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8일
마태오 1,18-24
예수님께서 견디지 못하시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옛날에 세 자매를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 자매는 모두 예뻤으나, 그들은 제각기 한 가지씩 결점이 있었습니다.
큰딸은 게으름뱅이이고, 둘째 딸은 훔치는 버릇이 있고, 셋째 딸은 험담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한편, 아들 삼 형제를 둔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세 딸을 모두 자기네 집으로 결혼시키지 않겠느냐고
청해 왔습니다.
세 자매의 아버지는 자기 딸들이 가지고 있는 결점을 그대로 말하자 부자는 그런 점은 자기가 책임지고 그것을 고쳐가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 자매는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시아버지는 게으름뱅이 첫째 며느리에게는 여러 명의 하녀를 고용해 주었고, 남의 것을 훔치는 버릇이 있는 둘째 며느리에게는 큰 창고의 열쇠를 주어 무엇이든지 갖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을 헐뜯기를 좋아하는 셋째 며느리에게는 매일 같이 오늘은 험담할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느 날 친정아버지는 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여 사돈집을 찾아갔습니다.
큰딸은 얼마든지 게으름을 피울 수 있어 즐겁다고 말했고, 둘째 딸은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셋째 딸은 시아버지가 자기에게 관계를 꼬치꼬치 묻기 때문에 귀찮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셋째 딸만은 부잣집의 며느리로 들어가서도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남을 험담하는 버릇은 인간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이 고쳐지기 전까지는 절대 좋은 며느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만은 뱀이 일으키는 감정입니다.
불만을 품고 남을 심판하면 이미 뱀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를 부정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약혼자인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남몰래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는 버림받은 여자가 되고 요셉은 임신시켜놓고 약혼자를 버린 몹쓸 인간으로 낙인찍힙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이 결단의 순간에서 요셉은 자신을 배신한 마리아를 위해 자신이 죽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나도 용서받은 사람이기에 남의 죄도 뒤집어쓸 수 있어야 ‘의로운 인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다 뒤집어쓰고 돌아가셨기에 우리도 그분 덕분으로 죄를 용서받은 입장에서 이웃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의로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의로운 요셉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과 하느님의 어머니를 모실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의로움이 곧 사랑이기에 의로운 사람에게만 사랑 자체이신 분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집니다.
얼음을 벌겋게 달궈진 프라이팬에 보관할 수 없고 따듯한 밥을 냉장고에 보관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을 보관하려면 그 받아들이는 것의 본질을 깨뜨리지 않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합당한 그릇이란 요셉처럼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랄프 이야기도 있습니다.
랄프는 이해력이 부족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였는데, 연극에서 ‘방 없어요!’라고 세 번만 하면 되는 역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연극에서 마리아와 요셉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이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고 가난한 이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태어나십니다.
영화 ‘헬프’(2011)는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흑인 가정부들이 당하는 비인간적인 취급을
다루었습니다.
도대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병균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태어나실 수 있으실까요?
아기 예수님을 바란다면 제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하느님은 조약돌로도 성인을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바오로 사도도
가장 위대한 전도자로 세우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탄이 되기 전에 이웃을 험담하거나 판단하는 마음부터 버립시다.
우리 죄를 대신 뒤집어쓰신 분을 맞이하는데 내가 타인의 잘못을 꼬집는 사람이라면 따듯한 밥을 냉장고에 보관하겠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의로우신 분은 의로운 사람만 모실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는 말구유와 같은 처지의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의로우신 분이 요셉이었고 그분은 그것 하나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맞아들일 자격을 가지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18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마태오 1장 18-24절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분의 손길이 내 인생에 닿는 순간>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자신의 인생 안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그 전환점은 다름 아닌 "강렬한 하느님의 손길의 체험"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요셉에게 닿는 순간 요셉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돌아보니 제 인생 안에서도 가장 은혜로웠던 순간은 하느님 그분께서 제 인생에 개입하시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분의 실재를 생생히 느끼던 바로 그 순간의 기쁨과 환희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그렇게 좋아 보이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시시하게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더 이상 재물도, 명예도, 사람조차도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말더군요.
진정한 내적 변화, 회개다운 회개, 새 삶, 이런 단어들은 결국 하느님과의 절실한 만남 그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셉에게 있어서도 하느님 체험의 순간은 얼마나 은혜로운 순간이었던지, 그 짧은 순간, 과거의 요셉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새로운 요셉이 탄생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느님 체험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마리아로 인해 요셉은 배신감과 분노로 치를 떨어야만 했습니다.
약혼녀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을 알게된 요셉의 하루 하루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하루 하루였습니다.
"마리아,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다 네가 어떻게 이렇게 배신을 때릴 수 있나?"
그러나 요셉의 인생에 하느님의 손길이 닿으면서 요셉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는 복음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요셉은 즉시 태도를 바꿉니다.
억울함, 분함, 불평불만, 아쉬움 등 인간적인 감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침묵 중에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우리는 언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했습니까?
언제 우리 삶 안에서 그분의 생생한 자취를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의 감미로운 현존에 취해 지나가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잊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번 성탄,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한번 하느님의 은혜로운 손길을 체험하는 기쁨의 시기가 되길 기원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하느님 그분으로 인해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그분이 우리 삶을 스치는 순간 우리 인생은 점화된 촛불처럼 의미와 활기를 지니기 시작합니다.
그분의 자취가 우리 삶에 각인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한번 영적 여정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는 순간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 18일 강론>
(2023. 12. 18. 월)(마태 1,18-24)
<요셉의 응답>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8-24).”
이 이야기는 요셉 성인이 아기 예수님의 아버지 역할을 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로 성모님을 선택하실 때, 마리아라는 한 처녀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루카 1,26-27).
이것은 하느님께서 요셉 성인과 성모님을 함께 선택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두 사람이 약혼한 것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심’도 따로 주어지고 ‘응답’도 따로 이루어진 것은, 두 사람이 아직 약혼 단계여서 ‘같이 살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찾아간 일이 먼저 있었고, 요셉 성인을 찾아간 일은 마리아의 성령 잉태 사실이 드러난 다음입니다.>
본문에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저절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성모님이 요셉 성인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천사가 찾아온 일과 천사와 나눈 대화도 모두 전했을 텐데, 성모님과 천사가 나눈 대화에서는
요셉 성인이 해야 할 일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천사가 직접 요셉 성인을 찾아가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 쪽에서도 요셉 성인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요셉 성인이 성모님을 믿었고, 성모님의 말도 모두 믿었다는 점입니다.
<사랑했으니까 믿었습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라는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서 성모님과 아기를 보호하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믿었으니까 보호하려고 한 것입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라는 말은, 성모님에게 일어난 일을 하느님과 성모님 사이에서만 일어난 일로 생각했고, 아기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니까 자기는 뒤로 물러나려고 생각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면, 사람들은 두 사람을 부부로 생각할 것이고, 아기를 요셉 성인의 아기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성모님과 아기를 무사히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라는 말은, 요셉 성인이 충실한 신앙인이었고, 성모님처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요셉 성인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얼마나 고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일에 대해서 마치 소설을 쓰듯이 상상할 필요는 없고, 우리는 이루어진 일의 결과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 성인이 해야 할 일을 알려 주고, 또 성모님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알려 주고, 아기 예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을 알려 준 것은, 성모님이 요셉 성인에게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준 일이기도 하고, 아기 예수님의 아버지 역할을 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달해 준 일이기도 합니다.
<천사가 나타난 일과 천사가 한 말들은, 목격자도 없고 증인도 없는 일, 누가 옆에서 보고 기록할 수도 없는 일, 순전히 요셉 성인 자신의 혼자만의 체험이고 증언입니다.
(성모님이 천사를 만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을, 요셉 성인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나는 마리아를 믿는다.
그리고 마리아가 나에게 한 말들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나는 확신한다.”입니다.>
천사가 ‘성령 잉태’와 ‘메시아 강생’을 설명해 줄 때, 요셉 성인과 성모님이 겪게 될 고난들도 미리 알려 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셉 성인과 성모님은 자신들이 겪게 될 일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두 분의 응답에는 그런 고난들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응답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자기 자신을 모두 봉헌한 일, 즉 전적인 헌신과 희생입니다.>
요셉 성인의 응답은, 주님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한 일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또 자신의 자유의지로 ‘기꺼이’ 순종한 일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고, 또 성모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사람을 믿고 사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일은 이사야서에 있는 ‘임마누엘 예언’이 실현된 일이라는 설명은 복음서 저자의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요셉 성인과 성모님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일, 즉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고,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