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 된 의학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라면 똑같은 마음일 게다. 자식이 사회적 존경과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는 전문직 종사자가 되길 바라는 것 말이다. 한국에서 의대 열풍이 거센 것도 그 때문일 터. 19세기 프랑스 화가 프레데리크 바지유도 부모님의 바람 때문에 의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의사 시험에 낙방하는 바람에 자신이 원하던 화가가 되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바지유는 이타심도 강했다. 클로드 모네나 오귀스트 르누아르 같은 가난한 화가 친구들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26세 때 그린 ‘가족 모임(1867∼1868년·사진)’은 그가 얼마나 유복한 집안 출신인지를 보여준다. 맑은 여름날 오후, 부모님 집 야외 테라스에 가까운 친인척들이 모여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결혼식 단체 사진처럼 대다수는 무표정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다들 고급스럽게 잘 차려입었는데, 특히 두 여성이 입은 남색 점무늬가 박힌 하늘색 드레스는 당시 파리 상류층 사이에서 유행하던 패션이다. 바지유의 부모는 왼쪽 커다란 밤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다. 정면을 응시한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무뚝뚝하게 먼 데를 쳐다보고 있다. 의사가 되지 못한 아들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이다. 화가는 가족의 일원으로 자신도 화면에 그려 넣었다. 맨 왼쪽에 있는 키 큰 이가 바지유다. 찬란한 빛의 포착, 밝은 색채, 일상적인 주제, 야외 제작 등 인상주의의 특징을 드러내는 이 그림은 1867년 파리 살롱전에 전시됐다. 비슷한 주제로 모네가 그린 ‘정원의 여인들’은 떨어졌는데 말이다. 바지유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심사위원들이 실수로 자신의 작품을 뽑았을 거라며 모네의 낙선작을 사주었다.
안타깝게도 바지유는 29세에 요절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했다 석 달 만에 전사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바지유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거다. 만약 그가 의사가 되었다면, 과연 무엇을 남겼을까.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