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현대의 예언자들
- 신앙 진리 실천 명제5: 연대성 2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연대성 원리 또는 명제를 회칙 ‘민족들의 회칙’의 가르침과 맥락에서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복음 말씀에 대한 해설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이 그 탄생 소식을 알려주는 요한의 아버지는 레위 지파 소속의 사제였습니다. 레위 지파의 사제들은 다윗 시절에 대사제가 된 사독(히브리식으로는 ‘차독’)의 뒤를 이은 사두가이파라 불리었는데(2사무 8,16), 남북 역대 왕조에서 간헐적으로 출현한 예언자들이 모조리 박해를 당하던 시절을 거쳐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는 왕도 예언자도 없어진 이스라엘에서 종교지도자를 넘어 사실상 독보적인 국가지도자 지위를 자처하였습니다.
이들은 레위 지파에게 배당되는 십일조 수입은 물론이요, 모든 이스라엘인들에게서 거두는 성전세 수입에다가 속죄의 제사를 드리려는 이스라엘인에게서 받아 냈던 제물 수입까지 받아서 치부를 했는데, 이 수입이 얼마나 막대했던지 당시 이스라엘의 중앙금고 기능을 할 수 있을 만치 예루살렘 성전은 복마전(伏魔殿)이었습니다.
사두가이파에 가담하여 부유하지만 타락한 세습 사제의 길을 걸을 수는 없었던 요한은 사두가이파에 반대하여 독립적인 에세네파 공동체를 세운 독신 사제들처럼 독신 사제로서 일생을 살면서, 아버지 즈카르야의 예언대로(루카 1,67-79) 바빌론 유배 이후 4백 년 동안 끊어진 예언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버지 즈카르야와 어머니 엘리사벳 같은 아나빔들이 이사야가 전해준 예언을 잊지 않고 4백 년 넘는 세월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온 전통을 완성하고자 드디어 메시아가 오셨음을 외치고자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감안하여 이사야와 말라키 예언자의 예언을 종합해서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말라 3,1; 이사 15,9; 마르 1,2-4). 그런데 사도 요한은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적 지성을 갖춘 사제로서 예수님을 알아본 종교적 안목으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사두가이들의 속죄 제사 관행으로는 도저히 없앨 수 없었던 세상의 죄를 메시아께서는 마침내 없애시리라는 예언으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활약한지 2천 년이 다 되어 가던 20세기 중반에 가톨릭교회는 복음화 제3천년기를 준비하는 스물한 번째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에게는 물론 동방정교회와 성공회, 개신교회 등 그리스도교 신자들 그리고 힌두교와 불교와 이슬람교 등 다른 종파의 신자들 그리고 심지어 무신론자들에게까지 커다란 주목을 받은 이 공의회는 전 세계에서 모인 5천여 명의 주교들과 이들을 보좌한 신학자들 모두가 예언자 직무를 수행하여 현대의 성령강림 사건’이라 불리울 만큼 현대 가톨릭교회의 방향을 복음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선두 대열에서 예언자 직무를 수행하여 성인품에 오른 인물들은 여럿인데, 우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목표를 제시하며 이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 교황을 비롯하여, 제1회기를 마치고 선종한 그를 이어 제4회기까지 마치고 마무리한 바오로 6세 교황을 들 수 있습니다. 바오로 6세는 공의회 폐막 후 공의회의 가르침을 선명하게 담은 회칙 ‘민족들의 발전’을 반포하여 교회쇄신 여정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공산권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황직에 선출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선임 교황이 시작한 교회쇄신의 여정을 지속하는 한편, 자신의 조국인 폴란드의 교회를 십여 차례나 방문하면서 기어코 동구 공산권을 자유세계로 해방시켰습니다. 이 여정은 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이어 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서 반세기 넘게 추진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 교회쇄신 여정의 이정표 구실을 하고 있는 나침반 같은 문헌이 바로 회칙 ‘민족들의 발전’입니다. 이 문헌의 핵심 개념이 바로 연대성 원리입니다. 연대성이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선 행위를 넘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위해 투신하는 사회적 애덕의 행동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 바오로 6세는 ‘발전’의 개념을 이렇게 제시하였습니다.
제1단계의 발전은 기아와 빈곤, 무지와 질병 등 절대적 가난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산업화). 제2단계의 발전은 절대적 가난에서 벗어나 상대적 가난의 상태에 접어 들었으나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선의 혜택을 고르게 받게 되도록 사회를 진보시키는 일입니다(민주화). 제3단계의 발전은 먼저 산업화와 민주화로 가난에서 벗어난 민족들이 아직도 산업화가 지체되고 민주화도 이루지 못한 민족들을 돕는 일입니다(복음화).
그리하여 연대성을 실천하는 행동은 복음화의 발전을 이룩하는 일입니다. 이는 개인과 개인 간에는 물론이요, 나라와 나라 사이와 민족과 민족 사이에서도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 오친 요한 23세 교황의 지향에 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주교들과 신학자들)이 복음적으로 응답한 쾌거였습니다. 중세 이래 근세에 가톨릭교회가 고수했던 개선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던 선교 자세를 버리고 전향적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웃 사랑’으로 전환함으로써 ‘예수의 선교’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근세에는 달랐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적 관점에서 유럽에 정착된 교회 모델을 다른 대륙에 부식시키겠다고 노력하다가 도리어 교회가 세계로부터 고립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근세의 선교적 실패와 시행착오를 뼈저리게 반성한 결과, 공의회는 세계인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고 기대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과제는 공의회의 교회쇄신 노력에 선뜻 동참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가톨릭 내부의 호응과 동참 노력을 이끌어 내는 일이 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그리고 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새 복음화’의 내용도 바로 이것입니다. ‘새로운 열의, 새로운 방식, 새로운 표현’(요한 바오로 2세)으로 요약되는 이 새 복음화란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예언자적으로 시작했고, 회칙 ‘민족들의 발전’으로 구체화된 연대성을 실천하자는 것이요, 가톨릭교회의 확장이나 부식(扶植)이 아니라 가난한 민족들의 발전을 돕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