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기분과 봄
박정인
명자꽃이 페트리코*를 처음 맡은 날
긍정문에 쓴 자제력은 나에게 가혹했고
부정문에 쓴 나의 비문非文은 흙 묻은 명자꽃처럼 부끄러웠다
후레쉬민트를 궐련처럼 되새김질하며
검지로 폭폭 눌러 우편물의 절취선을 뜯었다
보내온 책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밍밍한 오후 네 시에는 오래된 결별과도 헤어지고 싶었다
오죽하면 내가 나를 간질여봐도 간지럽지 않았을까
노을이 봄비에 불어 터질 때에야
시야가 조금씩 트이는 듯했다
시래기처럼 늘어진 커튼을 열기보다
감옥을 참아내는 편이 쉬울 거란 생각
비 맞는 벚나무에게
연인들의 탄성이 위로가 되는 것처럼
한 번 만나기로 약속한 헤어진 애인에게서
확인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약속은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
페트리코 : 비가 오기 시작할 때 마른 흙이 젖으면서 공기 중에 퍼지는 냄새
폭설
-고 이선균 배우를 애도하며
우리들 애인은 아름다웠다
부암동 산복도로에 밤이 내리면
커피프린스* 지붕 위에 해맑은 얼굴 하나 떠오른다
우리의 관심이 경계를 넘어설 때도
그는 유리알 같은 웃음을 흘리며 걸어 다녔다
애인을 탐내는 붉은 입술들
누군가와 손을 맞잡을 때
따뜻한 체온이 번지는 것처럼
한 사람의 멋도 나눌 수 있는 걸까
지리멸렬이 콘크리트 벽을 에워싸던 날
그의 발길이 임계점을 넘었다는 소문이 들리고
카메라 플래시가 진위의 안팎을 휘저었다
사실보다 번식이 빠른 말들
담담한 표정을 한 그가 속으로 구겨 넣은 건 무엇일까 번지는
흠결이 삶보다 싫어서 애인은 자신을 구겨버렸다
아름다운 그의 흔적들은 살아남은 자만 누릴 수 있는 서가에 보관되고
목 잘린 국화꽃 사이에서 질문의 시간은 계속해서 자라났다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그의 백서는 부끄러운 수술처럼 해부되었다
슬픔은 아쉬움보다 빨리 낡아서
반짝이는 그의 비늘 짜파구리만
여전히 우리를 군침 돌게 할 뿐
지난겨울 자동차 속 그의 사건은 한반도에 내린
광역성 폭설이었다
*
종로구 백석동길 153 번지. 고 이선균 배우가 출연한 드라마 <커피프린스> 촬영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