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曰 文王何可當也 由湯至於武丁 賢聖之君六七作 天下歸殷久矣 久則難變也 武丁朝諸侯有天下 猶運之掌也 紂之去武丁未久也 其故家遺俗流風善政 猶有存者 又有微子微仲王子比干箕子膠鬲皆賢人也 相與輔相之 故久而後失之也 尺地莫非其有也 一民莫非其臣也 然而文王猶方百里起 是以難也 (맹자가) 말씀하시기를, “문왕을 어찌 당할 수 있겠는가? 탕왕으로부터 무정에 이르기까지 성스럽고 어진 군주가 6,7명이 나와서 천하가 은나라에 돌아간 지가 오래 되었으니, 오래되면 변하기 어려운지라. 무정이 제후들에게 조회를 받고 천하를 거느리되 손바닥에 놓고 움직이듯 하였으니 주(紂)왕은 무정과의 거리가 오래지 않아 옛 가문과 끼친 습속과 전한 풍속과 좋은 정치가 오히려 남은 것이 있었으며, 또 미자, 미중, 왕자 비간, 기자, 교격이 다 어진 사람이니, 서로 더불어 (주왕을) 도와주었으므로 오랜 뒤에야 나라를 잃어버렸다. 한 자 되는 땅도 그의 소유가 아닌 게 없었으며, 한 사람의 백성도 그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문왕이 사방 백 리의 땅으로 일어났으니 이 때문에 어려웠던 것이다.”라고 하셨다. 鬲, 音隔, 又音歷. 輔相之相, 去聲. 猶方之猶與由通.
○ 當, 猶敵也. 商自成湯至於武丁, 中間大甲, 大戊, 祖乙, 盤庚皆賢聖之君. 作, 起也. 自武丁至紂凡九世. 故家, 舊臣之家也. 當이란 대적한다는 것과 같다. 상나라는 성탕으로부터 무정까지 중간에 있던 태갑, 태무, 조을, 반경이 모두 어질고 성스러운 임금이었다. 作은 흥기한다는 말이다. 무정으로부터 주왕까지 모두 9세다. 옛집이란 옛 신하의 집이다. 雙峯饒氏曰 故家舊臣遺俗舊民是說在下底 流風之化善政之事是說在上底 쌍봉요씨가 말하길, “故家와 舊臣, 遺俗과 舊民은 아래에 있는 것을 말한 것이고, 流風의 교화나 善政의 일은 위에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9 齊人有言曰 雖有智慧 不如乘勢 雖有鎡基 不如待時 今時則易然也 제나라 사람의 말에 ‘비록 지혜가 있으나 형세를 타는 것만 못하며, 비록 농기구가 있으나 때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으니, 지금은 그렇게 하기가 쉬운 때다. 鎡音茲.
○ 鎡基, 田器也. 時, 謂耕種之時. 자기(鎡基)란 밭을 가는 기물(쟁기, 호미)이다. 時란 밭 갈고 파종하는 시기를 말한다. 10 夏后殷周之盛 地未有過千里者也 而齊有其地矣 雞鳴狗吠相聞 而達乎四境 而齊有其民矣 地不改辟矣 民不改聚矣 行仁政而王 莫之能禦也 하나라 임금과 은나라와 주나라 전성기에 땅이 천리를 넘은 자가 있지 않았는데, 제나라가 그만한 땅을 가지고 있으며,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 사방의 경계에 미치는데 제나라는 그만한 백성을 지니고 있으니, 땅을 더 개척하지 않고 백성을 더 모으지 않더라도 어진 정치를 하고 왕 노릇을 한다면 이것을 막을 자가 없을 것이다. 辟, 與闢同.
○ 此言其勢之易也. 三代盛時, 王畿不過千里. 今齊已有之, 異於文王之百里. 又雞犬之聲相聞, 自國都以至於四境, 言民居稠密也. 이는 그 형세가 쉽다는 말이다. 삼대가 융성할 때도 왕의 직할지는 천리를 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제나라는 이미 그것을 갖고 있으니, 문왕이 백리를 갖고 있던 것과는 다르다. 게다가 닭과 개 소리가 서로 들리는 것이 도읍부터 사방의 국경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백성들이 조밀하게 많이 살고 있다는 말이다.
雙峯饒氏曰 勢是指事力而言 有地則有財 有民則有兵 地廣則財富 民衆則兵强 旣富且强 所以擧事易 文王百里 地狹民少 所以難 쌍봉요씨가 말하길, “勢란 일과 힘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땅이 있으면 재물이 있고, 백성이 있으면 병사가 있으니, 땅이 넓으면 재물이 풍부하고, 백성이 많으면 병력이 강한 것이다. 이미 부유하면서 또한 강하니, 이 때문에 일을 거행하기 쉬운 것이다. 문왕은 백리여서 땅이 협소하고 백성이 적었기 때문에, 어려웠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11 且王者之不作 未有疏於此時者也 民之憔悴於虐政 未有甚於此時者也 飢者易爲食 渴者易爲飮 또 (진정한) 왕이 나오지 않은 것이 지금보다 더 드문 적이 없었으며, 백성들이 학정에 시달린 것이 지금보다 심한 적이 없었으니, 굶주린 자에게 밥 주기가 쉬우며 목마른 자에게 물 주기가 쉬운 것이라.
此言其時之易也. 自文武至此七百餘年, 異於商之賢聖繼作; 民苦虐政之甚, 異於紂之猶有善政. 易爲飮食, 言飢渴之甚, 不待甘美也. 이것은 그 시기의 쉬움을 말한 것이다. 문왕과 무왕으로부터 이때까지 700여년은 상나라에서 성현이 계속 나타났던 것과는 달랐다. 백성들이 학정에 심하게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주왕에게 아직도 선한 정치가 남아있던 것과 달랐다. 마실 것과 먹을 것 되기가 쉽다는 것은 굶주림과 목마름이 심하여 달고 맛있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12 孔子曰 德之流行 速於置郵而傳命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덕의 유행이 파발을 두고 명령을 전하는 것보다 빠르다.’라고 하였으니,
○ 置, 驛也. 郵, 馹也. 所以傳命也. 孟子引孔子之言如此. 置는 역이고, 郵는 馹이다. 이는 명령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맹자가 공자님의 말씀을 인용함이 이와 같았다.
新安陳氏曰 如漢五里一置 左傳楚子乘馹會師 신안진씨가 말하길, “漢書에 5리마다 하나의 置(역참)를 두었다거나, 좌전에 초나라 임금(子爵)이 역마(馹)를 타고 군사를 모았다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東陽許氏曰 字書 馬遞曰 置 步遞曰郵 漢西域傳 因騎置以聞 師古曰 卽今驛馬也 黃霸傳 郵亭 師古曰 書舍 謂傳送文書所止處 如今驛館 동양허씨가 말하길, “자서에 역마가 교대하는 곳을 置라고 말했고, 역졸이 교대하는 곳을 郵라고 말했다. 한서 서역전에, 역마와 역참으로 인해 소식을 듣는다고 하였으니, 안사고가 말하길 지금의 역마라고 하였다. 한서 황패전의 郵亭에 대하여, 안사고가 말하길, 書舍이니, 문서를 전송하면서 그치는 곳으로서 지금의 역관과 같은 곳을 말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德之流行 卽是應前面文王之德底德字 蓋德是本全靠時勢不得 有智慧而後可以乘勢 有鎡基而後可以待時 若無德雖有時勢 何以行之 쌍봉요씨가 말하길, “덕의 유행이란 곧 앞에서 나온 ‘문왕의 덕’이란 말의 德자와 호흥하는데, 대체로 덕은 본래 온전히 때와 형세에만 의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혜가 있은 이후에 이로써 형세를 탈 수 있고, 쟁기가 있은 이후에 이로써 때를 기다릴 수가 있는 것이니, 만약 덕이 없다면, 비록 때와 형세가 있다 할지라도, 무엇으로 그것을 행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3 當今之時 萬乘之國行仁政 民之悅之 猶解倒懸也 故事半古之人 功必倍之 惟此時爲然 지금 이 때를 당하여 만승의 나라가 어진 정치를 행한다면 백성들의 기뻐함이 거꾸로 매달린 것을 풀어줌과 같으리니, 그러므로 일은 옛 사람의 반만 하고 공은 반드시 그 배가 되는 것이 오직 지금만이 그러할 것이다. 乘, 去聲.
○ 倒懸, 喩困苦也. 所施之事, 半於古人, 而功倍於古人, 由時勢易而德行速也. 倒懸이란 곤궁과 고통을 비유한 것이다. 베푸는 일은 옛사람의 반이되 공은 옛사람의 두 배이니, 이는 때와 형세가 쉽고 덕의 유행이 빠르기 때문이다. 問孟子旣卑管仲 使孟子當管仲之時 則如之何 雙峯饒氏曰 亦只是合諸侯以尊周室 但孟子則眞能使王室尊安而諸侯各循王 度管仲不過假尊周之名以蓋其摟諸侯之實 其所爲實文武之罪人也 王覇之分 只在誠僞 孔子作春秋亦不過欲諸侯尊周室循周制而已 누군가 묻기를, “맹자는 기왕에 관중을 낮게 보았는데, 만약 맹자가 관중의 시대에 당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요?”라고 하였다. 쌍봉요씨가 말하길, “역시 그저 제후를 규합하여 주왕실을 높였을 것이다. 다만 맹자라면 진짜로 주왕실로 하여금 존중받고 편안하게 하며 제후들은 각자 천자를 따르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관중을 헤아려보면, 주왕실을 높인다는 명분을 빌려서 제후들을 끌어안으려는 그 실질을 덮는 것에 불과하였으니, 그가 한 행위는 사실 문왕과 무왕의 죄인인 것이다. 왕도와 패도의 구분은 그저 정성스러우냐 아니면 가짜로 하는 것이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공자께서 춘추를 지으신 것 역시 제후들이 주왕실을 높이고 주나라의 제도를 따르기를 바라신 것에 불과하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丑並論管晏 孟子只及管仲而不及晏 蓋晏之事功 又在管之下 不必言也 晏事景公 政在陳氏 晏未嘗當齊政也 晏才不及管而其人稍正於管 其人無可譏 其事無可言 此孟子所以置晏不言 而專及管歟 신안진씨가 말하길, “공손추는 관중과 안영을 나란히 거론했지만, 맹자는 그저 관중에게만 미쳤을 뿐 안영에게는 미치지 않았는데, 대체로 안자의 일과 공이 또한 관중의 아래에 있어서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영은 제경공을 섬겼지만, 정사가 진씨에게 달려있었기에, 안영은 일찍이 제나라 정사를 담당한 적이 없었다. 안영의 재주는 관중에 미치지 못하면서, 그 사람됨은 관중보다 조금 올바른 편이었다. 그 사람됨을 나무랄 만한 것이 없었고, 그가 한 일은 말한 만한 것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맹자가 안영은 버려두고 말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관중만 언급했던 까닭이리라!”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