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산시 와촌면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
690년(신문왕 10) 원효가 창건하였다. 그 뒤의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는데, 한창 때는 50여 동의 전각과 12개의 부속 암자, 8대의 물방아를 갖추고 쌀을 찧어 승려와 신도들의 공양미를 한 대사찰이었다. 1723년(경종 3)에 중창하였으나 1736년(영조 12)에 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퇴락되었다가, 순천 송광사의 한 노승이 현몽하여 이곳으로 와 중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 1860년(철종 11)에 유혜(有惠)·쾌옥(快玉)이 중창하였으며, 1939년에 은해사의 백현(伯鉉)이 다시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적멸보궁·약사보전·독성각·산령각·요사 등이 있고, 그 밖에 원효와 김유신이 수련하였다는 원효굴 또는 불암으로 부르는 석굴에는 홍주암(紅珠庵) 독성전이 있다. 석굴은 1976년에 내부를 보수하던 중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불상 1점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적멸보궁은 1988년 인도에서 모셔온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지었는데, 이 자리가 본래 있던 대웅전 자리라고 한다. 안에는 진신사리가 안치된 삼층석탑과 후불탱화·아미타탱화·칠성탱화가 있다.
약사보전은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로서 약사여래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약사여래입상은 1736년에 내린 큰비로 사찰 전각이 무너질 때 매몰된 것을 순천 송광사 노스님이 현몽하여 발굴한 불상이라 전한다. 상호의 표정과 신체의 표현, 그리고 대좌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굴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9세기의 작품이며 보물 제4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743㎝의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을 장식한 일반형이다.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석등으로서 현재 약사보전 앞에 있는데 이 자리가 원위치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불굴사(佛窟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690년(신문왕 10) 원효대사가 정진하여 득도한 곳에 암자를 세운 것이 시초가 되었다.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50여 동의 전각과 12개의 부속 암자, 8대의 물레방아를 갖추고 쌀을 찧어 승려와 신도들의 공양미를 해결한 대사찰이었다.
1723년(경종 3)에 중창했고, 1736년(영조 12)에 큰 비가 내려 건물들 대부분이 무너져 퇴락되었다가, 순천 송광사의 한 노승이 현몽하여 이곳으로 와 중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 1860년 중창이 있었고 1939년에 은해사의 백현스님이 다시 중창하였다. 1988년 원조스님은 본래 대웅전이 있었던 위치를 찾아서 적멸보궁을 짓고 인도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
서산으로 넘어가는 석양빛을 받으며 서 있는 삼층석탑 뒤의 극락보전, 조선 후기 건축물로 불굴사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는 약사보전, 그리고 약사보전 옆의 관음전까지, 전각들은 멀찍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적멸보궁, 약사보전, 독성각, 산령각, 요사 등이 있다.
불굴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9세기의 작품이며 보물 제4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을 장식한 일반형이다.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석등으로서 현재 약사보전 앞에 있는데 이 자리가 원위치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찰 옆에는 원효대사와 김유신이 수련하였다는 홍주암 원효굴이 있다 또한 김유신이 이 석굴에서 삼국통일을 염원하는 기도를 드리다가 천신(天神)으로부터 깨달음과 지혜를 얻었다고 한다. 한편 1976년에 석굴 내부를 보수하던 중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불상 1점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 자연의 석굴(堀) 안에 부처(佛)를 모셨다고 하여 붙여진 사명(寺名)이 현재 불굴사(佛窟寺)일 것으로 추측된다.
원효대사가 수도한 석굴이라 전하는 굴이 있는데 이를 원효굴이라 부르며, 석굴 속의 약수터는 아동제일약수(我東第一藥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김유신 장군이 이곳 석굴에서 이 물을 마시면서 삼국통일의 염원을 기도했다고 하며 김유신이 마신 물이라고 하여 장군수(將軍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찰 주변에 우기가 있을 때는 불상의 얼굴 부분에 땀이 나며, 큰비가 오기 전에는 불상의 온몸이 흠뻑 젖는다고 한다. (※ 我東: 우리 동방에서~)
◆ 약사보전의 약사여래 입상은 머리에 족두리 모양 비슷한 장식이 있어 특이하다. 6 km 떨어진 팔공산 갓바위와 마주본다고 하여 민간에서는 영험한 불상이라고 소문이 났다. 호사가들은 약 6 km 떨어진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과 불굴사 약사여래입상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갓바위가 양(陽)이고 약사여래입상이 음(陰)이 되어 한 쌍을 이룬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갓바위와 불굴사 사이에는 음양리(陰陽里)가 자리하고 있다.
◆ 불굴사는 신라시대 때만 해도 은해사가 말사일정도로 아주 큰 사찰이었다. 그런데 이 절이 갑자기 쇠퇴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설화로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영향으로 인해 유교가 크게 숭상되고 불교는 억압되었던 시기다. 그런 까닭에 이 불굴사도 유생들의 횡포에 크게 곤혹을 치렀다. 심지어 유생들은 부처님이 계신 이곳을 놀이터로 삼고 승려들에게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비가 찾아왔는데. 승려들이 그에게 유생들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물었다.
그 선비는 산 너머 솔밭에 가면 큰 거북돌이 있는데 눈을 빼오면 더 이상 유생들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스님들은 그의 말만을 믿고 거북의 눈을 빼자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오더니 산사태가 일어나 절이 모두 흙속에 묻혀버렸다. 그 이후 작은 암자만 복원되고 절은 퇴색되고 말았다. 이 설화가 전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무명에서 깨어나라는 것이다.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함부로 없애고 허무는 것은 오히려 죄업을 짓는 것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는 사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