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메고 / 임정자
'제주 산간 강풍경보로 인해 한라산 국립공원 전 구간 통제합니다. 탐방로 입산이 불가능하며 입산하신 탐방객께서는 하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라산국립공원에서 문자가 왔다. 06시 45분, 버스 타러 나가려는 시간이었다. 배낭을 메고 그대로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한라산 등반을 위해 목포에서 배 타고 제주도에 왔다. 전날 호텔 앞에서 성판악 가는 버스 정류장도 확인했다. 물과 김밥을 사려고 편의점 위치까지 눈여겨보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려고 프론트(안내)에 5시50분 모닝콜을 부탁했는데, 입산 통제라니!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네이버를 열고 폭풍 검색했다. '제주도 올레길'이라 적고 연결된 블로그를 읽기 시작했다. 대부분 무엇을 먹었다. 그곳에 가면 어디는 꼭 가봐야 한다. 풍경 사진 몇 장 올려놓고 다음에 또 오고 싶다는 내용이다. 마음에 든 곳이 없었다. 검색어를 '송악산 둘레길'로 다시 입력했다. '송악산은 작은 한라산 같은 곳이다. 제주 올레길 10코스 걷기 좋은 해안 산책로 송악산 둘레길로 주변에 용머리, 산방산 등 볼거리가 있다.' 는 블로그에 마음이 끌렸다. 더 좋은 건 그곳에 마라도 선창장이 있다는 것이다. 제주도 날씨가 변덕이 심하다는 말은 들어 알고 있다. 천운이 내게 올지도 몰라. 걷다보면 강풍이 멈출 수도 있을 거야. 그렇다면 마라도나 가파도에 갈 수 있어. 날씨에게 마법을 걸면서 제주버스 앱을 핸드폰 바탕화면에 설치했다.
호텔에서 성판악까지는 버스로 30분이면 갈 수 있었다. 환승없이 한 번에. 송악산 둘레길은 한 시간이 넘는다. 세 네번은 버스를 달리 해서 타야 한다. 불편하더라도 그리 하기로했다. 달랑 배낭 하나 메고 왔으니까. 모르는 길은 제주도 사람에게 물어 찾아갈 것이다. 숙소도 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진짜배기 즉흥 여행은 처음이다. 오랜만에 느낀 감정이다. 봄꽃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이 힘이 난다. 새롭고 놀라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설레였다.
이른 아침이라 정류장에 학교 가는 학생들이 많았다. 출근 시간인데도 직장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드물다. 베낭 메고 모자 쓴 여인에게 다가가 송악산 가는 버스를 여기서 타야 할까요? 건너편에서 타야 할까요? 하고 묻자.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버스 노선 표지판 앞에 가더니 여기저기 눌러본다. 그곳까지 가는 길을 모르는지 버스 기사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이런 나를 보고 있던 선글라스 착용한 여인이 말한다. "거기 갈려면 건너편에서 231번 타야 합니다. 서귀포 약국에서 내려 281번으로 환승해서 서귀포 터미널에서 다시 202번을 타고 송악산 가는 버스는 기사에게 물어보란다. "제가 적을 테니 다시 한번 알려 줄래요?" 말하자 묻지도 않았는데 "그곳까지 택시비가 대략 6만 원 정도 나올 텐데" 하면서 다시 버스 경로를 말해주었다. 그녀의 친절한 말속에는 택시 타면 편할 텐데 굳이 버스를 이용하려 하느냐고 말하는 듯 했다. 이동경로를 인터넷 검색 한 뒤라서 그림으로 그려졌다. 그녀에게 고맙다 말하고 건너편 정류장으로 향했다.
비는 그치고 흐릿한 날씨다. 231번 버스를 탔다. 버스는 북적거리지 않았다. 운전기사 바로 뒷좌석 오른쪽에 앉았다. 시야가 한눈에 보였다. 아침시간인데 사람들 걸음이 여유가 있어 보였다. 빨간, 파란 ,오렌지색 포르쉐 차들이 한 줄 기차로 정지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거리에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걸어가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디 먼 나라에 온 듯 이색적인 분위기다. 도시를 벗어나니 넓은 평원에 풀 뜯어 먹는 말들이 흔하게 보인다. 귤 농원에 낮은 돌담 그 너머에 일하는 사람들, 창밖 풍경을 구경하다 내릴 곳을 놓쳤다.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다음 정류장에서 281번 타면 된다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환승할 차가 도착했다. 정신없이 올라 타 의자에 앉아 무심결에 들었다. 다음 정류장은 '답다니' 입니다. 정류장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마을 이름인지 사람 이름인지 버스 안내 방송에 귀 기울이게 했다. 운전석 뒤 모니터에 정류장 이름이 적어져 있다. 눈은 그곳에 귀는 방송에 쫑긋했다. 듣기는 외래어인데 글자를 보면 제주도 지역명 인듯하다. 뒷빌레, 여의물, 고래왓 등 무슨 뜻이 있는지 버스기사에게 묻고 싶었으나 다음 정류장 이름이 궁금해 참기로했다. 생경한 지명을 들으면서 차 밖 풍광을 보니 심심하지 않았다. 서귀포 터미널에서 내려 202번을 타고 안덕면 화순리에서 내려 걸었다. 불어오는 바람과 나무의 향기를 먹으면서.
바다와 산이 보인다. 길 안내 표지판에 '올레길 10코스' 적혀있다. 쾌청한 날은 한라산도 보인다는데 내게 행운은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변 풍광이 운무에 끼어 갑자기 천상에 도달한 기분이다. 희뿌옇게 뿌려진 구름이 점차 가까워지자, 시야가 온통 바위산이다. 병풍처럼 야트막한 산, 구름바다에 떠 있는 섬이다. 검은 암벽에 이중 삼중으로 겹쳐있는 틈새마다 운무가 가득 차 돌연 다른 세계에 들어선 것 같았다. 전혀 기대하지 읺은 장면이 나타나는 이것이 여행의 맛이 아니겠는가!
시설 식구들이 코로나 감염으로 격리 병원에 입원했다. 뜬금없이 5일 휴가가 생겼다. 이 자유를 즐길 생각을 하니 하늘을 날아오르듯 기뻤다. 일요일, 노트북 앞에서 여행지를 찾았다. 남편은 다음에 함께 가자했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라산 등반 예약 홈페이지를 열었다. 18일 성판악에서 06시~08시 등반하는 시간으로 예약했다. 그리고 배편을 알아보았다. 씨월드고속훼리 4월17일 09시 퀸제누비아호 제주 출항, 4월19일 18:10분 목포 도착이다. 주중이라서 선택의 폭이 넓었다. 호텔과 콘도를 알아 보았으나 비싸기도 해서 포기하고 현장에서 구하기로 했다. 2박3일 제주도 한라산 여행은 이렇게 즉흥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짐을 꾸렸다. 작은 배낭 하나 메고 떠난 여행이 나를 가볍게 했다.
첫댓글 우와! 나 홀로 배낭 메고 제주 여행, 멋집니다.
여행은 예측하고 계획했던 일이 어긋나야 진짜라고 하더군요.
기억에 남은 여행이었길 바랍니다.
선생님도 할 수 있어요.시도한다면요.
제주도에서 38년만에 친구도 만났구요. 예측불허의 에피소드가 있었지요. 고맙습니다.
저도 혼자 걷는 거 좋아합니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은 거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그렇죠! 걷는 게 좋지요.
공감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와우! 정말 멋지세요.
선생님도 충분히 할 수 있답니다. 시도해보세요.
우와!
선생님도 할 수 있어요.
도전해보세요.
진짜 이번 글감에 딱 맞는 글이네요. 멋진 '도전'이예요.
나도 걷기나 여행은 좋아하지만 혼자는 망설여지는데 용기있으시네요.
우와, 이렇게 멋진 분이셨나요?
대단합니다.
사람과 어울려 살기 좋아하지만 아직 혼자만의 여행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글 보면서, 언젠가는 저도 도전해야겠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