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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따르릉 ~ ~” “여보세요 4233입니다” “나야 나” 술취한 철호 의 목소리다. “철호 로구나” “어” “니 술 취했구나” “어 한 잔 했어” “술 냄새가 이까지 품겨오는걸 보니 한 잔이 아닌데” “오늘 술 좀 했어 그런데 갑자기 너 생각이 나서 전화 했어” “그래 가정은 두루 편안하야” “그럼 재옥아” “어” “너 우리아버지 돌아가셔서 고생 많이 했지” “갑자기 그때 예기는 왜하니” “아니 그냥....”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상 대학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직장을 구한 것도 아니고 허구 헌 날 룸펜 노릇을 하고 있을 때 이다. 초하의 어느 날 미자골 어구 누님 네 집 툇마루에 앉아 철호와 같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철호와 나는 장기수가 비슷하여 내가 이기면 다음번엔 내가 지고 철호가 지면 내가 이기고 하루 종일 두어도 승부가 나지 않는 맞수 엿다. 장기가 한판 끝나고 다음 판을 시작하려는데 철호 여동생이 숨을 몰아쉬며 찾아와 오빠 큰일 났어 빨리 집에 가봐 아버지가... 이상해...빨리 하며 울먹인다. 아버지가 왜서... 글 세 빨이 가보라 니 까? 예감이 이상하여 철호와 나는 용수철 퉁기듯이 일어나 철호네 집을 향해 뛰었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철호네 집이 보이고 집 앞에 동네 아주머니 세분이 서 있다가 우리가 가니 빨리 들어가 보라고 한다. 철호 어머니는 제천 장에 돼지새끼 사러 나가시고 집에는 나이어린 철호 동생들만 있는 상황에서 철호 아버지는 아침을 잡수시고 신문을 보시다가 그대로 숨을 거두셨다. 철호네는 마차에 가까운 친척이 없고 아버지 형제들이 단양에 산다고 했다. 단양역에서도 십 여리나 떨어진 시골이라 전화 가설이 되어있지 않아 인편으로 알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그날 철호 주변에는 심부름 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 보였다. 나는 철호 사촌들 주소와 이름을 적은 쪽지를 받아 들었지만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마차에도 하루에 수없이 버스가 드나들지만 그때는 오전 오후 2회밖에 운행되지 않았다. 오후버스를 탄다면 한밤중이라야 목적지까지 갈지 말지 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옆에서 딱한 사정을 지켜보던 이웃 사람이 시계를 보더니 지금부터 약 반시간 후이면 평창서 나오는 버스가 있으니 서둘러 문곡초등학교 까지 걸어가서라도 버스를 잡으라고 한다. 나는 평창서 나오는 버스를 잡아탔지만 근심은 계속되었다. 제천에 돼지새끼 사러 나온 철호 어머니를 만나 예기를 하고 단양으로 가야 하는데 쉽게 만날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 외로 철호 어머니는 쉽게 만났다. 철호 어머니는 돼지세끼를 사가지고 다래끼 에 넣어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중이었다. 나는 철호 아버지가 숨을 거두셨다는 말은 나오지 않아 위독하니 빨리 들어가시라고 일르고 대합실로 뛰어가 단양 가는 열차표를 끝을 수 있었다. 말 들은 대로 철호의 사촌들이 살고 있는 동내는 단양역에서도 십 여리 떨어져 있는 산골 마을이었다. 내가 그곳에 도착한 것은 초하의 끓어 이글거리든 태양의 열기가 식어가는 해거름 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해 주는 조밥 한 그릇을 방안에도 들어가지 않고 봉당에 쪼글 트리고 앉아서 먹으며 친척들이 하는 예기를 들었다. 지금은 버스고 열차고 다 놓쳤으니 밤을 새어서라도 걸어서 갈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단양서 영월까지는 질러서 온다 해도 100여리 길이다. 중 고등학교 6 년 동안 왕복 40리 길을 매일 통학한 나는 걷는 대는 자신이 있었다. 그들의 제일 뒤에서 나는 그들의 걸음걸이를 보았다. 빠르고 경쾌하고 리듬이 있었다. 성큼 성큼 고개를 넘고 재를 넘는데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자연에 묻혀 살아가는 농민들의 건강한 참 모습을 나는 여기서 볼 수 있었다. 처음 한 두 시간은 어슴푸레 하지만 길이 보여 힘 안 드리고 따라 붙였는데 차츰 어두워지고 거리상으로 절반정도 오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주위는 점점 어두워져 칠흑 같은 어둠으로 앞 사람의 형체가 일렁일렁 흔들릴 뿐이다. 너무나 어두웠던 것이 기억에 남아 나중에 철호한데 물으니 그날이 음력으로 시무사흘이라고 한다. 나는 그렇게 밤 세워 걸을 줄은 생각 못하고 구두를 신고 간 것을 후회 했다. 몇 개월 전 구두 뒷 창에 징을 밖았는데 징에 못이 구두창을 완전히 둟고 올라와 발 뒤꿈치 를 찌르기 시작 하는 것이다. 어쩌다 그쪽으로 힘이 실릴 때 찌르는 통증은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나는 도저히 더 갈수가 없었다. 마차리 를 30리 정도 앞둔 남면 창원리 새슬막 주막집에서 떨어져 자고 이 튼 날 철호네 집에 들려 동행했던 분 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분들은 계속 걸어서 날 샐 임세 도착 했다고 한다.
“그날 너 고생한 것 내가 알아” “아무튼 전화주어 고맙다” “건강해라”“그래 너도 건강하고”
어느 해 겨울 떡방아 깐 을 한다며 떡을 제천서 영월까지 싣고 와 친구들 집집마다 한 봉지씩 돌리던 친구 남이야 뭐라 든 속을 탁 터놓고 예기하는 친구 속임이 없고 진실한 친구 반세기가 넘어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 잊이 않고 전화하는 참으로 언재든 만나고 싶은 정다운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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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정이란 제하의 장문의 글에서 따뜻한 친구의 우정을 느끼게 하는 구만.
친구란 서로 어려울때 도와 주는 게 친구요, 의리가 아니겠는가..
철호는 요즘도 심심찮게 전화가 오는데..마음 하나는 진국이지..
전화가 올때마다 거의 절반은 술이 취해서 횡설수설 하는 편이지..
철호가 재옥에게 전화를 할때는 옛날 아버님 돌아갔을때 생각을 할걸세.
철호에게 재옥이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의리의 친구로 기억됨이 분명해 보이네.
옛날을 회상하며 술술 풀어낸 추억담 잘 읽었네 ^^*
독감으로 고생했다며 나는 아직도 쾌차하지않네
오늘도 병원에서 약 이 일분을 가져가실레요 삼일분을 가저가실레요.
하는것을 삼일분을 달래서 완전히 쫓아버릴려고 독을 쓰고 있소
철호가 삼일간 동생들과 같이 배트남을 갔다 왔는데 허리가 아파
구경이구 말구 애만 먹은 모양이야
또 추워진다고 하지만 이제 추워봤자 그렇게지만
그래도 조심하고 건강지키시게나.
그래 철호아버지가 철호 대학교다닐때 돌아가셨지 형들이 단양 살았지 고생했구먼 거암도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지 참 어려웠든 시절이지 좋은친구지 오래도록 변치 말자고
철호 너 나 샜이서 께나 모여 다녔지
벽암 자당께서는 옥수수 박상을 항상준비 하셨다가 우리가 가면 옥수수박상을 내어놓으셨지
깔아놓은 이불속에 다리를 넣고 박상을 입에 넣으며 시간가는줄 모르고 떠들던 시절이
어 그제 같으이 우리도 늙은 모양일세 지나간 예기만 하니 안그런가?.ㅎㅎ
건강하시게나.
첨부터 잘 읽었나이다.
그런일이 있었다니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그 어려웠고 힘들었던 시절의 회고를 읽고나니 우정의 소중함과 필연이란
끊을 소홀히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철호라는 사람은 전혀 알지 못했는데 동창회를 계기로 철호의 심성과 인간관계를 통한
신뢰의 소유자임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할 좋은 친구입니다. 정재옥 전회장님의 글을 접하므로
그를 새로히 소중한 친구임을 조명해 봅니다. 참 의리 있는 친구입니다. 이렇게 좋은 글로 이아침에 공간을 채워주심
고맙습니다. 할레루야~
우리 왕 총무님 안녕하십니껴. 요즘도 바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좋은글 까지는 되지못하고 그저 지나간 추억들 쬐금 생각하고 글로 옮겨 보았습니다.
철호 그 친구 동생들이 여럿인데 모두가 아버지처럼 대하고 집안이 화목한줄 압니다.
고속도로로 편입된 땅 보상금을 받아 형제들에게 똑 같이 분배하여 소문이 좋게 나더군요.
꼬리글로 격려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건강 하기요.
거암슨상께서 그토록 어려운 일에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음에 놀라움은 말할것도 없지만
철호 친구의 사람 됨됨이 울 거암슨상님과 같은 좋은 친구를 두고 있다 이말씀입네다.
우정으로 얼킨 고달펐던 옛 이야기 실감나게 읽었네 철호와의 우정 참으로 자랑 스럽고 서로가 허심 없이 살아온
편생 인생에 삶의 발자취 술회한 글 벗간에 두터운 의리 갈때까지 영원 하길 빌며 더욱 건강 하기요.
변변치 못한 글 보시고 여러가지로 격려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인산께서는 한시로 일가를 이루었지만 지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인터넷이란 가상공간을 통하여 우리의 남은 시간 아름답게 보내고자 할 뿐입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좋은계절 입니다. 건강 하십시요.
모두 어려웠던 시절 먼길 마다치 않고 나서준 친구분을 어찌 잊을수 있겠습니까
요즘이야 전화하면 자가용으로 잽싸게 오고가는 시절이니 그때그시절 생각이
더 나겠지요 ..친구분 한잔 하신김에 떠나가신 부친생각 하다보니 거암님 수고가 따라
떠 오르셧나보네요 ...끈끈한정 오래오래 이여가세요 .
연가님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그때가 오히려 사람사는 진면목이 잊이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요즘같이 아쉬운것이 없이 흔해 넘치고 모든게 편리하니 사람사는 정은 점점 매말라 가는것 같읍니다.
다만 이렇한 예기라도 주고 받을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감사할 뿐입니다.
어재는 눈이 많이 내렸는데 봄 눈이라 하루를 못가네요. 건강하세요.
참 눈물나게 정겨운 이야기 입니다요 요즘갚으면 자가용타고 붕 갚다 붕오면 되련만 아무튼 귀한정 끈끈한정 봅니다
그떄가 그립지요 정말 끈끈한정 요즘사 찾아보기 힙들것 같으내요 우리 살아온 정 찾아 친구여 모습은 어딜갔나 그리
운 친구여 ! 친구여 ! 뿔뿔이 흩어져 사는 그리운 친구들이여 건강히 평안히 살아가자구요....
그때는 극히 일부 제하면 거의 다 힘들고 어렵게 살지 않았나 생각이드네.
건강은 이상업지 이제는 모이면 건강이야기 자녀이야기가 주를 이루는것 같으이
지난 31일 상조회 모임에서 부부동반 모임이라 회비를 다음모임부터는 30000원씩 내기로 격상시겼내요.
그리고 3월 모임은 고씨굴 고 박재권이내 집에서 모이기로 합의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다음모임부터는 최병주가 다시 가입한다고 합니다. 건강하시고 다음모임에 만납시다.
이렇게 귀한 거암님의글을 이렇게 늦게 접합니다.
철호와 그런 사이였군요.
이런 우정은 세월이 흐를 수록 더욱 아름답고 값진 마음의 보물이되나 봅니다.
읽는 나의 마음도 훈훈한 감동을 받네요.
철호는 정말 티없이 곱고 여린 마음의 소유자 같습니다.
조그만 얘기에도 그 얼굴에 눈물이 글성이는 것을 자주 본 것 같습니다.
거암님의 글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꼭 어느 소설가의 콩트를 읽은 기분입니다.
거암님 퇴직하고 영월문화원에서 근무하게 된 이유가 이런 문학의 소질이 있어서인 것을 이제 좀 짐작하게 됩니다.
자주 좋은 글 올려주시길...
좋은 글이라 할게 뭐 있습니까. 반세기가 지난 일이라 생각나는데로 글로 옮겨 보았습니다.
철호 좋은친구조 정설자가 남편과 사별하고 제천 송학어느 골짜기에 요양원을 처음 설립할때
음으로 양으로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은파님 요즘은 어떻게 지나시는지.. 언듯 듣기로는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셨다는 예기를 들은것같아
물어 보는 것입니다. 은파님에 과분한칭찬에 부끄럽군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네, 요즘 일 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바쁘다고 할 수 있고, 어쨋던 내 생애중 가장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답니다.
철호 얘기가 나오니 생각나는 사진이 있어서 답글에 올려 보겠습니다.
이케 댓글이 철철 차고 넘치는 진풍경도 첨 봅니당^^
아름다운 글 잘앍었읍니다. 친구간의 우정을 새삼 느껴보게됀다네.
작년 한국갔을때..철호가 점심대접을해서 우리여러친구들 신세를젔지요.
마음이넓고 선한 친구임은 익히알고있읍니다. 재옥이도 정말로 선한 친구지요.
지난 아름다운 추억이야기 이렇게 종종 자주 올려주시요.
정말로 감명깊게 잘읽었읍니다.
얼마간 보이지않아 어디 또 여행가셨나 하고 생각했었다네 건강한 모습보니 반갑구려
어영버영하다보니 또 한해가 지나갔습니다.
바같에 따뜻한 햇볕은 봄 기운이 완연하지만 이북의 3차핵실험으로 이곳의 공기는 어재 오늘
울울 하기만 합니다. 별일이야 없겠지 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되내요. 건강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