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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이홍사
돼지국밥집에서 돌아오는데 불이 꺼진 빈집이 거대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늘 살던 집인데 낯설게 느껴졌고 들어오기가 싫어졌다. 그 순간 시 한 구절이 입에 맴돌았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잘 있거라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기형도의 빈집의 한 구절인데 생각지도 않은 그 구절이 난데없이 입에서 맴돌았다. 이미 내 것이 아닌 열망? 그래, 내 것이 아니다. 열망은 내 것이 아니었다. 동생은 없다. 동생은 죽었다. 그게 벌써 햇수로 헤아리니 구 년이다. 오늘이 동생의 기일이다. 아내와 아들 녀석은 제사를 모시러 대구로 가고 빈집이다. 그냥 단독주택이 아니라 삼 층짜리 상가건물이기에 불 꺼진 모습이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한 번도 동생의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곳에 가서 뒷전에 앉아 있으면 스스로 북받치는 설움이 감당이 안 될 것만 같았기에 가지 않았다. 매년 그랬다. 이제는 제수씨나 조카들도 의당 아니 올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오늘의 일상은 매끄럽지 못하다.
빈집에 들어오는 순간 이미 나의 정서와 영혼은 상당 부분 훼손되어 있었다. 오로지 더 우울하고, 더 짙은 농도의 고독에 깊은 갈증을 느꼈다.
사무실 경리 업무를 담당하는 여동생도 오빠 제사라고 일찍 퇴근하고 내려가고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부터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이런 날은 뭘 해야 하나 생각하니 내 행동 하나하나가 부자연스러워 아무 짓도 못 하고 막연히 앉아 있었다. 신문도, 유튜브도 보지 않았다. 그런 일들이 시들해졌다. 일 층 중장비 부품 가게, 신 사장이 퇴근하며 셔터 내리는 소리를 들었고 어둠이 완전히 건물을 덮을 때까지 미동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불을 켜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어둠 속에 막연히 앉아 있었다.
저녁을 무엇으로 해결하나, 그 생각을 했었던가?
끼니때마다 하는 그 단순한 과정이 숙제처럼 여겨졌다. 뭐든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동생이 죽고 없는데 그 제삿날 뭔가 꾸역꾸역 먹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혐오감이 일었고 그 행위가 마치 죄악처럼 여겨졌다.
아내가 없어도 나는 뭔가를 잘 찾아서 먹는 편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사무실에 내려와 신문을 보고 삼 층, 집으로 올라가면 아내가 자고 있다. 그러면 아내를 깨우지 않고 밥솥의 밥을 큰 사발에 퍼서 냉장고에 있는 달걀을 하나 깨어 넣고 고추장 한 숟가락을 퍼서 참기름을 조금 붓고 비벼서 그냥 먹는다. 그렇게 비비면 다른 반찬이 필요가 없고 달걀의 성분 때문에 매끄러운 게 잘 넘어간다. 무릇 사람은 입고 먹는 것을 간단히 해야 한다는 성현들의 말이 있다. 그 말에는 참으로 충실한 편인데 오늘의 기분은 확실히 다른 여느 날과 달랐다.
그렇게 간단히 먹는 것도 처량함의 핵심을 찌르는 행위로 여겨졌다.
누구에게 전화해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소리를 할 기분도 아니었다.
어둠이 완전히 사무실을 덮고 나서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사무실을 나섰다. 해는 졌지만, 장마가 끝난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사무실을 나서긴 했지만 정해진 목적지가 없었다. 그냥 발길이 닿는 곳으로 한 바퀴 동네를 돌아볼 심산이었다.
골목을 빠져나오니 집 앞 주유소에 훤히 불을 밝히고 공사를 하고 있었다. 여태 주유원을 쓰던 주유소인데 셀프 주유소로 바꾼다고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인부들과 기술자들은 보이는데 매일 기름을 넣어주던 주유소 사장 내외는 보이지 않았다. 그 양반들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할 것이고 어디를 가느냐고 물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별안간 그게 번거롭게 여겨져서 빠른 걸음으로 주유소를 지나쳤다.
소도시에서 담을 낮추고 살면 익명성이 두텁지 못하다. 골목을 나서면 아는 사람과 부딪치게 된다. 기분을 감추고 무슨 말을 걸어오면 대답을 해야 하고,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데 그 얕은 익명성이 오늘은 상당히 번거롭고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막상 집을 나서니 갈 곳이 정해졌다.
동네 중앙에 있는 분수공원이나 한 바퀴 돌도 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목적지를 확실히 정하지 않고 나선 길은 언제나 엇길로 들어서게 마련이다. 오늘도 그랬다. 분수공원으로 올라가다가 돼지국밥집으로 들어섰다. 혼자서 소주나 마시면서 아주 우울한 기분으로 농도가 짙은 고독을 씹고 싶은 마음에 들어선 것이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그렇게 때우는 게 마땅하겠다 싶었다.
국밥집은 한산했다.
여주인은 안면이 있는 젊은 아줌마였다.
“오랜만이네요, 혼자 오셨어요?”
“소주나 한 병 주세요.”
“안주로 돼지국밥을 드릴까요?”
“그게 좋겠죠?”
최대한 말을 아꼈다. 아끼고 싶어 아낀 것이 아니라 이미 우울해져 있었다.
국밥집에는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관심도 없고 보고 싶지 않은 뉴스가 나오고 있어서 텔레비전을 보지 않겠다는 심산에서 바로 텔레비전 아래에 있는 탁자에 앉았다, 국밥보다 소주가 먼저 나왔다. 깍두기를 안주로 빈속에 소주부터 한잔 마셨다. 차가운 소주가 울대를 넘어서 어디로 들어가는지 감각으로 선명하게 알 수가 있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였다. 의사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다. 간의 수치가 너무 높아 간이 경화되기 직전이라고 겁을 주었다. 환갑 밑자리 깔아두고 의사 말을 다 듣고 사는 놈은 삼 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간이 조금 굳은들 어떠하랴? 이미 동생은 먼저 가고 없는데, 설명은 구차하고 사실은 명쾌하다. 동생은 없다. 그런데 그따위 간, 경화? 그런 단어들이 시들하게 여겨졌다. 술은 이럴 때 마시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술을 보자 동생이 그리웠다. 동생을 불렀다. 죽은 동생이 나타났다. 동생과 대작하며 소주 두 병을 가뿐하게 비우고 나섰다. 국밥은 조금 남았지만, 소주는 깔끔히 비웠다. 살짝 취기를 느끼며 거대한 짐승의, 벌리고 있는 아가리 같은 빈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도 할 일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말복과 광복절을 하루 앞둔 방은 더운 열기로 가득했다. 창문을 열고 후덥지근한 방에 에어컨을 돌리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기분이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럴 땐 뭘 해야 하나? 한참을 생각했었다. 씻어야지. 몸에 칭칭 감기는 옷을 몽땅 벗고 욕실로 향했다. 집에 아무도 없었으므로 방에서 옷을 벗어도 무방했다. 벗은 옷을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세탁에 쑤셔 넣고 샤워를 했다. 나는 씻는데, 그리 오래 걸리는 편이 아니다. 후딱 씻고 새 팬티를 입고 방으로 들어오니 방이 조금 시원해져 있었다.
팬티만 걸치고 침대에 기대어 방바닥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여자들은 참 편리하겠다는 생각을 불현듯 했다. 이렇게 다리를 뻗고 앉아 얕은 눈물샘으로 대성통곡이나 하면 오죽 좋을까?
씻고 다리를 쭉 뻗고 에어컨 앞에 돌아앉는 건, 평소에 땀을 말린 때 자주 취하던 자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직 메리야스를 입지 않은 것이다. 나이 탓인지 운동을 덜 한 탓인지 적당히 나온 아랫배가 눈에 거슬렸다. 내 몸의 한 부분이지만 달마의 아랫배처럼 눈에 착 들어오지 않고 그 아랫배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동생은 죽고 없는데 아랫배가 나오도록 먹고 살았다니, 상당히 눈에 거슬렸다.
후딱 서랍장을 뒤져 메리야스를 찾아 입었다.
메리야스를 걸치고 같은 자세로 다시 앉았다. 평소에는 유튜브를 볼 시간이었지만 핸드폰은 침대 위에 뒹굴고 있었다.
동생은 대구의 어느 고등학교 물리 선생님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렇게 선생님이 되라고, 선생님 타령을 했는데 동생이 그 뜻을 이룬 셈인데 애석하게도 요절한 것이다. 동생은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곤 했다. 사범대를 나온 게 아니라 물리학을 전공하고 교육학을 이수했으니 물리에 대해서는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알아주는 정도로 탁월했던 모양이다. 수능을 치는 날 저녁에 교육 방송을 보면 동생이 나와 물리에 대한 문제 풀이를 하는 것을 화면으로 볼 수가 있었다. 그 정도로 유능한 물리 선생님이었다. 동생이 죽고 나서부터 그 문제 풀이를 누가 하는지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꼭 기일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그 동생을 생각하면 바람이 앞가슴으로 들어와 그대로 관통하여 등으로 빠져나가곤 했다. 속옷 바람으로 에어컨 앞에 퍼질러 앉아 있으니 오늘은 정도 심하다. 돌아앉아 있으니 에어컨 바람이 등으로 들어와 앞가슴으로 빠져나갔다.
술이 좀 취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맨숭맨숭하다.
동생은 뜻하지 않은 시간에 나를 두 번이나 찾아왔다.
한 번은 초등학교 사 학년 때였다.
그날의 일은 나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물론 담임 선생님의 이름과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면 단위이지만 상당히 컸다. 한 학급에 육십 명씩 배정해서 한 학년에 육 반까지 있었고 이천 건아라고 했었다. 그런데 일곱 살짜리 동생이 내가 있던 교실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모르겠다. 지금 일곱 살이면 유치원을 다니겠지만 당시에는 유치원이 없었고 어머니가 동생에게 이름 정도는 쓸 수 있도록 가르친 게 전부였다. 아무튼, 이 교시를 마치고 한참, 수업을 받고 있는데 복도에서 까치발로 창 너머를 보고 누가, 형아, 하고 소리쳤다. 돌아보니 눈이 마주쳤는데 동생이었다. 순간적으로 왜 그랬는지 눈물이 울컥 돌았다. 집이 가까운 게 아니었다. 십리 길이었다. 그 먼 길을 동생은 혼자서 타박타박 걸어서 학교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담임 선생님의 배려로 동생은 교실에 들어와 교실 뒤에 있던 여분의 의자를 가져다가 내 옆에 앉았다. 동생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내 옆에 앉아 조용히 선생님의 눈망울만 쳐다보았다. 아마도 그날 수업은 사 교시 끝이었던 모양이다. 사 교시를 마치면 급식이라고 강냉이 빵을 주는데 동생 몫으로 하나를 더 받았다. 그전에도 강냉이 빵을 받으면 반은 먹고 반은 연습장의 갱지를 찢어서 싸서 동생에게 갖다주곤 했는데 동생은 빵이 식은 것보다 따뜻한 것이 훨씬 맛이 좋다고 했다. 당시에는 빵을 함석으로 된 양동이에 담아서 가져왔는데 동생은 친구들에게 다 돌리고 남은 빵을 하나 더 받았다. 아마도 남은 빵에 눈독을 들이자 담임께서 주신 모양이다. 시키지 않아도 동생은 강냉이 빵을 두 손으로 들고 담임 선생님께 고맙다고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했다.
“왜 학교까지 왔어?”
동생의 손을 잡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내가 물었다.
“형아! 나도 내년이면 학교에 가는데 학교가 어디인지, 형처럼 우등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알아야지.”
일곱 살짜리 동생은 당시에 우등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동생의 손에는 종이로 싼 강냉이 빵이 들려있었다. 어서 먹으라고 했지만, 집에 가서 여동생에게 준다고 십리 길을 그 빵을 들고 돌아온 기억이 난다.
생각하면 짠하다.
그다음에 불쑥 찾아온 것은 내가 군에 있을 적이었다.
해안경계병으로 배속된 나는 부산에서 근무했었다. 해안경계병은 위수지역이 넓어 본디 분대 단위로 생활한다. 많으면 한 소대이고 적으면 분대 단위다. 그런데 동생이 분초까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아마도 토요일이었지 싶다. 학교를 마치고 바로 왔는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그대로 들고 대구에서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또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려서 작전 도로를 걸어서 찾아왔는데 정확히 찾아온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 분초에서 막내였다. 층층이 선임들이 있었는데 참으로 난감했다. 분초로 바로 찾아왔으니 면회가 아니었다. 외출이나 외박을 나가기에는 절차가 너무 번거롭고 까다로운 위치였다.
“어떻게 왔냐?”
“갑자기 보고 싶어서 형님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동생의 입에서 나온 호칭은 변해 있었다. 그때까지 형아! 라고 불렀는데 형님으로 변해 있었다. 좀 서먹한 거리감은 있었지만 그게 마땅하다 싶었다. 그때가 석양이 질 무렵이었으니 분대장이 근무조를 편성하던 시간이었을 거다. 동생은 잠깐 보고 돌아간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분대장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시간에 대구까지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고 늦은 시간이었다.
“너? 오늘 여기서 근무를 확실히 배우고 가라.”
생각지도 않았는데 분대장은 호의를 베풀었다.
해안경계병은 밤에 매복을 서고, 다음날 오전이 취침 시간이다. 분대장은 근무조를 바꾸어 나를 탐조등 근무로 바꾸어 주었다. 선임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양해를 해주었다. 분초는 가족적인 분위기로 현역병이 겨우 여덟 명이 근무했고 나머지는 부산 인력의 방위병이었다. 방위병은 주야간으로 나뉘어 출퇴근했는데 경계근무는, 방위병 하나에 현역 하나, 이인 일조로 매복에 들어갔고 탐조등을 맡은 병사는 수시로 불을 바다에 비추어 매복 근무자가 바다의 상황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매복 근무보다는 탐조등 근무가 편안했다. 그래서 말년 병장이나 선임들이 도맡아 서는 근무였다. 탐조등은 바로 분초의 숙소 위 옥상에 설치되어 있었고 지붕은 위장막을 덮어져 있어 밤이슬을 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매복 근무는 옆 사람과 얘기를 할 수가 없지만, 탐조등은 아니었다. 옆 사람과 두런두런 대화를 할 수가 있고, 방위병을 시켜 물이나 건빵을 가져오게 할 수가 있었다. 축구라도 하는 날이면 방위병 혼자서 근무를 서게 하고 숙소에 들어가서 텔레비전을 잠깐 보다가 나와도 무방한 근무였다. 또 근무를 가장 늦게 들어가고 제일 먼저 끝이 나는 게 탐조등 근무다. 해안경계병은 아침 점호가 없다. 근무가 끝이 나는 대로 상황실에 알리고 취사장으로 내려가 아침을 먹고 바로 잔다.
동생이 왔던 그 날은 탐조등 근무를 셋이서 섰다. 말이 셋이지 방위병에게 탐조등을 돌리게 하고 탐조등 뒤에 동생과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서 무슨 이야기인지는 지금은 기억에 없지만 밤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안경계병은 조식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근무가 끝나는 시간이 아침을 먹는 시간이다. 밤샘 근무를 했기에 속이 쓰린 관계로 새벽밥을 먹고 잔다. 취사병은 근무에서 열외다. 대신 새벽 세 시가 되면 일어나 밥을 한다. 모든 게 자율이다.
동생이 왔던 그 날은 탐조등 근무를 서둘러 마치고 동생을 데리고 취사장으로 내려가 아침을 후딱 먹고 내무반에 나란히 누워 잤다.
“형님! 군대 생활, 괜찮은데?”
자려고 침상에 누웠는데 동생이 모포를 살짝 들고 재미있다는 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군대는 계급보다 보직이야. 자라.”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동생과 함께한 마지막 잠자리였다. 그 후로 동생도 대학에 들어가면서 객지 생활을 했었고 나도 일을 따라 타지로 돌아다녔으니 같이 나란히 잔 기억은 없다.
그날 오전에 자고 점심을 먹고 동생은 돌아갔다. 해안경계병의 오후 일정은 교육인데 고작 여덟 명이 무슨 교육을 하겠는가? 그 시간이면 운동이라며 방위병 한두 명을 끼워서 족구나 배구를 하다가 근무조를 편성하고 근무 준비에 들어간다.
분대장인 선임은 동생이 와서 자고 가기는 처음이라며 선임들에게 얼마씩 갹출을 했는지 동생에게 차비에 보태 쓰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며 여비를 주고 어깨를 툭 쳐주었다. 동생의 책가방에는 선임들이 서로 자기 동생이라면서, 건네준 건빵이 가득 들어 있었다. 교복을 입은 동생은 모자를 고쳐 쓰고 분대장에게 고맙다고 충성을 큰소리로 복창하며 거수경례를 했고 나는 버스 종점까지 작전 도로를 따라 나가서 배웅했다. 당시에는 시내버스에 차장이 있던 시절이었다. 동생은 어디서 갈아타고 부산역으로 가는지 차장에게 묻고 버스에 올라 손을 흔들고는 거수경례를 붙였다.
떠올리니 그날이 엊그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살아났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인가?
짚어보니 삼십 년이 훌쩍 넘은 일인데 선명하게 떠올랐다. 버스 좌석에 앉은 동생의 약간 상기된 얼굴이 눈에 짠한데 벌써 그 세월이라니.
방이 어지간히 시원해졌다. 속옷 바람으로 앉아 동생을 짚고 있으니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겠다. 동생이 죽을 당시에 대학에 입학했던 조카가 벌써 다음 달에 결혼한단다. 동생은 없지만 어렵게 키워 제수씨도 이제 시어머니가 된다. 이런 걸 세월이라고 하는가?
세월을 참 허망하다고 생각을 하는 그때 침대 위에 던져둔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보니 아내였다.
“저녁은 자셨어요?”
“대충 때웠어.”
“집이에요?”
“응, 집이야.”
“잠깐만요.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시는 제수씨가 바꿔 달래요.”
제수씨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집안에서 가장 무섭고, 대하기가 어렵고, 조심하는 대상이다.
“잠깐만, 옷이나 좀 걸치고.”
아무리 전화지만 속옷 차림으로 제수씨 전화를 받을 수는 없다. 그런 결례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전화를 놓고 후딱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다시 전화를 받았다.
“아주버님! 저녁은 자셨어요?”
제수씨의 목소리는 의외로 밝고 경쾌했다.
나에게 그렇게 들리려고 노력하는 티가 역력했다. 순간적으로 그게 더 울적하게 만들었다. 저녁을 먹었다고 하니 너무 우울한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했다.
빈집에 혼자 남은 내가 걱정되어 전화한 모양이다. 술이나 마시지 않을까, 비탄에 젖어 있지 않을까, 염려되었던 모양이다.
“아주버님! 기분 울적하다고 술 자시지 마셔요. 큰일 납니다. 그리고 일찍 주무셔요. 걱정하시지 마시구요.”
“예! 알겠습니다.”
제수씨의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잠시지만 긴장을 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제수씨는 그렇게 어렵고 무섭고 긴장을 하는 대상이었다. 어쩌다 제수씨가 집에 오면 맨발로 있다가 양말부터 찾아 신는다. 동생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 생각을 하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니, 가능하면 그 생각은 하지 말기로 하자. 결과는 동생이 죽었다. 마흔여섯의 젊은 나이에. 제수씨가 무섭다. 동생이 죽고 나서 그 정도가 심해졌고 젊디젊은 제수씨가 혼자 잔다고 생각을 하니 아내와 합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각방을 쓰고 있다. 아내도 버릇이 되어 그게 편하다고 했다. 친구들에게 그 얘기를 하니 너무 소심하다고 했지만 늘 제수씨 걱정이다.
제수씨는 집안에 조그만 일만 생겨도 나에게 상의를 한다. 무남독녀로 자란 제수씨는 홀어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신다. 돌아가시면 제수씨의 일이다. 제수씨는 사촌들도 없다. 오로지 기댈 곳은 나 뿐이다. 결국 내 일인 것이다.
제수씨를 동생보다 내가 먼저 알고 지냈다.
절에 올라가는 길을 확장 공사를 하면서 연줄이 되어 다니는 절이 있다. 그 절의 신심이 깊은 보살님의 외동딸이었는데 가끔 행사가 있으면 절에 나타나기도 했다. 말수가 적고 얌전했다. 참, 참한 처녀라고 생각하고 무엇을 하는 처녀인가 알아보았더니 초등학교 행정실에 근무하는 처녀였다.
결국 스님과 아내가 다리를 놓아 동생을 만나 아들 둘을 낳았다.
절에서는 평소에 이름을 불렀는데 그 어려운 제수씨로 둔갑을 한 것이다. 나도 나이가 있어 그 절의 신도회장이 죽고 그 직함을 내가 물려받을 정도로 나이가 들었고 절 살림이나 불사에 신경을 쓰고 있다. 물론 동생이 죽고 나서 천도와 사십구제를 그 절에서 모셨다. 지금도 집에서만 제수씨를 만나는 게 아니라 그 절에서 행사가 있으면 제수씨를 만나는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제수씨를 보면 살아 있는 게 죄악처럼 여겨져 송구할 따름이다.
아내에겐 무기가 있다.
내가 뭘 잘못하면 제수씨에게 일러바친다는 말을 곧잘 한다.
그게 아내가 지닌 최대의 무기고 나의 약점이다. 아내는 그 말을 교묘히 이용한다. 무슨 일이든 제수씨 얘기가 나오면 나는 꼬리를 내린다.
가만히 생각하니 동생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나를 찾아온 적이 또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어서 근무하다가 어느 토요일 내가 당시에 살던 열세 평 주공아파트로 찾아왔다. 짚어보니 그때가 동생은 결혼하기 전인 총각 선생님 시절이었지 싶다. 아니다. 제수씨와 연애 기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에 나에겐 자가용 승용차가 있었다. 동생은 면허를 갓 받은 초보였는데 내 차를 끌고 오밤중에 현장으로 찾아왔다.
그날은 현장에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있었다.
송정동의 어느 연립주택 지붕을 타설하고 있었는데 당시에 레미콘이 부족하여 ‘멧돌믹스기’라고 불리는 재래식 기계를 놓고 인력으로 강행하는데 날이 저물었다. 콘크리트는 치다가 날이 저물었다고 중단할 수가 없다. 그러면 먼저 친 것과 다음날 친 것이 결합이 되지 않아 비가 샌다. 일단 시작하면 무조건 끝을 보아야 하는 공정이다. 시멘트를 가져다 놓고 모래와 자갈을 받아서 굴착기로 퍼서 기계에 넣어 돌려서 윈치로 감아올려서, 위에서는 손수레로 받아서 콘크리트를 치는 작업이었는데 옥상이 평평하지 않고 지붕에 각도를 주어서 손수레를 이용할 수가 없고 양동이로 받아서 나르니 공사가 더디었다. 애초에 그 시간에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작업이었다.
내가 퇴근하면 한잔하겠다고 밤 열한 시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서툰 운전 솜씨로 나를 찾아 나선 모양이었다. 인부들은 시멘트 가루를 뒤집어쓰고 어두컴컴한 곳에서 일하고 있는데 와서 보니 그런 현장은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인부들은 온통 시멘트에 범벅이 되어, 일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짠했던 모양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윗도리를 벗어 놓고 시멘트를 날라주었다. 그렇게 한다고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공사감독이 내 동생이라는 걸 알고 그만두라고 만류했고, 나는 동생을 보고 기다리지 말고 들어가서 자라고 했다.
아마도 그날 일은 새벽이 뿌옇게 밝아올 때쯤 끝이 났지 싶다.
난공사였다.
다음날은 모든 일을 하루 미루고 쉬자고 합의를 보고 마지막 정리를 느긋하게 하고 일을 마쳤다.
아마도 동생은 그렇게 일을 하는 모습을 처음 본 모양이었다. 정신적으로 약간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다음날 동생은 점심을 먹으며 그렇게 일을 하는 인부는 하루에 얼마를 받느냐고 물었다. 인부들은 일당이 아니었다. 전부가 공동 사업자다. 그 사람들 가운데 굴착기를 조종하는 나만 일당으로 받고 나머지는 한 달간 공사를 하여 이윤을 다 나누어서 가져간다고 했더니 한 달에 얼마쯤 버느냐고 물었다. 나는 동생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내 일당보다 많을 것, 이라고만 했다. 그래야 동생의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다.
“세상에 그렇게 일하는 사람도 있구나. 그렇게 일하면 그 정도는 가져가야 마땅하지.”
굴착기 일당보다 많다는 말은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게 학교 선생님들이라는 말이 있다. 동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벌어서 아이들 공부 시키느라. 열심히 가르쳐라.”
그날 내가 그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자기 일을 열심히 할 때 인간은 가장 보기가 좋다는 말은 아마도 했던 것 같다.
빈집에 홀로 담겨 동생을 더듬고 있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가고. 동생을 돌이키는 것조차 나에겐 아픔이었다.
생각이 난다. 동생은 마지막 병석에 누워 전화했다.
“낙안읍성에 한 번 갔으면 좋겠어요. 아이들 데리고.”
동생의 목소리가 귀에서 이명처럼 살아났다.
기억에서 희미한 일인데 동생은 그게 문득 생각났던 모양이다.
그 옛날 형님과 전라도를 돌았던 것처럼 그렇게 한 바퀴 돌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날 전화를 한 요지는 그것이었다. 동생 가족과 승용차를 두 대에 나눠타고 사흘에 걸쳐 전라도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일종의 가족여행인 셈이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적이었는데 낙안읍성에서 장작으로 군불을 지폈으니 아마도 겨울방학이었지 싶다. 구례 화엄사를 거처 선운사, 송광사를 둘러보고 낙안읍성에서 자고 목포로 가서 회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형님! 길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요?”
내 차가 앞장을 서고 동생 차가 뒤를 따랐다. 당시에는 내비게이터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병석에 누워 동생은 그게 생각났고, 그렇게 좋았던 시간으로 기억이 났었던 모양이다.
빨리 나아서 그렇게 돌자고 흔쾌히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다.
낙안읍성을 다시 가보지 못하고 동생은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죽은 동생은 선산의 아버지 발치에 묻었다.
동생을 그곳에 묻지 않았을 때는 자주 선산에 혼자 갔었고 혼자서 벌초나 풀을 뽑곤 했는데 동생을 묻고 나서는 선산에 혼자 가지 못한다. 나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혼자서 가면 전율이 일고 스스로 감당이 안 되기에 꼭 아내나 아들 녀석을 데리고 간다. 동생에 보내고 나에게 일어난 변화 중의 하나다. 어쩌다 선산에 가면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여 동생에게 건네는 것이 고작이다. 죽은 동생에게 살아있는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이지 빈약하다.
이 빈집에서 정말 동생에게 해줄 일이 없다.
제수씨는 마음을 쓰지 말고 일찍 자라고 했지만 잠이 쉽게 올 것 같지 않다.
지금쯤 장만한 음식을 진설하겠지. 조율이시, 홍동백서, 가야산해. 조율이시와 홍동백서는 들어보았겠지만 가야산해는 아는지 모르겠다. 가家, 집에서 나는 것, 야野, 들에서 나는 음식, 산山, 산에서 채취한 나물, 해海, 바다에서 구한 음심. 그것을 왼쪽에서부터 진설해야 하는데, 제사상이나 제대로 차리는지 모르겠다. 하긴, 어떻게 차린들 무슨 소용이랴. 동생이 와서 먹겠는가? 그저 살아있는 사람들 마음을 달래는 의식이지.
울적한데 절에나 가볼까?
법당에 가서 백팔 배를 올리고 주지 스님과 동생 얘기를 하며 보이차나 한 잔 마시고 올까? 엄밀히 따지면 주지 스님이 동생의 중매를 서신 분인데, 오늘이 동생 기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계실 것이다. 아서라, 정신은 말짱하다지만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는데 운전을 할 수가 없는 문제다.
그럼 스님께 전화해서 전혀 엉뚱한 얘기를 하며 심란한 마음을 달래볼까? 어쩌면 위안이 될 수도 있겠다.
침대 위에 던져둔 핸드폰을 들었다.
스님의 전화번호는 찾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스님의 전화번호는 단축으로 저장되어 있다.
단축 번호를 길게 눌렀다.
*고객께서 지금 전화를 받을 수가 없어서*
신호도 가지 않고 안내 음성이 기계음으로 나왔다.
저녁 예불 시간인가?
아마도 그런 모양이다.
꼼짝없이 울적한 마음으로 빈집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잘 있거라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난데없이 또 빈집의 한 구절이 입에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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