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월이 가까워지면 이웃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간 성원 어머니의 편지가 생각난다. "4월이면 늘 현아 네 뜰에 활짝 핀 목련과 수유리 이웃들이 그립다" 는 이야기이다. 성원 어머니는 미국에서, 나는 서울에서. 수유리 생활과 우리 집 목련에 향한 그리움이 공감된다는 것이 반가웠다.
수유리 우리 집 뜰은 20평 남짓한 작은 뜰이었지만 낮은 담장 밖에는 10m도로가 지나가고, 길 건너 앞집들은 낮게 오밀조밀 모여있어 낮 내내 햇빛이 뜰에 머물면서 꽃들을 피게 하였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는 정원수 몇 그루만 있어 남편은 먼저 목련을 구해다 심었다.
처음에는 가냘프고 남편 키보다 작은 나무였는데 해마다 무럭무럭 자라며 무성하게 가지를 뻗고 살이 찌는 듯 굻어져, 10년 세월에 어느덧 9-10m 넘게 자랐다. 인근에 있는 향나무는 사그라지며 누런 잎으로 말라가고 목련은 씩씩하게 가지를 뻗고 자라서 넓은 공간을 확보하더니 유아독존이 되었다.
봄이면 뜰에는 새싹들이 돋아나고 노란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트려 지나는 사람들에게 봄소식을 알렸다. 개나리 노란 꽃잎이 지고 연두 빛 잎이 돋을 때면 목련은 털에 싸인 꽃눈을 키우는데,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땅 속에서 물의 스물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록소록 커지던 꽃눈에서 목련이 피어나면 어느새 4월 중순이다. 흰 꽃이 구름처럼, 풀 솜을 헤친 듯이 온 뜰 안을 가득 채운다. 목련은 색깔이 다양하나, 우리 집 목련은 흰 목련으로 꽃이 피고 실하였다. 목련은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나며 순백의 색깔은 순결과 고상한 지조를 상징한다.
목련은 항상 하늘을 향해 피어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기백과 성장한 여왕의 기품을 엿볼 수 있고 귀족적이며 또한 고전적인 모습이다. 꽃이 활짝 피면 색에 매혹되어서인지 향기에 이끌려서인지 사방에서 꿀벌들이 모여들어 달콤한 꿀 따기 잔치가 벌어진다. 꽃이 질 때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
꽃잎이 사뿐사뿐이 떨어져 내리고 혹여 바람이 있어 꽃비가 되어 날려도 벚꽃처럼 몸부림치며 뒹굴지 않는다. 떨어진 꽃잎들도 바람에 함부로 뒹굴지 않고 조용히 사대부의 과수댁처럼 애처롭게 삭는다. 떨어진 꽃잎이 너무 아쉬워 주머니 속에 넣고 출근을 하면, 내가 탄 버스속이 온통 목련 향으로 가득하다.
그토록 목련은 향기가 있어 우리집 목련 향이 온 동네로 퍼져 나간다. 목련은 꽃이 지면 잎이 나오는데, 타원형의 큰 잎으로 자라서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가리워줄 뿐만 아니라 푸르고 싱싱하여 보는 이들을 시원하게 헤준다. 또 가을이면 노란 잎으로 물들었다가 귀뚜라미 우는 소슬한 밤에 "뚝뚝 뚜 드둑" 그리운 님의 발자국 소리로서 문을 열게 하고, 적막한 가을밤에 겨울이 멀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우리 집 뜰에는 봄에 개나리를 시작으로 라일락, 철쭉, 장미 등이 피고 지고 이어져 꽃이 지지 않는 정취를 안겨 주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목련을 가장 좋아했고 이웃들도 목련을 예찬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뜰 안의 나무들도 자라고 아이들도 자랐으며 우리 집은 동네에서 "목련 집" 으로 알려 지게 되었다.
초인종 소리에 뛰어 나가면 지나던 사람이 집을 팔지 않겠느냐 묻기도 하고 부동산 붐으로 법석을 떨 때도 심심하지 않게 거간들이 들르고 했다.
그러나,17년을 살고 아이들 진학문제로 집을 처분하고 강이 보이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그 집과 정원수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기가 쉬지 않았다. 특히, 소담하게 잘 자란 목련은 너무나 아까웠다.
주택이 아닌 아파트로 가는 이사여서 아쉬움을 떨쳐 버려야 했지만 그리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얼마후, 매수자가 그 집을 헐고 고층 건물을 짓는다며 제일 먼저 목련을 파냈다는 소식에 가슴이 썰렁하니 아팠다.
그 후로 수유리에 갈일이 있어 그 곳을 지나칠 때면 그 목련이 짤려 나간 우리 집이 보고 싶지 않아 딴 길로 돌아서 다니곤 한다. 목련이 필 4월을 기다리며 목련에 얽힌 추억들이 다시금 새롭게 떠오른다.
심각한 부부싸움으로 사흘씩이나 냉전을 하던 중에 남편이 퇴근하면서 뜰에 핀 목련 한 송이를 꺾어 입에 물고 패잔병처럼 두 손을 쳐들고 "유구무언"을 외치며 들어선다.
그 모습이 너무나 천진한 어린애 같아 "쿡" 웃음이 터지고 토라졌던 마음도 풀어져 부부싸움이 싱겁게 끝이 나 버렸다. 4월 남편의 생일에는 미역국 식탁 위에 작은 선물과 함께 목련 한 송이를 꽂아 놓으면 남편은 싱글벙글 흐믓해 한다. 딸들은 저희들 선물은 좋아하지 않고 엄마 선물만 좋아한다고 토라진다.
이토록 우리 가족들의 꿈과 희망을 가꾸었던 수유리 집과 목련을 잊을수가 없다. 나는 작년 8월말로 40년 가까이 몸담았던 교직 생활을 끝내고 명예퇴직을 하면서 연공상으로 목련장을 받았다.
석류장, 동백장이 아닌 목련장이 내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목련과의 깊은 연관성을 생각하게 된다. 목련은 내 삶의 터전에 밝은 꿈과 희망을 가꾸게 했고, 40여 년의 고달픈 맞벌이의 여정을 목련장으로 보상해 주었다.
이제 남은 여생의 하얀 여백에는 목련을 소재로 한 폭의 맑은 수채화를 그리며 순결한 삶으로 마감하고 싶다.
내 순결 한 삶이란 목련의 향기처럼 이웃과 화합하고 아낌없이 나를 내어주는 봉사 적 삶이라 생각한다.
무궁화는 우리나라 꽃
목련은 우리 집의
나의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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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보석
여자들 대부분은 보석상의 진열장 앞을 지날 때 안으로부터 뻔쩍이는 보석의 현람함을 외면하고 지나치는 이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개성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사림들은 보석을 좋아하며 사파이어나 루비 다이아몬드 같은 귀한 보석이 인기가 있고 그 중에서도 단단한 탄소덩이에 불과한 다이아몬드를 아주 좋아한다.
보석은 크기나 질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며 부가가치가 높아 부의 축척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보통 사람들은 결혼 예물로 이용한다. 60년대에는 다이아3부가 결혼 예물로 보통 이용 되었는데 나는 결혼 때 그것을 받지 못했다. 위 동서들이 금반지 예물로 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형제간의 형평을 위해 우리도 다이아를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아래 동서들 결혼 때는 이런 형평의 원칙이 무너지고 상대에 따라 수준이 달라져 불만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속 좁게 불평을 들어 낼수도 없어 참았다.
결혼5년 만에 남편이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결혼 때 못해준 것이 못내 미안 했던지 조그마한 다이아반지를 사들고 왔다. 빠듯한 생활비를 절약하여 이 선물을 마련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가슴이 아릿한 떨림으로 벅차 오르며 반지의 진가보다도 남편의 따뜻한 마음의 동기가 손가락을 통해 전이되는 순간, 모든 지난날의 섭함과 불쾌했던 소외감들이 섬광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후 그 반지는 나의 분신이 되어 남편의 사랑으로 소중하게 늘 지니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민방위 훈련과 소방훈련을 하던 날, 3층 교실과 운동장을 오르내리며 훈련을 지도하던 중에 알이 빠져나간 것도 모르다가 종례시간에야 발견하고 운동장으로 교실로 계단으로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분신이 찢겨나간 듯한 아픔으로 병이 나 누웠는데 늦게 귀가한 남편이 이를 알고 다음에 더 큰 캐렅짜리를 사 줄 테니 잊어버리라고 호기 있게 위로하는 바람에 남편의 깊은 사랑과 너그러운 이해심에 고마움을 느끼며 손재의 상심을 털어 버렸다. 그러나 호기 있던 남편의 약속도 수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았고 기다리는 희망도 버리지 않고 있다.
어느새 며느리를 볼 날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변변한 보석 하나가 없다. 며느리에게 대물림을 할 패물하나 없는 게 부끄럽다가도, 사는 동안 보석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도둑이 들까봐 걱정하지 않았으며 남들이 도둑에게 몽땅 패물을 잃었다고 울 때에도 홀가분 했다. 두 딸들의 결혼식을 치르면서도 사돈댁 어른들의 배려로 허례허식을 버리고 합리적으로 검소하게 치르었다. 아들의 결혼식도 검소하게 치르고 싶음엔 변함이 없어 보석에 대한 탐심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의 보석거리를 거닐면서 양쪽 진열대에서 뻔쩍이는 휘황찬란한 보석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 구경이라도 실컷 하고 싶다는 일행들의 제안이 있었지만 상점 대부분이 유대인 상가라서 선뜻 문을 열고 설 수가 없었다. 다행히 한국인의 가게가 눈에 띄어 뉴욕의 보석을 구경 할수 있었는데 휘황 찬란한 보석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기도 전에 엄청난 가격표를 읽고 위축이 되었고 번쩍이는 보석의 아름다움으로 더욱 초라함을 느꼈다. 마음을 열고 욕망을 자극시켜 주머니를 풀어내기보다 우리의 이성은 여행자로써 아까운 달러를 여비로 풀고 다니는 것조차 불황의 국가경제 속에 죄송한 일인데 보석을 사겠다는 욕망은 안 된다고 가로막는다.
전날 워싱턴 D.C의 스미스 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서 본 세계 제일의 가장 큰 다이아몬드를 감상한 것으로 보석에 대한 허영심을 채우며 만족하라고 소곤대는 것 같았다.
45.52캐렅의 푸른 다이아의 아름다움과 가치에 앞서 세계적인 보석이란 호기심에 우리는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큰 코끼리의 박제 앞을 지나 2m가 더 되는 오징어 표본을 구경하고 2층으로 급히 뛰어 올라갔다. 벌써 인파가 100m도 넘게 뻗어 있었는데 1분 이상 보면 재앙이 따른다는 경고 덕인지 인파의 줄이 빠르게 전진하여 금방 그 앞에 서게 되었다. 유리 진열장에 목걸이로 셋팅된 그 금강석은 푸른 광이 으스스 할 만큼 차가웠고, 마치 양기를 몰아내고 음기를 손짓하여 부르는 달밤의 요정처럼 빛나고 있었다.
45.52캐렅의 크기는 1캐렅만 보아온 눈에 45배의 양감을 주지 못했지만 상당히 크다고 생각했다. 1분의 짧은 순간에 생각은 매우 착찹하였다. 저 보석이 무엇이기에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탐욕자들을 재앙으로 몰고 갔을까? 저 보석의 주인이던 루이14세는 천연두에 걸렸었고 루이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폴레옹도 패망했다.
그 후 그의 어머니에게서 나온 저 보석이 탐욕의 인간을 수없이 거치다가 미국 신문왕의 부인에게까지 왔는데 그 또한 딸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마의 그 보석을 궁리 끝에 이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결심하고 우편으로 송달했는데 그 보석을 운반한 우체부까지 재앙을 당했다고 한다. 달밤에 개가 짖다가 2층에서 뛰어내려 죽었고 자신도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나 그는 이러한 일들이 결코 보석에 의한 재앙으로 보지는 안는다고 했다니 의지가 강한 사람인가보다.
스미스 소니언에 온 이 다이아몬드는 이제 탐욕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받으며 즐거움을 나누어주며 더 이상 재앙을 일으키는 요물의 보석이 아니라고 한다. 조용한 자태로 푸른빛을 아름답게 발산하면서 어느 특정인의 것도 아니고 금고 속에서 숨도 쉬지 못하는 죽은 보석도 아닌 만인의 보석으로 사랑받는데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번쩍이는 다이아 앞에서 단 일분의 소유로 만족하고 보석을 향한 한 점의 소유욕까지도 모두 떨쳐버리며, 누구나 공유 할 수 있는 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있는 거리로 나오니 햇빛은 다이아보다 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