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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초문학상 시모음
https://naver.me/IGJ7lh3l
제32회 공초문학상
물의 표정 / 이향아
누구는 물의 표정을 고요라고 하고
어떤 이는 그래도 정결이라 하지만
나는 또 하나 순종이라고 우긴다
거슬러 흐르는 걸 본 적이 없으므로
앞 물을 따라가며 제 몸을 씻는 물
영원의 길을 찾아 되짚어 오는 물
돌아오기 위해서 불길 위에 눕는 물
물의 온도는 봉헌과 헌신
이슬로 안개로 그러다가 강물로
온몸을 흔들어 겸허히 고이는
물의 내일은 부활
조용한 낙하
https://naver.me/5ne1mqhn
제31회 공초문학상
도착 / 문정희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했어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 더 많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
지는 것도 괜찮아
지는 법을 알았잖아
슬픈 것도 아름다워
내던지는 것도 그윽해
하늘이 보내 준 순간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이파리들의 자유
벌레 먹어
땅에 나뒹구는 떫고 이지러진
이대로
눈물나게 좋아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
여기 도착했어
https://naver.me/FxFwvstE
제30회 공초문학상
서쪽을 보다 / 최금녀
우리는 동쪽에 있다
남편은 늘 동쪽 벽에 기대어 앉아
서쪽 벽을 보고 있다
액자 속 인물들은 표정을 바꿀 생각이 없다
40년 된 소철은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다
반가운 적이 없는 기억들이
꽃 진 화분에서 기어나와
틈새를 찾아다니며 핀다
르누아르의 여자는 그림 속에서도 르누아르를 사랑한다
꼭 하고 싶은 말은 냉동실에 넣어두고
죽음은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정장 차림으로 날씨를 읽는다
서쪽 벽은 늘 춥고 어둡다
바라보는 중이다
https://naver.me/GSDFO4WB
제29회 공초문학상
산까치 / 허형만
보슬비 오시는 날
날마다 찾아가는 산길을 걷는데
저만치 산까치 대여섯 마리
보슬보슬 젖는 길에서
신나게 뛰놀고 있다
나도 함께 뛰고 싶어 우산을 접고
비에 젖으며 가만가만 다가가는데
눈치 빠른 산까치들
후르르 나뭇가지 위로 날아오른다
하이고 못 본 척 뒤돌아갈걸
미안해하며 비에 젖어 걷는다
젖어라 시여
심장 깊이 젖어라 시여
산까치도 젖으며 노래하나니
산딸기도 젖으며 붉게 익나니
보슬보슬 젖는 시는 부드럽나니
젖어라 시여
뼛속까지 젖어라 시여
https://naver.me/xuclRhKj
제28회 공초문학상
하루해 / 오탁번
간밤에 비 오고 바람 불어
새벽에 지팡이 짚고
밤 주우러 나간다
알밤은 다
한발 빠른 다람쥐 차지
나는 송이밤 몇 개
해가 뜨면
풀밭이 된 마당에서
메뚜기 여치 방아깨비 버마재비
제 세상 만난다
고추잠자리 떼
혼자 어지럽다
낮곁 내내
보행기 미는 노인 한둘
텅 빈 동네
벼 익는 논배미마다
지는 해
더디다
https://naver.me/FgHZQhfL
제27회 공초문학상
거리 / 유자효
그를 향해 도는 별을
태양은 버리지 않고
그 별을 향해 도는
작은 별도 버리지 않는
그만한 거리 있어야
끝이 없는 그리움
https://naver.me/x5GCiAji
제26회 공초문학상
멀고 먼 길 / 김초혜
오 하느님
나이는 먹었어도
늙은 아이에 불과합니다
햇살은 발끝에 기울었는데
내 몸이나 구하고
굽은 마음 어쩌지 못해
얼굴을 숨기기도 합니다
몸안에 가득 들여놓은 꽃은
붉은 조화 나부랭이였습니다
어찌
고요를 보았다 하겠습니까
https://naver.me/xs3HNJFb
제25회 공초문학상
지는 꽃 / 김후란
지는 꽃
한때 눈부시던
천연색 빛깔 그리고
향기
소리 없이 지는 꽃
쓸쓸한 그림자로 누웠네
그토록 애틋했던
우리의 젊은 날도
흑백사진으로 남아
고요하여라
아득한 우주 속으로
사라져가고
https://naver.me/xyTvooe0
제24회 공초문학상
돌멩이 / 나태주
흐르는 맑은 물결 속에 잠겨
보일 듯 말 듯 일렁이는
얼룩무늬 돌멩이 하나
돌아가는 길에 가져가야지
집어 올려 바위 위에
놓아두고 잠시
다른 볼일 보고 돌아와
찾으려니 도무지
어느 자리에 두었는지
찾을 수 없다
혹시 그 돌멩이, 나 아니었을까
https://naver.me/F3T3q8xK
제23회 공초문학상
오아시스의 거간꾼 / 김윤희
내가 너의 무심한 갈증 편에 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발견했다
오늘 아침 내 손이 너에게 건넬 것은
오로지 건더기 없는 차디찬 맹물
뿐이니
손아귀에 옹이 지도록 물의 집
비틀어 잠긴 물의 문 노크하다 말고
부수어 내 손이 갇혀 입 다물고 참고 있는
한 모금 물 어렵사리 빼네
너의 앞에 내놓으니
간밤 긴급하고 험악한 갈증이 불타고
남은 너의 사막을 잘 받쳐 들고
아침의 오아시스 앞에
줄을 서라
그는 너를 알아볼 것이다
나는 물을 중개하는 특별한
자본이라곤 마련 없는 맨손의
거간꾼이 될 것이니
https://naver.me/5oEtMmJT
제22회 공초문학상
무제 시편 11 / 고은
오늘 오만불손의 묵언이던 내가 모처럼 입을 연다
나의 고독은
태양의 고독을 안다
그 불타는 고독 이외에는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는 고독을 안다
나의 고독은
명왕성의 고독을 안다
그 만겁 빙벽의 고독을 안다
그 혹한의 침묵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필요 없는 고독을 안다
오늘밤은 상심의 내가 우주의 눈물을 흘리는 밤이다
나의 고독은
토성 및 토성 고리의 고독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도 토성도 허망이다
https://naver.me/56R1x6EC
제21회 공초문학상
불타는 말의 기하학* / 유안진
쉬운 걸 굳이 어렵게 말하고
그럴듯한 거짓말로 참말만 주절대며**
당연함을 완벽하게 증명하고 싶어서
당연하지 않다고 의심해보다가
문득 문득 묻게 된다
유리 벽을 지나다가
니가 나니?
걷다가 흠칫 멈춰질 때마다
내가 정말 난가?
나는 나 아닐지도 몰라
미행하는 그림자가 의문을 부추긴다
제 그림자를 뛰어넘는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확인해야 할 것 같아
일단은 다시 본다
이단엔 생각하고 삼단에는 행동하게
손톱 발톱에서 땀방울이 솟는다
나는 나 아닐 때 가장 나인데
여기 아닌 거기에서 가장 나인데
불타고 난 잿더미가 가장 뜨건 목청인데.
* 파스칼은 『팡세』에서 詩는 불타는 기하학(幾何學)이라고 헸다. 그러나 시가 언어의 몸을 지니기 때문에 말의 기하학이라고 정의해본다.
** 장 콕토는, “시인은 항상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다(The poet is a liar who always tells the truth)."라고 했다. 그러나 원전을 못 찾아 그 출처를 밝히지 못한다.
https://naver.me/xLWh88PM
제20회 공초문학상
나무에 기대어 / 도종환
나무야 네게 기댄다
오늘도 너무 많은 곳을 헤맸고
많은 이들 사이를 지나왔으나
기댈 사람 없었다
네 그림자에 몸을 숨기게 해다오
네 뒤에 잠시만 등을 기대게 해다오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왔다는 걸 안다
네 푸른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잠시만 눈을 감고 있게 해다오
나무야 이 넓은 세상에서
네게 기대야 하는 이 순간을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상처 많은 영혼을
https://naver.me/x4Fmg6ua
제19회 공초문학상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 정호승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에 버리고 온 나를 찾아가지 못한다
의상대 붉은 기둥에 기대 울다가
비틀비틀 푸른 수평선 위로 걸어가던 나를
슬그머니 담배꽁초처럼 버리고 온 뒤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이제는 봄이 와도 내 손에 풀들이 자라지 않아
머리에 새들도 집을 짓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을 이미 잊은 지 오래
동해에서는 물고기들끼리 서로 부딪치지 않고
별들도 떼지어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치지 않는데
나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서로 부딪쳐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 종소리도 듣지 못한다
https://naver.me/5xj7xOPq
제18회 공초문학상
백비 / 이성부
감악산 정수리에 서 있는 글자가 없는 비석 하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너무 크고 많은 생 담고 있는 나머지
점 하나 획 한 줄도 새길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씀을 지녀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 일 다 부질없으므로
무량무위를 말하는 것은 아닌지
저리 덤덤하게 태연할 수 있다는 것을
저렇게 밋밋하게 그냥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https://naver.me/FmfQSEIT
제17회 공초문학상
눈물 / 신달자
슬픔의 이슬도 아니다
아픔의 진물도 아니다
한 순간 주르르 흐르는 한줄기 허수아비 눈물
내 나이 돼봐라
진 곳은 마르고 마른 곳은 젖느니
저 아래 출렁거리던 강물 다 마르고
보송보송 반짝이던 두 눈은 짓무르는데
울렁거리던 암내조차 완전 가신
어둑어둑 어둠 깔리고 저녁놀 발등 퍼질 때
소금끼조차 바짝 마른 눈물 한줄기
너 뭐냐?
https://naver.me/GbDWkykE
제16회 공초문학상
아지랑이 / 조오현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https://naver.me/F2Zm2TOe
제15회 공초문학상
오체투지 / 이수익
몸을 풀어서
누에는 아름다운 비단을 짓고
몸을 풀어서
거미는 하늘 벼랑에 그물을 친다.
몸을 풀어서,
몸을 풀어서,
나는 세상에 무얼 남기나.
오늘도 나를 자빠뜨리고 달아난 해는
서해바다 물결치는 수평선 끝에
넋 놓고 붉은 피로 지고 있는데.
https://naver.me/FDnbpI8A
제14회 공초문학상
마음과 얼굴 / 성찬경
남한에서 나무가 연간 빨아들여 간직하는 물의 양이
150억 톤은 된다고 한다.
큰 저수지 여러 개가 저장하는 물의 양과 같다고 한다.
크고도 착하구나 나무가 하는 일.
그렇기나 하니까 나무의 자태가
저렇듯 늠름하고 멋있는 거지.
들에 솟은 몇 그루 나무의 시정(詩情).
보라 나무의 집단 저 숲의 위용을.
수목의 바다 센 바람이라도 불면
출렁이는 잎의 파동 웅혼한 율동.
저런 나무를 마구 학대하니까
세계 곳곳에서 물난리가 나는 거지.
보아서 좋은 것은 본질도 곱다.
착한 모습은 착한 마음의 거울.
무섭다 독을 품은 버섯은 역시 독버섯.
절대 어김없다 사기꾼 얼굴은
나는 사기꾼이요 하고 말하고 있다.
판독을 잘못하여 더러 속긴 하지만.
풀밭에 둥실 뜨는 달빛처럼
모습을 칠하는 본질.
안과 밖 이 조응(照應)이 큰 신비다.
늘 푸르고 천연한 나무여.
https://naver.me/5pwhIpQs
제13회 공초문학상
마음의 달 / 천양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 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 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https://naver.me/5EUroHDa
제12회 공초문학상
경청 / 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https://naver.me/5gFWZB13
제11회 공초문학상
절, 그 언저리 / 김지하
절,
그 언저리 무언가
내 삶이
있다
쓸쓸한 익살
달마(達摩) 안에
한매(寒梅)의 외로운 예언 앞에
바람의 항구
서너 촉 풍란(風蘭) 곁에도
있다
맨 끝엔 반드시
세 거룩한 빛과 일곱별
풍류가 살풋
숨어 있다
깊숙이
빛 우러러 절하며.
https://naver.me/5MVcJAkh
제10회 공초문학상
풀 / 김종해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풀이 되어 엎드렸다
풀이 되니까
하늘은 하늘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햇살은 햇살대로
내 몸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
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
풀·2
풀이 몸을 풀고 있다
바람 속으로 자궁을 비워가는
저 하찮은 것의 뿌리털 끝에
지구라는 혹성이 달려 있다
사람들이 지상地上을 잠시 빌어 쓰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풀은 흙을 품고 있다
바람 속에서
풀이 몸을 풀고 있다
https://naver.me/FjbOPRKQ
제9회 공초문학상
순금(純金) / 정진규
우리집에 도둑이 들었다 손님께서 다녀가셨다고 아내는 말했다 나의 금거북이와 금열쇠를 가져가느라고 온통 온 집안을 들쑤셔놓은 채로 돌아갔다 아내는 손님이라고 했고 다녀가셨다고 말했다 놀라운 비방(秘方)이다 나도 얼른 다른 생각이 끼여들지 못하게 잘하셨다고 말했다 조금 아까웠지만 이 손재수가 더는 나를 흔들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순금으로 순도 백 프로로 나의 행운을 열 수 있는 열쇠의 힘을 내가 잃었다거나, 순금으로 순도 백 프로로 내가 거북이처럼 장생할 수 있는 시간의 행운들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손님께서도 그가 훔친 건 나의 행운이 아니었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상징의 무게가 늘 함께 있다 몸이 깊다 나는 그걸 이 세상에서도 더 잘 믿게 되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상징은 언제나 우리를 머뭇거리게 한다 금방 우리를 등돌리지 못하게 어깨를 잡는 손, 손의 무게를 나는 안다 지는 동백꽃잎에도 이 손의 무게가 있다 머뭇거린다 이윽고 져내릴 때는 슬픔의 무게를 제몸에 더욱 가득 채운다 슬픔이 몸이다 그때 가라, 누가 그에게 허락하신다 어머니도 그렇게 가셨다 내게 손님이 다녀가셨다 순금으로 다녀가셨다
https://naver.me/xTTno9Q5
제8회 공초문학상
나무 토막 / 이탄
여름날,헤엄을 치고 놀 때
즐거웠다,
물을 먹으며 공을 던지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대개 우리들은 노는 일에 몰두했다
어깨 위로 조금씩 어둠이 내려앉을 때
바위처럼 살리라
구름처럼 살리라
그러면서 산 속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 여름날 해변가는 그냥 있는데
또 다른 물결이
앞에 서서
길 떠날 준비를 한다
이제는
나무토막처럼 물 위에
떠 있을 것이다.
정말?
https://naver.me/5FmTVqSe
제7회 공초문학상
집만이 집이 아니고 / 오세영
출가出家라니
정녕 어디로 간단 말이냐.
머리 깎아 바랑 메고
산으로 간단 말이냐.
장삼 걸쳐 법장法杖 짚고
바다로 간단 말이냐.
바람 따라 향기 좇아 이른 계곡엔
도화桃花는 시나브로 꽃이 지는데
하염없이 개울물은 흘러가는데
강물 따라 소리 좇아 이른 바다엔
파도는 실없이 부서지는데
출가라니
누굴 따라 어디로 간단 말이냐.
집만이 집이 아니고
집 밖에 있는 것이 또 집인데
비로봉 만물상 곰바위 밑에
앉은뱅이 민들레나 되란 말이냐.
지리산 세석대 널바위 밑에
가지 꺾인 소나무나 되란 말이냐.
출가라니
집 밖이 또 집인데
정녕 어디로 가란 말이냐.
https://naver.me/Galq5XkE
제6회 공초문학상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들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https://naver.me/xAF6SqTz
제5회 공초문학상
달항아리 / 박제천
항아리를 보면 붕어 불러들이던 된장항아리 생각난다
항아리를 보면
잡은 붕어 내보이던 투명한 달항아리 생각난다
항아리를 보면
그 안에 들어가 숨죽이고 잠자던 관항아리 생각난다
그러다 문득 비를 생각하면,
항아리 또한 비가 된다
개여울 속 하늘 속 땅 속 어느 곳이든
내가 만든 비들은 하나같이
항아리같은 추억,
항아리같은 사랑,
항아리같은 죽음을 만든다
그런 항아리 가득 볼펜을 꽂아놓고
나는 문득 비의 자서전, 항아리의 자서전을 구상한다
청개구리가 된 부처를 받아들이는 비의 일생,
살도 정도 불에게 내어주고,
사리와 뼈만 남은 부처를
그 안에 쉬게 하는 사리 항아리의 일생
그러다 문득, 붕어라고 쓰면 붕어가 뛰어 나오고
된장이라고 쓰면 된장내 구수해지는 입체 볼펜으로
항아리 하나를 그린다,
그 안에 전생의 메모리칩이 내장된
내 항아리 하나를 하늘에 띄워놓고 흥얼거린다
달아 달아 천년만년 나랑 놀던 달아
https://naver.me/xSFoX6X2
제4회 공초문학상
호박덩이 / 김여정
어머니의 눈물이 방울방울 호박잎에 맺혀 있는 돌담길에 열세 살 어머니의 휜 고무신 한 짝이 조각배로 떠 흐르고 있었더란다. 어머니는 열세 살에 어머니의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세 오랍동생들의 어머니가 되어 호박넝쿨에 주렁주렁 슬픔을 키우며 살았더란다. 호박넝쿨에 호박이 주렁주렁 영글 무렵 열일곱 처녀 어머니는 물 설고 낯설은 아버지의 바다로 시집을 왔더란다. 밤낮으로 어린 세 오랍동생을 못 잊어 어린 명도무당의 휘파람 소리를 따라 어느 달 밝은 밤 몰래 보따리를 쌌더란다. 하지만 어린 새색시가 십 리도 못가서 아버지의 썰물에 쓸려 다시 아버지의 바다 가운데로 되돌아오고 말았더란다. 그 후로 어머니는 울타리 밑에 호박씨를 묻으며 피눈물 한 됫박씨도 같이 묻었더란다. 해마다 어머니가 심은 호박넝쿨에는 붉은 호박덩이가 사월초파일날 연등처럼 빛났더란다. 어머니의 세 오랍동생들은 어머니의 눈물이 별이 되어 빛나는 하늘을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바라보며 미루나무처럼 잘도 자라주었더란다. 어머니의 눈물의 전설에 따라 걷는 돌림길에 열세 살 어머니의 흰 고무신 한 짝이 하늘에 반달로 떠 있었다.
https://naver.me/I55BG6kj
제3회 공초문학상
낙법 / 홍윤숙
일찍이 낙법을 배워둘 것을
젊은 날 섣부른 혈기 하나로
오르는 일에만 골몰하느라
내려가는 길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어느덧 전방엔 '더는 갈 수 없음'의
붉은 표시판
석양을 등지고 돌아선 너의
한쪽 어깨 이미 어둠에 묻힌
발밑에 돌무더기 시시로 무너져내리는
아슬한 벼랑 끝에 외발로 섰다
세상에 진 빚과 죄로
몸보다 무거운 영혼의 무게
추스려 이마에 얹고
남은 한 발 허공에 건다
아득하여라
해 아래 떨어지는 모과의 향기
바람에 섞이듯 그렇게
사라지는 소멸의 착지 그
아름다운 낙하를
https://naver.me/5gFWZAww
제2회 공초문학상
꿈의 물감 / 박남수
지도위에
파란 물감을 엎질렀다.
바다에 반도가 잠긴 것은 아니다.
중간에서 동강난 분단위에
파란 물감이 엎질러져
한 색으로 파란빛을 뿜은 것이다.
오죽하면 대낮에
엉뚱한 꿈의 물감을
엎질러놓았겠는가
…반도에 물감이 엎질러져
한 빛깔이 되면 된다.
꿈의 물감이 영롱하게 드러나면 된다.
허리를 동인
분단이 덮이어 사슴도
넘나들고, 사람도 그랬으면 된다
https://naver.me/GbDWkT5O
제1회 공초문학상
석녀들의 마을 / 이형기
내 소싯적 벚꽃놀이 때는
꽃나무 밑에 서면 웅웅대는 벌들의 날개짓소리
온몸 후끈후근 닳아오른 꽃들은 그 소리에 홀려
자궁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황홀한 꽃가루받이의 집단 오르가즘
부끄러움이 없었다
오늘 이 과수원에도
만발한 사과꽃을 토플리스로 치장하고 나서서
소싯적 그때처럼 홀려대는 그 소리 기다리고 있건만
벌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다
아 활짝 열어만 놓고
아무 것도 받아들일 게 없는 그녀들의 자궁
무참한 부끄러움!
꽃들이 모두 석녀가 되어버린 마을
위생적으로 멸균(滅菌) 처리가 된 무기질(無機質) 침묵
침묵만 가득 찬 마을 한복판에
심약한 ‘레이젤 카아슨*’여사가 새파랗게 질려 있다
가을에 사과가 열지 않으면 어떡하지요?
걱정도 팔자군, 수입하면 그만이지!
* 레이젤 카슨 : 미국의 과학자이자 녹색 운동가. 『침묵의 봄』의 저자. 1964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