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외로움
호 3:1-5
호 3:1-5 / [정조 없는 아내의 속전과 정화]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네 아내를 다시 데려오너라. 비록 그녀가 음행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더라도 다시 데리고 와서 사랑하여라.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 온갖 좋은 선물들을 갖다 바쳐도, 나 여호와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있다.' 2) 그래서 나는 은 15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노예 신세로 전락한 그녀를 다시 사왔다. 3) 그리고 이렇게 타일렀다. `당신은 한동안 혼자 지내야만 하오. 다른 사내들과 어울려 밖으로 나돌아다녀서도 안 되고, 창녀짓을 해서도 안되오. 그동안에는 나도 당신에게 가까이 가지 않겠소.' 4) 이는 곧 이스라엘에 오랫동안 왕이나 섭정자도 없고, 제단과 성전과 제사장들도 없으며, 심지어는 우상들도 없게 되리라는 것을 비유한다. 5)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와 자기들의 왕이신 메시야에게 돌아와 마침내는 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분의 온갖 좋은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한 말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가 되시며 사랑 때문에 존재하시고 사랑 때문에 사람과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랑의 영원성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사랑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으며 사랑 없이는 진리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서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것은 죽음까지 당하시면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분으로 성경에 조명되고 있습니다. 마치 너무나도 외로워서 사랑의 열병을 앓는 여인처럼 사랑할 자를 날마다 찾아 헤매시는 그런 분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소원이 있다면 여러분과 나를 만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제발 나를 만나주고, 제발 나를 떠나지 말고 나와 함께 영원히 같이 살자고 애원하듯 인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내가 누구를 만나 내 사랑을 줄 것인가? 어느 날 하나님이 외로워지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어찌 내 사랑을 싫다고 도망가느냐! 제발 내게로 돌아와다오.”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충분히 나타났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어린 양이였는데 그 하나를 잃어버린 하나님은 견디지 못하시고 험산 계곡을 미친 듯이 소리치며 다니다가 그 사랑의 대상인 어린 양을 발견했을 때 너무 기뻐서 다시는 잃어버리기가 싫어 놓치지 않으려고 품에 안고 돌아오시는 예수의 모습을 우리가 예술 작품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싫다고 버리고 나간 탕자를 절대 포기하지 못하시고 밤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분이라서 돌아온 사랑의 대상을 책망할 능력을 상실합니다. 살아 돌아왔다는 그 한 가지 사건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서 큰 경비를 아까워하지 않고 최고의 품위 있는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표현으로 외로워서 혼자 못사는 그런 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어느 날 큰 잔치를 배설하고 사랑의 대상자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사람들이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참을 수가 없어서 종들을 시켜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려오라고 하시며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대상이 날마다 필요하신 하나님, 혼자 계시면 외로워서 못 견디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이런 속성으로 조명되어 있습니다.
“만약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온갖 좋은 것으로 너를 채워줄 것이며 네가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영생을 선물해 주고 영원히 누릴 수 있는 행복의 하늘나라를 네게 줄 것이니 제발 내 말을 믿고 나와 함께 살아다오.” 이렇게 하나님이 애원하고 계십니다. 버리고 떠난 인간을 절대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자존심을 다 버리시고 인간을 찾아오신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요, 그 절대적 실천 행위가 십자가 사건이 됩니다. ‘나는 죽으면서라도 너를 사랑해야 돼!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내가 죽을 터이니 이제 네가 내 마음을 인정해 주겠니?’
이 호세아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 인간끼리 나누는 사랑도 자존심 때문에 깨어지는 경우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관계에서 언제나 일 순위를 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 속에 내가 일순위로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원합니다. 제가 심방 다니면서 들은 소리인데, 요즘에 며느리들이 사랑의 순번을 정하는데 일 순위는 자기 자신이고 이 순위는 자녀이고 3번은 남편이고 4번이 강아지고 그래도 애교로 봐주시니까 시어머니가 5번이고 시아버지는 제일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들집에 들렸다 오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3번아 잘 있어라. 6번은 간다.” 이 사랑의 관계에서 자존심 부리는 사람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지 절대로 전화도 먼저 하지 않습니다. 미안한 일을 해 놓고 미안하다는 말도 먼저 하지 않습니다. 만나자는 말도 더욱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정말 만나기가 싫은가하면 또 그렇지는 않습니다. 간절히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면서 자존심을 부리는 것, 이것이 사랑의 상대성입니다. 그런대 하나님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자존심은커녕 날마다 부르시고 찾아오시고 사랑한다고 하시고 도망가도 따라 오시고 죄를 졌다고 해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찬송가를 부르지 않습니까? “♬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 혹시나 내 사랑이 돌아오지 않을까 동서남북을 보며 내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방황치 말고 오라고 하십니다. 이 호세아 성경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그 표현을 현실감 있게 하기 위해 호세아 선지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대상자들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왕 중 13대 왕이었던 여로보암2세의 통치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였습니다. 이 성경의 시작은 그의 불행한 결혼 생활이 조명되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의 신분은 본래부터가 매춘부였는데 호세아와 결혼을 합니다. 고멜이라는 이름의 여자로 결혼 전부터 문제가 있는 여자로 나타나는데 왜 그렇게 됐는가? 이것이 곧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에덴동산을 떠난 후부터 문제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 역사라는 것은 이미 버려져서 구원 능력은 전혀 없어진 완전 타락의 문제아들로 내버려진 매춘부와 같이 그렇게 되었다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을 하나님이 절대적인 사랑으로 제자리로 되돌려서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너를 사랑해야 돼. 사랑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게 나야!’ 사랑의 절대적 대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 나타난 하나님의 외로움을 몇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부인 고멜에게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는 고멜과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호세아는 가족을 위해 매우 성실하고 좋은 가장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잘 살고 있는 행복한 가정을 깨트리고 고멜이 남편과 세 자녀를 버리고 정부한테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가정은 고멜의 타락적 성품 말고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마 이 호세아뿐만 아니고 모든 남성과 여성의 심리는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가장 자존심이 상할 때가 언제인가? 내가 최고로 신뢰감을 주고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 버림을 당할 때라고 봅니다. 특히 이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 누구나 최고로 두려워하는 문제가 사랑하는 자에게 버림당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남자들은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인간관계가 있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의 대상에게 인정받기를 기다리고 비로소 인정을 받았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감정을 가집니다. 또한 여자들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일생을 걸고 헌신하는 존재요, 남자들은 훌륭한 남편이라는 소리 한번 들으려고 평생 피 땀을 흘리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 인간이었으니까 호세아도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내 고멜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열심히 노력하고 살았는데 결국 타락적 성품 때문에 버림당한 외로운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쯤 되면 예언자도 낙심합니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든 호세야가 절망적 자기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 하나님은 그의 영혼의 문을 두드려 하나님의 마음을 지금 보여줍니다. “호세아야 네 마음이 내 마음이다. 네가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마음이 곧 나다. 나는 처녀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랑했고 내 사랑의 모든 것을 주어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가르치려고 계획했다. 아내를 사랑하듯 사랑하고 너와 함께 살면서 내 사랑의 모든 대상을 만들어 가려고 했는데 이스라엘이 나를 버리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정부에게로 도망갔다. 너의 가정의 비극이 다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고멜의 성품과 똑같이 이스라엘이 나를 버리고 내가 아닌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타락성 때문이다. 네가 버림을 당해 슬퍼하듯 나도 내 사랑의 대상자 이스라엘에게 버림을 당해 너와 같이 슬퍼하고 있음을 알라.” 사실 호세아가 예언자가 된 것은 이것 때문에 그 영혼의 문이 하나님께로 열린 동기가 됩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어떤 계기를 만나면 인생을 정리해보는 심각성을 가져 봅니다. 고뇌를 통해서 성숙해지는 면도 있습니다. 실패나 좌절의 사건이 닥치면 더욱 자기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깁니다. 그럴 때 정리가 잘못되면 막가는 인생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잘되면 보다 나은 새로운 인생의 길을 출발하는 성공적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호세아의 고민은 버리고 떠난 고멜을 잊어버리고 정리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새로운 길이 주어질 텐데,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하나님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고민이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버리고 떠난 인간! 그러나 하나님은 정부와 함께 달아난 이 택한 백성을 절대 잊을 수 없는 마치 순정파 남편과 같이 괴로워하고 있는 겁니다. 당시는 하나님의 인간 사랑을 가장 방해하고 있는 마귀적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알 종교였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마치 하나님과 바알의 전쟁터와 같은 인상을 줄만큼 하나님 백성의 정신사를 가장 강력하게 흐리게 한 것이 바알 종교의 세력이었습니다. 이 바알 종교의 세력이 얼마나 컸었는가 하는 것은 엘리야 사건에서 아주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호렙산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을 버리고 다 바알을 따라갔는데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엘리야라는 선지자 한 사람만 남고 모두 바알 신자가 되었다고 했으니 이 택한 백성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던가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해석할 수 있는 좋은 말이 우리 문화에 글자 하나로 있습니다. 한이라는 말입니다. 이 한이란 말은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말이 됩니다. 즉 사랑과 증오가 함께 있으며 좌절과 미련이 서로 모순되는 감정의 충돌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한이 들어와서 해결이 되지 않으면 병이 됩니다. 이때의 하는 말은 말 뒤에 숨어있는 뜻이 따로 존재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한이 많았기 때문에 한 많은 백성으로서 문화적으로 마음을 감추기 때문에 직설적 표현을 하는 서구 사회같이 생각하고 말을 들으면 큰일 납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미워죽겠다.” 그 뒤에는 너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표현되는 말 자체 뒤에 따로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정말 바라는 것은 님을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이 보내드린다고 마음을 감추는 문화의 언어로 변질되었습니다.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도 죽어도 안 하겠다고 말하는 애증의 갈등 문학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마주 보면서 얘기할 때는 그 눈빛을 잘 보고 그 말 뒤에 숨어있는 말을 집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인류의 시작을 보세요. 하와는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주었는가? 사랑하기 때문에 나누는 기쁨으로 준 것입니다. 아담은 받아먹고 나니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아담은 “너 때문에 다 망한 거야!” 지독한 원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없이는 또한 살 수가 없습니다. 아담은 사랑과 증오의 갈등을 안고 하와의 외로운 손을 잡아주며 하나님에게 야단을 맞고 그토록 아름답던 에덴에서 서글프게 쫓겨나서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살 수 있는, 해산하는 고통을 두려워하며 출산해야 하는 인간 고난의 최초 순례자의 길을 떠납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러한 관계는 계속되고 있는데 오늘 말씀에 호세야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의 고통은 계속됩니다. 자기를 떠나버린 고멜이 차라리 행복하게 산다면 그 행복을 자기 것으로 알고 인내로 견딜만합니다. 그러나 호세아를 떠난 고멜은 다시 매춘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호세아를 더욱더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매춘부라는 위치는 만인의 노리개요 장난감 취급을 받습니다. 선지자의 사랑을 받던 아내였던 고멜이 어둠의 길가에서 몸 파는 잡초로 타락한 현실을 호세아가 참을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처녀같이 아내같이 사랑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도망가서 온 세상을 어지럽히는 바알 종교에 몸을 팔고 만국의 장난감 같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하나님이 지금 괴로워하신 겁니다. 예레미야의 말대로 “슬프다. 이성이여. 본래는 공주 같던 자가 조공 드리는 자와 같이 되었도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호세아에게 큰 고통스러운 작업을 시키십니다. 가서 고멜을 다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데려오되 포주에게 빚이 있으니 그것을 네가 갚아주고 자유롭게 해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고멜이 진 빛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이지만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값을 지불해주고 해방의 선물을 주실 때 비로소 인간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와 능력입니다. 인간이 지은 죄의 빚을 하나님이 대신 갚아주시고 용서하여 주신 그 자체를 우리는 은혜라고 하고 이 개념은 거저 받았다고 하는 뜻입니다. 고멜같은 여자는 구원할 가치가 없다고 모두 생각할 터인데 하나님은 인간을 고멜로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남성들과 유대 남성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민족들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보다 과거를 더 중요시 한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현재 만족하면 과거 같은 것은 크게 문제를 삼지 않는데 남자들은 과거가 나타나면 그것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깨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인데 한국 남성과 히브리 남성의 자존심은 세계에서도 첫째, 둘째 갈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게일 선교사의 논문에 이것이 잘 반영되고 있습니다. 호세아도 유대 남자이니 자존심이 강합니다. 고멜을 다시 데려다 산다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은 치욕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호세아에게 그것을 명하셨는가? 하나님의 마음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와도 그때만을 기다리신 듯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어떤 과거도 묻지 않으십니다. 돌아온 그 자체만이 기쁘신 것입니다. 우리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의 사랑은 분명한 철학이 존재합니다. 이기주의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소원대로 될 때만이 사랑이니 정열이니 떠드는 것이지 실망을 주었을 때는 사랑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사랑하기로 선택한 대상을 향해서는 영원합니다. 그래서 언약의 하나님이요, 불변의 하나님입니다. 어떤 경우에 있다하여도 끝까지 찾아가서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그를 다시 사랑의 대상, 제자로 회복시키시는 그 자체가 구원입니다.
호세아는 이 일을 치르고 나서 히브리 민족에서 외칩니다. 6장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버리고 떠난 인간을 찾아나서는 하나님의 외로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존심은 십자가에 이미 다 못 박았습니다. ‘이래야 내 마음을 알겠니? 나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서 죽는 거야. 이것보다 더 큰 고통이 있다면 그것을 내가 당하겠는데 이것이 제일 큰 고통이라서 십자가를 지는 거야. 이제 내 마음을 보았으면 내게로 와. 나하고 함께 살아. 나와 함께 있으면 네가 있을 곳을 예비할거야. 다시 너를 데리러 올께.’ 이것이 기독교 진리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했을 때 내 마음은 어떤가? 그런데 ‘괜찮아! 오기만 하면 돼. 그것은 다 잊었어.’ 하나님은 나를 향하여 수백 번도 더 심각한 고통을 겪으신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내 품으로 돌아온 사랑하는 자여! 나와 사랑을 나누자.” 거기에 대한 인격적 응답을 “하나님!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이 영원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옵소서.” 호세아는 이것을 우리에게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다소 힘든 부분이 있을지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강한 손에 붙들려서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호세아를 통해서 들려주신 하나님 사랑의 속성을 저희들이 잘 깨닫게 하옵소서. 어떠한 힘보다도 가장 강열한 힘의 손으로 우리를 붙잡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세상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또 한 주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순례자의 길을 걷겠습니다. 저희들의 손을 붙잡아 주시며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마땅히 있어야 할 것
호 4:1-5 / 김광일 목사
카일 아이들먼(Kyle Idleman)은 저서 ‘팬인가, 제자인가’(Not a fan)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제자가 되어야 하는데, 팬처럼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어린 시절 마이클 조던 사진 옆에 예수의 사진을 붙여놓았던, 즉 예수 그리스도의 팬이었던 그가 어른이 되어 “팬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예수는 자신의 팬이 많아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라고 말하며 전적으로 그에게 항복하고 헌신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팬은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팬은 관람석에 앉아 응원만 할 줄 알지 경기장에서 필요한 희생과 고통은 조금도 모릅니다. 예수의 팬은 예수에 관해 모르는 게 없어도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팬은 자기 것을 조금도 희생하지 않은 채 예수를 따르기 원합니다. 그러나 삶이 뿌리째 흔들리지 않고서 예수를 따를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면 무엇인가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에게 밤만이 아닌 낮에도 동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그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만 예수를 따르는 것은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진정한 제자라면 밤낮으로 예수를 따라야 하고, 손해를 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니고데모와 같은 선택의 상황에 서게 됩니다. 팬의 길과 제자의 길 중에서 선택해야할 때가 찾아옵니다. 그때 당당하게 드러내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머리로는 하나님을 열심히 연구하지만 그분께 마음을 드리지 않으며, 예수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한다면 다만 예수의 팬일 뿐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예수가 좋아서 따라다니는 팬입니까? 아니면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를 좇아가는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제자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많이 받은 백성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잘 알고 있어야 했고, 하나님을 더욱 잘 섬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 가는 것을 거부하였고,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세상을 향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과 포악하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 영혼은 황폐해졌으며, 황폐해진 영혼에서 오는 갈증을 우상숭배와 향락을 통해 채우려다 더 큰 죄를 범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결국 무서운 죄에 오염되어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이 되었으며, 그 결과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걷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방치해 두었다가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불행에 빠질 것이 분명하기에 심판에 처하게 해서라도 돌이키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를 통해 죄악을 지적하게 하십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와 책망은 곧 우리의 범죄이며 우리를 향한 책망임을 알아야 합니다. 과연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진실이 있어야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의 아버지는 요한 게오르그 칸트(Johann Georg Kant)입니다. 한번은 말을 타고 산길로 지나가다가 강도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칼을 들이대는 강도들에게 모든 것과 말을 빼앗겼습니다. 강도가 물었습니다. “숨긴 것이 더 없느냐?”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럼, 가거라.” 그는 무사히 빠져나와 안도의 숨을 내쉬고 바위에 걸터앉았습니다. 그런데 바지춤에 금덩어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갈등을 하다가 강도들에게 다시 돌아갔습니다. “조금 전에 숨긴 것이 없느냐고 물을 때 없다고 했는데 가다보니 금덩이를 숨긴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도 마저 받으시오” 강도에게 금덩어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빼앗은 물건과 말을 내어주며 엎드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당신이 두렵습니다.” 그의 진실에 강도들도 무릎을 꿇고야 말았습니다.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도 진실 앞에서는 누구나 두려워 떱니다.
본문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진실의 히브리어 ‘에메트’는 ‘거짓이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실이 없었습니다. 종교성은 있고 경건한 분위기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 진실한 헌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을 파기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죄를 짓기가 다반사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사랑하고 더 섬기고 좋아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보다 세상이나 인간적인 것들을 더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실하지 못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과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 마땅히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진실하게 행하려 힘써야 합니다. 부족한 진실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바랍니다.
둘째로 인애가 있어야
영국의 미들랜드(Midlands) 지역에 오른손이 없는 여인의 동상이 있어 관광객이 많이 모여든다고 합니다. 십자군 전쟁 당시 한 십자군 병사가 회교 정복자 살라딘 왕에게 사로잡힌 적이 있었는데, 그의 사랑하는 여인이 날마다 살라딘 왕에게 찾아와 병사를 놓아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러자 사악한 살라딘 왕은 여인의 사랑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왕은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네 한 손을 잘라 가지고 오면 너의 남자를 풀어 주겠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즉시 오른 손을 잘라 왕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한 쪽 팔이 없는 여인의 동상은 그녀의 희생적인 사랑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졌다고 합니다.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오른손을 주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애요 사랑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인애의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애가 있는 자를 ‘헤시드’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망과 지옥에서 영생을 얻었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모름지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애가 신앙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살기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잃어버린 인애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합니다. 모든 것 위에 인애를 더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인애를 더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혹시 사랑의 고백이 입술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삶 속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사랑이 실행되고 있습니까? 인애의 모습이 마땅히 우리의 신앙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셋째로 지식이 있어야
파스칼(Blaise Pascal)은 17세기 최고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했습니다. 1654년 11월 23일, 평생 잊을 수 없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 날의 영적 체험을 “불에 휩싸인 은총의 밤”이라고 저서 팡세(Pensée)에 기록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파스칼을 찾아오셨고, 그는 비로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파스칼은 이 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해 주실 때 알 수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숨어계신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태도를 바꾸라고 지적합니다. 철학의 인식론적 태도를 버리고 그 대신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과 같은 인식론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파스칼은 ‘나는 생각한다’(cogito)라는 이성 중심에서 ‘나는 믿는다’(credo)라는 신앙 중심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지식의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히 아는데 그치는 사변적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지식’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겪어서 아는 것이고 친밀성을 가지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신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합니다. 오해가 생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근원을 잃어버린 사람이 됩니다. 자기 교만과 오만 속에서 살다가 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일과 향락을 추구하는 정욕적인 삶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갔고, 하나님의 말씀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서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렸기에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리학자 뉴턴(Isaac Newton)은 말년에 치매가 와서 모든 기억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자기의 나이도 생일도 모르는 스승을 바라보던 제자가 답답해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알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내 구주 되신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내가 확실히 알고 있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인간의 모든 지식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심판뿐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있어야 할 것은 없으며 없어야 할 것으로 채워져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이제 마땅히 있어야 할 것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비록 손해가 난다 할지라도 있어야 할 것들로 갖추어져야 합니다. 부디 없어야 할 것들에 관심 두지 마시고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알아가면서 하나님을 더 잘 예배하고 더 섬기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모쪼록 우리의 신앙 가운데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인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신앙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나에게 없는 것
호 4:1-5 / 김정호 목사
한 드라마에서 어떤 사람이 자동차 사고가 나 차 안에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는 운전면허를 따지 않을 것이고 자동차 운전도 안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할아버지는 어디에서 돌아가셨니?” “병원 침대에서” “너의 할머니는?” “침대에서” “너의 아버지는?” “침대에서…….” “가족들이 모두 침대에서 돌아가셨구나. 내가 너라면 그렇게 위험한 침대에는 근처에도 안 가겠다.”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죽고 싶지는 않아서 뭔가 특별한 꿈을 꾸지만 그냥 꿈만 꾸다가 평범하게 죽고 맙니다. 왜냐하면 일어나지도 않을 염려 때문에 지금 머무는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한 발 자국도 내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세상이기에 사람이 늘 예방과 조심을 해야 하지만 기우에 사로잡혀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피하기만 하는 삶이 아닌 극복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밥 먹고 죽었다고 해서 밥을 안 먹을 수도 없고 먹지 않으면 누구도 살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선지자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지적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보다는 딴 길로 향하여 계속 범죄하자 책망과 경고를 줌으로써 어떻게든 돌이키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당시 이스라엘에게 마땅히 있어야 하는데도 없었던 것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범죄 원인을 규명해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범죄이며 우리를 향한 책망과 질책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음성을 겸허히 듣고 큰 깨달음과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진실이 없습니다
본문 1절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
이 땅에는 진실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진실’의 히브리어 ‘에메트’는 신실과 확실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한 약속이나 맹세에 대해서 신실한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민23:19)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삼상15:29)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진실이 결여되어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진실성의 결여가 곧 죄인 것입니다.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때로는 하나님 보다 우상을 사랑하고 섬기고 좋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이나 세상의 것이나 사람이나 인간적인 것들을 더 사랑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맺는 언약과 약속과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진실에 이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하여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국에 가구점 목공출신으로 나이 16살에 예수를 영접한 에드워드 모트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열심히 일하여 드디어 가구점 하나를 경영하는 일종의 중소기업 사장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회사를 갖게 된 그날 그는 그가 일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늘 가구점 뒤에 있는 홀본 언덕에 올라 그에게 성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마침 그가 앉아서 기도드리던 그 곳은 넓게 펼쳐진 바위 언덕이었습니다. 그는 이 바위 언덕위에서 아름답게 펼쳐진 마을 정경을 바라보다가 그는 바위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제가 조금 성공했지만 저는 이런 성공은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의 인생의 흔들릴 수 없는 반석은 주님 한분뿐이십니다. 저의 평생에 저의 반석이신 여호와만을 의뢰하고 살겠사오니 제가 한 평생 여호와를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 그의 마음에는 하늘의 기쁨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 집에 돌아오는 즉시 한편의 시를 기록합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488장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무섭게 바람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 그는 가구점 경영을 청산하고 침례교 목사가 되어 일생을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합니다. 그가 77세를 일기로 그가 섬기던 교회 강단에서 마지막 예배를 인도하던 날 그가 마지막으로 불렀던 찬송도 이 찬송이었다고 합니다.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앞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바로 서리라.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에드워드 모트처럼 일, 신앙, 사업, 목회,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 무엇이나 진실성이 없거나 결여될 때 큰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보다 더 진실하게 살고 믿고 충성해야 합니다. 열심은 있는데, 모양은 그럴 듯한데, 말은 많고 잘 하는데, 기도는 많이 하는데, 얼굴에 웃음이 있기는 하는데, 옷은 말끔하게 잘 입었는데……. 혹 진실성이 부족하지는 않습니까? 잃어버리고 부족한 진실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인애가 없습니다
본문 1절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
‘인애’의 히브리어 ‘헤세드’는 언약에 기초한 사랑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은총과 긍휼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을 측은히 여겨 사랑을 베푸는 것이나 자신의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상대방을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선택하셨고 특별한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하여 충성과 헌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았고 계속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구원 받았고 영원한 사망과 지옥에서 영원한 생명과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땅에서 하늘의 신분을 얻었습니다. 천국 시민권을 이미 확보하였습니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헌신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우리 자신의 이익과 명예와 행복만을 위하여 살고 있으며 때로는 하나님을 도구로 이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짐승도 은혜를 입으면 보답을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큰 구속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얼마나 보답하며 살고 있습니까?
모든 진흙덩이가 그렇듯이 질그릇으로 최고의 작품이 되어서 왕궁의 식탁이나 부잣집의 장식장에 올라가는 것이 최고의 꿈이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들의 토기장이가 이 나라 최고의 장인이란 것이었습니다. 그가 만든 그릇들은 거의 다 왕궁이나 부잣집으로 팔려나갔습니다. 어느 날 토기장이가 내 앞에 앉아서 나를 반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나도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작품으로 태어날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했습니다. 토기장이가 빚는 나의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주둥이에 유난히도 넓은 손잡이, 나를 지켜보는 다른 진흙들의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난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나를 이런 흉측한 모습으로 빚은 토기장이의 손길이 밉고 또 미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불가마에서 나온 내 모습은 정말 절망적이었습니다. 토기장이가 날 왜 이런 모습으로 빚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토기장이는 내가 완성되자마자 나를 품에 앉고 어디론가 뛰어갔습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이었습니다. 아무리 이렇게 가난한 농부에게 나를 팔려고 했어도 이런 모양으로 만든 토기장이가 나는 생각할수록 미웠습니다. 차라리 바닥에 떨어져 내가 깨져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농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난 너무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농부는 농사일을 하다가 두 손이 잘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하게 생긴 그릇을 사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이 사실을 알고 이 농부를 위해 손이 아닌 팔로 사용할 수 있는 나처럼 생긴 그릇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나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농부에게 토기장이가 말했습니다. ‘더 고마운 것은 나요. 내가 질그릇을 만들면서 이렇게 기뻤던 적은 처음이요. 이 그릇은 나의 최고의 작품이요.’ 토기장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 나라는 사실을 난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빚던 토기장이의 그 따스한 손길을 그제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제가 드릴 것은……. 저는 가난합니다. 많은 헌금을 드리지 못합니다. 저는 음치입니다. 아름다운 찬송도 부르지 못합니다. 저는 잠꾸러기입니다. 새벽 제단도 쌓지 못합니다. 저는 몸이 둔합니다. 교회 봉사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저는 말을 더듬습니다. 전도의 말 한마디 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헌금, 찬송, 새벽기도, 봉사, 전도, 헌신을 해야 되지만 먼저 잃어버린 인애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 사랑, 즉 인애를 더해야 합니다. 사랑을 더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인애’를 회복하고 더 큰 인애, 사랑으로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기쁘게 해 드리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본문 1절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
‘지식’의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히 아는데 그치는 사변적인 지식이 아닌 경험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심으로 인간의 생각과 마음까지도 꿰뚫어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물과 만나와 메추라기,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고 의복이 해어지지 않게 하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뜻대로 살고 있습니까?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지식은 팽배한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얼마나 됩니까? 관심과 노력은 있습니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더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기도를 통하여 깊이 알고 교제하게 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고 믿으면 더욱 잘 믿고 제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모든 인간의 지식은 헛된 것이고 잘못된 지식입니다.
뉴욕에 있는 카네기 홀에서 피아노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어떤 젊은 피아니스트가 열연을 했습니다. 그때 맨 앞에 앉은 어떤 노인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서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이 피아니스트에게 몰려가서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피아니스트는 말하기를 저는 잘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늘도 실패를 했습니다. 저 맨 앞에 앉으신 노인이 저의 선생님이신데 일어나지도 박수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이 피아니스트는 관중이 열광적 박수를 보내고 칭찬을 했어도 자기 선생님께서 칭찬하지 않으므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칭찬은 자기 선생님의 칭찬이 진짜 칭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선생님은 그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즉 대중이 알지 못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칭찬은 주님의 칭찬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할지라도 하나님이 칭찬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 칭찬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주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엡6:10)에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하루의 삶이 어떻게 하여야 나를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인가만 생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내가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랑스러운 자랑은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는 진실한 자랑, 즉 분량대로 하는 자랑이며 나는 낮아지고 주님만을 높이는 주안에서 하는 자랑이라고 했고 스스로 하는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께 옳다 인정함을 받으므로 주님께 받는 칭찬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인간과 세상과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이고 능력이고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비로소 나의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더 이상 고민하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바꾸고 변화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모든 지식은 다 헛되고 공허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더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있어야 할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꼭 있어야 할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받은 것을 생각하며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과 우리 교회에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꼭 있어야 할 세 가지
호세아 4:1-5 / 이상호 목사
1장에서 3장까지는 호세아의 불운한 결혼 생활을 통하여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경고하고 징계할 것과 그리고 그 징계를 통하여 그들을 회복하실 것을 말씀하심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였습니다. 이제 4장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직접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보여주고, 하나님이 그들을 향한 심판과 용서에 관한 계획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지켜 행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에서 하나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논쟁하십니다. 논쟁한다는 것은 법적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있어야 할 것은 하나도 없고, 없어야 할 것만 가득한 그들을 향하여 그 문제를 법정에 끌고 가서 그들의 불법성을 밝히시겠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그들에게 꼭 있어야 할 진실과 인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진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것은 말과 행동의 신실함을 나타냅니다.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과 행하심에는 항상 거짓이 없으십니다. 그 말씀은 진실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에게 하셨던 모든 말씀들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말씀은 변함이 없고, 거짓이 없으셨습니다. 민 23:19절에서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이나 행동이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 된다면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은 신실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은 항상 신실하셨습니다. 거짓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한 약속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 모든 약속을 하나님은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서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과 몇 날이 못 가서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린 이래 계속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린 채 범죄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항상 진실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적인 풍요 앞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풍요의 신 바알을 따라갔고, 그를 섬겼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음행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실하심 앞에 그들은 진실함을 버리고 거짓으로 답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진실해야 합니다.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실하지 못함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실하지 못한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 진실하지 못하다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진실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또한 진실함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성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2. 인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이 헤세드는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헤세드는 크게 두 가지의 경우로 사용되어 집니다. 하나는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헤세드가 사용되기도 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어지는 경우에 헤세드는 값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어지는 것인데 헤세드를 베푸는 사람은 강자나 부자입니다. 그리고 그 수혜자는 반드시 약자로서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입니다. 룻기을 보면 과부가 된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늙은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정성 들여 공양했습니다. 이를 본 보아스는 "너의 베푼 헤세드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다"고 말합니다. 개혁 성경에서는 이 헤세드를 인애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또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사울의 자손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를 찾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헤세드를 베풀리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헤세드를 "은총"으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에서 보는 것처럼 헤세드는 부요한 강자가 무능한 노약자에게 베푼 친절과 사랑과 긍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헤세드는 일반적으로 계약 개념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변함없는 사랑. 곧 헤세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계약을 맺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계약의 일면이 아니라 오히려 계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의 징표요,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인애가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인애가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인애가 없다는 것입니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으면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그냥 나 두어 라고 말합니다. 감람나무를 떤 후에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다시 살피지 말라고 말합니다. 포도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의 품삯은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고 합니다. 이 외에도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고, 부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해서 힘없고,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을 자행했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행해야 하는 헤세드를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 사랑이 변하여 바알에게 가 버렸습니다. 이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헤스드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3. 또한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무엇을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나, 하나님에 대하여 신학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지식은 마귀도 가지고 있습니다. 약 2:19에는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지식에 해당하는 다아트는 알다라는 뜻의 야다에서 온 말입니다. 야다는 단순한 사변적인 지식이 아닌 경험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부부가 육체적 관계를 통하여 서로를 체득하는 것을 가리킬 때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알고 남편이 아내를 아는 이와 같은 깊은 지식을 말합니다. 인격적인 교제, 둘이 하나가 되는 상황, 사랑을 나누는 관계를 안다는 낱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직접 하나님을 겪어서 아는 것이고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성을 가지고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친밀한 교제 없이는 이러한 지식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같은 학교를 다니더라도 친밀한 교제가 없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얼굴만 알뿐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없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단절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단절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진실도, 인애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가 그들에게 없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포악하여서 피가 피를 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십계명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와 속임은 다릅니다. 저주는 남을 저주하는 것과 관련된 거짓 맹세를 말하고, 속임은 말 그대로 남을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모두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조그마한 땅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이웃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해서 멀리 노예로 팔려갔다가 돌아오면 이웃이 그 땅이 이 가난한 사람의 땅이라는 사실을 증거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그 땅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은 그 땅을 그 사람에게 내 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땅을 관리하고 있는 부자는 이웃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증거해 달라고 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올바른 증거를 해야 하는 이웃이 뇌물을 받고 저주까지 하면서 거짓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증거의 신빙성을 위하여 저주까지 해야 하는데, 자기가 저주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행하고 있습니다. 도둑질을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사용해서 강제로 남의 것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리고 살인과 간음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엎습니다. 이것은 피 흘리는 행위에 또 다른 피 흘림이 뒤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즉, 폭력은 폭력을 낳고 피는 피를 부른다는 뜻입니다. 폭력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사회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이스라엘, 부패 할 때로 부패하고, 타락할 때로 타락해 버린 그 이스라엘 백성의 정신적인 지도자마저 물들어 버린 이스라엘입니다. 타락한 제사장을 향해서 낮에 넘어지겠고,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넘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넘어진다는 것은 죄에 대한 형벌과 심판을 의미합니다. 너희들이 범한 죄에 대해서 분명하게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네 어머니를 멸하겠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이야기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권이 있는 나라 전체까지도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죄악된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악 된 길에서 돌아서야 하고, 벗어나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거짓됨 없이 진실함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 앞에 진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진실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진실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그 말씀은 변함이 없으며, 거짓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변함이 없는 진실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내가 하나님 앞에 진실 된 모습으로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진실하신 하나님 앞에 거짓 없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변함없는 진실한 모습으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진실한 모습으로 서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하나님과 인애를 가지고 있습니까? 가난한 내 이웃을 돌아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도리어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친히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을 감싸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하늘 보좌를 가지신 분이시지만 그들을 돌아보셨습니다. 이런 인애가 우리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지키고 있습니까?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해 버렸습니다. 물질적인 풍요 때문에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우리들도 얼마든지 이러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앞에 여러분 또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있습니까? 단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지식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한도 내에서나마 하나님과 그 분의 뜻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묵상함으로써 그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대로 좇아 행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인애하며 더욱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을 알아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였기에 몸도 마음도 더러운 창녀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도 하나님을 알고 사랑했기에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 거짓과 위선을 버리고 진실과 인애와, 이스라엘 백성처럼 겉으로만 아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지식으로 가득 채워지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식을 버린 자의 말로
호 4:1-5 / 곽선희 목사
현대심리학 용어 중에 피터팬 신드롬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많이 들으셨고 또 익숙하게 하는 말인 줄로 압니다. 이 피터팬이라고 하는 것은 J.M. Barrie라고 하는 분이 쓴 극입니다. 극본의 제목이 피터팬이요 그 극의 주인공이 피터팬입니다. 피터팬의 특징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영원한 소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몸은 컸지마는 마음은 소년입니다. 항상 동화의 세계에 삽니다. 빗자루를 타고 높이 날아다니는 그런 꿈속에 삽니다. 이러한 사람, 이런 군상을 흔히 피터팬 신드롬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병이냐 장애냐 하는 겁니다. 고칠 수 있는 병이냐 아니면 영영 disorder, 장애로 구제불능한 것이냐 하는 심각한 문제가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산업화에서 정보화시대로 바뀌는 과정에서 우리는 특별한 사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머리 좋고 현실판단이 잘되고 그야말로 똑 소리나는 엘리트, 그런 엘리트가 대접을 받는 세상이 되어서 모든 부모가 모든 사람이 그러한 엘리트가 되어 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또 그렇게 가르쳐보려고 애를 씁니다. 냉정한 승부의식, 철저한 실용주의, 적자생존의 법칙을 적절하게 이용하며 변화에 즉각적으로 순발력 있게 대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키워보겠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만들어 보겠다고 부모님들이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똑똑한 현대인, 이런 신세대가 이상하게도 삼사십대가 되면서부터 뭔가 중요한 것이 결핍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이것을 알게 됩니다. 명문대를 나오고 컴퓨터에 능하고 기술능력이 탁월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 이런 사람들을 만나보면은 자기도취에 빠져있습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가 제일 잘났습니다. 아무도 인정하질 않습니다. 자기가 최고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그 원인은 대체로 봐서 부모들이 살기가 힘들어서 너무 바빠 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는 동안에 테레비가 TV가 아이들의 교육을 맡았습니다. 아이들의 세계를 다 뺏아가버렸어요 아이들은 아이의 세계에서 천천히 천천히 성장해야되겠는데 아이에서 바로 건너뛰어서 어른이 되고 말았어요. 어른의 세계 아직은 몰라도 되요. 뭐 알 필요도 없어요. 어쩌면 몰라야 되는 것까지 다 알아버렸어요. 여기서 겉은 어린아이인데 속은 영감님이에요. 너무 많이 알아요. 깜짝 놀랄 만큼 너무 많이 알아요. 이것이 병이에요. 모를 건 몰라야 되는데 말이에요.
자, 그런데 이런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으로 가는 과정을 무시해버렸어요. 그리고 건너뛰어서 기술자가 되었어요. 자, 몸은 어른인데 속은 여전히 어린아이요. 그리고 부조화를 이루고 계속 철부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몸은 어린이일 때 벌써 마음은 어른이더니 몸이 어른이 되가지고는 이제는 마음이 여전히 어린아이입니다. 여기에 존재의식도 없고 정보처리능력이 없고 그 많은 지식을 소화하지를 못합니다. 여기서 파티클맨(Particle Man)이라고 하는 미립자 인간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회심리학자는 이것을, 이 엘리트를 미립자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직도 동화의 세계를 날아다니며 피터팬처럼 착각과 오해 속에 살아갑니다. 이것은 구제 불능한 병입니다. 이것은 병이 아니라 이제는 장애가 아닌가,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아닌가하고 이 시대가 지금 걱정을 합니다. 앞으로의 세대를 예측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고등학생들을 통계적으로 내보니깐 우리 나라에도 무려 11.5%가 가출을 해본 경험이 있답니다. 그러니까 뭐 아이들이 한번 가출을 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을 하지 마세요. 그 왜 가출할 것 같습니까? 내가 몸이 이만큼 컸는데 또 내가 다 아는 게 많은데 이까짓 거 내가 부모의 간섭을 받으며 이 고생할 거 없다 뛰쳐나가서 뭔가 해볼 것이다. 나가보니 그렇지 않더라구요. 차라리 부모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부모 밑에서 얻어먹는 것이 낫지 밖에 나가보니까 이게 무섭더라구요. 이게 동화의 세계가 아니에요. 이게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기어 들어오는 아이는 소망이 있고 그냥 나가버린 즉은 이거는 영영 피터팬이 되고 마는 것이죠. 그래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는 그의 저서 가운데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교육이란 현명한 악마를 키우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 현대인은 많은 것을 아는 거 같아요.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상에서 꼭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 소중한, 유언과 같은 그 말씀 중에 첫째가 "하나님이여 이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주 신중한 말씀을 하셨어요. 아주 뜻깊은 말씀입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똑똑하다고 생각했어요. 자기들이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어요. 가야바같은 사람은 요한복음 11장에서 말합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무사할 수 있다면 죽는 거지 뭐 생각할 여지가 있느냐.' 이렇게 결단하고 이렇게 결정을 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잘났어요. 자기가 제일 잘났어요. 자기가 제일 똑똑해요.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를 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그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그러나 저는 가장 지혜로운 자로 가장 똑똑한 자로 자처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예수님은 판단하십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죄, 모든 실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알아야 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know how는 있습니다 know what이 없어요. 혹 know what이 있으나 know why가 없습니다. 그렇게들 말합니다. 지식이 힘이요 지식이 능력이건만 참 지식이 없어서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을 몰라서 세상은 어지럽고 자기자신도 불행해집니다. 가장 귀중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되는데 세상은 알고 나는 모르고 있어요. 또한 미래를 알아야 합니다. 현재가 그냥 머물러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젊은 사람 항상 젊습니까? 오늘 건강하다고 항상 건강합니까? 오늘 사업이 잘된다고 항상 잘될 것입니까? 세상이 이렇게 정신 못차리게 급히 변하고 있는데 우리가 미래를 모른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거죠. 아무 소용도 없는 거죠. 그런고로 우리는 보다 더 먼 미래를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되고 또 하나는 최우선을 알아야 되요. 어차피 우리는 다 알 수도 없고 다가질 수도 없고 다 할 수도 없어요. 그 중에 제일이 무엇인지, 가장 First Priority, Number One, 제일 최우선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걸 알아야죠. 다른 건 다 몰라도 되요. 이건 알아야 됩니다. 그걸 모른다면 나머지 것은 다 소용없는 거죠. 또한 한계를 알아야 됩니다. 요새 인간들이 한계를 모르고 지금 교만하게 행하는 것이 불안스럽습니다. 과학발전,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 한계가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정해주신 피조물의 세계는 피조물대로의 한계에 사는 것이요. 무제한의 세계로 도전하려고 드는데 이것이 망상이올시다.
또 하나는 은혜를 알아야 됩니다. 요새 컴퓨터에서 클릭하는 것처럼 만사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모든 것이 내 지혜로 내 노력으로 내 기술로 되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며 깨닫는 게 뭡니까? 은혜로 되는 것이죠. 오직 은혜로 세상에 있고 오직 은혜로 내일이 있는 것이에요. 은혜를 모르는 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거예요. 은혜를 부인하고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은 피터팬이에요. 그 신드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 교육학자인 Parker J. Palmer라고 하는 분은 지식의 근원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호기심과 통제의 의한 지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주체가 나요 세상 전부가 객체가 됩니다. 내가 보고 내가 깨닫고 내가 실험하고 그리고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지식은 사랑과 상호주관성에서 오는 지식입니다. 이것은 내가 객체가 되고 상대방이 주체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란 내가 연구해서 아는 게 아니고 그가 나를 사랑하므로 내가 아는 거예요. 사랑 받으므로 사랑을 아는 거예요. 인식의 주체가 객체예요. 나 자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다려야 되요. 이것은 시간이 필요해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러한 지식이라는 것은 인격적입니다. 만남의 관계에서 오는 겁니다. 책상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있죠. 그것 가지고는 안돼요. 컴퓨터 가지고 배울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에요. 인간을 알고 사랑을 합니다. 그것은 만남의 관계에서 조용히 인격적으로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 지식이 없는 것이에요. 또한 참여와 책임에서 얻는 지식입니다. 동참합니다, 함께 합니다, 책임을 집니다, 작은 일부터 책임을 져 나아가면서 인격적으로 성장해갑니다. 공동체 의식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 사람 속에 내가 하나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자기가 우주의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게 바로 피터팬 신드롬입니다. 그런가 하면 순종을 통해 배웁니다. 여러분 다 알고 하는 거 아니에요. 믿고 하는 거죠. 다 알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다 합리적으로 소화가 되어야 되는 게 아니에요. 어린아이가 어른의 세계를 어떻게 다 압니까? 그 다 알 수도 없어요. 지금은 순종을 해야 되요. 신뢰와 사랑으로 순종해가면서 배우고 깨닫는 것이죠. 그 오묘한 이치예요. 이 같은 숭고한 지식이 점점 멀어지고 오로지 과학적 지식만을 내놓는 것이 현대인의 결정적인 잘못이에요. 누가복음 19장 4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감람산 언덕에 앉아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며 예루살렘의 장래를 보시면서 모름지기 40년 후에 있을 일을 이렇게 내려다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기 예수님이 눈물을 흘렸다고 돼있어요. 기가 막힌 거예요. 이 40년 후에 돌 하나가 돌 위에 첩 놓이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망해 없어질 것을 내다볼 때에 예수님은 가슴이 아팠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들은 돌이키지를 못해요. 평화에 관한 일을 몰라요. 그런 고로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가 지식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지식이 없는 게 아니에요. 있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이제 다른 지식을 얻을 수가 없게 됐다는 것입니다. 무식은 심판입니다. 지식을 버렸습니다. 아는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현대인 똑똑한 엘리트는 알기만하고 말만 많아요. 행동할 줄을 몰라요. 이것이 얼마나 나쁘다는 걸 남보다 더 잘 알아요. 그리고도 거기에 머물고 있어요. 단 하나를 실천하지 못해요. 이것이 현대젊은이의 결점이에요. 실천의지가 없어요. 어쩌면 뻔히 망할 짓만 하고 앉았어요. 지식을 버렸어요. 여러분, 이미 틀린 것은 틀린 거예요. 거기에 지식이 있어요. 그러면 버려야죠. 여기다가 미련을 둘 필요가 없어요. 요새 제가 읽고 있는 책 가운데 보면 그런 책이 있어요. "대붕괴 신질서" 프란시스 후쿠야마라고하는 분이 쓴 겁니다. 대붕괴, 무너져야 될 것은 무너져야 되요. 빨리 헐어버려야 되요. 여러분, 잘 알지 않습니까? 나라도 정치도 경제도 개인도 인격도 지식도 이미 잘못됐어요. 기초가 잘못됐어요. 이거는 벌써 무너진 거예요. 벌써 망한 거예요. 그러면 버려야죠. 그걸 자꾸 일으키겠다고 수혈을 하면 되겠습니까? 다 틀린지가 언젠데 끝난 지가 언젠데 그걸 붙들고 있는 겁니까? 이건 다함께 망하는 것이죠. 역사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래서 구조 조정이라는 게 뭡니까? 망할 것은 치워버리라 그거 아닙니까. 이미 망한 것은 걷어버려! 아니 뻔하고 언제 망한 지가 오랬는데 거기다가 계속 투자하고 계속 나라 돈을 쳐놓고 있으니 이 나라가 망할 수밖에! 안그렇습니까? 개인이나 세상이나 마찬가지로 지식을 버렸어요 왜 버렸느냐? 욕심 때문에 그 알량한 체면 때문에 그 쓸데없는 고집 때문에 뻔한 것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지식을 버렸어요. 그런 고로 회계가 없어요. 회계란 뭡니까? 완전히 무너뜨리는 거예요.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릴 것이다. 심판입니다. 나도 너를 버리겠다고 심판하십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하십시다.
한 장을 넘겨서 호세아 6장 1절을 제가 보겠습니다. 6장 1절에서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시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는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치셨으나 다시 세워 주실 것이요 그 진노적인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을 따라 얻은 지식을 버리지 말고 지식 안에서 회계하고 지식 안에서 바로 서야됩니다. 그리할 때 새로운 미래가 약속되는 것이올시다.
하나님을 알 때에 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미래를 알고야 현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야 나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종말을 알고야 현실을 밝히 볼 수 있는 이것이올시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물리학자로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너무 나이가 많아서 다,요새말로 말하면 치매가 와서 다 잊어버렸어요. 자기 나이도 자기 생일도 몰라요. 너무 답답해서 제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선생님이 알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내 구주 되신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내가 확실히 알고 있지"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것 다 몰라도 좋아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가 내 구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거예요. 그 여호와를 힘써 알 것이요. 그럴 때에 우리 앞에 새로운 미래가 전개되는 것이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