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때 의협에 회의가 있어 도시락을 먹으면서 회의를 마친 후
용산역 앞에서 지갑도 수리할 겸 찾았더니 그 구두가게는 없어지고
앞의 건물들만 번듯한 체 나머지는 철거가 되고 있다.
이 앞에는 내가 자주 갔던 바싹 불고기로 유명한 '역전회관"이 있었으나
지금은 마포에 둥지를 틀고 있다.
창녀촌은 완전히 없어지고 임시 파출소가 들어서 있다.
여기의 포주도, 환자도 내 환자.
학교 강의가 있어 흑석동 캠퍼스로 가려면 용산병원에서 나와 한강쪽으로 좌회전이 안되기 때문에
어쩌다 큰길이 막혀 살짝 이 길로 들어가면 누가? 90도로 인사를 하여 나를 당황케 하였었지.
신세를 비관한 창녀가 한번 응급실에 빙초산을 먹고
우리 응급실로 왔는데 pH가 7이하로 급성신부전이 속발하여
겨우 이틀만에 사망하였는데 우리 병원 영안실에 그 동네 문상객들이 대거 몰려왔었다.
내가 진료부원장일 때 일어난 사고로 금요일 오후에 이 동네환자가 이비인후과 수술 후 환자가 깨어나질 않고
결국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나중에 수천만원으로 합의 한 일도 있었다.
그러니 내가 이 동네에 알려진 인물.
이 골목이 원래 유명한 곳이었다.
쇼윈도우에 여자들이 벌거벗고 나와 앉아서 눈웃음을 치고 있고
길에는 팸프가 길가는 사람들을 불러 들인다.
이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은연중에 들어갈 수 있는 잠재적인 고객이므로.
원래 용산역은 군용열차의 종착역이자 시발역으로 병사들이 입영할 때나 휴가 나올때
거치는 곳이므로 약간 질이 떨어지고 가격(?)이 싼 곳이다.
언젠가 부산에 갔다가 밤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병원에 차를 두었기 때문 처와 같이 택시를 타고 이 골목 옆을 지나는데
불 밝은 쑈윈도우에 새벽까지 장사하는 걸 보고 처가 질겁을 하였었다.
포크레인 뒤로는 붉은 벽돌의 베링거 제약이 있었다.
이 자리가 용산 철거 화재 참사가 난 그곳이다.
그 전날 내가 병원 식구들에게 무얼 사 주려고 용산역의 이마트에 가려고 이 길 앞을 지나다가
던지는 돌멩이와 화염병을 피해 운전을 하고 난 다음날 아침에 참사는 벌어졌다.
여기는 우리들이 한번씩 일차로 가는 "놀부 부대찌개,
"레아"라는 이차를 가는 맥주집이 있었고 여주인의 남편은 철거민 대책위원회 주 멤버로 지금은 구속되어 있다.
그 후 저녁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인가 뭔가 하는 자들이 미사를 보고 있었다.
앞에 "스텔라"라는 왕년에 맥주를 cc로 팔고 테이블마다 꼭지가 있어 만 cc가 되면
온 홀에 불이 번쩍하고 음악이 흘러 나와 깜짝 놀래게 하는 집이었다.
"누굴까?"
당연히 우리 테이블의 내가 보스로 애들을 데리고 맥주를 마시러 갔을 때.
그 사이에 들어 선 건물들
아는 구두가게에 들리니 아줌마가 반가워한다.
간단하게 지갑을 붙이고는 "그냥가세요"
부부가 하는 구두가게인데 언젠가 손세척제를 가져다 주었더니 좋아고 하여서 인가.
이 골목에도 한 양반하는 일직 남씨가 IMF의 된서리를 맞고 산업디자인을 하다 채린 "두레"가 있었고
철거 말이 나오기 전 일본에 음식 공부하러 간다며 일본에 갔다.
그 아래에는 "청운"이란 솥뚜껑 삼겹살과 수육을 하는 집과
대방동으로 옮겨간 "가마솥 손두부"도 있었다.
내가 84년 7월부터 근무를 하였던 용산병원
2011년 3월까지 있었으니까 27년간 이었구나.
그러니 나의 한창인 4십대와 5십대를 보낸 애환이 서린 곳이다.
병원 앞 정원의 나무는 무성하고 담쟁이는 줄기를 뻗어 붉은 벽돌벽을 싸고 올라가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벽돌 군데 군데 총알 자국도 보인다.
병원 지하실에는 전쟁시 시신을 쳐 박아 두었다 한다.
철망으로 해 놓은 사이로 응급실이 보인다.
길바닥에는 잡초들이 자라고 있고.
저 건물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인가 하는 표지도 있었다.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이란 표지를 떼어낸 자국은 아직 그대로이고.
뒷문이다. 안에는 누가 던져놓은 쓰레기들.
또 다른 문, 그 옆은 영안실이다.
병원을 바깥에서 한바퀴 돌아본다.
웬지 서글픈 생각이 들어 학교 앞 가게에서 목도 마르고 해서 캔맥주 하나를 사서 시원하게 마신다.
가게 아줌마랑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84년부터 근무를 하였다 하니까 자기 가게는 87년부터 문을 열었다며
우리가 병원을 떠난 후 이 동네 경기가 다 죽었다고 철도청을 원망한다.
자주 갔던 중국집
역시 우리가 갔던 고기집
이 집은 양과 토시살이 유명한 곳이다.
갈치조림과 고등어 조림이 맛있었는데.
저 문뒤로 제일 좋은 자리에 나의 고정 주차공간이 있었다.
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나와서는 "교수님'한다.
마음씨 좋은 주인 아줌마로구나.
더운데 들어와서 찬 수박이나 드시라면서.
그래, 이 집도 나의 단골집이었다.
한번 여기서 번개모임이나 할까요?
첫댓글 추억 여행(?) 잘 보았습니다. 용산쪽의 산 증인이십니다. 병원이 떠났는데도 식당을 그냥 하시는 분들은 수입이 많이 줄었겠습니다. 재빨리 다른 곳으로 이전한 분들도 계시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