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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21
3월1일 [사순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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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알다가도 모를 나>
이제는 벌써 흘러간 옛 노래가 되었네요. 젊은 시절 영화 ‘건축학 개론’ 주인공들처럼 ‘마이마이’나 CD 플레이어를 끼고 많이 듣고 부르던 노래 중에 ‘가시나무새’(하덕규 작사·작곡, 조성모 노래)라는 가요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아니고 그 이후인가?’ 노래가사 내용이 상당히 시적이고 철학적이어서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려 있습니다.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당신이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당신이 편할 곳 없네 내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당신에 쉴 자리를 뺏고[내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음미할수록 수긍이 가는 가사구절입니다 헤아려 보니 참 그렇습니다. 내속에 뭐가 그리 내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때로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의 내가 있는가 하면, 때로 송곳 하나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속 좁은 내가 있습니다.
때로 시속 500킬로의 테제베같이 성급한 성격의 내가 있는가하면, 때로 나무늘보보다 더 느긋한 내가 있습니다.
때로 비단결보다 더 고운 너그러운 천사 같은 내가 있는가 하면, 눈빛이며 얼굴이 무섭고 기괴한 사탄 같은 내가 있습니다.
오늘 비록 내가 천사로 산다할지라도 내일 사탄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우리네 삶입니다.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나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인내 또 인내입니다. 심호흡하고 또 심호흡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는 것입니다. 수시로 내안의 사탄을 몰아내는 작업입니다
‘엑소시스트’ 비슷한 영화들을 보면 라스트신에서는 언제나 연세 지긋하신 노사제가 사탄과의 최후 대결을 위해 마늘과 성수 그리고 십자가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끔찍한 최후의 일전을 벌입니다.
우리도 내안에 사탄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를 대비해서 늘 준비하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런데 그 준비는 다름 아닌 깨어있음입니다. 말씀 안에 늘 살아있음입니다. 보다 자주 성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안에는 내 평소 모습과는
다른 너무나 다른 또 다른 내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나, 결국 사탄과도 같은 내가 뱀 또아리 틀듯이 틀고 앉아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내 안의 사탄’입니다.
형제적인 진솔한 대화나 부드러운 소통을 통한 문제 해결보다는 극단적 감정 대립을 통해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싶은 폭력성이
내 안의 악령입니다.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룰이 아니라 편법이나 부정적인 방법을 이용한 지름길 역시 악령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모두에게 선익이 되며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공동체 의식보다는 나 홀로 빛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곧 악령의 얼굴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그저 퍼질러 앉아 울적한 얼굴로 아까운 인생 허송세월하려는 게으른 마음이 곧 또 다른 악령입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수시로 외쳐야겠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마태오복음 4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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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경공부를 좋아하면 이단에 빠질 확률이 크다>
지금 신천지 교인이 20만 명이 넘고 신천지에 들어오려고 교육받는 학생이 7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신천지에 빠지는 많은 사람들이 젊은 지식층이라는 데도 놀랐습니다. 이는 신천지가 명단을 내놓지 않았으면 누구도 모를 숫자입니다.
신천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지 않으면 됩니다. 모든 이단은 다 성경공부로 시작하고 성경공부로 끝납니다. 따라서 저는 통계는 보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개신교 신도들이 신천지에 훨씬 잘 넘어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천지에 빠지는 이들이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럴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전에 가졌던 ‘교리’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자신이 가진 교리지식을 확인하고 타인에게 그 교리를 전수하는 수단입니다. 성경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사람의 교리를 자신도 모르게 흡수하여 그 사람 교리에 빠지게 됩니다.
신천지가 성경을 통해 가르치는 교리 중 하나는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을 허용합니다. 그래야 새 교육생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생들은 자신들이 이미 헤어 나오지 못하게 신천지에 빠졌을 때 쯤 자신들이 신천지에 입문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이 포섭방법을 쓰기 위해 거짓말의 교리가 허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거짓말의 교리를 그들은 성경으로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려 할 때 “너희나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라. 나는 이번 축제에는 올라가지 않겠다. 나의 때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8)라고 말씀하시고는 갈릴래아에 남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요한 7,10)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좋은 의도를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에서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람은 이런 가르침에 바로 빠져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도 예수님을 성경말씀을 통해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마귀가 이렇게 성경을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성경구절을 수긍하시면서도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라는 말씀으로 반박하십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도, 저런 말도 있어서 누구든 그 말씀으로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근거를 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도 있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부모를 미워하라고 하십니다(루카 14,26 참조). 도대체 무슨 말씀이 진리일까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쓰신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 성경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교회를 믿는다.”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기본교리에서 벗어나 성경을 믿으려한다면 그것을 통해 잘못된 교리를 주입시키려는 마귀의 소행에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가톨릭교리를 믿는 종교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진리이신 주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1381항)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신다고 하셨다가 다시 올라가신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다는 가정 하에서 해석해야합니다.
교리서는 또 “선한 의향(예를 들어, 이웃을 돕는 것)은 그 자체로 무질서한 행동(거짓말이나 비방)을 선하게 하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1573항)고 말합니다. 선한 의도에서 하더라도 거짓말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거짓말은 (정직의 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가한 명백한 폭력이다.”라고 합니다. 신천지는 이런 교리가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교리를 성경을 근거로 주입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신자이고 교리를 배웠다고 하면서도 ‘선한 거짓말’은 해도 된다는 식으로 말하면 그 사람 역시 교리를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성경공부를 하면 잘못된 교리에 빠지고 맙니다.
문제는 가톨릭교회 안에도 성경으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강의하다가 신자들에게 불붙는 영원한 지옥이 반드시 있음을 믿는 사람 손을 들어보라고 하면 10%도 안 듭니다. 지식층으로 갈수록 더 심합니다. 심지어 신학박사학위를 지니신 분들도 장소적인 개념의 ‘불붙는 지옥’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신학생들이 배우고 신자들이 배웁니다. 그렇게 배운 지식으로 성경까지 공부한 선생님들은 성경공부를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다른 신자들에게 전해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비를 뿌려주시는 분이시라는 성경구절을 제시합니다.(마태 5,45 참조)
결국 하느님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그래서 심판도 지옥도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공부를 통해 잘못된 진리가 계속 주입됩니다.
천국과 지옥의 심판 교리는 교리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만약 지옥이 없다고 말하면 지옥에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비웃는 사람이 됩니다. 지옥도 없는데 왜 괜한 고생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를 믿으면 가톨릭신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라고 하신 것처럼, 지금은 교회의 가르침인 「가톨릭교회교리」가 너무도 힘을 쓰지 못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신부님들이 그렇겠지만 저도 책이나 글을 통해 「가톨릭교회교리서」의 내용을 전파하려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교리서에 있는 내용도 제대로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책에 “우리도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고 많은 이들이 반박을 합니다. 성경에 그런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근거를 교리서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물론 성경에도 있습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4-36 참조)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으니 본성상 ‘신’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성체는 하느님이라고 하면서 성체를 모신 하느님의 자녀는 인간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이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신학박사들까지도 인간이 본성상 하느님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을 보아야합니다. 교리서는 구원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를 맺고, 자녀 됨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가톨릭교회교리서」 460)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도 하느님 신성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리입니다. 교리서도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라고 하고,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하느님: deus)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교리 앞에서 인간이 절대로 하느님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 잘못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잘못된 교리에 물들어있으면서도 가톨릭신자라고 믿고 있을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리를 믿어야 가톨릭 신자입니다.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으려면 마스크를 써야하고, 손을 깨끗이 씻어야하고, 따듯한 물을 마시는 등의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이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하루 손 씻는 만큼이라도 ‘교리’를 공부해야 합니다. 교리를 다 배우고 성경을 보아야합니다. 교리를 아는 만큼 성경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이 짧은 생을 앗아갈 수 있지만, 잘못 배운 이단적 교리는 영혼도 앗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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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3월1일 [사순 제1주일]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된 사순절은 파스카를 향해 정향되어 있다. 이 사순절의 긴 여정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다. 40이란 숫자는 성서에서 볼 때, 하느님과의 만남에 앞서 갖게 되는 특별한 긴장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간 광야에서 헤맨 것(신명 8,2-4), 모세가 산 위에서 보낸 40주야(탈출 34,28; 신명 9,9), 엘리야가 호렙산을 향해 밤낮으로 걸어간 40일(1열왕 19,8)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 다다르는 길이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자신의 주위와 자신의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것이 사순절 동안 우리를 내적 순례를 통해 ‘우리의 과월절 양’(1코린 5,7)이신 그리스도와의 기쁜 만남에로 초대하는 것이다.
복음: 마태 4,1-11: 예수께서는 40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셨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40일 간의’ 체험에 우리의 깊은 관심과 믿음의 눈을 돌리는 것이 좋겠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 ‘비둘기 모양으로’(3,16) 내려오셨던 ‘성령’께서 그분을 광야로 ‘인도하시어’ ‘유혹을 받게 하신다.’ 그런데 이 유혹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17)는 말씀 후에 나오는 것으로 ‘메시아적’ 유혹이다.
사탄은 두 번이나 이것을 확인하려고 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3.5절)이라고 하지 않는가?
당시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명예와 품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무력도 불사하는 강력한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다. 아마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언급한 고통 받는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에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마태 16,22). 그 때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16,23).
이것은 광야의 유혹 장면을 연상케 하고 있다. 베드로가 사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유혹사화는 그리스도의 일생 전체를 압축시켜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까지 계속된 유혹이었다(마태 27,42 참조).
예수님의 유혹은 오랜 단식 후에 빵을 얻는 것과 같은 단순하고 순수한 일로부터 우상을 숭배하도록 종용하는 본격적인 충동적 권유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려고 애쓰는 사람 누구에게나 던지는 유혹적인 발언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특히 사탄이 권력과 부라는 매력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는 완전히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묘한 유혹들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일치로써 이기신다. 그 말씀은 당신이 하시는 모든 결정의 근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정확히 세 번 ‘성경에’(4.7.10절)라는 표현을 하시면서 당신의 결정은 이미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음을 뜻하고자 한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빵’보다도 더 갚진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물질적 차원만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사상의 참된 의미에 대한 유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 지금도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빵’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과 나눌 수 있도록 마음을 ‘회개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즉 자신을 나누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배고픔을 없애기 위해 돌을 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제1독서: 창세 2,7-9; 3,1-7: 인간들의 창조와 범죄
1독서는 인간창조 설화와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충실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 그래서 죄를 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끝까지 충실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있다. 여기서 구원이냐 파멸이냐에 대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창세 3,3 참조). 그러나 결과가 불행하다.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하여 그 말씀을 어기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4-5절). 정말 그들은 그 열매를 먹은 후 눈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그들이 ‘알몸인 것’(7절)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꿈꾸었던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것은 사탄의 말을 들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의 행동은 죄를 낳게 되었고, 모든 세상을 파멸에로 이끌었다.
제2독서: 로마 5,12-19: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원조들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대립적인 상태를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19절). 이제 하느님의 말씀에 절대 순명하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이 회복시켜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부지런히 이루어 가는 것이 사순절을 잘 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신 장면을 다시 묵상해 본다면, 그 유혹은 예수님께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기까지 계속 괴롭혔던 유혹이었다. 바로 그 유혹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에 확고하게 근거하고 신뢰하며 그 유혹을 이기셨듯이 우리도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서 있으려 노력한다면 우리도 능히 그 유혹들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에 합당한 힘을 주실 것이다. 기도 중에 이러한 삶의 용기와 도우심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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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유혹>
‘유혹’은 날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신앙인들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날마다 유혹들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유혹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유혹’은 세속에서 올 수도 있고, 자기 안에서 올 수도 있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 쪽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어떤 경우에는 진심으로 하는, 또는 사랑으로 하는 권고의 모습으로 올 때도 있고, 압박이나 박해의 모습으로 올 때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오든지, 어떤 모습으로 오든지 간에 유혹의 근원지는 사탄입니다. 유혹을 물리치면 하느님 쪽으로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지만, 물리치지 않고 타협하거나 굴복하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되고, 그 상태를 방치하면 영영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탄이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유혹과의 싸움에서 적당한 타협이란 없습니다. 타협은 사실상 굴복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이 말씀은, “빵도 필요하지만, 참 생명을 얻으려면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가르침인데,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먹고살기 위해서 날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만 신경 쓰고 영혼의 구원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 먹고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정도를 넘어서, 부를 축적하고,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독점하는 것은 ‘악한 일’이고,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버리는 일입니다. (부의 축적과 독점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상 풍조 자체가 유혹입니다. 신앙인은 그런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세속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신앙인은 돈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고,^‘돈의 힘’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어떤 간절함도 없이, 그저 기적에 대한 호기심으로 기적을 보기를 바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시험하는 태도이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가셨을 때,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 기적을 일으켜 보라고 요구했습니다.(루카 4,23)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또 믿으려는 마음도 없이, 예수님께서 일으키셨던 기적에 관한 소문을 듣고서 호기심만 가졌던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런 태도를 보였습니다.(루카 23,8) 오늘날의 사람들 가운데에도 나자렛 사람들이나 헤로데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어떤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곳으로 몰려가거나,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생기기를 바라거나... 그것은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 간절하게 청하는 무엇이 있더라도,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 태도도 하느님을 시험하는 태도입니다. ‘기적’은 정말로 필요한 때에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예외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하느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을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단순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기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일이어야 하고, 선한 일이어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일이어야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다음 말씀이 바로 연상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것을 베드로 사도가 말린 것은,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말씀’을 듣고서 놀라서 그랬던 것이고,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낮은 단계’의 인간적인 사랑일 뿐이었고, 그 사랑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과 같은 행동을 하면서,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탄의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일’은 ‘사탄이 바라는 대로 하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또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면, 낮은 단계의 인간적인 사랑을 극복하고 초월해야 합니다. 만일에 도착하는 지점은 같은데 그곳까지 가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다면,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빠르고 쉽고 편안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옳습니다. (일부러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길이 하나뿐이라면, 그 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길만 가야 합니다. 신앙인이 걸어가야 할 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 그 길 하나뿐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만일에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쉽고 편한 생활을 찾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떠나서 사탄에게 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만을 섬기는 일을 중단하고, 사탄을 섬기는 일을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결코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항상 사람들에게 쉽고 편하고 재미있는 길만을 보여주고, 그 길로 가라고 유혹합니다. 그 유혹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그랬던 것처럼 주변 사람들의 ‘진심으로 하는 충고나 만류’의 모습으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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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말씀대로>
교회는 지난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의 의미를 잘 새기며 지내시는지요? 스스로 다짐하고 결단한 일을 성실히 실천함으로 진정 하느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사실 주님께서 지고 가신 ‘사랑의 십자가’는 생각만 해도 슬픕니다. 하지만 도저히 가늠되지 않는 그 큰 사랑 덕분에 우리는 사랑이란 누군가의 희생과 대가로 맺어진 결실임을 배웁니다.
교회가 사순 시기를 통해서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랑이지요. 때문에 주님의 사랑에 젖어 주님처럼 사랑하고 희생할 것을 묵상하도록 돕고 그 사랑을 배우도록 권합니다.
사순의 가르침은 당신께 배운 사랑을 몸소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에덴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한껏 받으며 복된 매일을 살았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런데 허망하게 그 축복을 날려버렸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 죽음의 저주 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의 처지를 바오로 사도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라며 가슴 아프게 토로했는데요.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살기 원하는 우리도 같은 심정입니다. 모두가 주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을 살아서 주님께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니까요. 우리는 모두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고민도 하고 애를 쓰는 것 역시 사실이니까요.
때문일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유혹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알려주며 경고합니다. 유혹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허약함을 하와와 아담의 이야기로 들려주고 예수님께서 당하신 극심한 죄의 유혹의 장면을 숨기지 않습니다.
복음의 장면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도 죄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고뇌하고 깊이 번민 하셨으리라는 걸 짐작하도록 이끌어주는데요.
완전한 인간이신 주님이셨기에 죄와 치열하게 싸우셔야 했으며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시련을 딛고 이겨내는 용단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매력적이고 감미로운 유혹을 떨쳐내는 것은 예수님께도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살아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강조하신 것이라 싶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다는 의미라 싶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일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라는 당부라 읽힙니다.
주님께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힘든 싸움을 치렀으며, 아버지 하느님처럼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 어려운 역경을 수없이 겪었으며 스스로 이겨내야 했다는 아픈 고백이라 듣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세상의 것이 아닌 기록된 말씀으로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사탄의 유혹쯤이야 너끈히 이길 수 있다는 승리의 공식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사제는 많은 신자분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고’ 혹은 ‘싫어’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립니다.
사제의 입장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계명을 번거롭고 까다로운 것으로 오해한다는 사실이 부끄럽습니다.
이 모두가 순수하게 복음을 가르치지 못한 제 허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무엇을 보태고 더하며 덜어낸 결과인 듯하여 주님께 죄송한 마음을 치우기 힘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지침은 매우 간단하고 명료하니 말입니다. 언제나 무슨 일에나 주님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니 말입니다. 오직 ‘말씀대로’ 따르면 헷갈릴 것도 없고 돌아볼 것도 없이 말끔할 테니 말입니다.
결국 다사다난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모든 문제는 주님의 말씀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살아내지 못한 결과이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 것이 아니며 내 뜻대로 조정할 수도 없는 주님의 것입니다. 죄의 유혹보다 훨씬 강한 사랑으로 우리를 지키는 주님 사랑에 감사드릴 때, 주님의 뜻을 위하여 나를 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위하여 내 뜻을 꺾을 때, 하늘의 용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사순,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주님의 눈치만 살피던 구차한 마음을 씻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한 다리를 죄에 걸치고 지내던 못난 모습에서 돌아서야겠습니다.
내가 물러서기보다 주님께서 양보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도 치워내야겠습니다. 지금 당장 끊어내지 않고 머뭇대며 미루던 결단을 실행해야겠습니다.
흐릿하고 모호한 믿음의 경계를 깔끔하게 정리 정돈할 때, 기쁜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의 은혜는 외면했던 자신의 십자가를 다시 찾아, 기꺼이 짊어지는 마음에 임합니다. 더 사랑하기 위해서 몰입하고, 조건 없이 순명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할 때 쏟아져 내립니다. 힘에 부쳐 나 몰라라 내던졌던 십자가를 다시 찾아 끌어안는 마음에 사순의 은혜를 담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곁에서 얼쩡대며 서성이지 않도록, 죄 앞에서 쩔쩔매는 일이 없도록, 미련 없이 돌아서는 지혜를 살아가도록 맹렬히 기도하니 힘내기 바랍니다.
죄의 유혹보다 훨씬 강한 주님 사랑이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니 도전하기 바랍니다. 당신의 뜻이기에 봉사하고 희생하며 먼저 다가가 화해하는 배포를 한껏 키우시길 바랍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참된 믿음으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에제 11,19)을 되찾기 바랍니다.
사순을 보내며 부활의 기쁨은 오직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몸소 체험하기 바랍니다.
통 큰 하느님의 은혜로 모자란 우리 삶에 새로운 가능성이 활짝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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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전광진 엘마노 신부님]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다음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가지 유혹이 있었습니다.
첫째, 돌을 빵으로 바꾸라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의 핵심은 ‘하느님인가? 세상인가?’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먹는 것이 첫 번째일 것입니다. 굶주림만큼 비극적인 것이 또 있겠습니까? 하지만 물질에 집착해서 하느님 말씀을 놓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둘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의 핵심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물음은 매우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자기와 친한 분이고 자기와 이야기를 나누는 분이라는 식으로 너무 쉽게 하느님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셋째, 악마에게 절하라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의 핵심은 ‘메시아는 어떤 분이신가?’입니다.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한 사회,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줄 뛰어난 지도자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영적인 메시아십니다.
유혹이란 ‘하느님 없이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려는 욕구’를 말합니다. 하느님을 잊고 물질만으로 살려는 것이 유혹입니다.
유혹은 우리를 노골적으로 악으로 초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툰 방법입니다. 유혹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또한 유혹에는 내 생각이 옳고 그렇게 해야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확신으로 포장된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심이 아니라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포장 속에 숨은 영웅심리입니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완전하지 못한 인간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죄로 물든 인간성입니다. 죄로 물든 인간성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고, 선인과 악인이 뒤섞여 있습니다. 또 인간 마음 안에도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늘 시끄럽고 복잡하고 인생길도 순탄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인생길에 유혹은 늘 우리 주변을 어른거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단호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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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용호 안드레아 신부님]
<곁들여 받게 되기 위하여... >
어릴 적 즐겨 읽던 전래동화 중에 “금도끼 은도끼”라는 동화가 있었습니다. 착한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호수에 도끼를 빠뜨리곤 곤란해 하자, 산신령이 나타나서 그에게 도끼를 찾아주었다는 재미있고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착한 나무꾼이 금도끼와 은도끼를 모두 얻게 되는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나는데, 이러한 결말은 결코 거저 이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무꾼이 처음 잃어버린 도끼와 비슷한 크기, 비슷한 무게와 모양의 금도끼와 은도끼를 두고, 모두 자기의 것이 아니라며 사양했던 착한 나무꾼의 솔직함과 정직함으로 이뤄진 결말입니다.
그런데 어릴 적에는 잘 몰랐습니다. 나무를 벨정도로 커다란 크기와 무게의 금도끼와 은도끼라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나무를 베어다 팔면서 살 수밖에 없을 정도의 살림이라면, 얼마나 어렵고 쪼들리는 살림이었는지에 대해 어릴 적에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만한 크기와 무게의 금붙이와 은붙이라면, 얼마나 값어치 있는 물건인지를 차차 깨닫게 되면서, 또한 그런 값진 물건이 하루 벌 하루 사는 나무꾼에게 얼마나 혹할만한 제안인지를 알게 되면서, 이는 분명 쉬이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받으십니다.
“돌더러 빵이 되게 해보라.”, “높은 데에서 뛰어내려보라.”, “나에게 경배하라.”
이러한 유혹자의 권유는, 광야에서 무려 40일간 단식한 후, 배고프고, 외롭고, 쓸쓸했던 예수님에게 너무나도 솔깃한 제안이었을 겁니다. 그저 하느님을 잠시 잠깐 모른척하고 슬쩍 저질러버리면 얻어질 배부름과, 권력과, 영광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하고 말씀하시며 단칼에 그 모든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곤 이어지는 이야기의 결말,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1)
전래동화에서 나무꾼이 정직함에 대한 대가로, 금도끼와 은도끼와 쇠도끼 모두를 얻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먹고 사는 것, 보호받는 것, 영광 받는 것 모두를 뒤로한 채, 한 분이신 “하느님”을 택하고, 오직 그분 만을 바람으로써, 세상 모두를 얻게 되셨습니다.
문득 마태오 복음 6장 33절의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오 6,33)
참회와 보속의 시기인 사순을 여는 우리에게, 교회는 주님의 유혹사화를 들려줍니다. 분명 먹고 사는 문제, 보호받는 문제들 다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 하느님의 것을 먼저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 이야기는 사순시기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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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금으로 천사를 만들 수도 있고, 마귀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천사도 본질은 금이며, 마귀도 본질은 금입니다. 천사도 다시 금이 되고, 마귀도 다시 금이 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여러 조건이 맞아서 인간에게 전해졌고, 지구촌 곳곳으로 퍼졌습니다. 세균, 박테리아, 바이러스는 생명활동의 원천이며, 생명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균, 박테리아, 바이러스와 함께 공존하며 살아왔습니다.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가축을 대규모로 양식하면서 바이러스는 더 많이, 더 넓게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과정을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주변의 사람에게 전해지고, 많은 사람이 바이러스에 감염됩니다.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을 가지는 치료제가 개발되면 더 이상 바이러스는 감염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감추고 숨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감추고 숨기면 더 빨리, 더 멀리 전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복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추고 숨기기 때문에 호미로 막을 수 있는 바이러스가 트랙터를 동원해도 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국 정부가 좀 더 빨리 알렸다면, 국제사회의 도움을 청했다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머물 수 있었을 겁니다. 병은 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야 치료제를 만들 수 있고, 더 멀리 퍼지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지나친 공포와 두려움이 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은 바이러스처럼 퍼져서 우리 안에 있는 자비심을 병들게 합니다. 손을 자주 씻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면 충분히 감염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감염이 되었다고 해도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감염된 사람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연대하면 감염된 사람은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진천과 아산의 주민들은 우한에서 온 교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했고, 교민들은 2주간의 격리 생활을 거친 후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한국에서 치료받고 완치된 중국인은 한국의 의료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몸은 각 지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지체는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있지만 우리는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는 서로 다투는 일이 없습니다. 서로 자랑하는 일도 없습니다. 한 마음,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참 외로운 별입니다. 강, 산, 들, 꽃, 나무, 사람은 지구라는 몸의 지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심장에서 만들어진 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해지듯이, 지구가 만들어주는 물과 공기는 지구의 지체인 우리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악으로부터 오는 유혹입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 번째는 ‘다음에 하지!’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다음에 하지’라는 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습관을 고치겠다고 하지만 ‘다음에 하지’라는 이 유혹 때문에 3살 버릇 80까지 가기도 합니다. 아직 기회가 있다고, 아직 시간이 있다고 그래서 다음에 하자고 미루는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기도 하고, 하늘로 가는 기차는 떠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도 다 그러는데!’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적당히 법을 어기고, 양심을 속이고,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니까 나도 그래도 된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닮아야 하는 분이 있다면 하느님을 위해 희생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 10년 째 몸져 누워있는 아내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남편,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성당의 화장실을 깨끗하게 치우고 성체조배를 하고 가는 형제를 닮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따르고 닮아야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나는 안 돼!’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절망을 버렸고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회개 할 수 있었고, 다시금 주님의 커다란 사랑을 받아 교회의 큰 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희망을 버렸고 절망을 가졌기 때문에 구원의 빛을 볼 수 없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악의 세력은 ‘나는 안 돼!’라는 유혹으로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자녀를 키울 때도 그렇습니다. ‘너는 안 돼!’라는 말을 들은 아이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움츠러들며 패배의식을 갖고 성장합니다. 그러나 ‘너는 잘 할 수 있어, 잘 될 거야’라는 말을 들은 아이는 실패와 좌절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것을 봅니다.
성서의 말씀을 보면 훌륭한 학식이나 능력으로는 유혹을 이길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 우리는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 우리는 교만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 우리는 권력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 의지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 삶의 유혹을 이겨내고 주님의 충실한 자녀가 되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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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두 목소리>
마태오 4,1-11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두 목소리>
홀로 있든 함께 있든
원하든 그렇지 않든
때론 미미하게 때론 강렬하게
때론 부드럽게 때론 거칠게
하나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서 맴돌다
심장을 향해 파고든다
다 가져
마음대로 해
한껏 누려
맘껏 짓밟아
네가 최고야
남들 신경 쓰지 마
이 세상에 오직 너밖에 없어
유혹자의 목소리
그럴듯하다
그런 것 같다
달콤하다
뿌리치고 싶지 않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 뭐
그저 모른 척 넘어가고 싶다
넘어가도 아무 문제없겠지
유혹자의
음흉한 웃음소리 뒤로
들릴 듯 말 듯
무언가 들려온다
애써 귀를 기울일수록
애써 마음을 모을수록
점점 커지고 커져
나를 휘감는 목소리
차갑게 멈춰버린 심장을
다시금 뜨겁게 약동시키는
잉걸불 같은 목소리
내가 사람임을 일깨우는
내가 살아있음을 일깨우는
생명의 목소리
유혹자의 거친 목소리를 덮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사랑의 목소리
나를 있게 하신 분의 목소리
나를 사랑하시는 분의 목소리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네가 살라고 내가 너를 보냈단다
네가 살리라고 내가 너를 보냈단다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그런데 왜 죽으려고 하느냐
그런데 왜 죽이려고 하느냐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너는 살아야 한단다
너는 살려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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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요즘은 사제관 밖으로 잠깐 나가기만 해도 께름칙한 마음이 듭니다. 마스크 착용은 물론이요 혹시라도 손에 바이러스가 묻을까 손매로 문을 열지만 그래도 찝찝한 마음은 가시지 않습니다.
손 세정제를 수시로 사용한다고 해도 어차피 핸드폰에 바이러스가 붙어있지 않을까 의심이 되니 그야말로 불안한 마음의 연속입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투도 조심스럽게 벗고 손과 얼굴을 깨끗이 닦고 옷을 모두 갈아입은 뒤에야 마음이 놓이니 아주 잠깐의 외출도 여간 성가신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가장 큰 유혹은 자꾸 얼굴을 만지고 싶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런 생각이 들지도 않았는데 손으로 얼굴을 만지면 안된다는 권고를 자꾸만 듣다보니 왠지 코에 무언가가 묻은 것 같고 눈과 귀가 간지러운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애써 참지만 가끔은 애라 모르겠다 얼굴을 마구 부비고 싶은 청개구리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사소한 유혹들을 경험하곤 합니다. 다이어트를 시작하면 평소에 생각나지 않던 야식을 시켜먹고 싶고 누군가를 미워하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면 꼭 그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 얄미운 행동을 합니다.
자녀에게 싫은 말을 쓰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꼭 그런 날 내 아이는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합니다. 요즘 같은 때에 핸드폰을 줄이고 시간을 유용하게 써야지 다짐 하지만 때마침 재난문자 경보음이 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저는 하염없이 뉴스를 탐독하고 있습니다.
외출을 하지 않고 집에 머무르는데 날씨는 또 어찌나 좋은지요. 그야말로 하루에도 몇 번씩 다양한 유혹을 경험하는 셈입니다.
그러다보니 정말 절박한 상황에서 유혹을 당하게 된다면ㅈ그것을 잘 이겨낼 수 있을지 덜컥 겁이 나기도 합니다. 사제 서품을 앞둔 겨울, 졸업여행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떠났던 때를 기억합니다. 버스를 타고 성지를 순례하던 중 저희는 이스라엘 한 가운데에 있는 광야에 내려 광야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광야에 발을 내딛으니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었고 온통 사막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광야는 그야말로 인적이 드문 메마른 곳이었습니다. 그나마 이스라엘의 12월은 우기로써 덜 더운 때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은 뜨거웠고 금방 목이 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바로 그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하며 생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탄에게로부터 그 유명한 세가지 유혹을 받으십니다.
그중 첫 번째 유혹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라는 식욕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 식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상징합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라는 유혹은 40일 동안 단식을 행한 예수님의 입장에서 가장 간절했을 유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을 기억함으로써 이 유혹을 이겨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본능>과 관련된 많은 유혹을 마주합니다. 육체적인 즐거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욕망, 맛있고 향기로운 것들이 언제나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시적일 뿐 인간에게 영원한 아름다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여배우의 아름다운 옷보다 초라한 수도자의 옷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천사들이 당신을 받쳐 주지 않겠소?”라는 유혹입니다. 악마가 굳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서 볼 수 있듯, 이 유혹은 귄위 혹은 신분과 관련된 <명예>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 명예는 사제인 저로써도 가장 경계해야 할 유혹입니다. 명예란 높은 직분, 좋은 학교, 사회적 권력이 될 수도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체면’과 연결됩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나아보이고 싶은 욕망, 듣고 싶은 칭찬, 좋은 사회적 평판 등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나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이 말씀은 저에게 매우 깊은 영감을 줍니다. 우리의 명예는 개인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 남들보다 나아보이는 그 무엇은 모두 세상의 기준일 뿐 하느님 앞에서 명예로운 이가 진정으로 명예로운 사람입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아 사람들이 줄을 서지만 뒤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다면 그 명예는 한낱 허울에 불과합니다.
역사 안에서 오래오래 기억되고 존경 받는 이는 거대한 기업의 오너도 독재자도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 세상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애쓴 이들이 결국 진정한 명예를 드러냅니다.
세 번째 유혹은,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주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대한 유혹입니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유혹에 우리는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물질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권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이기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며 그릇된 윤리관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유혹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물질이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이것을 우리는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금은보화는 세상이 아닌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들은 재물이 아닌 하느님을 섬겨야 하며 갖고 있는 것들은 선하게 사용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오늘의 세 가지 유혹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본능>, <명예>, <물질적 풍요>
이 유혹들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우리의 주변에 그야말로 널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기 보다는 내리 누르고 앞서가야 훌륭한 자질을 가졌다고 인정받는 사회, 아름답고 멋진 것들이 우선적으로 선택 받고 사회적으로 명망을 유지하는 사회,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보다 많은 재물을 가져야 존경받는 사회, 성적인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극적인 소재들을 내미는 대중매체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사회는 그야말로 각박한 곳, 그리고 금방 감정의 메마름을 느끼게 되는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이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다른 물질적인 가치로 인해 하느님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자기 성취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다른 데서 행복을 찾고자 발버둥칩니다.
돈을 많이 버는 데에, 건강과 젊음을 유지하는 데에, 권력과 명예를 얻는 데에, 현대 과학을 무한대로 발전시키는 데에 행복이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한 폐해들을 제프 딕슨이라는 시인은
<우리 시대의 역설>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높은 빌딩과
더 넓은 고속도로를 가지고 있지만,
성질은 더 급해지고 시야는 더 좁아졌습니다.
돈은 더 쓰지만 즐거움은 줄었고,
집은 커졌지만 식구는 줄어들었습니다.
일은 더 대충대충 넘겨도 시간은 늘 모자라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줄어들었습니다.
약은 더 먹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습니다.
가진 것은 몇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줄어들었습니다.
말은 많이 하지만 사랑은 적게 하고
미움은 너무 많이 늘어났습니다.
우리는 달에도 갔다 왔지만
이웃집에 가서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습니다.
외계를 정복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습니다.
수입은 늘었지만 사기는 떨어졌고,
자유는 늘었지만 활기는 줄어들었고,
음식은 많지만 영양가는 적습니다.
호사스러운 결혼식은 많지 더 비싼 대가를 치르는 이혼은 늘었습니다. 집은 훌륭해졌지만 더 많은 가정이 깨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불러오는 사회 현상과 유혹들 속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믿음을 실천해야 하겠습니까?
광야의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온갖 영적인 아름다움을 되새기며 주님을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유혹 앞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을 시험하지 말자는 다짐 속에서 기도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우리의 영적인 명예는 드높아지고 하늘에는 금은보화가 쌓이게 될 것입니다. 사순 제 1주일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기억하며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통회하는 첫 주간인 오늘, 특별히 내가 쉽게 걸려 넘어지는 유혹은 무엇인지 떠올려 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그러한 유혹에 처했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써 가장 먼저 기억해야할 것은 무엇인지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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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님들을 위하여>
어떤 사람이 등산하다가 길을 잃고 헤매던 중 불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불빛을 따라 올라갔더니 오두막집이 있었다. 오두막집 주인이 “이 산에서 길 잃은 사람들은 거의 길을 찾지 못하고 죽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까?”라며 놀라워하였습니다.
“예, 저는 위로 올라오다 보니 불빛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길 찾은 사람의 대답이었습니다. 사람이 산에서 길을 잃으면 대다수 산 아래로 내려가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에서 길을 잃으면 위로 올라가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복음 22장 42절)
여기서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말이 없는 것입니다. 미움이 없고 비난이 없는 것입니다. 다 끌어안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어디서든지 당당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아쉬워하거나 섭섭해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나는 하느님의 길을 간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순례자의 길입니다.
순례자의 이 길은 십자가의 예수님 말씀을 듣고, 새기고 바라보며 걷는 길입니다. 시편 127편 1절에 보면, 솔로몬 임금 ‘순례의 노래’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이의 파수가 헛되리라.”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을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목이 말랐습니다. 굶주렸습니다. 더위와 추위에 떨었습니다. 짐승의 위험과 고독에 떨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40일 동안 단식을 마치고 좀 편히 쉬려고 할 때, 마귀가 찾아와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주 너희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유혹을 물리친 세 마디 말씀은 “주님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라는 뜻입니다.
코린토 1서 10장 31절을 보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그래서 “먹는 이유가 하느님의 영광이요, 마시는 이유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 때문에 모른 척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느님의 영광 때문에 고운님들이 이렇게 노력하고, 참고, 애쓰다 보면 성령의 도움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악마의 유혹을 3가지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주 너희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3마디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을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왜요?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도 3가지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지켜나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 9장 2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기도로 말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 때문에 두렵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두렵다고 해도 코로나 19 앞에서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이제 하느님이 없어도 되겠습니까? 안 되겠지요. 하느님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살 수 없지요. 하느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순시기에 지금 고운님들이 있는 삶의 자리에서 오후 3시, 하느님 자비 시간에 성모님의 7가지 고통을 묵상하는 ‘성모칠고 묵주 기도’를 함께 바치고자 합니다. 기도 시간에 고운님들을 초대합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씀으로 기도해봅시다.
또한, 저는 하느님의 자비 시간에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고운님들 자신을 위하여 주신 예수님의 3가지 말씀으로 성령 충만함으로 코로나 19를 이겨내어 극복하고, 또한 오후 3시에 드리는 기도로 코로나 19로 고생하는 모든 님들이 견딜 수 있도록 드리는 부족한 기도로 치유와 회복의 하느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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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23)
♧♧ 시편 76편 2절…
"하느님께서 유다에 널리 알려지셨네. 이스라엘에 그 이름 위대하시네."
* 하느님께서 유다에 널리 알려지셨네.
시편 76편의 저작 배경을 히즈키야 시대에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아시리아 군대가 파괴되어 멸망한 사건(열왕기 하권 19장 35절. 참조)으로 보면, 이 구절은... 유다 백성들이 아시리아 군대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을 어떤 분이신지를 많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려지셨네...’라는 말은 ‘새롭게 알려진’ ‘계시된’ 뜻으로 ‘최근의 놀라운 사건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진 일’을 의미합니다. 그 만큼 아시리아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 사건은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 하느님께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여기서 ‘유다’는 솔로몬이 죽은 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왕국으로 나누어진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 유다 지파 또는 남 유다 왕국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뒤 이어 나오는 ‘이스라엘’과 같은 의미의 말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 이스라엘에 그 이름 위대하시네.
히즈키야 임금 시대 당시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략한 때는 대략 B. C. 701년경으로 이때는 이미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이후입니다.(열왕기 하권 18장 13-16절. 참조)
그런데도 아삽이 여기서 ‘유다에 그 이름 위대하시네.’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에 그 이름 위대하시네.’라고 한 이유는 하느님께서 저들을 구원한 사건(열왕기 하권 19장 35절. 참조)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모든 백성에게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로우심을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위대하시네.’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돌’은 ‘존귀하다.’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 단어로, 이는 하느님께서 구원 역사를 거행하신 일로 인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존귀와 영광을 받았음을 말해줍니다.(탈출기 18장 10-11절. 참조)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나 당신의 본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니 ‘하느님의 이름이 위대하시다.’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위대하신 분으로 찬양받았음을 의미합니다.
♧♧ 시편 76편 3절…
"살렘에 그분의 초막이, 시온에 그분의 거처가 마련되었네."
* 살렘에 그분의 초막이,
이는 하느님께서 유다와 함께 하시어 당신의 백성들을 아시리아의 손에서 구원해 내신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편 하느님의 초막 곧 거처는 살렘(창세기 14장 18절. 참조) 곧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역대기 하권 3장 1절. 참조) 따라서 아시리아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처와 당신의 백성들을 잃으시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반면에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아시리아의 손에서 지키신 것은 당신의 거처와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시온에 그분의 거처가 마련되었네.
‘살렘에 그분의 초막이 있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서 대구를 이루는 표현입니다. 이는 다윗이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계약 궤를 다윗 성(시온 산), 즉 예루살렘에 옮겨놓은 이래(사무엘 하권 6장 12-19절. 참조) 그곳이 하느님의 도성으로 불리게 된 것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한편, 하느님께서 대적들을 물리침으로 인해 하느님의 처소, 즉 예루살렘 성전은 다윗 성(시온 산)에 온전히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아삽은 이 구절에서 이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과 하느님께서 이 백성과 함께 하심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시편 9편 12절, 74편 2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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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나이 든 노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 열심히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강론 시간에 강조하셨습니다. 이 강론을 들은 나이 많은 한 형제님께서 미사 후에 신부님께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저도 성경을 읽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읽고 나서 뒤돌아서면 곧바로 무엇을 읽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성경의 내용은 2,000년도 더 된 옛날이야기가 아닙니까? 이 과거의 이야기가 현대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 읽는 것이 쓸데없는 시간 낭비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본당 신부님께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아주 지저분한 대나무로 만든 작은 바구니를 주면서 말씀하십니다.
“이 바구니에 물을 가득 담아 오셨으면 합니다.”
수돗가에 가서 물을 담았습니다. 그런데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바구니여서 신부님 앞에 도착했을 때는 바구니 틈새로 물이 모두 빠져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빈 바구니를 보면서 다시 물을 담아 오라고 시켰습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차례 반복했어도 바구니에 물을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형제님은 화를 내며 말합니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바구니 틈새로 물이 다 빠져나가는데.”
그때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구니를 보세요. 처음에는 너무나도 지저분했지만, 형제님의 노력으로 깨끗해졌습니다. 형제님이 성경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용이 이해 안 되고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님 영혼은 깨끗해집니다.”
우리는 성경의 힘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이해하기 힘들고, 때로는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 정도로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은 우리의 영혼을 분명 깨끗하게 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언제 유혹을 받으셨는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웠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사십 일 밤낮으로 단식해서 아주 시장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부족함이 있을 때 악마는 찾아옵니다. 즉, 가장 강력한 무기인 탐식, 허영, 탐욕을 들고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겪을 수밖에 없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찾아오는 이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지를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성경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모든 유혹을 이겨내야 내 영혼이 깨끗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반드시 성경이라는 참된 방패로 유혹에 맞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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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
어느 연구팀이 사람들에게 팝콘을 준 다음, 영화가 끝난 후 수거해서 얼마나 먹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사실 실험 참가자들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들 중 절반은 일주일 전에 만든 눅눅한 팝콘을 받았습니다. 공짜로 준다 해도 먹지 못할 팝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팝콘을 얼마나 남겼을까요?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제대로 된 팝콘만 다 먹은 것이 아니라, 눅눅한 팝콘 역시 모두 다 먹은 것입니다. 영화에 집중하다 보니 평소 습관을 따라 영화를 보며 다 먹은 것입니다.
우리가 반복하는 것에는 인식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즉, 습관이 나의 인식을 뛰어넘습니다. 따라서 나의 습관을 바꾸려고 한다면 대단한 의지가 필요함을, 주님 말씀처럼 ‘늘 깨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더구나 이 사회는 우리의 습관들을 교묘히 이용해서 더 많은 소비를 하도록 이끕니다. 이런 구조를 만드는 사람은 그 회사에서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뛰어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들보다 뛰어나야 내 습관을 이용하여 판매하는 이들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악마도 이렇게 우리의 습관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더욱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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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전쟁>
-주님의 전사, 말씀의 전사, 승리의 전사-
오늘은 3월 첫날이자 사순 제1주일입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해도 영춘화迎春化, 봄꽃은 피어나고 봄비에 젖은 농장의 매실나무 꽃봉오리들은 피어날 준비에 분주합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은 한결같이 위용을 자랑합니다. 시절이 뒤숭숭하고 어수선할수록 마음의 평온과 안정은 중요합니다. 어제 주고 받은 긍정적 메시지들입니다.
-“신부님, 불암산 아침 축복 인사받으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잘 계시죠?”
“네, 신부님의 기도와 관심 덕분에 방에서 자가 격리 잘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도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수녀님, 영춘화 아침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영춘화가 무슨 꽃인가? 하였는데---아! 참 맑고 깔끔하고 청명하고 예쁘네요. 고맙습니다.”-
-“신부님, 제 며느리가 건강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신부님 기도 덕분입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아, 축하드립니다. 손자를 두셨으니 이제 할머니가 되셨네요!”
-“자매님, 불암산 아침축복 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아멘. 맑은 하늘과 고고한 불암산이 제 맘에 희망의 빛줄기가 되어 자존감을 높여 주네요.---지금은 힘들어도 희망의 부활을 기다립니다.”-
-“자매님, 영춘화 아침 인사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추운 겨울 이기고 이렇게 예쁘게 피어나다니 신비롭습니다. 꽃을 보니 행복과 희망이 생깁니다.”-
-“자매님, 영춘화 축복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어쩌면 이리 맑고 밝고 아름다운지요! 예쁜 축복인사를 받으니 세상의 시끄러움이 잠시 잊혀집니다. 꽃보다 아름다운게 진정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매님의 영혼이 이처럼 맑고 밝고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아멘, 신부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이런 따뜻한 마음이 담긴 덕담들이 어둔 마음을 밝히고 살 힘과 희망을 줍니다. 요즘 코로나 19사태로 몹시도 혼란한 현실이 전쟁상황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참으로 이와는 대조적으로 윗 주고 받은 따뜻한 빛과 희망의 메시지와는 달리 인터넷은 온갖 부정적 비방과 비난 악담의 혐오스런 댓글들로 도배된 느낌입니다. 범람하는 가짜 뉴스와 더불어 그대로 ‘더러운 영들’처럼 알게 모르게 우리를 오염시키는 것들입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나 더러운 영에 걸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치열한 영적 내전內戰 상태에 있는 나라요 시국같습니다. 이럴수록 위엄과 품위를 견지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치열한 영적전쟁 상황중에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을까요?
광야에서 악마를 물리친 예수님처럼 ‘주님의 전사’, ‘말씀의 전사’, ‘승리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예수님을 통해 참사람 하나 만나는 느낌입니다. 영적전쟁에 승리를 위한 몇가지 지침을 나눕니다.
첫째, 삶은 광야입니다.
그 어디나 삶은 광야입니다. 광야인생입니다. 광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옛 수도승들은 하느님을 찾아, 악마와의 싸움을 위해 고독과 침묵의 사막을, 광야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악마와의 치열한 영적전쟁터가 바로 광야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만나 행복을 살아야 할 오늘 지금 여기가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광야입니다.
토마스 머튼도 사막을 사막으로 받아들일 때 바로 거기가 낙원이 된다고 했습니다. 영적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전쟁중의 평화요, 고통중의 기쁨이요, 절망중의 희망이요, 광야여정중의 낙원입니다. 박노해(가스팔) 시인의 ‘길이 끝나면 이란 시도 이런 역설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바로 광야인생의 영적전쟁중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길이 끝나면 거기/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새 봄이 걸어 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둘째, 삶은 전쟁입니다.
악마와의 영적전쟁입니다. 악마가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합니다만 짧은 생각입니다. 악마의 유혹이 없는 유토피아 세상은 환상입니다. 악마의 유혹이 없다면 영적성장도 없고 나태로 무기력해져 서서히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전쟁을 기꺼이 맞아 수행하십시오. 바짝 긴장만 할 것이 아니라 유머를 잊지말고 여유를 지니십시오.
하느님 수중에 있는 악마들이요, 하느님 주신 시련과 훈련의 도구가 악마의 유혹입니다. 그러니 악마의 유혹이 없게 해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악마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잘 통과할 수 있게 해 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보다시피 에덴 동산 낙원에도 악마를 상징하는 뱀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복음의 예수님은 대조가 우리에게 크나큰 깨우침이 됩니다. 하와와 아담 부부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영적전쟁에 패한 것입니다.
누구 탓도 아니 자기 탓입니다. 악마의 유혹에 빠져 불순종의 죄를 짓는 순간 줄줄이 죄로 오염되는 사람들에 세상입니다. 아담으로 시작된 죄의 역사와 대조적으로 복음의 예수님의 영적승리로 말미암아 새롭게 시작된 은총의 역사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대로 복음의 예수님과 창세기의 아담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심오한 해석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5,18-19)
아담과 하와의 실패를 만회한 하느님의 전사, 승리의 전사 예수님이십니다. 삶의 광야에서의 영적전쟁에 두려워 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악마의 유혹에 앞서 성령의 인도가 있고 배경에는 천사가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가 공존했듯이, 우리 인생 광야에도 천국과 지옥은, 천사와 악마는 공존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행불행이 결정됩니다.
누구를 택하느냐에 따라 영적전쟁의 성패는 결정됩니다. 성령을 선택하여 성령의 인도따라 성령의 전사, 주님의 전사로 살 때 유혹에 빠지지 않고 백전백승입니다. 이미 예수님 덕분에 우리의 영적전쟁은 이겨 놓고 싸우는 전쟁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전사, 승리의 전사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참사람의 영원한 모델 예수님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예수님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이 입증하는 진리입니다.
셋째, 삶에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삶의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중심을 잊어, 중심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에 복잡다난한 삶입니다. 하와와 아담의 실패는 방심으로 유혹에 빠져 하느님 중심을 잃은 탓이었습니다. 어렵고 혼란한 세상일수록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일이 절대적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을 때 바로 그 자리에 자리잡는 온갖 우상들 잡신들 더러운 영들입니다. 참으로 황폐화되는 인성에 존엄한 품위의 인간성 상실입니다. 급기야 괴물이 악마가 폐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은 폐해가 참으로 막심합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부부와 대조적인 복음의 예수님과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광야에서 악마와의 치열한 전투에 예수님이 궁극의 승리를 할 수 있음도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믿음이 전제되었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충실한 사도 바오로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은 우리 모두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은 물론 전생애동안 예수님께서는 현세적 목적을 달성하시려고 당신의 영적 능력을 이용하지 않으셨고, 기적같은 것을 통해서 당신을 신비한 방식으로 구원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독촉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믿음으로 모든 것을 돌파해 나가셨고 마침내 궁극의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넷째, 말씀과 하나되어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전사, 승리의 전사는 바로 말씀의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허무나 탐욕이 아닌 사랑이자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중심의 삶을 견고히 해주는 말씀의 은총이요 영적전쟁에 최상, 최고의 무기가 말씀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이자 영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튼튼하고 건강한 영혼입니다. 말씀의 부재로 인한 영혼의 영양실조, 영혼의 골다공증입니다. 사순시기의 단식, 기도, 자선 모두 영혼을 튼튼히 하는 수행들인데 필히 이에 전제되는 바 말씀 공부와 실천의 수행입니다.
말씀과 일치될수록 정화되고 성화되는 존재요 더러운 영들 또한 범접치 못합니다. 악마들에 대한 유일무이한 퇴치 수단은 말씀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세요. 거듭된 악마의 유혹을 말씀으로 이겨내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말 그대로 주님의 전사, 말씀의 전사, 승리의 전사입니다. 온갖 탐욕과 허욕의 사탄의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는 ‘참 사람’ 예수님이십니다.
1.“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으로 배고픔에서 유혹을 물리쳤고,
2.“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재차 허욕의 유혹을 물리쳤고,
3.“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지막 허영의 유혹을 말씀으로 일거에 격파하신 주님이십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셨고 얼마나 말씀과 하나된 예수님의 삶인지 깨닫습니다. 육신의 배는 텅 비었어도 마음은 살아 있는 생명과 빛의 말씀으로 충만해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악마의 정체는 낱낱이 폭로되니 참으로 통쾌, 유쾌, 상쾌한 영적 승리입니다. 악마는 패퇴하여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으니 천상 양식으로 영육을 충전시키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말씀 공부와 실천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보이지 않는 성령과 천사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심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치열한 1,광야에서의 2.영적전쟁에, 3.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삶중에 4.말씀의 무기로 악마를 패퇴시킨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주님의 전사, 말씀의 전사, 승리의 전사로 영적전쟁터인 삶의 광야로 파견 출전시키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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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유혹을 물리치는 길>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셨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고 그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에게 악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시간 유혹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악을 지배할 수 있는 주님의 힘과 능력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 근심걱정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유혹도 없이 평온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근심걱정이 없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악의 유혹을 받으셨고 더군다나 악의세력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음기회를 노리며”(루카4,13)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도 이러한 어려움이 생겼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겠습니까? 그러므로 근심 걱정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어떠한 유혹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근심과 곤란이 없으면 자만하는 마음,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사치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따라서 근심과 곤란으로서 마음의 회초리를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 지상의 순례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완전하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악의세력은 거룩함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에서 지면 보통 사람이고, 이기면 그야말로 큰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쁜 일은 멈추고 좋은 일만 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만 실천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길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2,18) 그러나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겪은 첫째 유혹은 생계문제 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쓰리고의 문제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 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마더데레사 수녀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내가 너그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빵이 중요하지만 빵보다 사랑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것 위에 영적인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명성에 대한 유혹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성경의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고 받쳐주리라.’ 하는 말씀을 들먹이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루카4,9)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살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능력인 기적을 남용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눈에 띠고 인정받으며 찬사를 받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상의 십자가는 남몰래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생색내기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세 번째 유혹은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사탄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성경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상대방을 더 많이 지배하고픈 마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불의와 타협하고도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렸습니다. 박해 시절에 그들이 세상과 타협했다면 목숨을 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지상의 조그마한 유익함 때문에 하느님을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정치에 발을 디뎠던 분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정치를 하려니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하며 소신이 없어야 하더라.” 만약 우리가 불의와 타협한다면 그것이 사탄을 경배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부, 권력, 명예의 3가지 유혹을 보았는데 결국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물리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6,10. 17절을 보면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4,12) 따라서 말씀에 나를 비추어 새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 유혹을 극복한 인물을 보면 구약의 요셉은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마침 집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보디발의 부인은 요셉의 옷을 붙잡고 침실로 같이 가자고 꾀었습니다. 요셉은 옷을 그의 손에 잡힌 채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창세 39,11-12)
다윗은 자기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오히려 죽임으로써 원수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알리는 아비새를 타이르며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치워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어른에게 손을 대고 죄를 받지 않겠느냐?”(1사무 26,8-9) 하며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3번의 유혹을 받으셨는데 “성경에 기록 되어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4,7)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4,10) 하시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뱀과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창세3,1-7) 그리고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세19,26) 에사오는 떡과 불콩죽을 받아먹은 후 야곱에게 장자의 상속권을 팔아먹었습니다. 아론은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제단을 만들고 축제를 올렸습니다. 다윗은 어느 날 궁전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고 결국 그 여인을 불러다가 정을 통하고 돌려보냈습니다.(2사무 11,2-4)
다윗은 유혹을 이긴 사람이기도 하지만 유혹에 넘어간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이렇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좋은 결심을 해도 한 순간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을 한번 이겼다고 해서 방심할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
가리옷 유다는 적신 빵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하고 이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습니다. 때는 밤이었습니다.(요한 13,25) 그리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그렇다면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만해서 그렇습니다. 이사야서 47,10에서는 “네가 실컷 나쁜 짓을 하면서도 ‘나를 감시할 눈이 없다.’하고 자신만만이구나. 너는 지혜로운 체, 세상일을 다 아는 체하며 ‘이 세상에 나 밖에 없다.’고하다가 제 꾀에 넘어가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들여 다 보시는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데 하느님을 의식하지 못한 탓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자기 욕심에 끌려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야고 1,14-15)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이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하기를 청한 다음 겟세마니 동산에 오르시어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부탁하고 조금 더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마르14,36) “기도를 마치시고 세 제자에게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하시며 한탄 하셨습니다.(마태26,40-41)
이성과 육이 따로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한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로마7,15.21)
주님의 기도에서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하면 유혹은 은총입니다. 자신을 확실히 볼 수 있는 기회이고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유혹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소유와 지배, 명예, 현세적인 권세, 정치적인 유혹으로부터 끝까지 지켜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뿐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말씀이 능력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으십니다.(히브2,18)
그러므로 우리는 유혹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며 필요하기도 합니다. 유혹은 자신을 확실히 볼 수 있는 기회이며 주님께 간절히 매달릴 때입니다.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지 말고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쌓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가슴에 안고 사시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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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사순 제1주일 미사의 독서들은 무척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독서에는 유혹에 무너진 인간이 등장합니다. 악이 인류의 조상을 속여 승리하지요. 복음에서는 인간의 조건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악에 대한 성자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두 사건을 비교 종합하여 구원 역사를 요약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 그 코에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마태 4,1)
제1독서와 복음은 한결같이 그 서두에서 성령의 현존을 언급합니다. 하느님의 "숨"은 성령이시고, 세례로 충만하신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신 분도 성령이십니다.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성령에 충만한 영혼이라도 유혹이 없을 수 없으며, 늘 유혹에 승리를 거둘 수 있지는 않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보여줍니다.
오늘 제게는 복음 속 유혹자의 말보다, 대응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 강하게 다가오셨습니다. 세 가지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에는 신앙생활의 본질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 그대로를 인용해 유혹자에게 대응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신명 8,3)
하느님의 입에서 발설되신 말씀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로 그분 자신의 "신원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단식으로 굶주린 육의 결핍을 비집고 들어온 유혹 앞에서 예수님은 온 세상을 배불리실 당신의 소명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신명 6,16)
상대방에 대해 믿음과 신뢰가 없을 때 상대를 떠보는 행위를 시험한다고 하지요. 믿음은 하느님과 나를 잇는 통로이며 "관계성"입니다. 하느님을 감히 시험하는 것은 믿음의 부재를 반증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신명 6,13)
예수님의 이 말씀 안에는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분은 홀로 흠숭 받으셔야 할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십니다. 모든 인간은 세속적 성공, 물질, 힘이라는 우상을 업신여기듯 지나쳐 하느님앞에 다다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만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삶 안에서 우리가 겪는 유혹은 중요하지도 않은 부분을 장난스레 건드려 보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각자 유혹 받는 부분을 가만히 성찰해 보면 알 수 있지요. 악은 나의 "신원"과 하느님과의 "관계성", 하느님과 나와의 "질서"라는 본질적 핵심에 균열을 일으키고 싶어합니다. 제1독서에서 원조에게 접근한 악의 속삭임이 잘 보여주듯 말이지요.
유혹은 도처에 있고 우리는 약합니다. 예수님처럼 통쾌하게 한방으로 악마를 떠나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겨우 넘어선 듯 하다가 걸려 넘어지고 또 무너지고 마는 것이 우리 현실이지요.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희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둘 이는 제 앞가림도 못하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로 죽음으로 우리의 죗값을 치르신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입당송)
분명 하느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대답"이십니다. 그러니 벗님! 유혹과 실패로 지쳐갈 때 더 크게 더 간곡히 주님을 부릅시다. 우리의 신원의식과 주님과의 관계성, 그분과 우리 사이의 질서에서 나오는 이 부르짖음은 반드시 하느님의 심장을 건드려 우리를 일으키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사순 제1주일에 미사를 단식해야 하는 여러분들을 미사 중에 기억하겠습니다. 오늘도 유혹을 말씀으로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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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순 제1주일이다. 오늘 <말씀전례>의 장소는 오늘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준다. 곧 <제1독서>의 장소는 에덴동산이고, <복음>의 장소는 광야이고, <제2독서>의 장소는 로마라는 도시 광야이다. 바로 이곳이 오늘 우리가 있는 장소이다. 이 이야기에는 역사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거대한 두 사건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중심에는 ‘유혹’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유혹의 결과에 따라 두 개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 곧 에덴동산에서의 ‘유혹’과 광야에서의 ‘유혹’의 결과에 따라 열리는 두 세계가 있다. 이는 유혹에 대한 패배와 승리의 결과에 따라 열리는 세계이다. 그것은 죽음의 지배를 받는 세계와 생명의 지배를 받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 마디로, 말씀에 대한 순명과 불순명에 따라 결정된 세계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죽음의 지배를 받는 것을 세계를 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의 지배를 받을 세계를 택하고 있는가?
1, 광야
자, 그럼 먼저 “광야”로 가 보자. 대체 ‘광야’는 어떤 곳인가?
‘광야’(사막)는 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물이 귀하고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대신에, 마귀들과 해로운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이 살만한 땅이 아닌 저주받은 땅으로 간주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한가운데도 ‘광야’가 있다. 우리의 삶 한 가운데에 어둔 밤이 있고, 공허가 있고, 막막함과 무미건조함이 있다. 어찌할 수 없는 나약함과 붙들어 매어지지 않는 흔들림이 있고, 불가항력적인 무능함과 도리 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무기력이 있다. 벗어나지지 않는 고통과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가슴 안에, 황량한 ‘광야’를 품고 살아간다. 결코 피해 지지 않는, 피할 수도 없는 광야를 좋으나 싫으나 부둥켜안고 살아간다.
<성경>에 의하면, ‘광야’는 아주 독특하다. 곧 지리적인 장소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구세사적인 독특한 시기를 의미한다. 곧 일반적인 의미의 사막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입은 이들이 겪게 되는 사막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세는 홍해를 건넨 후에 광야를 길을 걷게 되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로 나아간다. 곧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 펼쳐져 있는 광야인 것이다.
그러니 이 광야는 이미 홍해를 건네 온 이들에게 주어진 광야이다.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홍해를 건네 온 이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인도하시기 위해서 사막을 통과하게 하셨다. 그것은 하느님에 의해 직접 선택된 길이었다. 그 길은 가나안에 이르는 짧은 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인도하기를 원하셨던 길이었다. 이스라엘인들은 바로 이 사막에서 율법을 받았고,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목마름과 갈증, 허기짐과 베고픔이 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과 우상숭배가 있다. 이방 민족들의 침탈이 있고,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투정과 불평, 배신과 반역이 있고 불충이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는 만나와 메추라기가 있고, 바위에서 솟아나는 물이 있고, 그들을 인도하는 지팡이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다. 그들을 치료해주는 구리 뱀이 있고, 이민족을 물리쳐주는 하느님이 손길이 있다. 하느님의 보살핌과 연민, 자비와 충실함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승리가 있고 하느님의 영광이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막에 살게 하지 않으시고, 단지 약속의 땅에 이르는 통과지로서 간주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유배지인 바빌론 또한 사막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묵시문학에서는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구원은 사막이 낙원으로 변하는 것으로 소개며, 그때에는 메시아가 사막에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마태 24,26;사도 21,38;묵시 12,6.14.)
따라서 사막은 신앙생활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광야”라는 이 묵중한 십자가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곧 구원에 이르는 통로로 주셨다. 그리하여 이 사막을 걷는 길은 곧 신앙의 길이 된다. 그렇다면, 광야에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2, 광야에서의 유혹
오늘 사순 첫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이다. 광야에는 예수님이 있고 유혹자인 사탄이 있고 주님의 천사가 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
먼저 있었던 그 말씀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들려준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참조)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신명 6,16 참조)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 6,13)
자, 그럼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들려주게 된 상황인 ‘사탄의 유혹’이 대체 무엇인지를 보도록 하자! 유혹자는 치명적으로 악마적인 매력으로 유혹하는데, 이는 유혹의 세 단계를 보여준다.
<첫 번째> 유혹은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 해보시오.”라는 꼬드김이다. 곧 돌을 빵으로 만드는 능력에 대한 탐욕이다.
나아가서는 자신의 기능과 재능 등을 포함할 수 있다.(예; 술과 목숨을 걸고 도박을 벌린 청년이야기-영혼의 부패와 파괴)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하시면서 하느님 말씀을 생명으로 삼으신다.
<두 번째> 유혹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라는 꼬드김이다.
곧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다치지 않고 내려오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당신의 신적인 힘의 과시를 드러내라는 허영에 대한 유혹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하시면서, 겸손하게 땅의 낮은 곳에서의 설교와 기도와 고통을 겪으시고, 마침내는 높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다.
<세 번째> 유혹은 “당신이 땅에 엎디어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라는 꼬드김이다. 곧 권력과 영광의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승리의 방식으로 사용하라는 유혹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다.
이 유혹들은 한 마디로, 아버지의 계획에 맞서라는 것이었다. 곧 사탄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정해놓으신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라고 부추기며 유혹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세상의 방식이나 자기 자신의 방식, 자기가 원하는, 자신이 유익하다 편리하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하라고 꼬드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에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이러한 유혹을 받으셨다. 그리고 겸손하게 성경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기셨다. 공생활의 시작부분에서뿐만 아니라, 공생활 내내, 그리고 십자가에서까지 그 유혹을 받으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순종함으로써 유혹을 승리로 바꾸셨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는 아버지께 대한 예수님의 순종이 가져온 선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불순종이 가져온 악을 훌쩍 넘어선다(로마 5,10)는 증언을 담고 있다.
3, 유혹의 의미
그런데 유혹은 대체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오는가?
“유혹”(πειρασμον)이라는 단어는 이중적인 의미, 곧 ‘유혹’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시련’ 혹은 ‘시험’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마치 우리말의 위기(危機)가 위험과 기회라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과 같다. ‘유혹’은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면, ‘시련’은 믿음을 흔드는 것으로 테스트하는 것이고 믿음을 굳세게 한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야고 1,2-3)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 1,12)
사실, 거의 모든 사건에는 우리의 두 가지 상반된 의지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곧 그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려는 ‘거룩한 의지’와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려는 ‘악한 의지’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같은 돌이 어떤 이에게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다른 어떤 이에게는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곧 어떤 사람은 유혹을 통해서, 오히려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고, 그것은 그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시련’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시험’하시기는 하지만 유혹하시지는 않으신다.
이에 대해 사도 야고보는 말한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3-15)
그렇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유혹에 빠지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곧 마음이 깨끗하면, 유혹은 마음 안에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존자 베다는 말합니다.
“마귀라 할지라도 우리의 나쁜 생각들에 힘을 보태어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오상의 비오 신부도 이렇게 말한다.
“그 어떤 경우라도 마귀는 인간의 응답 없이는 인간 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 ‘유혹’은 악마에게서 온다. 그것은 맨 처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서 벌어졌다.(창세 3,1-7)
오늘 <복음>에서는 광야에 있는 예수님에게서 벌어졌다. 그리고 공생활 내내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까지 유혹을 받으셨지만 승리하셨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유혹과 패배의 한가운데로 찾아오시어 우리 손을 붙잡아 일으켜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계속해서 인류를 유인하고 있는 유혹들을 예수님을 통해 이겨낼 수 있다.
이를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은 사람들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죄 외에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습니다.”(히브 4,15)
이처럼, ‘유혹’은 사탄이 하며, 악과 관련된다. 그래서 마태오복음사가는 ‘유혹’이 사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다음에 “악에서 구하소서.”를 덧붙인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는 유혹 자체를 저지할 수는 없기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 달라고 청원한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이 구절을 “유혹받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니라, 유혹에 굴하지 않기를 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세상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제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5-1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 있으면서 악에서 보전되기를 기도하셨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그 보전되는 길을 기도하셨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말씀의 진리로 거룩한 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곧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악을 이기는 길이다. 따라서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며”라는 기도는 “우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라는 적극적인 기도와 같은 것이 된다. 그러니 우리는 단지 악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머물러 있어서만은 안 된다. 더 적극적인 의미로 선으로 악을 이겨내야 한다. 그렇다. 악은 단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으로 이겨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그러니 악에서 구원된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로서 선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4, 유혹에 대한 대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담은 에덴에서 유혹에 걸려 넘어지고 시험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막아내고 시험에 승리하였다. 왜 아담은 걸려 넘어졌고, 예수님은 걸려 넘어지지 않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기도에 달려 있다. 아담에게는 기도가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40일간 드리는 기도를 통해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렇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탄의 계략에 이길 수 없다. 사탄은 어려운 일이 오면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원망하게 하고,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통해서 교만하게 함으로써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든다. 그렇지만 기도를 한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것들을 통해 성화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루카 22,40)
아마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 충고를 따랐더라면, 그날 밤 스승을 배반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짐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무거운 시련을 허락하지는 않으신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으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여러분이 시련을 당당하도록 묵인하지 않으실 것이며, 오히려 시련과 함께 그것을 견디어 낼 방도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1코린 10,13)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유혹과 시련을 마주하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우리를 구원받도록 도와준다. 바로 그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동행하시며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스 큉은 말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혹 속에서 오히려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길을 가르쳐주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다름 아닌 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영적 전쟁이란 복음에 신실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전투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 6장 10-1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끝으로,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무기는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며, 말씀의 영이신 “성령”이며, 성령이 동반된 기도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곧 기도로 성경 말씀을 사용하시고, 성경말씀으로 기도하기를 제시하신다. 결국, 말씀이 유혹을 이기는 권능을 발휘하시고, 말씀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비추고 어둠을 몰아내신다.
오늘, 부활을 기다리는 우리는 텅 빈 ‘광야’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사막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 생명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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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주님!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헤아리고,
소유하기보다 소유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무엇이 유익한가보다 그것이 사랑인가를 보게 하시고,
능력을 가지기보다 가진 능력을 사랑으로 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으로부터 떼어 놓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힘입어 말씀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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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유혹 알아차리기>
"40일 밤낮으로 단식하시며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려 택하신 곳이
어디에도 마음 뺏길 것이 없는 광야였습니다.
온전히 집중하여 주님 뜻 찾으려할 때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유혹들,
주님의 거룩함에 들어서기까지
견디고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욕구, 명예, 힘, 감정 등 ~
유혹임을 알아차리면 주님 앞세워 반격!
영적으로 승리하여 한계단 성장합니다.
'유혹과 타협 No, 반격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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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마태 4, 1)
광야에서
숨길 수 없는
인간의 욕구를
만나게 됩니다.
인간의 욕구는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욕구 또한
십자가를 통해
진정한 사랑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곳 광야에서도
메아리칩니다.
광야도 십자가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빵도 말씀도
시험도 믿음도
유혹도 회개도
모두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하느님의 힘을
믿는 것이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알게되는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욕망에 묶여 있는
우리를
풀어주십니다.
풀어주시는
하느님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됩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의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받아들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사랑도 봉사도
기도도 믿음도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십니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을 끝까지
신뢰합시다.
삶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느님께 이 시간을
봉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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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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