃했다. 지배인이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이 토스트를 먹으려고 일부러 늦게 한국에 왔다가 오전에 사서 다시 비행기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벅찼다. 토스트를 먹자고 비행기를 탔다니.
또 기억에 남는 한 부부가 있다. 미국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였다. 이들은 토스트를 먹고 가시다가 다시 오셔서 팁을 줬다. 꺼내보니 10만원이었다. “너무 많다”며 되돌려 주자 부부는 “한국에 매년 1주일씩 관광 겸 사진을 찍으러 오는데, 이렇게 입맛에 맞고 맛있는 토스트는 생전처음이어서 감사해서 드리는 선물”이라고 했다. 미국의 유명한 철강회사 회장님 부부라고 했는데 명함을 주시면서 미국에 오면 한번 꼭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15) 줄잇는 손님들… 장사 설렘으로 밤잠 설쳐
새 메뉴·소스 개발… 노하우 공개, 2004년 프랜차이즈 체인점 시작
김석봉 석봉토스트 대표(가운데)가 2002년 체인점 점주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00년 즈음 오전 6시부터 5시간 동안 토스트 300여개를 팔았다. 석봉토스트의 토스트가 맛있다는 소문이 났고, 석봉토스트가 희망을 굽는 토스트맨으로 언론에 소개되면서 손님이 줄을 섰다. 나는 토스트 노점상의 프로가 되기 위해, 최고의 서비스를 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그랬더니 체인점까지 내게 됐다.
나는 손님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몇 년 일하다 보니 눈썰미도 생겼다. 하루에 300명 안팎의 손님이 왔지만 여러 번 오는 손님은 대충 기억했다. 그래서 주문을 하기 전에 “햄토스트요?”라고 말하거나 채소의 양을 알아서 조절해 줬다. 자신을 알아주자 손님들은 더 좋아했다. 단골이 됐고, 새로운 손님을 데려왔다.
또 화장실을 자주 안 가려고 물 먹는 것도 조절했다. 물의 양은 소변의 양과 직결된다. 다섯 시간 동안 손님을 대하다 보면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갈증이 나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랬더니 소변이 자주 마려웠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양해를 구하지만 갔다 오면 손님들은 가버렸다. 이것은 아니다 싶었다. 손님이 가고 안 가고를 떠나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이었다. 나는 마시는 물의 양을 조절해 5시간 동안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가스가 떨어지면 가스통을 들고 뛰기도 했다. 토스트를 굽다가 가스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올스톱 된다. 다행히 근처에 가스충전소가 있었다. 갈 때는 그런대로 들 만하지만 가스를 충전하면 보통 무게가 아니다. 당시는 20㎏ 가스통을 갖고 다녔다. 나중에는 5㎏ 가스통을 별도로 갖고 다녔다.
새로운 토스트 메뉴도 개발했다. 고객 한 분이 “오늘도 계란밖에 없습니까”라고 했다. 한 주 정도 있다가 또 오셔서 “계란토스트밖에 없네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귀에 꽂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마다 오시는 분도 많은데 이분들이 매일 계란토스트만 드시면 얼마나 질릴까라고 생각했다. 나는 계란을 기본으로, 야채토스트, 치즈토스트, 햄토스트, 이것저것 다 넣은 모듬토스트 이렇게 3가지 메뉴를 개발했다.
소스도 연구하고 개발했다. 처음에는 케첩만 사용했다. 설탕을 안 쓰려고 넣기 시작한 것이 케첩이었다. 외국에는 무슨 소스를 사용할까 알아봤더니 머스터드였다. 나는 케첩과 머스터드 두 개를 한꺼번에 사용했다. 속된 말로 맛이 죽였다. 그때 오뚜기에서 ‘허니 머스터드’를 출시했다. 이 제품이 비쌌지만 나는 과감히 사용했다.
그런 날도 있었다. 다음날 장사할 준비를 마치고 잠을 청하는데 잠이 안 왔다. 손님들과 만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내가 토스트에 완전히 미쳤구나’라고 생각했다.
장사를 마무리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기다렸다. 어떤 분은 사인을 받고 싶어 했고, 어떤 분은 사진을 찍자고 했다. 어떤 이는 토스트 만드는 노하우를 알려 달라고 했다.
나는 이 노하우를 모두 공개했다. ‘우리는 모두 맛있는 토스트를 먹을 권리가 있다’는 제법 거창한 이유를 만들었다. 또 언젠가는 사람들도 다 알 텐데 굳이 안 가르쳐준다고 하는 것도 우스웠다.
노하우를 알려 달라는 이들을 근처 커피숍으로 안내했다. 정리를 마치고 그곳에 가면 보통 하루에 60∼70명이 기다렸다. 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앉고 가운데에 내 자리를 비워 놨다. 사람들은 체인점을 내게 해 달라고도 했다.
2000년 체인점 10개를 내줬다. 그냥 이름만 쓰라고 했다. 체인점이 뭔지 잘 모를 때였다. 그러다 보니 토스트의 질, 위생관리 등이 안 됐다. 시행착오를 거쳐 2004년 8월 정식으로 프랜차이즈를 내주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16) 갑작스런 위암 판정… “주님 살려주세요” 기도
위 75% 잘라내는 대수술·항암치료… “죽더라로 일하다 죽자” 다시 일터로
김석봉 석봉토스트 대표가 항암 투병을 하던 2003년 4월 넷째와 함께 찍었다.
2002년 한국 축구가 4강에 진출해 온 나라가 난리가 났다. 우리 집은 당시 첫째가 초등학교 6학년, 둘째가 5학년, 셋째가 유치원, 넷째가 임신 8개월이었다. 언론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나를 계속 다뤘다. 길거리 노점상에서 ‘연간 1억을 버는 사나이, 토스트맨’. 하지만 나는 병들어 있었다. 위암이라고 했다.
연간 1억원을 벌었지만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집의 크기도 늘리지 못했다. 스낵카 말고 차도 없었다. 통장에 만원 한 장 없었다. 벌어서 생계만 유지하면 남는 것은 다 이웃을 위해 썼기 때문이었다.
“위암, 악성입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병원을 나와서는 다섯 시간 정도 밖을 헤맸다. 아내에게 전화했다. “위암이래. 빨리 수술하면 고칠 수 있대.”
그날 밤은 꼬박 새웠다. “죽으면 나는 천국 가는데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아이들은 고아원에 갈 텐데.”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아내도 잠을 자지 못했다. 서로 등을 대고 누워, 눈물만 닦았다. 아내가 두 마디 했다. “혼자 죽지 마. 나 두고 혼자 떠나지 마.” 나는 속으로 외쳤다. “하나님, 보셨죠. 아내의 이야기 들으셨죠. 저 한 번만 살려주세요.”
어떻게든 살겠다고 결심하고 나는 수술대에 올라 위의 75%를 잘라냈다. 의사는 암세포가 임파선으로 번졌다며 하루에 여섯 끼 식사를 하고 항암제를 세 번 투여해야 한다고 했다. 4∼5년은 쉬라면서 재발하면 희망이 없다고 했다.
수술도 수술이지만 버티는 것이 더 힘들었다. 정해진 양보다 쌀 한 톨만 더 먹어도 위에서 난리가 났다. 위급상황이 수시로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내가 수술하고 누워 있는데 아내도 누워 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넷째를 출산했기 때문이다. 통장은 비어 있지, 애들은 다 어리지, 형제가 있었지만 누구 하나 도움을 줄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수술 후 6개월이 지났다. 돈이 없어 그냥 쉴 수만은 없었다. 나는 ‘어차피 죽을 것이면 일하다 죽자. 아이들에게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남겨주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을 나가기로 했다.
“나는 토스트를 다시 굽겠다.” 나는 날마다 새벽 5시에 화장실에 기어가다시피 들어가 이렇게 세 번씩 외쳤다. 또 “나는 살아있어 기뻐. 나는 일하느라 바빠. 내 얼굴은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이니까 나는 예뻐”라고 외쳤다. 그럴 때마다 내 눈에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어찌 보면 내가 이렇게 외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또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석봉아 너는 할 수 있어. 너라면 해낼 거야. 너는 꼭 해내고 말 거야.”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용기를 줬다. 기도도 했다. “하나님 저 지금 다리가 휘청거려 서 있기도 힘들어요. 하지만 저는 일 나갈 겁니다.” 실제 3주를 그렇게 외치고 차를 끌고 일을 나갔다.
항암제는 정말 독했다. 약 기운 때문에 일하다 쓰러지기도 했고 손님이 눈앞에 서 있는데도 왔는지 모른 적도 있었다. 어떤 때는 내가 스낵카에 있는 것조차 몰랐다. 몸이 너무 힘들어 집에 가다가 2시간여를 차 속에 누워 있기도 했다. 아내는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했지만 나는 말하지 못했다. 더는 나가지 말라고 할 게 뻔했다.
그렇게 3년을 버텼다. 그러면서 기적을 맛봤다. 항암치료가 끝났을 때 의사는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세 가지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첫째, 머리가 빠질 수 있습니다. 둘째, 살이 안 찔 겁니다. 셋째, 얼굴이 까매집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모두 거꾸로 됐다. 머리는 더 났고 얼굴은 하얘졌고 살도 올랐다.
죽다 살아난 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은 도전하는 자에게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고백과 지난날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 그것이 ‘석봉 토스트, 연봉 1억 신화’였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17) 프랜차이즈 사업 반년 만에 가맹점 100여개로
“돈없어 노점상 하려는 사람들인데…” 가맹비 등 안받고 경비 최소로 줄여
김석봉 석봉토스트 대표가 2007년 석봉토스트 암사역점 오픈기념으로 이벤트를 벌이자 행인들이 몰려들고 있다.
2004년부터 프랜차이즈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체인점을 원했다. 그래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척척 진행될 줄 알았다. 하지만 쉬운 사업은 없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다른 사람을 돌보게 됐는데 남는 장사를 하지 못했다.
프랜차이즈 사업에는 초기 자본이 필요했다. 당장 사무실이 필요했다. 상담도 해야 했고 업무용 책상도 놔야 했고 교육도 해야 했다. 시간을 아끼려면 사무실은 무교동 스낵카 근처에 있어야 했다.
무교동의 임대료는 비쌌다. 이런저런 것을 따져 보니 최소한 1억원이 필요했다. 생계만 유지하고 남는 돈은 이웃을 위해 썼기 때문에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은행이 노점상에게 대출해줄 리도 만무했다. 지인 중 한 분이 석봉토스트를 믿고 투자했다. 무교동에 사무실을 냈다.
나는 오전에는 스낵카에서,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일했다. 사무실에서는 사업설명회를 하고, 가맹계약을 맺으면 교육을 했다. 재료 준비하는 과정, 토스트 굽는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가르쳤다. 체인점에 재료도 공급했다. 나는 좋은 재료만 고집했다. 특히 치즈 햄 등은 유명 브랜드 제품만 썼다. 좋은 재료를 사용하겠다는 욕심도 있었고, 그래야 식중독 등 문제가 생기면 해당 기업이 해결해 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대기업 제품을 대량 구매하고자 했다. 대기업을 찾아가 담당자를 만났다. 제품을 정기적으로 납품해 달라고 하자 담당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도매상 제품을 체인점에 납품했다. 나중에 석봉토스트가 더 유명해지자 그 대기업 담당자가 석봉토스트에 제품을 납품하고 싶다고 찾아왔다.
스낵카는 0.8t트럭을 개조했고 석봉토스트 로고를 붙였다. 여름에는 모기장을, 겨울에는 방풍비닐을 설치했다. 트럭 개조 등 전문적인 부분은 업체에 맡겼지만 대부분 내가 했다. 밤새는 일도 많았다.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대여섯 달 동안 체인점을 100여개로 확장했다. 2004년 8월 가맹사업을 시작해 2005년 3월 즈음 투자받은 돈 1억원을 다 갚았다.
그렇다고 일반적으로 체인점을 낼 때 받는 가맹비 노하우비 등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돈이 없어 노점상을 하려는 이들에게 이런 비용을 부담시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만 트럭을 스낵카로 개조하고 빵 굽는 시설을 설치하는 데 따른 시설비가 약간 남았다. 가맹비 등을 받지 않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가게 10평 기준으로 4000만∼5000만원만 있으면 석봉토스트를 낼 수 있다.
나는 체인점만 내주는 게 아니고 오픈기념 이벤트도 해줬다. 새로운 체인점에서 직접 토스트를 구워주며 손님들과 덕담을 나눴다. 나름 유명했기 때문에 손님들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그즈음 무교동의 석봉토스트는 접었다. 2005년 청계천 복원사업이 진행되면서 인근의 노점상들이 모두 없어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노점을 접었다.
외국인을 위한 관광가이드북에도 소개됐는데, 내가 장사를 하고 못하고를 떠나 무교동의 석봉토스트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쉬웠다. 지금 같으면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자고 했을 텐데 말이다. 사무실도 무교동에서 영등포구 신길동으로 옮겼다. 현재 사무실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다. 가맹비도 안 받으면서 유지하기에는 무교동의 사무실 임대료는 너무 비쌌다. 가맹점은 많이 냈지만 금전적인 것만 생각하면 실속은 없었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18) “노점상의 기적을 배우자” 삼성그룹 특강 요청
내 인생·성공 스토리에 모두들 감동… 2009년엔 ‘명강사 95호’ 위촉패 받아
김석봉 석봉토스트 대표가 2009년 10월 대한민국 명강사들의 모임인 한국강사협회에서 95호 명강사 위촉패를 받고 있다.청계천 복원사업으로 무교동 석봉토스트 스낵카를 철수한 이후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강의다. 주식회사 석봉토스트 대표로 경영하는 것 외에는 주로 특강을 하고 있다. 나름 잘나가는 강사다. 전문 교육도 받았다. 명강사라는 호칭도 얻었다.
첫 강의는 삼성그룹에서 시작했다. 어느 날 무교동에서 토스트를 팔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삼성입니다. 과장 승진자들이 있는데 이들을 위해 강의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했다. 나는 “삼성, 그 삼성 말인가요?”라고 물었다. “네, 그 삼성 맞습니다. 차를 보내드릴 테니 주소를 부탁합니다.” 나는 약속된 날에 삼성 연수원인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창조관으로 갔다. 2시간 동안 그간의 삶과 무교동에서 토스트를 굽기 시작해 나름 성공하게 된 이야기를 강연했다. 반응이 좋았던지 다음에 또 불렀다. 이번에는 주임 승진자를 대상으로 했다. 다음에는 신입사원이 대상이었다. 삼성은 강의 평가를 해서 90점 이상을 못 받으면 다시 부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있었다. 내가 적어도 90점 이상은 얻은 것이었다.
욕심이 났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강의하는지 궁금했다. 강의를 끝내고 다른 강사의 강의를 청강했다.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파워포인트를 사용했다. 내가 열 마디, 스무 마디 할 내용을 파워포인트 한 장으로 설명했다. 나도 컴퓨터를 샀다. 중학교 아들의 도움을 얻어 소프트웨어를 컴퓨터에 설치하고 파워포인트를 만들었다. 물론 엉망이었다.
나는 강연자료 만드는 법, 강연하는 방법 등을 가르치는 곳은 없는지 알아봤다. 한국강사협회라는 곳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리고 강의에 대해 새로운 세계를 접했다.
더 욕심을 냈다. 마침 이화여대 평생교육원에 최고 명강사 과정이 생겼다. 나는 1기로 입학해 한 학기 과정을 마쳤다. 이곳에서 국내 파워포인트의 대가로 알려진 한국강사협회 초대회장 안병재 주임교수를 알게 됐다. 나는 현재 최고 명강사 과정 동문 총회장을 맡고 있다.
내가 고민했던 것, 원했던 것이 이 과정 안에 다 있었다. 이를 통해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나를 초청하는 회사가 원하는 대로 내용을 자유자재로 변주할 수 있었다. 내가 내 이야기를 통해 감동할 정도였다. 강의 때 쓰는 말투도 바꿨다. 강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청중들이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한국강사협회는 매년 분기별로 강사를 평가한다. 나도 명강사로 불리는 이들, 강사협회 임원, 각 유명기업의 연수원장 앞에서 60분간 강의했다. 떨리다 못해 두려운 자리였지만 내 연설이 감동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평가 이후 2009년 명강사 95호 위촉패를 받았다. 나도 명강사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2011년에는 한국HRD(인적자원개발)협회에서 강사 부문 대상을 받았다. 2013년엔 ㈔한국신지식인협회에서 역시 강사 부문 대상을 받았다.
이후에도 강의 요청이 쇄도했다. 중소기업, 대기업, 정부 부처, 국회, 초·중·고교, 대학교, 삼성의료원 등에서 강의를 요청했다. 강의 내용은 성공 노하우, 인생을 바꾸는 작은 습관, 가슴을 뛰게 디자인해라, 시간관리 노하우 등이다. 강의 방법 중 내가 중시하는 것은 ‘첫째, 메시지를 분명하게 정하라’ ‘둘째, 웃음을 곁들여라’ ‘셋째 감동을 전달하라’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19) 한인디아스포라와 유학생 섬기는 코스타 강사로
‘하나님 자녀가 가져야 할 비전’ 등 전 세계 다니며 청년들에 도전 심어줘
김석봉 대표가 2012년 명지대에서 열린 한국코스타대회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기업체 특강 강사로 주가를 올리던 나는 국제복음주의학생연합회(코스타) 강사로까지 활약하게 됐다. 코스타는 30여년 전 홍정길 이동원 목사 등이 한인디아스포라와 유학생을 위해 시작한 복음주의 운동이다.
코스타 강사들은 사례를 받지 않고 오히려 자기 돈을 들여 강의하러 왔다. 또 모든 일정을 참가자들과 함께 하며 은혜를 받았다. 나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알고 큰 도전을 받았다.
코스타와의 인연은 강원도의 한 호텔에서 시작됐다. 이랜드 직원을 대상으로 특강을 마쳤을 때 당시 코스타 상임총무 곽수광 목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 강연이 아주 좋았다면서 그해 5월 필리핀에서 열리는 코스타대회의 강사로 초청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코스타에 대해 전혀 몰랐다. 곽 목사는 코스타의 시작부터 당시 활동 상황까지 한참을 설명했다. 나는 가겠다고 했다. 9년 전 이야기다. 필리핀의 코스타 대회는 장난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향한 청년들의 열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예수님을 소개하려는 강사들의 열의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청년들은 1년 동안 코스타 대회만 기다린다고 했다.
강사는 한국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홍정길 이동원 목사, 송정미 사모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자비량으로 섬겼다. 사실 이런 인사들이 강사료를 받고 강연을 한다면 코스타 대회 운영 자체가 불가능할 터였다. 이들을 강사로 모시려면 웬만한 액수로는 어림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코스타 대회 내내 자리를 지켰다. 자신의 강연 순서가 끝났다고 먼저 일어서는 법이 없었다. 이들도 참석한 청년들이 입은 티셔츠를 똑같이 입고 청중 맨 앞자리에 앉아 강연을 경청했다. 모두 대회 시작 전에 도착해 끝날 때까지 청년, 스태프들과 함께 했다.
사실 강의를 하러 왔다기보다 은혜를 나누러 왔고, 가르치러 왔다기보다 본을 보이러 왔다. 이들은 무대에 서기도 하고 무대 아래에서 청중이 되기도 했지만 한결같이 섬기는 모습이었다. 또 청년들에게 도전을 줄 뿐만 아니라 내 자신도 이곳을 통해 도전을 받고 은혜를 받았다.
어떤 이들은 코스타 강연을 위해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휴가를 내서 오기도 했다. 나는 코스타를 통해 큰 도전을 받았다. 코스타에 갈 때마다 회개하고 통곡하고 기도하고 비전을 새롭게 했다. 반면 청년들은 코스타를 통해 말씀으로 세워지고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들의 역할을 찾았다. 이들 중에는 갖가지 가정 문제로 외국에 방치된 아이들도 있었다. 또 힘겨운 유학생활로 탈진한 이들도 있었다.
청년들은 한국의 유명 강사들을 직접 보며 처음에는 ‘이런 분들을 내가 직접 만나다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청년들은 강사들이 아니라 강사들이 소개하는 예수님을 만난다. 그러면서 회복되고 헌신을 다짐하고 비전을 세워나간다.
코스타 대회에 처음 참석한 나는 큰 감동을 받고 불러주기만 한다면 매년 강사로 섬기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어떤 해는 코스타 대회에 4번 참석해 강연하기도 했다. 덕분에 중국 필리핀 아프리카 캐나다 등 많은 나라를 다녔다. 지금까지 대략 10회가량 코스타 대회에서 강연했다.
나의 강연 주제는 ‘인생을 바꾸는 습관’ ‘하나님 자녀가 가져야 할 비전과 꿈’ ‘인생은 시간관리다’등이었다. 나는 코스타 대회에 강사로 참석하면서 석봉토스트의 해외 진출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됐다.
***[역경의 열매] 김석봉 (20 ·끝) 세상에 꿈과 희망 주는 토스트를 굽겠습니다
1980년대부터 어린이전도협회 섬겨 ‘예수님 위한 사업’ 초심 잃지 않을 것
김석봉 석봉토스트 대표(가운데)가 2011년 2월 극동방송 ‘만나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 코너에 출연한 후 김장환 목사(오른쪽), 김성윤 아나운서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어린이전도협회와 극동방송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단체다. 어린이전도협회는 1937년 미국에서 창설돼 전 세계 190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제 사역단체다. 이곳은 1980년대 내가 섬기던 서인천교회(현 선목교회) 전도사가 소개하면서 알게 됐다. 지금 나는 어린이전도협회 서서울지회 이사장으로 섬기고 있다.
어린이 전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어릴 때 한 번이라도 복음을 들어야 커서라도 신앙생활 할 수 있다. 매스컴의 발달로 아이들이 복음을 쉽게 접할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매스컴에는 복음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넘쳐 아이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
또 대부분의 아이가 학원에 가 있어 길거리에서 아이들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니 전도가 어렵다. 세상이 흉악해진 것도 전도를 어렵게 하는 요소다.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경계한다. 이렇게 전도가 어려운데도 협회는 오직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전도자들을 훈련하고 실제 전도에 나서고 있다.
극동방송은 청취자에서 후원자로, 지금은 운영 부위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고 김용련 반석성결교회 원로목사님이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찬양을 들어야 마음에 평안을 얻는다며 극동방송 청취를 적극 추천했다. 실제 극동방송을 통해 믿음이 성장했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 또 ‘극동PK장학재단’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극동PK장학재단은 김장환 목사를 미국으로 유학 보낸 한국전 참전용사 파워스 상사와 김 목사의 영문 첫 이니셜 ‘P’와 ‘K’를 따 만든 장학재단이다. 김 목사가 그동안 받지 않은 사례비를 모아 만들었고 1년에 한 50여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나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가깝게는 2년 안에 직영매장을 내는 것이다. 직접 유니폼을 입고 토스트를 굽고 서비스를 했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 석봉토스트를 경영하는 것보다 좋았다. 그 행복을 되찾고 싶다. 직영매장 옆에는 연구실과 응접실을 만들어 제품을 연구하고 나를 만나고자 하는 이들과 삶을 나누고 싶다. 아카데미도 만들려고 한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대학생들에게는 시간 관리, 경영 등을, 빵 굽는 기술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기술도 가르쳐주고 싶다.
나는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당신 잘못이다’라는 빌 게이츠의 말에 크게 공감한다. 앞으로는 가난했던 지난 삶에 연연하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미래에 투자할 것이다. 멀리는 석봉토스트를 해외에 수출할 계획이다. 한국에 바른 먹거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 버는 수입으로는 국내에 330만여㎡(100만평) 규모의 청소년캠프장을 지을 계획이다. 이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심어주고 비전을 세우도록 도울 생각이다.
신앙적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업을 시작했던 초심을 잃지 않고 겸손하게 살면서 예수님을 전하고 싶다. 그래서 나의 비문에 ‘한국인답게,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면서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사람, 이곳에 잠들다’라고 쓰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