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토록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지루한 장마의 끝을 생각한다.
와중에 장마철을 알리는 수국꽃이 피었다.
작년에는 꽃을 피우지 않아 애를 태웠고 마음 한 켠이 허전했다.
개인적으로 수국꽃을 좋아한다.
꽃망울을 들여다보며 꽃이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기원하는 것도 좋고
땅의 토질에 따라 각각 다른색으로 피어나는 것도 마음에 든다.
어쩌면 어떤 환경에 처해 있어도 스스로 적응하여 제 주체성을 갖고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꽃이 아닐까 싶어
비오는 아침 뜨락으로 꽃들을 보러 나갔다...어차피 비가 와서 숲속 산책을 어려운고로.
그런 수국을 바라보면서 한컷, 어제 기분좋은 소식을 들려준 지인을 생각했다.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만의 철학과 원칙과 소신과 바름을 갖고
어떤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꼿꼿하게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켜내며 사회생활을 하는 친구다.
그런 인생 후배 친구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씩씩하게 이 험한 세상을 잘도 헤쳐나갔다.
누군가 밀거나 잡아당겨서 흔들어대어도 제 자신의 뿌리를 굳게 딛고
온갖 험로에도 이를 악물고 흔들리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참으로 의연하게 헤쳐나간다.
곁에서 보기에 힘든 여정을 헤쳐나가느라 애쓰는 모습을 보자면 안타깝고 마음 쓰여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 털고 일어나는 그런 친구다.
그 인생 후배 친구가, 늘 지인이라 불리우는 그 친구가 어제부로 오랜 사면초가의 위기를 극복하고
드디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한발 나아가 발걸음을 떼고 힘차게 한발을 내디뎠다.
차후에는 그야말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무한 무궁의 능력을 뽐내게 될 것이다.
그 친구에게는 늘 희망이라는 단어가 함께 했다는 사실이 고맙다.
언제든 일어설, 도약할 준비를 하며 차후를 기다리는 모습도 보기에 좋.았.다
그런고로 오늘, 쥔장의 몸과 마음이 한 없이 즐겁다.
더불어 요즘 시류에 왈가왈부 되는 이슈에 걸맞는 글 한자락을 옮겨온다.
************************************************
■ '기본소득 대 전 국민 고용보험'/ 김만권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치열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기본소득이냐, 전 국민 고용보험이냐.’
이전엔 여간해서 귀 기울이지 않던 제도들이 논쟁 테이블에 올라왔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해 수많은 예측과 이야기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이 논쟁이야말로 가장 실질적이고도 생산적이라는 생각이다.
그나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에 발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두 제도 중 한쪽 편을 들 의도는 없다.
그 어떤 것이라도 시행된다면 지금보다 나은 세상이 될 것이다.
다만 이 두 제도를 지탱하는 분배의 근거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점은 밝혀두고 싶다.
전 국민 고용보험이 ‘일하는 자만이 자격이 있다’는 노동중심적 발상이라면,
기본소득은 ‘누구나 실질적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권리중심적 발상에서 나온 제도이기 때문이다.
실제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는 노동의 성격이 그 위계질서를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19는 노동이 단기고용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세계에서 공무원과 비공무원,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이 간단한 구분이 얼마나 차이 나는 삶을 만드는지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이 세계에선 팬데믹에도 40대의 누군가는 콜센터로 출근하기 전 이른 새벽에 녹즙 배달을 하고,
20대의 누군가는 오전에 슈퍼마켓 배달을 한 뒤 음식점으로 출근해 새벽 3시까지 근무를 한다.
은퇴 연령을 넘은 노인들도 백화점 지하 폐기물 처리장에서 하루를 온전히 노동으로 보낸다.
코로나19 확진자들이 보여준 평범한 일상의 고단한 동선이다.
그런데 이런 동선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해고의 앞 순위에 배치되고 있는 것이 지금 노동시장의 현실이다.
그러니 전 국민 고용보험이 대책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고용보험의 현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고용보험 밖에 있는 노동자는 1300만 정도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난 이후 재계의 반응을 보라.
재계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고용보험률 인상에 명백히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더하여 노동에 대한 각종 규제를 풀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현실만 본다면 전 국민 고용보험 역시 기본소득만큼이나 갈 길이 멀다.
둘째, 고용보험의 불충분성이다.
단기노동이 증가하는 현 상황에서 실업급여 수급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2019년 10월1일 이후 기준)
이직일 이전 18개월간 피보험 단위기간이 180일 이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기간이 1년 미만일 경우 최대 120일까지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10년 이상이라 해도 혜택은 최대 270일에 불과하다.
한편 현재 실업급여 수급기간 중 재취업률은 3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반면 기본소득은 급여의 대가로 노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20세기 이후의 기본소득은 소수의 노동으로 다수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탈산업사회에 대비해 왔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 이 탈산업사회에선 필연적으로 상당수 사람들이 안정적인 노동을 할 수 없는‘노동의 위기’가 일상화되어 있다.
많은 비판과 반대가 있었음에도 사실상 기본소득의 형식을 취한 재난소득이 효과를 발휘한 이유는
이 제도 자체가 ‘노동의 위기’를 상정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노동하는 자’란 자격 대신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이란 자격만을 요구한다.
물론 기본소득에는 막대한 재원이 든다.
5000만명을 기준으로 매해 10만원당 60조원가량이 필요하다.
20만원만 지급해도 120조원가량의 재원이 들어간다.
기본소득을 지지하지만 ‘지금 당장 실시할 수 있다’는 식의 과장된 말을 삼가는 이유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길 하나는 분명하다.
이제 노동중심적 분배라는 전통적 구조에서 벗어날 준비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을 통해 신분중심적 분배가 종말을 맞았듯이, 제4차 산업혁명과 그린 뉴딜 등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 세계는 노동중심적 분배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다.
도래하는 변화 속에서 계속 노동중심적 분배를 유지한다면,
인천국제공항에서 노동시장 내 진입과 서열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쟁처럼
혐오와 차별로 가득 찬 공정성 시비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기본소득을 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제 틀에 박힌 ‘노동’이란 기준에서 벗어나 ‘탈노동적 분배제도’ 구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김만권/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