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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강 창세기 9:18~29 노아가 취하여 1.01.36
26.09.13(일)
601년 2월 27일 노아 601세 되던 해 6월 27일 노아가 1년 17일 만에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긴 기간 동안 방주에 있었지만 노아는 나오자마자 자기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단을 쌓았죠
제사 즉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제사의 향기를 기쁘게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제물을 태우는 것은 본래 향기가 나는 건 아니라고 그랬죠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 제사의 향기를 기뻐 받으셨다고 하는 것은 나오자마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노아의 중심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다시는 홍수로 사람을 심판하지 않겠다.
바꾸어 말해서 홍수로 인류를 멸절시키는 일을 하지 않겠다라고 언약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인간을 심판하지 않을게 이 말씀을 하실 때 그 말씀을 듣는 대상이 누구여요?
홍수로 심판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홍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은 노아가 그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에 바꾸어서 홍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은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는 홍수로 인간을 심판하지 않을게라고 하신 말씀은 조금 더 깊이 묵상하면 무슨 의미이겠어요.
나를 믿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네가 구원받은 것처럼 구원받는다 그 말이잖아.
네가 나를 믿고 나와 동행하는 한 어떤 경우에도 나는 너를 구원해 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인 것이죠. 이것이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하시는 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그 언약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 언약에 대한 증거 증표까지 주셨단 말이에요.
증표라고 하는 것은 쌍방이 서로 주거나 아니면 약하고 아쉬운 사람이 크고 강한 사람에게 주는 거라 그랬죠 결혼할 때 신랑 신부가 서로 사랑하겠습니다. 서약하고 그 약속의 증표로 예물을 주는 것은 서로 준단 말이에요. 한쪽만 주는 것 아니란 말이죠.
기업체와 기업체가 서로 계약할 때 쌍방이 계약을 합니다. 계약서에 싸인해요. 그래서 한 부씩 나눠 갖지않아요. 그러나 돈을 빌릴때는 채무자만 채권자에게 증서를 써줍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약조물을 주고 돈을 빌려주는 법은 세상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 언약을 주시면서 인간에게 어떤 증표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만 일방적으로 당신의 약속에 대한 증표까지도 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도 말씀하시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도 당신의 말씀에 대해서 당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도 우리가 확인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세요. 1점 1획도 변함없는 당신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 말씀을 더더욱 믿을 수 있도록 맹세하시고 증표까지 주시는 분이시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증표를 주신 것이 무지개라고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무지개였을까?
우리 지난 시간에 몇 가지 한번 생각을 해봤죠
첫째로 무지개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죽어가는사람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보다 내가 당신을 영원히 살려줍니다 라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디 있어요.
하나님의 구원은 아름답단 말이죠. 무지개는 신비롭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각자를 불러내신 그 구원의 섭리를 한번 생각해 보셔요 얼마나 심요 막측합니까?
또 무지개는 크다고 그랬죠 동해에서부터 시작해서 서해까지 걸려요 하나님의 구원은 정말 큽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인간도 그 구원 속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죠.
무지개는 인간의 손으로 헐거나 세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거여요. 그래서 내가 도저히 바로 세울 수 없는 인간도 나는 저런 사람은 안 될 거야 포기한 사람도 하나님은 세우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무지개는 땅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걸리지않아요. 그죠 그래서 구원은 철저하게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요구해서 주어진 게 아니에요.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선물이 구원인 것이여요.
그 무지개를 가만히 우리가 살펴보면 그 무지개야말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그랬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제물이 되어서 돌아가시고 인간의 죄를 속한다는 그 신비로운 구원의 역사 인간 중에 누가 그것을 상상했겠어요.
예수 그리스도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구별하시지 않으셔요 그분의 구원은 크시단 말이죠.
인간이 포기한 사람도 예수님은 세우실 수 있기 때문에 폭도였던 사울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사울보다 더 못했던 나 우리 각자도 구원을 받는 거여요.
내가 이 구원을 먼저 알고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던가요 아니에요. 주님께서 먼저 주신 거예요.
자 그러면 보세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의 증표로 무지개까지 주셨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믿는 것밖에 없어요.
좀 더 세상적으로 표현하면 그냥 믿어주면 돼요.
그런데 이것을 못 믿는단 말이여요. 이것을 못 믿어서 자기 인생을 평생을 의미 없이 날려버린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이 무지개의 언약의 말씀을 내 심령 속에 새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산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새로운 미래와 희망의 실체로서의 내일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 증거가 노아단 말이죠. 바로 그 구원의 언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쫓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시려는 그를 인류의 중시조 두 번째 시조로 삼으시려는 새로운 희망과 미래의 실체로서의 새 역사를 그의 삶으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자 오늘 본문 18절을 보시겠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방주에서 나올 때 세 아들도 당연히 같이 나왔겠죠. 그렇죠 그리고 이제 인류의 역사가 새롭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으로부터 이제 모든 민족 족속들이 지금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18절을 가만히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표현이 이제 끝까지 우리가 보던 표현과는 전혀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 6장으로 한번 되돌아가 볼까요?
6장 9절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다
지금 노아의 족보를 설명합니다. 족보니까 아버지 노아 이름이 있고 아들 세 아들들의 이름이 족보에 등재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죠 이제 그 다음을 보십시다.
6장 18절
그러나 노아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라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얘기하셔요 너 그다음에는 그냥 아들들입니다.
7장 1절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여기에서도 아들들은 너의 온 집 거기에 그냥 속해 있습니다.
10:18
7장 7절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다
노아는 아들들과 이렇게 되어 있죠.
13절
곧 그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자 오랜만에 셈 함 야벳 이름이 나왔는데 이것도 개별적인 독립체로서가 아니라 노아에 딸려있는 식구로서 그냥 이름만 기록이 되어 있는 겁니다.
23절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 여기에서 아들 역시 함께 있던 자들 집합명사로 처리되어 버렸습니다.
8장 16절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와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만 말씀하십니다.
9장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여기에서도 주체는 노아여요
9장 8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기에서도 노아는 이름이 밝혀져 있고 아들들은 그저 노아에게 속해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9장 18절은 어떼요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노아의 아들들이 비로소 주어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뒤에 보면
22절 가나안의 아버지 함
23절 함과 야벳이 더 이상 노아의 아들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셈이 함이 야벳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어떤 인간이든 이 땅에 태어나면 누구의 자식으로 먼저 불려요 만약에 누구의 자식으로 불릴 수 없는 사람이라면 안타깝게도 고아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누구의 자식이라는 명칭 호칭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누구의 자식이 자기의 이름으로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소중한 교훈을 얻게 돼요. 첫째로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겠느냐야는 거예요.
정말 좋은 부모는 때가 되었을 때 자식이 자기의 이름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모입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자립할 수 있도록
자 18절 다시 읽을게요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보세요. 지금까지 세 아들들은 노아의 아들로만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이들은 자기 후손의 선조로서 사는 겁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슬하에서 벗어나서 자기의 인생을 자립적으로 살지 못하는 자가 결혼해서 자식은 낳을 수 있겠죠.
자기 자식의 부모노릇 바로 할 수 있을까요?
자기 손자 증손자에게 존경받는 할아버지 증조부가 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훌륭한 부모는 내 자식이 자신의 이름으로 걸고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그를 지켜줄 때 지켜주고 세울 때 세우고 자립하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러분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물론 그렇지 않은 부모님도 많이 계시지만 한국 부모님들의 자식 사랑은 선을 넘어섰습니다. 병적이여요.
결혼시켜 놓고 나서도 자식이 부모의 도움속에서 살게 만듭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 자식이 자기 자식의 부모가 될 수 있겠습니까?
세계 어느 나라 엄마 아빠가 자식 교육을 위해서 기러기 가족이 되어서 삽니까?
우리 깊이 생각해봐야합니다. 언젠가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자연의 법칙은 부모를 먼저 데려가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자식을 먼저 데려가시지 않죠 그렇죠 내가 내 자식이 죽을 때까지 내 자식이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내 자식을 뒷바라지 해줄 수 있으면 괜찮아요
그런데 내가 내 자식이 죽을 때까지 뒷바라지 할 수 없고 내가 먼저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그 자식이 책임 있게 자기 삶을 살 수 있도록 세워주는 게 사랑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혹 내가 내 자식이 바로 서는데 자기 이름으로 살아야 할 때 아직도 내 자식이 바로 서지 못하도록 내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번 우리는 생각해 봐야죠
두번째로 부모한테 드릴 수 있는 효도가 뭐겠습니까? 자기 이름으로 사는 겁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제 자식이 있는데 아직 어리니까 어디 가서 쟤 이재철 목사 아들이야 그렇게 이야기 들을 수 있겠죠. 그죠
그런데 그 자식들이 나이 50 60이 돼 가지고도 어디 가든지 저 이재철 목사들이야 걔들은 인생 실패한 아이들입니다. 그죠
자식이 장성하면 그 다음부터 제가 어떻게 불려져야 돼요. 누구의 아빠로 불려지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태어난 사람은 누구의 자식으로 살다가 그 다음에 자기 이름으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부모가 누구의 아빠 엄마가 되는 거죠.
그렇다면 내가 내 부모를 가장 명예롭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루라도 빨리 내 이름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서 우리 부모가 내 이름으로 누구의 부모로 불리는 분이 되게 해드리는 것 그게 효도 아니겠어요.
베들레헴의 다윗이라고 하는 소년일 수도 있고 청소년일 수도 있고 청년일 수도 있겠죠. 그런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그 체격을 보고 이스라엘 장수 중에서 아무도 나가서 싸울 엄두를 못 낸단 말입니다.
다윗은 8형제의 막네인데 다윗의 큰 형 세 사람도 그 전쟁에 지금 참전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 집에 3명이 전쟁에 나갔으니까 아들 아직 5명 남아 있잖아요.
근데 넷째 아들 다섯째 아들 여섯째 아들 일곱째 아들 다 제쳐놓고 막내 다윗을 불러서 너 지금 전쟁터에 나가 있는 형들에게 먹을 것 좀 갖다 줘라 막내를 불러서 시켰습니다.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들 자식을 키울 때 부모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보셔요 내 집에 자식이 여러 명 있는데 전쟁터에 있는 형들한테 가서 먹을 것을 전해주라는 심부름을 내가 특별히 누구에게 시킨다면 왜 시켜요 그 아이만이 이 이야기를 딱 부러지게 해줄 아이이기 때문에 시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이미 그때 자립인이어요
아버지가 볼 때에 이 자식만 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어요. 다윗이 예스하고 가지 않습니까?
그죠 가서 보니까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능멸합니다. 이스라엘 임금에서부터 국민만 능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능멸해요.
내가 가서 싸우겠다. 말리지만 나가서 싸우잖아요.
그렇죠 골리앗을 꺾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떨다가 풍전등하의 위기를 맞다가 그 젊은이 다윗에 의해서 나라가 이제 건져졌으니 임금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사울왕이 물었습니다. 네가 도대체 누구냐
다윗이 뭐라고 대답하죠.
저는 베들레햄 사람 이세의 아들입니다.
20:31
다윗의 데뷔는 이세의 아들로 시작합니다.
당연하지 않겠어요. 자기는 존재가 없는 사람이여요. 우리 아버지 아들입니다. 이러고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골리앗을 꺾고 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고 나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 난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세가 이세는 다윗의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어디 가나 그 이세는 다윗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긍지가 되는거여요
만약에 그 이세가 다윗을 정말 사랑했는데 이 다윗이 60 70이 되어서도 그리고 이세가 90 100세가 되었는데도 어디 가서 다윗의 아버지 이세로 불리는 게 아니라 자기 아들이 이세의 아들로만 불린다 그 아들 볼 때마다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정말 우리는 오늘 밤에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부모로서 그리고 자식으로서 내가 부모로서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뭐겠는가
내가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진정으로 효도하는 것이 뭐겠는가
우리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죠.
원든 원치 않든 셈과 함과 야벳은 이제 자신들의 이름으로 살아야 할 시대를 맞았습니다.
20절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노아가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노아가 첫 번째 농부였다. 그런 의미는 전혀 아니죠. 그죠
홍수 전에도 농부들이 다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홍수 이후에 그저 이제는 안정적인 삶을 살아야 되니까 노아가 이제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그 말이죠. 그죠
그런데 여기에서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우리말로는 농사를 시작하여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게 히브리말로는 이슈 하 아다마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땅의 사람이다 그 말이여요. 그래서 이 말을 그 히브리 원전을 그대로 번역하면 20절이 이렇게 됩니다.
땅의 사람인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다
이 히브리말로는 말이죠. 농사짓는다 씨를 뿌린다 라고 하는 동사가 자라라고 하는 동사가 있습니다.
또 농부를 가리키는 히브리말 구부가 있어요.
그런데 지금 이 본문에서는 농사를 짓는 노아를 가리켜서 이슈 하 아다마 땅의 사람이라고 불렀어요. 물론 구약성경에는 다른 데에도 농부를 가리켜서 땅의 사람이라고 부른 데도 있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본문을 들여다보면 여기에서 노아를 가리켜서 이슈 하 아다마 땅의 사람이라고 본문이 기록했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땅을 갈아먹고 사는 농부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다.
21절
포도주를 마시고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 포도주 마시는 거야. 이 중동 지방에서 문제 될 거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물이 좋지만 이 중동은 다 물이 석회수이기 때문에 음료수로서 적합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본래 중동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빵을 먹을 때 음료수로 포도주를 먹는단 말이죠.
그래서 성경이 포도주를 먹는 것 자체를 금한다기보다는 포도주를 음료수가 아니라 음료수를 넘어서는 수준 바꾸어 말하면 그것을 술 자체로 여기고 술로서의 포도주를 즐기는 걸 금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다고 하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뭔가 하브리말로 포도주를 야인이라고 하는데 이 포도주 앞에 하라고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를 마신다고 할 때 정관사 하가 붙을 때 히브리어 표현법에 의하면 이것은 술과 포도주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의미할 때 그런 표현을 써요
바꾸어 말하면 노아가 포도주를 그저 하루 세 끼 식사하면서 음료수로 먹는 정도가 아니라 술 자체로 즐기는 사람이 되어 있음을 지금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습니다. 취했어요.
여기에서 이 취했다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샤카르라고 동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샤카르라고 하는 동사는 샤카라는 동사의 최상급이여요.
샤카라고 하는 게 마신다 특별히 쭉 들이킨다 그런 의미인데 마신다 쭉 들이킨다는 의미의 샤카의 최상급이니까 뭐예요? 끝까지 들이키는 겁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꼭지가 돌 때까지 마시는 겁니다. 지금 노아가 그렇게 한 거예요. 평소에도 술을 즐기다가 이날은 꼭지가 돌도록 마셨습니다.
그 장막 안에서 여기에서 그 장막이라는 것은 어떤 장막을 가리키는 그 장막이 아니라 그의 장막이다
이 사람들은 다 텐트에서 살잖아요.
아버지 어머니 장막이 있고 자식들 장막이 있고 다 장막이 있단 말이죠. 근데 아마 노아는 여기에 그의 장막이라고 하는 걸 보니까 자기의 술방이 따로 있었나 봐요.
자기의 텐트를 하나 만들고 그 텐트에 처박혀서 꼭지가 돌 때까지 술을 먹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는가 벌거벗었다
자기 통제력을 상실해버렸습니다.
자 여러분 한번 머릿속에 상상을 해보세요.
요즘 말로 표현하면 골방에 앉아가지고 술병을 찬미하게 내려다 놓고 꼭지가 돌 때까지 한 병씩 술을 따서 나중에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뻗어버렸다
그러면 이 땅의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제 뭔지 알겠죠.
20절에서 노아가 땅의 사람이 되어
땅의 사람인 노아라고 본문이 표현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농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노아는 본래 어떤 사람이에요. 하늘의 사람이에요.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이어요
노아가 창세기에서 등장할 때부터 완전한 의인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다 이렇게 등장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게 뭐예요?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동행하는 거죠. 1년 17개월 동안 방주 안에서 노아가 미치지 않고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다고요.
창문이 천장에 하나 뚫려있다고 그랬죠
1년 17일 동안 하나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던 사람입니다.
그 노아가 어느덧 땅의 인간이 되었습니다.
땅을 바라보고 땅을 목적으로 삼고 육체를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골방에 앉아서 꼭지가 돌 때까지 술을 먹고 자기 통제력을 상실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세월입니다. 세월이어요
예전에 하나님만 바라보던 노아가 세월이 흘러서 땅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보세요. 홍수가 끝나서 나왔는데 오늘 내가 포도나무 심는데 내일 포도주를 내가 수확합니까? 아니잖아요.
심으면 이것이 1년 2년 3년 자라야 되고 그죠
거기에서 또 수확해서 이거를 포도주로 담아서 그걸 먹으려고 하면 꽤 세월이 흘렀잖아요.
세월이 흐른 뒤에 노아가 이렇게 바뀌어져 있음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초의 살인자였던 가인이 그 동생을 죽이게 된 동기가 하나님에 대한 예배 때문이잖아요. 그죠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물은 받으셨는데 내 제물은 안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배를 안 받으셨다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왜 하나님 안 받으셨습니까? 여쭈어야 하는데 그 순간에 가인의 안색이 바뀌었단 말입니다.
그건 뭘 의미해요. 지가 하나님이 돼 있는 거죠.
아니 내가 이거 주면 당연히 당신 기쁘게 받아야지 왜 당신 안 받는 거야.
그러니까 예배의 포커스가 하나님께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인 자기에게 맞춰져 있죠.
중요한 것은 그 가인의 범죄를 전하는 창세기 4장 3절이 뭐라고 시작합니까?
세월이 지난 후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30:29
가인과 아벨도 어릴 때는 안 그런 겁니다.
가인도 어릴 때는 겸손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에게 정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던 사람이어요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가인이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세월이 지난 뒤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걸 성경적인 다른 용어로 표현하면 뭐죠 그게 교만입니다. 교만이 뭔가 내가 사람 앞에서 목이 곧게 행동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사람 앞에 얼마든지 머리를 숙이고 겸손하게 언행을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인간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은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거할 공간을 자꾸 없애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 되는 거죠. 그 세월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왜 그렇죠 세월이 흐르면요 어린아이가 어른이 됩니다.
세월이 흐르면요 지위가 높아져요
세월이 흐르면요 가진 게 많아지게 됩니다.
세월이 흐르면요 없던 수하 사람이 생겨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의뢰하기보다는 내 마음에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공간을 내 스스로가 자꾸 없앱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온통 내가 차지하는 것이죠.
가인도 그랬고 지금 노아도 그런 상황입니다.
여러분 세월은 아무리 멈추어라고 해도 중단하지 않고 흘러갑니다.
2008년 2월 13일 오늘 하루도 흘러갔잖아요.
이제 3시간 지나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 세월의 흐름이 우리의 영적 성숙의 은혜가 되게 할 것인가?
나를 교만하게 하는 독약이 되게 할 것인가?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월의 흐름을 나의 영적 성숙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한 사람이죠.
저분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저분을 바라보면요 내가 저분에게 시선이 맞춰져 있는 한은 저 분만 바라보면 나는 항상 개미보다도 작아요 교만할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 분으로부터 시선만 제치면 외면하면 그 순간부터 내가 왜 그렇게 커져요 골리앗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그분을 바라보면서 솔로몬이 젊었을 때 그의 일천 번제를 받으시고 내가 너에게 뭘 해줄까 할 때 솔로몬이 하나님 저는 작은 아이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십시다.
그런데 솔로몬도 나중에 지위가 높아지고 세월이 흐르니까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습니까?
22절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렸다
그 노아의 아들 가운데에 함이 잘못한 그 내용을 밝혀주는 본문이에요
그런데 함에 대해서는 여기 가나안의 아버지 함 그 아들 이름이 자꾸 나와요.
18절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다
계속 지금 이 본문 속 단락 속에서는
힘은 가나안의 아버지인 걸 강조해요.
그리고 22절에서도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
하체를 보고 나갔다 또 가나안을 언급하거든요.
왜 가나안을 언급하는가?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우리가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견해는 바로 노아가 자기 장막에서 꼭지가 돌 때까지 술을 먹고 자기 통제력을 상실하고 하체를 다 벗고 있는 장면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이 손자 가나안이라는 거예요.
그 가나안이 가서 아버지 자기 아버지한테 얘기한 겁니다. 그게 지금 자기 아버지가 그 얘기를 듣고 와서 하는 짓거리가 여기에 기록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다시 보시겠습니다마는 25절 보십시다. 25절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으라
노아가 그 잘못한 것을 징계할 때 함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라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제일 먼저 보고 이 문제를 야기했던 사람이 가나안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해할 수 있죠.
22절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우리 한글로 성경을 보면 이게 뭐 대단한 일 같지 않아요.
그저 가서 봤다. 이러니까 그런데 보고라고 우리말로 번역된 이 히브리 동사가 히브리말로 라아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 라아라고 하는 것은 그냥 한번 쓱 봤다. 이 말이 아닙니다.
막 눈을 씻어가면서 주도 면밀하게 보고 나아가서 즐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경학자 가운데에서는 이 라아가 함이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고 변태적인 성행위를 했다 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단순히 그냥 봤다 이건 뭐 아버지가 그렇게 화낼 일이 있겠습니까? 그죠 그 히브리어 라아라고 하는 동사가 갖는 것처럼 우리가 본다는 우리말 의미 이상이 있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것 아니겠느냐 말이에요.
22절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일을 보고 행한 일을 보고 그러니까 단순하게 본 정도는 아니다. 그거죠. 그죠
뭔가 하여튼 인륜을 벗어나는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인륜을 벗어나는 짓을 했죠.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렸다
여기에서 알리다 하는 나가드라고 하는 히브리 말은 선포했다. 선포한다.
그러니까 뭐 조용조용하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아주 그냥 우리말로 나발을 부는 걸 의미합니다.
또 배신한다는 말이 있어요. 이 말뜻은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지켜야 될 윤리를 배신했습니다.
또 이 나가드라고 하는 단어는 해설한다는 말이어요 마치 무슨 비밀스러운 걸 남에게 아주 일목요연하게 이야기해 주듯이 과장해 가면서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함은 아버지의 벗은 하체를 보고 당시의 인륜으로서는 용인될 수 없는 행위를 했습니다.
그리고 덮은 것이 아니라 나가서 마치 그것이 자랑인냥 형제들에게 그것을 마구 퍼뜨렸단 말이죠.
요즘 말로 간단하게 표현하면 함이 잘못한 것은 보고서도 안 한 거죠. 무언가 잘못된 것을 봤으면 할 일을 해야 되잖아요. 보고서도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행한 사람이에요.
23절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 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함이 라아한 것과는 정 반대지요
셈과 야벳은 함으로부터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버지가 벗어둔 옷을 취해서 그것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 쳐서 아버지의 장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왜 앞으로 걸어가면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곳을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 드리는데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보지 않고 나왔어요.
셈과 야벳이 잘한 일이라면 뭔가요?
안 보고도 행하여야 될 일을 행한 것입니다
자 여러분 노아가 누구입니까? 인류의 중시조입니다.
노아의 방주에서 살아나온 자식어요 이 자식들이 누굽니까 그 노아의 자식이 그 사람에게 자식이 30명 40명 있는 거 아니에요. 딱 세 명이 있습니다.
그 세 명 가운데에 한 명이 이처럼 비틀어졌습니다
오늘 이 본문이 우리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게 뭘까요? 함만 잘못했다는 얘기예요. 아닙니다.
40:32
그 위대했던 노아가 땅의 인간으로 전락하는 순간에 그 자식 중에 한 명이 어긋나더라 이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자식으로 성장되는 사람들 우리 주위에 있잖아요.
내가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인데 내 자식은 나와 상관없이 반듯하게 자랐다 그래서 아버지 내 잘못이 면책됩니까? 아니에요.
1차적으로는 자식이 바른 사람으로 서는 것은 자식 자기의 책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자식이 잘못된다면 원초적으로 그 상황을 제공한 사람은 아버지 부모잖아요.
그러니까 자식이 반듯하게 세워졌다고 해서 부모가 잘못한 자기 삶에 대한 면책이 되는 건 절대 아닌 것이죠.
더더욱 노아처럼 그가 땅의 인간으로 전락함으로 인해서 한 자식의 삶이 비뚤어졌음을 성경이 보여준다. 이거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우리가 창세기 5장을 볼 때 5장 22절에 에녹의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에녹은 뭘 잘했다고요. 300년 동안 동행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식을 낳았다. 1년에 한 명씩 낳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랬죠
300년 동안을 바른 자식을 위한 믿음의 이정표가 된 겁니다.
여러분 그게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얼마나 그것이 위대한 일이면 하나님께서 에녹으로 하여금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승천하는
첫 번째 사람의 영광을 입게 해주셨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렸죠 모든 인간은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지만 자기 때가 되면 자기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와의 관계는 단절되는 것 아닙니다.
부모는 자식이 자기 이름으로 살고 어느 순간부터는 누구의 부모로 불려진다 할지라도 부모의 역할은 변함없는 믿음의 이정표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을 살던 자식이 어느 날 불현듯이 아 이때 내 아버지라면 하고 아버지를 쳐다볼 때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꿋꿋하게 바른 진리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만으로 자식들은 답을 얻습니다.
그런 아버지는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한 뒤에도 그가 놓은 모든 족적이 자식을 위한 이정표가 되는 것입니다.
에녹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죠.
따라서 노아가 하나님만 바라보던 삶에서 땅을 목적으로 삼고 한 자식의 인생을 망치게 되었다.
참으로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고 부모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절대 노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누군가의 자식의 아버지 어머니인 내 자신의 문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되는 거죠.
24절
노아가 술이 깨어
드디어 꼭지가 돌도록 마시고 자기 통제력을 상실했던 노아가 술이 깼습니다. 이때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이때 기분 되게 안 좋습니다. 저는 알아요. 이 통제 불능이 될 정도로 술을 먹었다가 아침에 깨면요 정말 기분 나빠요 다 아시죠.
몸과 정신 마음 다 찌뿌듯하고요. 그리고 기분이 언찮습니다. 왜냐하면 아 내가 또 마셨구나 또 마셨구나
내 몸과 마음은 찌뿌듯한데 내가 어제 술을 마셨던 것 자체에 대해서 내가 언짢다 기분이 안 좋다 이건 뭐예요?
내 육신과 마음은 찌뿌듯하고 힘들지만 그 순간에 내 영혼이 잠시 깨는 겁니다. 영혼이 깨면요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아요. 근데 이상하죠.
아침에 자고 깨서 분명히 기분이 언짢고 아 내가 또 마셨구나 이랬는데 12시 점심 먹고 3시 4시 5시 되고 눈이 반짝반짝해지면 또 술 먹으려고 한단 말이죠.
그건 왜그래요. 내 육체와 정신이 깸과 동시에 내 영혼이 짓눌리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영혼이 육체에 짓눌려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육체가 완전히 힘을 잃으면 영혼이 잠시 반짝해서 후회하고 이 육체가 힘을 받으면 영혼은 자기 자리를 지킬 수가 없어지는 겁니다.
말하자면 육체를 주인으로 섬기고 살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노아도 이때 깨어서 기분이 분명히 안 좋았을 거여요.
노아가 깨어서 그의 작은 아들이 작은 아들 주 1번 있죠. 그 보니까 둘째 둘째 아들 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았습니다
이때 노아는 인사불성이었잖아요. 그런데 노아가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인간도 자기 인사불성 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거든요.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은밀하게 계교를 꾸몄는데도 알려지잖아요.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노아가 알았다.
이런 성경을 볼 때 아 노아가 알았나 보다 그렇게 우리가 간단하게 보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죠.
자기가 인사불성 때 일어난 일을 노아도 알았다면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 앞에 가려질 게 있겠는가 우리는 여기까지 나갈 수 있어야 되는 거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노아가 가나안이 누구죠 함의 아들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자기에게 몹쓸 짓을 한 그 함 그리고 만약에 이 가나안이 최초로 보았다고 한다면 최초로 자기의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가서 그런 일을 하게 한 그 가나안에게 저주했단 말이죠.
여러분 잘못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됐잖아요.
근데 이 아버지가 과연 자식을 저주하고 징계할 수 있겠는가 우리 질문이 제기되죠. 그렇죠
그런데 이 시대 상황을 우리가 생각을 해야죠 이때는 성경이 없지 않습니까? 이때는 성전이 없습니다
이때는 제사장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노아가 하나님의 대리인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함이 잘못한 일을 노아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지금 징계하는 거죠. 그러면 아버지 자기도 잘못해 놓고 자기 자식만 하나님을 대리해서 징계하면 그러면 노아는 면책이 되는가 아니죠.
자기 몸에서 태어난 자기의 자식이 징계를 받는다고 하면 그게 그 아버지에 대한 징계죠 이때 노아도 같이 징계받는 거죠.
자기 자식이 징계 받는데 자기는 돌아앉아서 허허 기분 좋다면 그 아버지 아니죠.
부모 아니죠. 자기 아들 종이 되어라
26절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라
보지 않고서도 행하여야 될 일을 행한 셈에게는 하나님 여호와를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해라 하나님이 셈의 하나님이 된다는 거예요.
무슨 의미겠습니까? 셈의 계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하나님이 셈의 하나님이 된다는 의미로 셈을 축복을 해 줬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라
함의 후손들은 바로 셈의 종이 되어라
17절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야벳의 후손들은 창대함을 얻어라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여기에서 셈의 장막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영적 은총을 함께 나누라는 겁니다.
셈이 받는 영적 은총을 함께 나누라는 거예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팔레스타인 땅에 오셨지만 그 복음을 들고 셈의 후손인 바울이 야베스의 후손인 유럽으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지 않습니까?
50:29
그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셈의 후손들은 우리와 같은 황인종들 그래서 아시아 지역에 살던 사람 뭐 사람들로 후손이 퍼져가고 야벳은 주로 유럽을 중심으로 한 백인들 그리고 함의 후손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피부 색깔이 검은 사람들로 알려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세계 4대 종교라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전부 다 아시아존에서 나왔습니다.
온 세계의 인간들이 종교적으로 전부 아시아인들의 후손들의 그늘 속에 사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가나안은 야벳 족속의 종도 되어야 한다. 자 이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예언이 셈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셈의 후손인 중에서 그리스도가 오셨죠 그리고 이 아시아 존에서 모든 종교가 다 세계적인 종교가 다 나왔습니다. 그렇죠 이루어졌습니다.
야벳은 창대해져라 유럽을 중심으로 한 백인들이 인류 역사상 얼마나 창대했었는지는 오늘까지도 지금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가나안의 후손들은 종의 종이 되어라 역사적으로 참으로 이 인종들이 고달픈 삶을 살았다고 하는 것도 우리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자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하나 확인하게 됩니다. 성경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나님 말씀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보십시오. 이 창세기는 3400년 전에 쓰여진 책입니다. 3400년 전에 쓰여질 때요 야벳의 후손 지금 유럽을 중심으로 한 백인 형편없었습니다.
그리스가 겨우 2800년 전에 그리스 문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아요. 2700년 전에 로마의 시조 아이 둘이가 뭐 늑대 젖을 빨아먹고 살았다는 거 아닙니까
유럽을 중심으로 한 백인이 창대키는커녕 역사의 무대에서 셈족들이 모든 주도권을 잡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야벳은 창대케되라 창대해졌습니다.
야벳은 셈의 장막에 거하라
종교적으로 셈의 정막 속에 온 인류가 살고 있습니다.
함의 후손은 종의 종이 되어라 다 이루어졌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여기에서 또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28절입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350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950세가 되어 죽었다
홍수 후에 350년 살아서 950세가 되어 죽었다
홍수가 언제 났죠. 노아 600세 되던 해 2월 며칠 날 2월 17일부터 비가 왔죠
그리고 601세 되던 해 2월 27일 날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실제로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이후로는 349년을 산 셈이죠.
홍수가 시작되고서는 350년을 살았고 그리고 950년을 살았어요. 자 보십시오. 여러분 홍수가 시작되기 전에 홍수가 시작될 때 홍수가 다 멈춰서 물이 마를 때까지 얼마나 노아에 대해서 성경이 상세하게 우리에게 일러줍니까?
그런데 그 방주에서 나와서 노아가 땅의 인간의 삶을 살고 나서 그의 일생의 마무리는 350년을 살아서 950세가 되어 죽었다 한마디로 끝납니다.
그 앞에 있는 게 뭐예요? 꼭지가 돌도록 술 먹고 자기 통제력 상실해서 자식 중에 한 명 어긋난 길을 가게 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했다 그리고 끝나버렸다
6장 22절 보십시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얼마나 멋지게 인류 역사의 무대에 노아가 등장했습니까?
이렇게 멋지게 등장했는데 퇴장은 한마디로 350년 살다가 950세가 되어서 죽었어 이렇게 끝나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를 마음속에 새길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부모는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자식들 앞에서 바른 신앙의 이정표로 서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젊었을 때 좋은 신앙의 이정표였다. 귀하죠. 나이 들어서는 더 좋은 신앙의 어른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자식이 자기 이름으로 자기 인생을 살지만 언제든지 필요할 때 돌아볼 수 있는 이정표 자기 삶의 방향을 새롭게 확정할 수 있는 이정표 그것이 그런 사람이 에녹 같은 진정한 신앙의 부모다 그 말이에요.
두 번째 우리가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 우리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영적으로 더 성숙하고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의인처럼 살았는데 나이가 들어서 땅의 사람으로 살았다. 안 됩니다.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의 삶은 더 향기로워야 되고 더 아름다워야죠
그것은 내가 주님 앞에 깨어 있고 깨어 있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쫓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죠.
마지막으로 우리가 마음속에 새길 수 있는 것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드려야 합니다.
주님을 찬양해야 됩니다 여러분 너와 같은 인간 그 당대의 의인도 막판에 이런 실수를 했다. 그러면 우리 같은 인간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 우리를 위해서 그분이 먼저 와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어요. 내가 바른 삶을 살 수 없는 것을 그분이 당신의 능력으로 당신의 은총으로 도우십니다.
그래서 정말 그분은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심을 고백하고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간부터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과 등짐으로 결과적으로 우리 삶이 땅의 열매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삶으로 일관되었다면 사순절을 맞아서 우리 회개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나가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가 홍수가 다 끝난 뒤에 이 지상 최고의 어른이 된 뒤에 땅의 사람이 되는 삶을 살았음을 성경이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주님 바로 이 노아의 모습이 세상에서 연륜이 거듭되고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세상에서 가진 것이 더 많아질 때 우리 자신들의 모습임을 일깨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 이와 같이 부족한 저희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와주시고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시고 우리의 구원자로서 우리의 인생의 구주가 되어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주님을 바로 뵙지 못하고 세상을 벗하며 살아왔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이 시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매일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우리 자식들 앞에서 변함없는 신앙의 이정표로 서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 자식들은 부모의 이름으로 살았지만 때가 되었을 때 우리 자신들의 이름으로 살게해주시고
우리 부모님들이 누구의 부모나 세상으로부터 칭함을 받을 수 있는 진정한 효도하는 자식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로 함께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아무리 멈추어라고 말을 해도 세월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흘러갑니다.
주님 이 세월의 흐름이 우리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고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독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더 겸손하게 세우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날마다 주님을 향하여 우리의 시선을 확정하게 도와주옵소서
주님을 바라만 보면 우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미물인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고 겸손하게 주님을 더욱 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시선을 거두는 순간 우리는 어찌 그리 큰 자가 되는지요
주님 이 어리석음에서 탈피하게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우리의 삶이 더 향기로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날이 갈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날이 갈수록 노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어른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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