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59
4월14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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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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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L3mseZxr2s
[서울대교구 이상진 아모스(2027서울세계청년대회 조직워원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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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때로 뜨겁게, 때로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이제 벚꽃 나무는 한국의 대표 수종으로 자리 잡은 듯합니다. 제가 사목하는 태안에도 군데 군데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명품 벚꽃길들이 숨어 있습니다. 시장 보고 오는 길에 화사한 꽃길 사이를 달리는데 혼자 보기가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달콤한 봄비가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만개한 벚꽃이었는데, 이제 떠날 때가 되었는지 화사한 꽃비가 내립니다. 온천지가 완연한 봄기운으로 기지개를 활짝 폅니다. 불어오는 바람도 이젠 예전같이 매서운 칼바람이 아니라 훈훈하고 따뜻한 봄바람입니다.
꽃비도 맞고 봄비도 맞으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비가 되어 내리는구나! 세상 방방곡곡 그 어떤 지역,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골고루 풍성하게 내리는구나!”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영적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니코데모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니코데모의 내면에는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어렴풋이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인식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강한 주님 체험이 부족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나 바오로 사도가 경험했던 그 강렬한 하느님 자비 체험, 골수로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온몸으로 느꼈던 절절한 은총 체험이 니코데모에게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저 머리와 이성으로만 자꾸 이해하려 하니 이런저런 의구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말씀에 묻고 또 묻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8)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요한 3,9)
참으로 묘한 것이 바람입니다. 물론 기압골이나 대기 상태, 지형이나 태풍의 영향에 따라 이리 불고 저리 부는 것이 바람입니다. 느낌은 있으나 절대로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바람의 존재 여부에 대해 의심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 성령으로부터 새롭게 탄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백번 깨어나도 성령의 그 감미로운 바람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 강렬하고 뜨거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례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묘하고 신비스러운 성령의 바람이 스쳐 지나갑니다. 때로 뜨겁게, 때로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하느님의 영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임하십니다. 그 결과 육으로만 살아가던 한 인간 안에 참된 내적인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이 고스란히 한 인간 안에 실현됩니다.
“나는 그들 안에 다른 마음을 넣어 주고, 그들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어, 그들이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그대로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11, 19-20)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간 측의 신앙 고백은 어찌 보면 하나의 도전이고 모험입니다. 많은 사람이 오직 육에 따라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물질과 육체의 쾌락만을 최고로 여기고 추구하는 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무조건적인 하느님 사랑, 대가 없는 예수님 사랑, 거저 주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의 중요성을 설파해야 되는 신앙인의 삶이 꽤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사라져버린 그리스도교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확신 갖고 믿음 갖고 온 몸과 마음으로 수용하고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우리들 삶의 원리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 부활은 당신과 함께 다시 시작하자는 우리 각자를 향한 강렬한 초대입니다. 새 인생을 출발하자는 초대, 영적인 삶, 위로부터의 삶을 다시 살아보자는 예수님의 간절한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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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_G8x_IzV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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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거인이 될 것인가, 하늘의 아기가 될 것인가?>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찬미 예수님! 부활의 기쁨 속에 우리는 어제에 이어 니코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인생의 근본적인 '태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한 번은 부모로부터 태어났지만, 이제는 선택해야 합니다. 땅의 것과 결합하여 아래로부터 다시 태어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과 결합하여 위로부터 새로 태어날 것인가!
성경 창세기 6장을 보면 인류 타락의 본질이 나옵니다. "세상에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예쁜 것을 보고, 저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창세 6,1-2)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땅의 욕망과 결합한 것입니다. 그 결과 "네피림", 즉 '거인'들이 태어났습니다.
이 거인들은 세상에서 유명해지고 커지기를 원했습니다. 자아를 한없이 부풀려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커지려는 욕구'를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 6,6)라고 기록합니다. 아래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세상의 물질, 돈, 명예를 사랑하여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속으로 내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상의 것들은 모두 아래로 떨어지는 중력의 법칙을 따릅니다. 거인이 되려 할수록 우리는 무거워지고, 결국 그 무게 때문에 침몰하게 됩니다.
1857년 9월, 캘리포니아의 황금 21톤을 실은 센트럴아메리카호가 침몰하던 순간의 기록은 이 '아래로부터의 결합'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여줍니다. 당시 배에 탔던 광부들은 평생을 바쳐 캔 금화를 가죽 주머니에 담아 허리에 단단히 묶었습니다. 그들은 금과 하나가 되어 세상의 '거인'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담은 게리 킨더의 저서 『황금의 바다』에 따르면, 한 남자는 마지막 구명보트를 향해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보트와의 거리는 불과 1미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면에 닿는 순간, 마치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그대로 수직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금 주머니, 즉 그를 거인으로 만들어줄 줄 알았던 그 무게가 사실은 그를 바다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는 무덤의 닻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황금과 결합하여 아래로부터 태어났기에, 황금의 운명과 함께 영원히 가라앉았습니다. (출처: 게리 킨더, 『황금의 바다』)
이렇게 내 자아를 키워 거인이 되려는 욕망은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끕니다. 내가 무엇에 순종하고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내 정체성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물 속으로 가라앉은 모든 거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살려면 더 나와 하나가 되기 전에 잘라내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순종하며 그것과 한 몸이 됩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원작 동화 『빨간 구두』 (1845)에서 주인공 카렌은 빨간 구두를 사랑하여 그 구두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합의 끝은 잔혹했습니다. 구두가 카렌의 의지를 삼켜버렸고, 구두는 살갗과 한 몸이 되어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카렌은 자신의 욕망인 구두를 벗기 위해 사형집행인을 찾아가 자신의 발목을 잘라달라고 애원해야 했습니다. 무언가를 좋아하면 그것과 하나가 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그만큼 힘들어집니다. (출처: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 전집』)
반면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노아의 길입니다. 노아는 어떻게 위로부터 탄생할 줄 알았을까요? 그는 세상 사람들이 거인이 되려 할 때, 하느님의 말씀 아래서 작아지기를 선택했습니다. 땅의 거인이 아닌 하늘의 아기가 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노아는 자기 판단을 버리고 산 위에 배를 지으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려면 반드시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분'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위'를 알아보는 법은 아주 명확합니다. 바로 '나를 위해 피를 흘려주는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사랑만이 진짜 '위'입니다. 위를 만나면 나는 ‘아래’가 됩니다. 나를 작게 만들어주는 분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라고 말씀하십니다. 구리뱀이 장대 위에 매달려 죽은 것은 '순종'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구리뱀을 쳐다보는 행위는, 나를 살리기 위해 독을 제거하신 하느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구조가 바로 삼위일체 구조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의 희생을 통해 전달되고, 그것을 믿는 이에게 성령의 생명이 주어지는 원리입니다. 오직 이 삼위일체 사랑만이 하늘이고, 그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하늘의 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은 가이오비니체크 대신 굶주림의 감옥으로 들어갔습니다. 만약 가이오비니체크가 콜베 신부님의 희생을 단순히 '재수 좋게 살았다'고만 생각했다면, 그는 평생 수용소의 트라우마와 증오라는 아래의 중력에 갇혀 폐인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이오비니체크는 자신을 위해 피 흘린 그 사랑이 '하늘에서 온 것'임을 즉각 알아보았습니다.
삼위일체 구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콜베 신부님은 예수님처럼 부활을 믿었고, 그 부활은 성령에 의해 가능하며, 그 성령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믿고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기로 합니다. 그는 평생 전 세계를 돌며 증언했습니다. "나는 이제 가이오비니체크가 아니라, 콜베 신부님의 생명으로 사는 덤의 인생입니다." 그는 94세로 선종할 때까지 원수를 용서했고, 콜베 신부님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후예들입니다. 그의 자녀와 손자들은 아버지를 살린 그 신부님의 피가 자신들의 가문에 흐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만약 콜베 신부님의 희생이 없었다면, 가이오비니체크의 후예들은 수용소 생존자의 자녀라는 상처 입은 정체성으로 살았겠지만, 이제 그들은 '성인의 사랑으로 탄생한 가문'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대대로 가톨릭 신앙을 굳건히 지켰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재단을 만들어 콜베 신부님의 사랑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자신의 피를
내어줄 수 없습니다. 내가 죽어도 다시 산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당신이 부활의 주님이심을 증명하신 것이고, 우리는 그 피 흘린 사랑 아래 설 때 비로소 땅의 중력에서 벗어납니다.
위로부터 태어남의 정점은 나의 소속을 땅에서 하늘로 옮기는 결단에 있습니다. 내가 누구의 피를 수혈받아 살고 있는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 세상의 옷을 벗고 하느님의 날개를 달다」 1206년, 아시시의 광장에서 청년 프란치스코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립니다. 부유한 포목상이었던 아버지가 아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 "내 돈으로 산 옷과 재산을 다 내놓아라!"라고 소리쳤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가문의 명예와 상속권이라는 아래로부터의 태생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지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에, 더 이상 세상의 옷을 입고 거인이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작은 자가 되었지만, 그 순간 하늘의 아버지는 그에게 성령의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그는 지상의 어떤 중력에도 묶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출처: 보나벤투라,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땅을 사랑하면 땅이 될 것이요,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이 될 것이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1서 강해』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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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제는 힘과 권력으로 유지되는 평화를 이야기했습니다. 먹구름이 걷히면 태양을 볼 수 있듯이, 복음은 또 다른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Pax Christi,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단순한 정치적 질서로 이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행복하다.” 복음이 말하는 평화는 군사력이나 권력의 균형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에 기반한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에는 황금률이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놀라운 사실은 이 가르침이 기독교만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동양의 고전에서도 같은 정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지혜는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같은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인류 문명의 깊은 곳에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윤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류 문명이 지금까지 발전해 온 것은 단순히 힘 때문만이 아닙니다. 인류는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조금씩 더 나은 질서를 만들어 왔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를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설명했습니다. 인류는 위기를 겪을 때마다 새로운 지혜를 만들어 왔습니다. 동양의 고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역천자망 순천자흥.(逆天者亡 順天者興)”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망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흥한다는 뜻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탐욕과 폭력으로 세워진 질서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의와 협력의 질서는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인류 문명은 생물학적 욕구를 넘어 문화와 예술, 철학과 종교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찾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단순한 힘의 경쟁이 아니라 지혜의 축적 과정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인류 문명은 또 한 번 큰 변화를 맞이할 것입니다.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이 발전하고 우주 탐사가 확대되면서 인간의 활동 영역은 더욱 넓어질 것입니다.
어떤 미래학자들은 인류가 지구를 넘어 다른 행성으로 확장할 가능성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드웨어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인간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윤리를 지켜 나간다면 인류는 앞으로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인류는 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전쟁도 있었고 문명의 붕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인류는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역사는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지나온 과거의 기록이고 미래는 현재의 삶이 도착할 집입니다. 인류는 지금도 그 집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힘의 평화(Pax Romana)와 권력의 평화(Pax Americana)를 넘어 인류가 사랑의 평화(Pax Christi)를 이루는 공동체로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독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도들은 공동체를 이루었고,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으며, 모두가 부족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바르나바는 자기의 것을 팔아 공동체를 위해 봉헌하였지만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사도들이 처한 환경이 더욱 좋아진 것도 아닙니다. 아직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감시하고 있었고, 박해의 칼날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능력이 갑자기 향상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능력도 재산도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들이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 그들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행복은 내가 바라보는 대로 주어집니다. 원망과 미움,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면 그만큼 나는 불행할 수 있습니다. 감사와 찬미, 희망과 겸손의 바람이 불면 나는 그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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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춘천교구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가 전하는 초대 교회는 그리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그들의 능력이나 성취가 아니라, 가진 것을 서로 ‘나누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단호히 거부하신 것 가운데 하나도 바로 ‘나눔이 없는 폐쇄성’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문제도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배제하며 자기 안에 갇혀 버린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곧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라고(요한 3,3.5 참조) 말씀하시며, 종교적 행위를 더 하고 윤리적으로 조금 더 나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삶의 기준을 하느님 쪽으로 옮겨 놓기를 요청하십니다. 이것이 파스카, 곧 옛 사람을 떠나 새 사람으로 건너가는 부활의 삶입니다. 익숙한 세상의 논리에 매이지 않고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선택하는 삶입니다.
신앙인은 세상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그러나 세상의 기준과 다르게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람의 아들”(3,13)이라 부르신 것은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로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 안에서, 신앙과 삶, 하늘과 땅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집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지만 세상과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그저 보여 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다양한 생각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현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그 중심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간직한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서 “영에서 태어난 이”(3,8)답게 살아가도록 다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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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7-15: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7절)라고 말씀하신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적 재탄생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곧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례와 성사 안에서 이미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성령 안에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옛사람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이냐? 곧, 성령과 물로, 즉, 세례와 성령으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XI,5)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그렇기에 성령 안에 살아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이”(13절)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13절) 이는 곧 주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심을 드러낸다. 말씀으로서는 영원히 하늘에 계셨지만, 육으로는 사람의 아들로 오셨다. 성 치릴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분이 내려오신 것은 우리를 올라가게 하기 위함이고, 그분이 우리와 같아지신 것은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기 위함이다.”(Commentarius in Ioannem, lib.II, cap.1) 곧, 주님의 강생은 우리를 하늘로 이끌기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사건을 말씀하시며 당신의 십자가를 예고하신다(14절). 구리 뱀을 쳐다본 이들이 살아났듯이, 십자가에 들어 올려진 사람의 아들을 바라보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광야에서 뱀을 바라본 자들이 뱀의 물림에서 해방된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믿는 이들은 죄의 물림에서 해방된다.”(Adversus Haereses, IV, 2,7)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구원의 표징이다. 사목 헌장은 고백한다. “하느님의 아들은 당신의 수난으로 인간을 속량하시고,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을 파괴하셨으며, 부활로 우리의 생명을 새롭게 하셨다.”(22항)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 짊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일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들어갈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성령으로 태어난 새로운 존재로 부르신다. 십자가에 들어 올려진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앙으로 우리는 멸망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제 우리도 날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며 주님을 닮아가야 한다. 그렇게 살 때, 주님께서 부활로 드러내신 영광이 우리 삶에서도 드러날 것이다. 그 믿음을 굳게 지니며, 우리도 주님과 함께 하늘로 들어 올려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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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
요한 3,7ㄱ.8-15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땅으로
하늘을
내리는
사람의 아들
하늘로
땅을
올리는
사람의 아들
땅으로
내려오는
하늘을
살아가는
사람의 아들
하늘로
오르는
땅을
살아가는
사람의 아들
땅에서
하늘 품어
하나 이루는
사람의 아들
하늘에서
땅 품어
하나 이루는
사람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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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동하는 믿음>
개나리, 진달래, 라일락, 벚꽃들이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긴 겨울을 견뎌 낸 나무들이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영양을 충분히 지닌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들이 구별된다. 밑거름이 충분하면 필요할 때마다 알맞은 영양분을 흡수하지만, 밑거름이 충분하지 못하면 일시적인 효과를 내는 웃거름에 매달리게 된다. 결국은 튼실하지 못하여 쉽게 수명을 다한다. 무엇보다 밑거름이 소중하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 그는 꾸준하다. 그러나 신심 단체활동 등 생색내는 일에는 열심히 하면서도 미사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큰 믿음을 지니려면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한다. 기도 생활로 밑거름을 줘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믿음의 생활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4-15).하고 말씀하셨다. 당신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 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고,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된다. 행함으로써 증거된다. 말씀대로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된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3,10). 는 주님의 꾸지람을 새겨들어야 한다. 닫힌 마음에는 진리가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17,3).하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다. 그분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주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을 가리킨다. 그 관계는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의 삶이 중요하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알프레드 신부).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주님, 저희가 이 세상에서 충실히 살아, 마침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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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7ㄱ.8-15)>
1) 이 대화에서, 핵심 가르침만 발췌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말고는 인간을 하늘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이가 없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예수님은 여러 구세주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하게 참된 종교라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만이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고, 증언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바오로 사도는 아버지 하느님과 메시아 예수님을 향한 우리 신앙의 유일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찾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믿든 누구를 믿든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라는 말씀은, “내 말은 진리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이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이 한 말이라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증언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보고, 직접 들은 것에 대한 증언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베드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사도 4,8-10)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떤 장애자를 고쳐 준 일은(사도 3,6-8),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한 사람들은 자기들 눈으로 직접 본 그 일마저도 안 믿었습니다.
3) 12절의 ‘세상일’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들, 그리고 사람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일들을 가리킵니다. ‘하늘 일’은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라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이 인간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을 믿어라. 그러면 인간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도 믿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라는 말씀은, “나의 십자가는 구원의 표지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일은, 민수기 21장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예수님 자신이 곧 구원의 표지라는 뜻입니다.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만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좁은 뜻으로는 “십자가의 목적은 영원한 생명이다.”이고, 넓은 뜻으로는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 세상의 여러 가지 사상들이나 이론들에 현혹되지 말고 예수님 말씀만 믿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의 목적과 이유는 단 하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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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하느님 영의 역동성과 창의성>
교회는 오늘 부활 제2주간 월요일부터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관한 복음선포를 접어두고 성령강림대축일 직전인 부활 제7주간 목요일까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얻게되길 희망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을 시도한다.
생명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동안 봉독되는 사도행전의 독서말씀과 요한복음서의 복음말씀으로 시도된다.
특히 '생명의 책'이라 불리는 요한복음에서 선택된(3장, 6장, 10장, 12-16장) 말씀들이 생명의 의미를 충분히 밝혀 줄 것이다.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오늘 복음(요한 3,1-8)이 그 장을 열고 있다. 문맥상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오늘 복음의 이전 부분을 잠시 보자.
거기에는 과월절을 맞아 상경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고 이 기적들을 본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믿음도 아니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도 아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는 무관한 믿음이다. 그저 예수께 대한 호감이라 표현함이 적당할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2,24)라는 표현으로 이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 암시는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언명(言明)이 있어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 대한 호감 이상의 마음을 가진 니코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와 묻는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2절)
이 대목은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0,25) 라는 질문과 비슷한 유형이다.
그러나 니코데모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질문을 던질 만큼 준비되어 있지는 않다. 그것이 그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이유이다.
이는 유다인들의 지도자에 속하는 니코데모가 다른 유다인들의 눈을 피하고자 하는 속셈일 수도 있고, 니코데모 스스로가 지금까지 몸담아 왔던 유다교 신앙에 대하여 혼돈과 의심을 가지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니코데모가 던진 질문 이상의 차원으로 응수하신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새로 태어나야 함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니코데모의 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은 강행하신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5-6절)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영에 의한 삶을 영위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를 직관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에 입적하려 하는 자는 물과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물과 성령의 세례'는 우선적으로 내적 변화를 통한 새사람이 됨을 의미한다. 니코데모에게 주어진 과제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니코데모는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육체를 지배하는 율법에 의한 묵은 삶을 벗어버리고 영을 지배하는 사랑에 의한 새로운 삶에로 초대받은 것이다.
이어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가 계속된다. 오늘 복음의 대화는 물과 영으로 '새로 남'의 의미에 대한 추가설명(7-10절)과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11-15절)의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최소한, 그러나 절대적인 조건으로 '새로 태어나야 함'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니코데모의 생각은 더 이상 진행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따라서 예수께서는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함을 제안하신 것이다.
'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은 생명과 정화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준다. 문제는 '영'에 대한 것이다.
영(靈)에 대한 지식은 모두가 짧다. 히브리어의 '루아흐'(Ruah)나 그리스어의 '프네우마'(Pneuma)는 구약성서에서 '바람, 호흡, 영혼, 정신' 등을 가리키는 의미로 다양하게 쓰인다.
예수께서는 '영'을 니코데모뿐 아니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바람'에 비유하여 설명하신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8절)는 말은 '영'의 자유로운 속성을 가리킨다.
바람이 부는 소리는 우리가 들을 수 있으나,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기상대가 관측하여 바람의 방향을 예보할 수는 있으나, 예보는 어디까지나 예상이며, 가정이다. 따라서 바람의 방향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바람의 성질을 통하여 영의 역동성과 창의성을 암시하신다. 그래서 곧바로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8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공동번역 성서는 여기서 '성령'이라고 말하지만, (새 번역 성경 - 영) 희랍어 원문에는 그냥 '영'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아직까지 하느님 성삼(聖三)의 구조를 언급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 대목의 '성령'은 그저 '거룩한 영'으로서의 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언급을 한다고 해도 하느님에 대한 유일신 사상을 전부로 알고 있는 니코데모가 이를 이해할 턱이 없다.
따라서 니코데모의 반문은 하느님 '성령'이 아니라 막연한 '영'에 의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9절) 라는 식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의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10절)라는 꾸중은 니코데모가 '영'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야 함을 고무하는 말씀인 셈이다.
이제 '정말 잘 들어 두어라'(11절)라는 요한복음의 특유한 표현으로 두 번째 단락이 시작된다. 즉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 가르침은 단지 니코데모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니코데모가 어제 복음에서 "선생님, 저희는..."(3,2) 하고 시작했던 물음의 서두를 기억하여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포함한 '저희는'이라는 표현과 니코데모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유다인들을 지칭하는 '너희는'(7절)이라는 표현으로 가르침을 내리신다.
이 가르침은 '너희'를 포함한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늘의 일'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은 사실상 보류되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는 암시로 마무리된다.
그것은 니코데모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일'(바람에 비유된, 또는 바람과 같은 영의 의미와 능력) 조차도 깨닫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깨우치거나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성서학자들은 십자가 죽음에 관한 예고의 대목(13-15절)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發說)이라기보다는 요한복음저자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공관복음에서 세 번씩이나 발견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가 요한복음에는 없기 때문이며, 물과 영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 대한 믿음에 연결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남'은 분명 세례성사를 의미한다. 세례성사에서 물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다. 모든 성사에서 합법적인 성사거행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은 형상과 질료이다.
세례성사에서 물은 질료에 속한다. 물은 생명과 정화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그렇다고 물이 성사를 베푸는 것은 아니다. 물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이다.
따라서 세례성사가 목적으로 하는 '새로 태어남'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힘, 새 생명을 가져다주는 힘은 바로 하느님의 영이다.
이는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의 기운(창세 1,2)이며, 진흙 인간이 숨을 쉬도록 생명을 가져다 준 하느님의 입김(창세 2,7)이다.
하느님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숨길을 불어넣어 주시고"(민수 16,22), "땅위에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게 숨결을 주시며"(이사 42,5), "마르고 비틀어진 뼈들 속에 숨을 불어넣어 다시 살려주시는"(에제 37,6) 힘이다.
이러한 하느님 성령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 세례성사 안에서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맞물려 작용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인 셈이다.
그렇다면 세례 받은 사람은 이미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하느님의 영에 따라 사는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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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심원택 토마스 신부님]
어제는 하느님의 은총의 이끄심을 느끼는 하루가 되셨는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영적 대화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 즉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니코데모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지만 그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시며, 진실을 외면하는 태도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어쩌면 오늘 니코데모에게 하신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하신 경고의 말씀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는 때로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적인 얕은 지식을 내세우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의 상황을 앞세워, 하늘의 일을 뒷전으로 미루어버리는 일이 허다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하여 고의로 눈을 감고, 마음을 닫아 버림으로써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어둠 속에서 헤매는 답답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루카는 오늘 독서를 통해 초대교회 신자들의 공동체가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 그들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공유하도록 직접 당부하신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형제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들을 헐고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난한 이웃들과 나눔으로써 초대교회 신자들의 공동체는 서로가 행복해지는 삶을 체험할 수 있었고, 나아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모두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기쁘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의 모습이고, ‘영에서 태어난’ 이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을 믿고,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닫힌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최소한 니코데모가 새로운 가치관을 갈망하여 밤의 암흑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듯이, 우리 또한 살아 있는 ‘영적 세계’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찾고 또 그렇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위로부터 태어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아갔듯,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실업자 100만명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절대적, 상대적 가난함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내어놓을 부분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하루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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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부님]
+찬미예수님
이탈리아에서 기차를 타면 검표원이 와서 표를 직접 검사합니다. 제가 로마에서 살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를 타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막 기차에 올라탔는데 저에게 다가와 검표원이 표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표만 확인하고는, 제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표는 전혀 검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인종차별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무임승차의 의심을 받은 것인가, 이렇게 대놓고 차별을 받아도 되는 것인가 싶어 굉장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다음 역, 다 다음 역을 지나며 이것이 저의 완벽한 오해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검표원들은 매번 기차를 돌며 새롭게 탑승한 사람들의 표만 검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인데, 이태리 검표원들은 새롭게 탑승한 인원과 그렇지 않은 인원을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합니다. 그리하여 때마다 돌며 아직 확인하지 않은 사람들의 표만 검사합니다.
이 경험을 하며 괜한 오해로 얼굴을 붉혔던 제 자신이 참으로 교만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태리에서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나만의 주관과 경험으로 사람들을 판단했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한낱 구름과 같아서 이런 저럼 감정들과 오해의 범람 안에서 여기저기 밀려다닙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휩쓸려, 혹은 내 자신의 주관에 의해 부정적인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올바른 진실을 니코데모는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그의 신앙에 있어 ‘두 가지 요소’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요소는,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지식의 부족과 경험의 부족입니다. 어제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바리사인이지만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보며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인정하게 된 인물입니다. 그러나 아직 경험과 지식의 부족으로 예수님이 어떠한 비유로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을 알아보고 듣고자하는 의지의 부족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인정하는 한편,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라고 재차 질문을 합니다.
어제의 복음에서도 그는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의지의 부족함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태어난다는 비유를 통해서 니코데모의 첫 번째 부족함을 채워주고자 시도하지만 결국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의지의 부족으로 마음을 닫아, 비유에 담긴 풍성한 뜻을 끝내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꽤나 답답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 모두를 향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 그리고 그분의 가슴 아파함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접할 기회를 자주 가집니다. 지금은 미사가 멈춰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복음 말씀을 통해 사랑의 가르침과 비유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기회 앞에서 우리는 가끔,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건 좀 힘들겠는데?”라는 심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나쳐버리기도 합니다. 특별히 가난한 이웃을 도우라는 가르침, 원수와 화해하라는 윤리적 강령을 마주할 때 그렇습니다.
이러한 태도의 근본적인 뿌리에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는 니코데모의 마음이 있습니다. 부활이 좋지만 우리의 행동에서 주님을 향한 기쁨과 사랑이 묻어나오지 않는다면, 즉 그것이 실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보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한 니코데모의 모습과 같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조금은 답답한 모습으로 다음과 같이 질문하십니다.
“세상 일 안에서 마주치는 너의 이웃을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과연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결국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섬겨야 하는 것은 하느님, 그리고 그분의 말씀입니다. 상대방이 나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지 그것은 하느님의 가르침에 비해 명확히 하위에 위치해 있는 나의 주관적인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위로부터 태어나기 위해서는 위의 것을 실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한낱 구름과 같아서 이런 저런 감정들과 오해의 범람 안에서 여기저기 밀려다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구름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구름은 하늘 높은 곳에서 아름답고 부드러운 모양으로 사람에게 편안함과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나 어떤 구름은 어두운 빛깔로 사람들에게 불길함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타고 더욱 아름답고 부드러운 색깔을 가질 수 있는 반면 미움과 의심의 바람을 타면 더욱 흐리고 어두운 색깔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힘입어, 바라보는 모두가 만족할 만한 아름다운 구름의 모습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 없이 우리는 결코 좋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바람이 없으면 구름이 움직일 수 없듯이.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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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방법>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은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살다, 다시 살다'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서다, 다시 일어서다'입니다. 곧 ‘부활’과 ‘들어 높여짐’입니다. 지난 부활 팔일 축제 동안의 말씀전례에서는 첫 번째 뜻,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드러내주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두 번째 뜻인 '들어 높여지다,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뜻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놀라운 사실, 아니 억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을 전합니다. 곧 분명 누명을 쓰고 죽은 실패인데도 오히려 승리라 하고, 또 분명 죽었음에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고 하며,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리하여 드높여졌다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아래’로 내려갔으나 ‘위’로 올라가는 역전의 대전환이라는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여기서 ‘위’(ano) 혹은 ‘아래’(kato)라는 말은 '위'란 산을 오른다든지 로켓을 타고 우주 위로 올라가는 물리적인 위치나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위’와 ‘아래’라는 말을 쓸 때, 이는 ‘두 가지 질서(방식)’을 가리킵니다. 곧 ‘아래’는 자기 중심적인 ‘나’의 통치 방식에 따르는 질서요, ‘위’의 질서는 사랑의 ‘성령’의 통치 방식에 따르는 질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지상에 묶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요한 3,9)
이는 어디선가 이미 들은 낯익은 질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천사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처럼 이 질문은 우리가 전 인격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곧 성모님처럼 ‘피앗’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하물며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이는 우리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이유가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에 대한 고집 때문에 새로 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영으로부터, 곧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믿음(피앗)으로 응답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역전의 대전환이 있고,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모든 것을 새롭게 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눈’으로 봅니다. 곧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워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하소서!
오늘 저희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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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주님!
당신은 패배하셨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으셨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추락하셨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추락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제 안에 숨겨져 있는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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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요즘에 사람들은 낯선 장소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비게이션이 있고, 스마트폰의 지도 앱을 이용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를 잘 이용하기에 낯선 곳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우리나라 전국 성지 순례 완주를 위해 제주도 추자도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처음 가는 곳이지만, 스마트폰이 있으니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배에서 내려 성지까지 6km 정도 되는 거리여서 기도하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제대로 잘 걸어가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스마트폰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배터리가 거의 방전된 것입니다. 아마도 수신이 되지 않는 바다에서 스마트폰이 계속 수신지를 찾다가 방전된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관광 안내소에서 받은 지도가 한 장 있었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목적지에 제대로 가려면 먼저 자기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어디에 있는지 나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지 못했기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열심히만 바쁘게 살면 될까요? 열심히 산다고 말하지만, 자기 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정확한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를 통해, 자기 자리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율법학자이자 바리사이였던 니코데모는 단순히 종교를 정해진 규칙과 인과관계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에서 태어나는 것’은 인간의 통제나 예측을 벗어난, 전적인 하느님의 주권적이고 자유로운 은총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이야기하시며, 오직 자신만이 하늘의 신비를 땅에 온전히 계시할 수 있는 유일한 중재자이심을 선언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평하다가 불 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모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들어 올려지는 것, 즉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온전히 바라보고 믿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방식은 철저히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우리의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절대로 다다를 수 없습니다. 철저히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뜻을 따라야 자기 자리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구원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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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나만의 행복을 누리던 자궁에서 우리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 마련된 우주의 자궁이라는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나만의 행복을 위한 공간에서 우리는 모두의 행복을 위한 공간으로 떠난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만 거저 주어져 행복했던 공간에서, 모든 것을 서로가 함께 나눔으로써 행복해지는 나라로 왔습니다.
혼자만 행복한 엄마의 자궁은 자신감을 키우는 곳이지만, 모두가 행복해야 될 우주의 자궁은 서로에게 믿음을 키우는 곳입니다. 자궁의 아가에게는 주님 같은 엄마가 필요하지만, 세상 사람에게는 엄마 같은 주님이 필요합니다.
아가는 주님 같은 엄마를 믿기에 행복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엄마 같은 주님을 믿기에 행복합니다. 자궁의 아가가 불행한 것은 주님 같은 엄마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세상 사람이 불행한 것은 엄마 같은 주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은 ‘세상 일’을 하는 동안 겪은 불신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주님 같은 사람을 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세상 일’에 바빠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에 충실한 어른을 보고 아이들은 믿음을 배웁니다. ‘세상 일’을 하면서 어른들이 심어준 믿음만큼 아이들은 ‘주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성숙한 어른들이 심는 믿음은 아이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지만, 불신은 많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끄는 뿌리가 됩니다.
순수한 아이들은 여전히 믿음과 희망을 품고 우주의 자궁에서 자라고 있지만, 미성숙한 어른들은 지금도 주님과 한 약속을 깨고 전쟁을 일으키며 생명을 해치고 있습니다.
믿기엔 너무 슬픈 ‘세상 일’이지만, 그래도 전쟁이 만든 많은 순수한 희생자들은 우주의 자궁에서 ‘믿음의 천사가 되어 하늘에서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하늘 일'마저 믿지 못하면 우리에게 지금 세상은 너무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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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부활 공동체의 모습!>
오늘 복음(요한 3,7ㄱ.8-15)도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대화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위로부터의 다시 태어남,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내려놓음', '비움', '자기비하'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3-15)
사람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우리가 살고 또한 당신 자신이 사신 '부활의 결정적 표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어야 살 수 있다는 역설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이는 '이제와 영원히 살고 싶으면 내 것이 비워지고, 예수님의 것이 내 안에 채워져야 한다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 신앙의 신비를 잘 드러낸 공동체가 바로 오늘 독서(사도4,32-37)가 전하고 있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2-34ㄱ)
참으로 아름다운 부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다시 태어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내 것이 없는, 예수님의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참으로 살아 있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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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요한 3,7)
불어오는 바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바람은1느껴지고,
붙잡으려 수 없지만
분명히 지나갑니다.
우리의 삶도,
하느님의 은총도
그러합니다.
그 바람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 바람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바람처럼 사는 삶은,
애써 이루려는 삶이 아니라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
내어 맡겨드리는 삶입니다.
바람을 붙잡지 않고
그저 지나가게 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
비로소 머물게 됩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바람처럼,
삶의 의미 또한
고정되지 않고
계속 새롭게
생성됩니다.
삶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연결되는 여정입니다.
불고 있는 바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가
믿음입니다.
불고 있는
바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또한 이 바람은
우리의 계획을
넘어섭니다.
흔들리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
깨어있는 삶,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길입니다.
바람처럼
거부하지 않고
깨어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게 됩니다.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은
우리를 가장 깊이
살게 하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숨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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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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