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소리가 멈출 때 그리움은 시작되고 / 정선례
동치미 담그려고 생강을 벗기다 무심히 통유리 너머로 눈길이 간다. 앞산에 알록달록 물든 단풍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날도 오늘처럼 단풍이 고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하루 꼬박 걸려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생전에 웃음이 없는 분이셨는데 빈소에 모셔진 영정 사진의 할머니는 희미하게나마 웃고 있었다. 치마저고리 옥색 한복이 왠지 슬프게 보였다. 할머니의 일생이 보였기 때문이다. 평소 잔병치레 한 번 안 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가시다니. 이른 아침 횡단보도를 건너다 사고를 당하셨단다. 오랜만에 그것도 영정 사진으로 할머니를 뵈었는데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너무 슬프면 눈물샘이 안에서 닫히는 걸까? 절을 하고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진즉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너무 죄송해서 가슴이 아팠다.
할머니는 젊어서 남편을 잃었다. 젖비린내나는 막내까지 4남 2녀를 남겨두고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가난한 살림에 홀시아버지와 어린 자식들을 돌보느라 일생을 일만 하셨다. 더구나 시아버지의 울뚝불뚝하고 발끈한 성미는 인근 마을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고약했다. 들밥을 늦게 내왔다고 물 잡아놓은 논구렁에 처박은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반찬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밥상을 마당에 내던져 상을 부러뜨린 적도 부지기수였다. 어찌하여 옛날 어른들은 내 식구 귀한 줄 모르고 함부로 막 대했을까?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고개 숙이고 사는 며느리가 가엽지도 않았을까. 엄마는 입버릇처럼 할머니가 불쌍하다고 했다.
어릴 적에 큰집과 한마을에서 살았다. 때때로 이른 새벽 집에 오신 할머니는 우물에서 첫 물을 길어 장독대에 올려놓고 중얼거리며 손바닥을 둥글게 원을 그리며 빌고 또 비셨다. 화장실에 가다 그런 할머니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지만, 연신 허리를 숙이며 소원을 비는 모습은 신비로웠다. 아마도 작은 아들네 식구들의 안녕을 간절히 빌었으리라. 그 정성으로 우리가 지금 무탈한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봄이면 산과 들에 돋아난 나물을 뜯어와서 작은아들네 집 토방에 덜어 놓고 가셨다. 작은 며느리가 올망졸망 다섯 아이 기르느라 나물을 뜯을 새가 없으리라 짐작하셨을 것이다. 큰아들네 아이들 업어서 다 키우고 이웃과 품앗이하며 평생 일에 묻혀 살았건만 그들의 홀대에 눈칫밥을 먹었다. 작은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가 안타까워 함께 살자고 권했다. 당신 때문에 형제들 사이에 분란이 생겨서는 안 된다며 한사코 큰집에 머무르며 그 수모를 다 견뎌냈다. 그래서 할머니가 그런 변을 당한 걸 두고 여러 말이 나왔다.
기름지고 자극적인 맛을 멀리했던 할머니는 동치미를 잘 담갔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엄마는 샘가에 달랑무를 그득 쌓아 놓았다. 큰 뿌리는 자르고 잔뿌리는 살살 긁어 내 겉잎을 떼어 내고 무와 잎 사이를 칼로 도려낸다. 대야에 무를 지그재그로 놓으며 이파리보다는 무에 소금을 뿌린다. 달랑무는 큰 무로 담근 것보다 한입에 들어가는 크기가 가장 맛있고 식감도 좋다. 할머니는 그 중 뿌리가 여럿 달린 무른 깎아 내게 건넸다. 매우면서도 아삭하고 달았다.
싸라기 눈발 날리는 날 아침 마당을 지나 장독대에서 항아리 뚜껑을 열어 재래종 붉은 갓 한쪽으로 걷어내고 양푼에 국물과 함께 가득 퍼왔다. 달랑무 동치미는 큰 무와 달리 구정 무렵까지 무르지 않고 싱싱하다. 무 한 둘금 끝물 풋고추,대파, 쪽파, 생강, 배, 어린 갓 한 둘금 번갈아 놓고 찹쌀죽 끓인 물 붓고 맨 위에 푹 절인 붉은 갓으로 덮어 숙성시킨다. 나는 지금도 이 김치를 가장 좋아해서 배추김치보다 더 자주 담가 먹는다.
할머니는 이가 없어 잇몸으로 음식을 드셨다. 그중에서 홍시와 팥칼국수를 좋아하셨다. 그녀가 우리 집에 오는 날은 굴뚝에서 일찍부터 연기가 피어올랐다. 팥을 삶으려고 피운 불이다. 식구들 입에 먼저 넣어 주느라 정작 당신은 배가 등에 붙을 정도로 깡마른 몸집이었지만 이날만큼은 팥물 진한 칼국수를 배부르게 드셨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할머니가 불쌍하다고 했다. 부모님 심부름으로 큰집에 가면 키질하던 할머니가 일손을 멈추고 솥단지에서 고구마를 꺼내 주며 얼른 먹으라고 하던 말씀이 어제인 듯 선명하다. "애야 너는 시집 늦게 가야 헌다." 내게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결혼해서 마음이 안 좋을 때면 할머니의 이야기가 간간이 떠올랐다.
일생을 소처럼 일만 하고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살아 계셨으면 호박고지 팥시루떡 해서 찾아뵈었을 텐데. 훌훌 마실 수 있는 블루베리 요거트도 얼마나 맛있게 잡수셨을까. 그 흔한 카네이션 한 번 가슴에 달아 드리지 못했다. 아무리 후회한들 다시는 뵐 수가 없다. 어릴 때는 할머니가 싫었다. 엄마 바쁜데 방 청소 깨끗이 안 한다고, 빨래 바로 널지 않았다고 수시로 혼냈다. 공부 안한다고, 돈 아껴 쓰라는 잔소리를 수없이 해댔다. 부모는 효도 할때까지 기다려주지않는다. 왜 그때는 이 말을 깨닫지 못했는지 마음이 너무 아프다. 할머니의 잔소리가 멈춘 지 오래되었건만 그리움은 깊어만 간다.
첫댓글 그래요. 뭘하면 사는지 마음에만 두고 찾아 뵙지 못한 분이 여럿있습니다.
누구나 그럴 겁니다.
제가 할머니 속 많이 썩였거든요.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철이 안 났는지
후회스럽습니다.
지나고 나야 소중함을 아는 것.
인간의 어리석음이지요.
저도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선생님은 할머니께 효도 충분히 하셨을 것 같아요.
누구든지 사후에 딱 한번 한 사람 정해서 못다 한 이야기 나눌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할머니 손에 자랐는데
할머니 생각 잘 안 해요.
효도를 하나도 못 했거든요.
그 세대 여자들 산 일을 생각하면
그런 세월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황쌤은 있는 듯 없는 듯 순둥이로 자랐을 것 같아요.
선생님, 잔잔하면서 코끝이 찡해지는 글이네요. 선생님만의 언어가 느껴져서 좋아요.
아유^^ 왠걸요~
읽어주시고 응원까지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