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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장: 무너지는 옛 이데올로기
지난 시간에는 짧은 독법을 선택하는 원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론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실제의 예를 살펴보고자 한다. 영국 옥스퍼드에서 활동한 신약 사본학자 킬패트릭은 짧은 독법이 필사자의 실수로 인해 생겨났을 법한 경우들을 예로 제시한다. 그가 든 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비잔틴 사본들과 서방 사본들은 마가복음 11:26에서 "그러나, 너희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들을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리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저 존경받는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은 이 구절을 빠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한 것인가? 비잔틴 사본들이나 서방 사본들이 원문에 첨가한 것인가? 아니면, 저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원문을 감한 것인가? 킬패트릭은 여기서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원문을 감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25절과 26절이 모두 헬라어 ta praptwmata humwn (너희들의 잘못들)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사자들은 25절까지 필사한 후 26절까지 필사한 것으로 착각하고 27절로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학계에서 왕따당하는 것을 각오한 학자다운 주장이다. 그는 학계의 눈치를 살피는 대신 당당하게 그의 제자 엘리엇과 함께 내증을 외증보다 더 중요시하는 본문비평학파를 형성하고 현대 신약사본학의 한 축을 형성한 것이다. 우리 한국신약학계도 서구학계의 동향의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식민지 신학의 신세를 면하고 한국신약학파를 형성하려면 이러한 용기를 필요로 할 것이다.
혹자는 마가 11:26은 마태 21:15에로의 본문조화(harmonization)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본문조화란 그렇게 함부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태(마태복음 기자의 약어)가 마가를 자료로 사용했다면, 마태 21:15절은 마가 11:26과 유사한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마태우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결과는 매 한가지이다. 마태를 마가가 자료로 사용했더라도, 마태 21:15와 마가 11:26은 원래 유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마가 11:26이 필사자들의 본문조화로 생겨난 것이라면 왜 마태 21:15와 다른가? 더구나, 마태가 ei (만일) 다음에 가정법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필사자들은 왜 본문조화를 시킬 때 문법적으로 어색한 직설법으로 바꾸었는가? 그러나, 마가 11:26이 원문이라고 가정하면, 마태 21:15의 변화는 문법적으로 다듬은 것으로 설명이 된다. 그러므로, 네슬판이 마가 11:26을 빠뜨리고 있는 것은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을 신봉하는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것일 수밖에 없다. 시내산 사본(알렙)과 바티칸 사본(B)이 일치하는 것을 보고는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가 합의하면 정신 못 차리고 따라가도 되는가?
네슬판에는 누가복음 23:17이 빠져 있다. 이것은 고대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인 파피루스 75, 바티칸 사본(B) 등을 따라간 것이다. 그러나, 비잔틴 사본들이나 서방 사본들은 이곳에서 "그런데, 그는 명절에 한 사람을 그들에게 석방시킬 필요가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킬패트릭은 이 구절이 원문에 있었으며, 고대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의 17절 생략은 이 구절이 시작인 anagke:n de와 18절의 시작인 anekragon de의 유사성으로 인해서 필사자의 눈이 17절 앞에서 18절로 건너뛰면서 생긴 것으로 본다.
네슬판은 난하주에서 17절 추가를 본문조화라고 정죄한다 (네슬-알란트 27판, 238 쪽; T라는 표시는 "추가"라는 의미이도 p)라는 기호는 "본문조화"라는 의미이다). 마태 27:15나 마가 15:6에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들에로 조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마태 27:15가 마가 15:6에 유사할 수 있듯이 누가도 원래 마가와 비슷하면 안 되는가? 도대체, 왜 본문조화라는 판단은 어디서 온 것인가? 3세기경으로 연대 매겨지는 고대 파피루스인 P75와 최고로 신봉 받는 대문자 사본 바티칸 사본(B)이 17절을 생략하는 것을 보고 확신에 차서 17절은 원문에 없었다고 미리 결정한 후에 내린 판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네슬판의 이러한 판단을 과연 옳은가? 아니다. 누가복음 23:17은 마태나 마가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 구절은 누가의 문체에 일치한다. anagke:n ... eichen ("... 필요가 있었다")은 마태나 마가에서 발견되지 않지만, 누가는 이미 14:18에서 쓴 표현이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고전 7:37, 히 7:27, 유다 1:3에서 이러한 표현이 발견됨). 사본 필사자가 마태와 마가에 조화시키기 위해 누가 23:17을 첨가하면서 오직 누가 14:18절에서 암시된 누가의 문체를 이처럼 흉내낼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억지 설명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누가복음 저자 자신이 이 구절을 처음부터 기록했는데, 저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17절과 18절의 초두가 비슷해서 실수로 17절을 빼먹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낫다.
네슬판은 원문에 매우 근접한 본문을 제공하고 있지만, 완벽한 원문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위의 예들에서 드러난다. 비록 네슬판이 비잔틴 사본들에 토대한 소위 공인본분(Textus Receptus)보다 우수한 본문을 제공할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공인본문이나 비잔틴 사본들이 네슬판과 다를 때 언제나 네슬판이 옳은 것은 아니다. 네슬판은 분명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에 대한 신뢰와 비잔틴 사본들에 대한 불신을 이미 작업 가설처럼 전제하고 만들어진 작품인 것을 고려한다면, 앞으로의 사본학적 작업은 비잔틴 독법들을 여기저기에서 부활시킬 가능성이 높다.
1965년에 영국 옥스퍼드에서 킬패트릭에 의해 제기된 짧은 독법 선호 기준에 대한 반란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가서 1975년에 그 혁명의 꽃을 피운다. 그 혁명의 주인공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의 제임스 로이즈였다. 그는 고대 파피루스들이 추가하기보다는 빼먹는 경향성을 보이는 것을 발견하였다. 로이즈가 증거로 제시한 파피루스들은 P45, P46, P47, P66, P72, P75 등 쟁쟁한 고대 파피루스들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파피루스들이 실수로 빠뜨린 짧은 독법을 따라가다가는 원문보다 짧은 본문에 도달할 것이다.
킬패트릭이 옥스퍼드에서 던진 공은 미대륙으로 건너가서 마구 날뛰다가 1990년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케임브리지로 날아간다. 복음주의자들이 케임브리지에 세운 틴델 하우스에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케임브리지 대학의 신약학 강사를 겸하는 젊은 신약학자 헤드(P.M. Head)는 로이즈가 제시한 파피루스외에 다른 파피루스들도 더하기보다는 빼먹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는 (다른 요인들이 동일하다면) 짧은 독법을 선호하지 말고, 차라리 긴 독법을 선호해야 한다"고 까지 주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짧은 독법을 선호해야 한다는 수백년된 사본학의 원리는 킬패트릭-로이즈-헤드의 속공에 무너지고 만다.
시험공부를 하지 않고 4지 선다형의 문제에서 가장 짧은 것을 찍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무지한 것이다. 그래서 마칠 수 있는 것은 잘해봐야 반타작이요, 대개 25%밖에 못 건질 것이다. 정답을 고르려면 답의 길이를 잴 것이 아니라 내용을 살펴야 한다. 수 백 년간 사용되어온 짧은 독법 선호의 원리는 객관식 시험에서 공부 않고 답을 맞추는 비법처럼 사본학도들을 유혹하지만 이제는 폐지되어야 할 구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제 12 장: 뽑혀지는 옛 푯말
비잔틴 본문이 원문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간주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매끄럽게 읽혀지기 때문이다. 오랜 필사 과정에서 다듬고 다듬어진 본문은 원문보다 더 매끄러워질 수 있기 때문에 사본학자들은 매끄러운 비잔틴 본문을 후기 본문으로 간주한다. 사본 필사자들이 선본(Vorlage)의 문체를 다듬는다는 생각의 기원은 최소한 18세기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가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토대로 하여 편집된 것이라는 내용의 그리스바흐 가설(the Griesbach hypothesis)로 인해 공관복음 문제 연구자들에게 꽤나 유명한 그리스바흐는 사본학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796년에 거친 독법이 매끄러운 독법보다 선호되어야 한다는 판단 기준(criterion)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과연 비잔틴 본문은 늘 다른 사본들이 간직한 본문(text)들보다 더 매끄러운가? 아니다! 비잔틴 본문은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들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옥스퍼드의 신약 사본학자 킬패트릭은 비잔틴 본문이 "대답하여 말했다," "대답하여 말한다" 등의 그리스어로서는 어색한 표현들이 고급스런 "진술했다(efe:)"로 고쳐지지 않고 보존된 것을 지적했다. 그는 마가 9:12, 9:38, 10:20, 10:29, 12:24, 14:29 등을 예로 든다. 미국의 사본학자 스터르즈는 예를 추가한다: 마태 24:2, 26:63, 마가 5:9, 7:6, 8:28, 10:5, 11:29, 11:33, 12:17, 13:2, 13:5, 14:20, 누가 5:22, 14:5, 20:34. 비잔틴 사본 필사자들은 분명 이러한 표현들을 고급표현으로 교정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지만 손을 대지 않고 보존한 것이다. 그렇다면, 비잔틴 사본들이 후기에 마구 고쳐진 사본이라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킬패트릭과 스터르즈는 설령 그리스바흐가 제시한 판단 기준대로 매끄러운 독법이 후기의 것이라고 해도 비잔틴 본문에도 오래된 독법들이 보존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바흐의 주장대로 과연 필사자들은 문체를 더 다듬는가? 18세기말에 제기된 그리스바흐의 주장과 완전히 상반된 주장이 벧쉬타인에 의해 18세기 중순(1752년)에 제기된 것은 기억할 만하다. 벧쉬타인은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한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두 개의 상이한 독법 중에, 한 독법이 더 읽기 좋고 더 명확하고 더 고급 그리스어로 되어있다고 다른 독법을 바로 선호해서는 안 된다. 더욱 자주 그 반대의 경우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21세기를 맞이한 지금 들어도 학문의 자유가 느껴지는 속시원한 발언이다. 대부분의 필사자들이 과연 문체를 더 좋게 만들 수 있을 만큼 헬라어에 정통했겠는가? 분명 어떤 필사자는 문체를 더 나쁘게 만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바흐는 분명 당시 지식인들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출판된 벧쉬타인의 책을 읽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후에 벧쉬타인의 경고를 무시하고 더욱 거친 독법을 선택하는 원리를 세우고야 만다. 그 후 사본학의 거장들인 옥스퍼드의 킬패트릭, 프린스턴의 메쯔거 등이 그리스바흐가 세운 푯말만을 보고 따라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한편, 킬패트릭은 2세기 필사자들이 신약본문 속으로 다량의 애틱(Attic) 그리스어 표현들을 투입했다고 주장하였다. 애틱 그리스어란 기원전 4-5 세기 경에 아테네 사람들이 사용한 그리스어로서 간결하고 우아한 고전 그리스어이다. 신약성서는 이런 고전 그리스어가 아니라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는데, 코이네 그리스어는 알렉산더 대왕이 제국을 중동지역으로 확장하면서부터 그리스어가 널리 전파되어 형성된 그리스어로서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에서 공용어로서의 사용되던 말이다. 킬패트릭의 주장에 의하면,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의 문체를 2세기 필사자들이 고전 그리스어로 열심히 고쳤다는 것이다.
스터르즈는 이러한 고전 그리스어 열풍이 세게 불었던 지역은 알렉산드리아였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보유한 고급 표현들은 원문에서 유래하기보다는 필사자들의 교정에 근거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반면에 비잔틴 사본들이 보유하고 있는 고전풍이 아닌 평범한 헬라어는 원문에 기인할 수 있다. 킬패트릭이 제시한 예를 살펴보자. 고린도후서 13:4에서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고전풍인 능동태 ze:somen를 사용하지만, 비잔틴 사본들은 중간태 ze:sometha를 사용한다. 만일 고전풍을 흉내내는 것이 2세기 사본필사자들에게 인기였다면, 비잔틴 사본에 나타난 비고전풍의 독법인 ze:sometha가 원문을 반영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킬패트릭과 스터르즈의 주장은 과연 옳은가? 그들이 따라간 푯말은 과연 옳았는가? 가다가 벼랑을 만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과연 2세기 필사자들은 고전 그리스어에 정통한 자들이었는가? 과연 그들은 신약성서의 문체를 고전풍으로 바꾸려고 한 복고주의자들이었는가? 오히려 그 반대라면 어쩌겠는가?
현대신약사본학의 최고의 거장 중의 한 명인 고든 피(Gordon D. Fee)가 이러한 푯말은 쓸모가 없다고 과감하게 주장한 것은 참으로 학자들의 명예를 높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저 쓸모 없는 푯말을 없애서 후학들을 더 이상 현혹시키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이유는, 저자가 때로는 투박하고 어색한 표현을 쓰다가 때로는 고급 그리스어를 쓰기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모국어가 그리스어가 아닐 경우 또는 저자가 사용한 자료가 그리스어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예를 들어, 아람어일 경우) 이러한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신약성서의 경우에는 이것은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이다. 피가 든 예를 살펴보자. 요한복음에는 고급 그리스어 표현인 "대답하였다" (apekrithe:)와 (21 회) 어색한 표현인 "대답하고 말했다" (apekrithe: ... kai eipen)라는 표현을 (19 회) 모두 사용한다. 그래서, 비록 어색한 표현인 "대답하고 말했다"를 필사자가 "대답하였다"로 고칠 가능성이 많지만, "대답하였다"가 본래 저자에 의해서 쓰여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저자의 문체가 투박한 경우에는 투박한 독법이 선호되어야 하지만, 저자의 문체가 고급스런 경우에는 고급스런 독법이 선호되어야 한다. 저자의 문체가 때로 투박하고 때로는 매끄러울 경우에는 투박하냐 매끄러우냐 하는 것은 전혀 판단 기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원문복원작업을 위해서는 필사자의 경향만이 아니라 각각의 저자의 특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비록 100% 완벽한 원문이 없지만, 거의 모든 사본들이 일치하는 부분들을 통해서 저자의 문체를 파악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비잔틴 사본들이 매끄러운 표현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나중에 다듬어진 것이라고 단정하거나,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고급스런 그리스어 표현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복고풍으로 변질되었다고 단정하기 전에 각 성경 기자들의 문체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경 각 권을 따로 연구해야 하는 것은 성경신학에서만이 아니라 성경사본학에서도 마땅히 취해야할 방법론일 것이다.
제 13 장: 셈어적인 문체와 사본학
신약성서는 헬라어(헬레니스틱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헬라어가 모든 성서기자들의 모국어였던 것은 아니다. 영어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사람이 영어로 논문을 쓸 경우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어색한 표현이 여기저기 나타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헬라어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사람들이 기록한 신약 성서 이곳저곳에서는 어색한 헬라어 표현이 발견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어색한 표현들은 종종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모국어였을 아람어 표현을 반영할 것이다. 마치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미국인이 한국어로 말을 할 때, 종종 영어식으로 말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되는 것처럼 ...
고전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다가 신약성서를 읽으면 표현이 어색한 것을 곧 발견할 것이다. 이러한 어색한 표현은 대개 히브리어/아람어를 알아야 이해될 수 있는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에, 신약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헬라어만이 아니라 히브리어/아람어를 알아야 한다.
고전 헬라어에 비해 신약성서의 헬라어의 문체가 떨어진다고 비웃는 사람은 비웃게 버려 두라. 그의 고전 헬라어 실력은 신약이해에 별 도움을 못 줄 것이다. 위대한 신약학자가 되기를 꿈꾸는 후학들이여! 열심히 히브리어를 공부하라! 네덜란드 최고의 신약학자가 누구냐고 네덜란드 신약학자들에게 물어보면, 서슴지 않고 은퇴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 교수인 바르다를 언급할 것이다. 바르다는 헬라어, 라틴어만이 아니라, 히브리어, 아람어, 아랍어, 시리아어, 콥트어, 페르시아어 등에 달통한 학자인데, 신약성서를 읽으면 머리 속에서 아람어로 번역이 떠오르는 천재적인 학자이다. 서구 신약학자들 중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는 학자들은 이처럼 히브리어/아람어에 뛰어난 학자들이다.
일찍이 김세윤 교수님은 한국에서 강의하실 때 학생들에게 이처럼 헬라어를 아람어로 번역할 수 있는 학자들이 한국에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표현하신 적이 있다. 그때, 필자도 강한 도전을 받고 열심히 히브리어, 아람어를 공부했지만 아직 저 신약학 신선들의 경지에는 근처에도 못 도달했다고 고백한다. 필자와 같은 사람에게 그러한 경지는 어쩌면 인생의 황혼기에나 간신히 도달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신약학 신선들의 경지에 젊은 시기에 도달하는 신약학자들이 후학 가운데서 많이 배출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복음서 연구의 경우에는 아람어 실력의 필요성이 특히 심각하다. 예수께서 아람어를 사용하는 군중들을 상대로 사용하신 언어는 아람어였을 것이고, 유대서민들은 아람어로 예수님의 말씀을 전승했을 것이다. 그 전승들은 헬라어로 번역되어 전승되다가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결집/편집되어 복음서를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전승 과정은 헬라어로 기록된 복음서에 아람어적 표현들이 나타나도록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표현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아람어 실력이 필요한 것이다.
아람어/히브리어적 표현을 신약 헬라어에서 발견해내는 실력은 신약사본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아람어 내지 히브리어 표현이 헬라어에 반영되어 있을 경우, 사본 필사자들은 문체를 다듬고자 그러한 표현을 정상적인 헬라어 표현으로 고치곤 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성에 대한 가정은 사본학자들이 아람어/히브리어적 독법과 헬라어적 독법 중에서 아람어/히브리어적 독법을 원문에 가까운 것으로 선택하도록 한다. 한국에 와서 살던 미국 사람이 한국말을 배워서 "한국의 가을 하늘 아름답습니다 참"라고 원래 적었을 경우에 필사자들은 "한국의 가을 하늘은 참 아름답습니다"로 고치려할 것이고, 이 두 가지 독법이 전승되어 필사본들에 나타날 경우, 현명한 사본학자는 저 어색한 "한국의 가을 하늘 아름답습니다 참"을 원문에 가까운 것으로 선택할 것이다.
사본학의 신선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우리의 킬패트릭은 바로 이러한 사본학적 원리에 입각하여 비잔틴 사본들에서도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가 든 예를 몇 개 살펴보자. 마가 1:27에서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은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적고 있다. 네슬-알란트 판은 물론 그들의 흠모하는 애인들의 미니 스커트(짧은 독법)에 반하여 이 독법을 따라간다. 한편, 비잔틴 사본들은 여기서 "왠 새로운 가르침이냐, 이것이?"(tis he: didache: he: kaine: aute:)라고 적고 있는데, 이 독법은 어순이 헬라어로서는 어색하지만, 주어가 뒤에 나올 수 있는 히브리어(또는 아람어)에서는 정상적이다. 그래서, 이 어색한 헬라어를 다듬지 않고 보존한 비잔틴 사본들을 여기서 신뢰할 수밖에 없다. 저 어색한 헬라어 표현은 비록 투박해도, 예수 말씀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왠 새로운 가르침이냐, 이것이?" 짧은 독법을 따라야 한다면서 "새로운 가르침"이란 독법을 선택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의상을 복원하면서 미니 스커트를 선택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우스꽝스런 일이다. "왠 우스꽝스런 선택이냐, 이것이?"
마가 10:51에서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대답하시며 그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라고 적고 있는데, 비잔틴 사본들은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그에게 예수께서"라고 어색한 순서의 헬라어로 적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주어가 동사 뒤에 나오는 어순은 히브리어/아람어에서는 정상적인 것이다. 비잔틴 사본들은 이렇게 헬라어로서는 어색하지만 저자가 기록했을 법한 독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네슬-알란트 27판은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따라갈 뿐 아니라 아예 비잔틴 사본들의 독법을 비평주에 소개도 하지 않는다. 우째 이런 일이!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것이다. 이것은 네슬-알란트판을 표준으로 사용하는 신학자들에게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닐 것이다.
비록, 저 에라스무스가 장사 속으로 출판한 공인 본문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게릴라 부대에 합류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최소한 네슬판 종속 신학에 종언을 고할 필요가 있다. 한국 신학의 서구로부터의 독립은 네슬-알라트판으로부터의 독립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서구 학자들이 만든 네슬-알란트판을 그대로 사용하는 몰사본학적인 신학계는 서구신학으로부터 철저한 독립을 할 수 없다. 또한 에라스무스의 공인 본문으로 무조건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말씀보존학회 역시 서구 근본주의자들의 주장들을 수입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의 신학도들에게는 이제 이러한 수입품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따라갈 의무가 없다. 그러나, 우리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 것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엄밀한 사본학적 노력을 통해 발굴해 내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것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미래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대한신학독립만세!
제 14 장: 70인역과 신약 사본학
신약성서 사본들에 나타난 헬라어적 표현과 히브리어/아람어적인 표현이 함께 나타날 경우, 히브리어/아람어적인 표현이 원문일 가능성이 많다.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는 관계로, 필사자들이 히브리어/아람어적인 어색한 표현을 헬라어적인 표현으로 고쳤을 가능성이 그 반대로 고쳤을 가능성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원리를 개개의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도그마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그러한 사본학은 더 이상 학문이 아니라 독단일 뿐이다. 당시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는 바르트가 한국의 일부 교계에 자유주의신학자로 소개된 것처럼 어이없는 일이 발생한다. 바르트 만큼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싸운 사람도 없을 터인데, 바르트를 자유주의라니! 사람을 죽인 강도와 격투하여 강도를 때려잡은 용감한 시민이 경찰에게 살인죄로 체포당하는 것처럼 억울한 일이다. 그 억울한 일을 당한 시민은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제대로 항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목격자는 그 경찰관의 정체를 알 것이다. 제복을 입은 사이비 경찰관이요 강도들의 앞잡이인 것이다. 바르트 신학은 오늘날의 한국상황이 아니라 당시 유럽 상황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셈어적인 문체를 고려할 때에는 신약 저자들과 필사자들의 당시 언어 환경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아람어적 표현이 언제나 원문을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 구약의 헬라어역인 70인역(LXX)이 초대교회에 미친 영향 때문이다. 70인역은 히브리어/아람어로 된 구약의 번역인 관계로 비록 헬라어로 되어 있지만 그 표현들이 상당히 히브리어/아람어적이다. 그러한 셈어적인 헬라어는 오래도록 회당을 중심으로 70인역을 읽으며 종교생활을 한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적인 헬라어 내지 유대적인 헬라어로 느껴지게 되었으며, 후에 신약성서를 기록한 유대인들은 이러한 "거룩한" 헬라어로 성서를 기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셈어적인 헬라어는 단지 성서기자들만이 아니라, 사본 필사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본문을 더욱 종교적인 헬라어로 기록하고자 여기저기서 70인역적 헬라어로 바꾸도록 했을 것이다.
그래서, 셈어적인 헬라어를 무조건 선호할 것이 아니라, 혹시 70인역적인 헬라어가 아닌지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70인역의 영향으로 설명될 수 있는 셈어적 표현은 원문일 가능성도 있지만, 사본 필사자들이 70인역의 문체를 흉내낸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고든 피는 비잔틴 사본들의 셈어적 문체는 70인역의 영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비잔틴 사본들이 더 많은 셈어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다고 더욱 우월한 사본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무너지는 것이다.
70인역의 헬라어가 종교적 헬라어로 정착되어 회당 헬라어로 사용된 현상과 유사한 현상이 한국에서도 나타났다. 개역성경의 한국어는 한문을 번역한 듯한 역어체로 되어 있지만, 오래도록 교회에서 사용되어 오면서 종교적 한국어로 느껴지게 된 것이다. 언어의 의미는 그 활용에 있듯이, 문체가 주는 느낌도 그 문체가 사용되는 사회적 환경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 기자들, 특히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저자들이 70인역적 헬라어, 즉 종교적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성서 번역을 할 때, 특히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시사점을 준다. 종교적인 한국어로 굳어진 개역성경적인 한국어의 문체를 반영하는 것이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헬라어 문체를 살리는 길일 수 있을 것이다. 현대한국어의 문체를 따라간 표준새번역이 교회들에 의해 예배용 성서로 사용되지 않는 데에는 표면상 제기된 신학적인 문제보다는 이러한 언어적인 문제가 내면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언어심리에 대한 고려가 좀더 있었더라면, 원어 반영에 있어서 진일보하여 성경공부를 위하여 권할만한 번역본인 표준새번역은 일찍이 예배용 성서로서도 자리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70인역 문체에 대한 고려는 비잔틴 사본들을 조심스럽게 평가하게 한다. 셈어적인 표현을 잔뜩 지닌 비잔틴 사본들은 열등하다고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셈어적인 표현들은 필사자들에 의해 다듬어지지 않고 남은 원초적인 표현들로서 원문을 반영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셈어적인 표현들 때문에 비잔틴 사본들이 다른 사본들보다 우월하다고 간주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셈어적인 표현들의 상당수가 실은 70인역적 역어체 헬라어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셈어적인 문체가 70인역적이지 않을 경우에는 필사자들이 70인역의 영향으로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본래 셈어적이었으며, 따라서 그 표현은 원문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70인역 문체의 영향을 고려하면서 사본학을 할 때, 과연 비잔틴 사본들은 어떠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는 앞으로 우리가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70인역적인 헬라어를 70인경의 영향을 받은 필사자들 탓으로 돌리는 것이 언제나 안전한 것은 아니다. 저자의 문체가 본래 70인역적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70인역의 문체로 저술을 한 작품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원문을 복원할 때에는 70인역적인 헬라어 표현이 필사자에 의해 도입된 것이 아니라 저자의 문체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70인역적이지 않은 셈어적인 문체는 오직 70인경적이지 않은 셈어적 문체로 저술된 성경, 예를 들어 마가복음의 원문복원에서 사용될 수 있는 원리이다.
신약사본학을 위해서는 문체에 대한 감각이 필요하다. 셈어적인 헬라어 문체, 70인역적인 헬라어 문체, 각 저자의 헬라어 문체에 대한 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신약사본학도는 우선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등에 탁월한 실력을 연마해야 함은 물론 성서 각 저자의 문체를 면밀히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오늘날은 Bible Works와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 덕분에 이러한 관찰이 쉬워져서 우리는 이제 사본학이 재미있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제 신약 사본학을 위해서 "마태복음의 헬라어 문체," "마가복음의 헬라어 문법," "누가복음의 헬라어 구문" 등과 같은 책들이 저술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원문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통계를 위해 네슬판이나 공인본문(TR)을 사용할 수 밖에 없지만, 네슬판이나 공인본문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이들이 원문을 90% 이상 반영하는 것은 분명하므로, 이러한 각 저자의 헬라어 문법, 문체, 구문 연구는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헬라어 연구는 신약 사본학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것일 뿐 아니라, 성서번역, 성서주석을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제 15 장: 사본학에서의 바알세불 논쟁
성서학에 기초하지 않은 교의학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시대가 바뀌면 바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신약사본학과 신약헬라어 연구 없는 신약학도 토대가 약하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신약 연구에는 고등비평이 주된 방법론으로 사용되어왔고, 사본학이나 신약헬라어 연구 등의 기초분야는 하등비평이라고 무시된 것인지 관심을 끌지 못해 온 것이다.
고등비평은 그 용어 때문인지 매우 고등한 학문분야인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과연 고등비평은 하등비평보다 우월한가? 고등비평은 하등비평을 토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서학이라는 집의 상부에 위치할 뿐이지 더 고차원적이거나 더 어려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등비평분야에 해당하는 공관복음 문제 연구의 경우, 세 복음서의 상호관계 연구인데, 그 중에서 어느 복음서가 우선하는지 찾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어렵기는 어렵지만 공관복음 문제는 풀릴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반면에, 신약원문을 복원하는 본문비평학은 수천개의 사본들의 숲 속에서 사라진 원문의 조각들을 찾아 복원하는 일이라 어렵기 그지없다. 더구나, 100% 원문을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본문비평학(textual criticism)은 하등비평이라 불릴 것이 아니라 기초성서학이라 불려야 더욱 합당할 것이다.
기초과학이 약하면 다른 과학분야가 발전할 수 없다. 과학분야가 약하면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없다. 그래서, 과학 분야에서는 기초과학이 매우 고등하게 여겨진다. 신학분야에서도 성서학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만, 성서학 내에서, 최신비평이론들이 선호되는 가운데 기초성서학분야들이 경시되는 것은 성서학 발전을 위해서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이렇게 도외시된 사본학 분야에서 열심히 설치고 있는 자들이 있으니, 다수 본문 또는 킹제임스 역본 지지자들이다. 이들이 사본학에 대중의 관심을 기울이게 한 것은 다행스럽고, 이것은 그들의 공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상대방의 증거는 숨기고 자기들의 증거만을 제시하는 부정직한 논법으로 대중을 현혹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구나, 다른 본문이나 역본들을 마귀의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히 성경 모독죄가 아닌가 염려된다. 또한, 어쨌든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성경을 마귀의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마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그들은 논쟁에서 이기려다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논법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면서 사용한 논법과 흡사하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게서 귀신을 좇아내시는 것을 보고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예수님이 혹시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야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동요하는 무리를 보고 시기심이 일어났는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 즉 사탄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주장하게 된다 (마태 12:24). 결국 예수님을 반대하는 의욕이 앞선 나머지 넘지 못할 선을 넘게 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한 번쯤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아야 했을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는 사람을 사탄의 능력으로 사역한다고 주장한다면 성령을 사탄이라고 모독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에 차서 예수님을 대적하다가 결국 성령을 사탄이라고 여기는 성령모독죄를 범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하는 율법의 파괴자로 보였던 것이다. 바리새 전통이 확실한 진리라고 믿었던 그들은 그들의 전통을 어기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결국 사탄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해석한 것이다. 결국 자기들과 다르다고 하여 예수님을 정죄하다가 하나님의 성령마저 모독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자기들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 확신이 하나님을 모독하는데 까지 가고만 것이다.
킹제임스 역본이 토대한 공인본문 또는 다수 본문이 옳다고 믿은 나머지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다른 본문이나 역본들을 마귀의 성경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저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다시 범하고 있다. 그들이 개역성경이나 네슬-알란트판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반대하는 데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들을 마귀의 성경이라 부르며 성경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참으로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마귀의 성경"이라는 악의에 찬 표현은 사본학을 모르는 대중을 현혹하는 표현일 뿐 아니라, 결국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모독이요, 나아가 선지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성령께 대한 모독이다.
킹제임스 역본은 매우 훌륭한 번역이며, 그 뒤에 놓인 공인본문도 매우 우수한 본문이다. 그것은 원문을 열심히 필사하며 전수한 결과로서, 비록 약간의 변경이 있어도 원문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본문이다. 그러나, 네슬-알란트판이나 표준새번역도 역시 매우 우수한 본문이요 매우 좋은 번역이다. 어찌 한 쪽이 천사의 성경이고 다른 한 쪽은 마귀의 성경이겠는가?
확신에 차서 어떠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는 주장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데까지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학문의 세계에는 100% 옳은 이론도 없고 100% 틀린 이론도 없다. 조금 더 옳고 조금 더 틀릴 뿐이다. 사본들 중에도 100% 원문을 보존하고 있는 사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100% 틀린 사본도 있을 수 없다. 좀더 나은 사본, 좀더 못한 사본이 있을 뿐이다. 공인본문을 택하건 네슬판을 택하건 어느 쪽도 원문을 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택해도 원문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공인본문과 네슬판은 사실상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세한 차이를 과장하여 한 쪽은 마귀의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성경에 대한 모독이다. 물론 마귀는 약간의 변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한다고 하지만, 미세한 차이를 과장하여 순수한 성도들을 속이는 것은 부정직한 것이다.
우리에게 성경의 원문을 없다. 그리고, 사본학을 통해 100% 원문을 복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끝없이 원문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100% 원문이 있어도 성경을 다 해석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석학을 통해 성경을 100% 다 알 수는 없다. 한 걸음씩 평생 성경을 좀더 알아 갈 수 있을 뿐이다. 성경을 다 안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시다. 저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주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분이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이 창조주 하나님이다. 성서는 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안내판이다. 우리는 안내판을 신뢰하지만 그 안내판을 믿음의 궁극적 대상으로 섬기지는 않는다. 그 안내판을 좀더 명확하고 선명하게 하려는 노력은 그 안내판이 가리키는 하나님에 대한 작은 사랑의 표현일 뿐이며, 안내판을 보고 따라가는 성도들과 그 안내판을 곧 접하게 될 인류에 대한 작은 봉사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과 봉사로서의 사본학은 안내판을 닦는 청소에 불과한 일이더라도 바로 그 안내판이 가리키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값지게 바뀌는 것이다.
제 16 장: 킹 제임스의 최후
"공인본문" 또는 킹제임스역의 우월성 내지는 무오성(!)을 주장하는 사본학의 반군들은 한국에도 상륙하여 꽤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였다. 이들은 항체가 개발되지 않은 한국에 침투하여 한동안 승리의 행진을 거듭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활약은 사본학이라는 항체를 요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기독교 신학의 핵심에 성서가 있다면, 이 성서의 원문의 형태를 복원하는 사본학적 작업은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도외시되어 왔다. 그런데, 이제 새로 등장한 강력한 병균에 의해 사본학이라는 약품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한국에 학문적인 사본학이 발전하게 된다면, 그 일차적 공로를 상륙한 반군부대인 말씀보존학회에 돌려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로를 돌리기 전에 우선 말씀보존학회의 그럴듯한 주장의 허구성을 요약 정리해 보자.
1. 정상적 상황에서는 다수의 사본들이 원문을 반영할 수 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가 모슬림들에 의해 정복되고 헬라어 사용이 비잔틴 제국으로 줄어든 상황 때문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지역인 비잔틴 지역에서 대부분의 헬라어 사본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비잔틴 사본들의 다수성은 원문성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제 3 장).
2. 하나님께서 많은 교회들이 성경 원문을 사용하도록 보존하셨다는 말씀보존학회의 교리적 주장은 자살 논리이다. 더 많은 교회들이 네슬판에 토대한 개역성경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대부분의 교회가 원문에 토대한 성경을 사용하도록 섭리하지 않으셨겠는가? (제 3 장)
3. 고대 파피루스들은 비잔틴 본문에도 초기 독법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몇몇 독법들은 비잔틴 본문 전체를 재평가하게 하지는 못한다 (제 5 장).
4. 본문조화일 가능성을 가진 독법들을 검토한 통계는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에 비잔틴 사본들보다 훨씬 적은 수의 본문조화 독법의 후보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고려할 때,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에 진짜 본문조화 독법이 더 적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이 비잔틴 사본들보다 우수한 사본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제 8 장).
5. 비잔틴 본문에는 더 많은 본문 병합이 나타난다. 본문 병합은 본문의 후기성의 증거이므로, 비잔틴 본문 형태는 후기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 9 장).
6. 교회 일반이 사용하는 성경은 비록 100%는 아니더라도 원문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성경을 단지 비잔틴 본문 내지 에라스무스의 본문 (소위 공인본문)과 조금 다르다고 해서, "마귀의 성경"이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마귀라고 간주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제 15 장). 자신들이 좋아하는 사본들을 옹호하고자 신성모독죄를 짖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잃은 것이 얻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킹제임스역 지지자들 또는 말씀보존학회는 이제 과거의 단순한 주장에 종말을 고하고 이제 상대를 존중하는 학문적인 태도로 사본학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비잔틴 사본이 대부분의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열등한 것은 아니다!"라는 겸허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1. 공인본문이나 킹제임스역 뒤에 놓인 비잔틴 본문은 4세기의 루시안(Lucian)의 개정작업에서 기원한다는 추측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개정작업이 우수한 고대사본을 토대로 되어졌을 수 있기 때문에, 루시안의 개정 작업이 비잔틴 본문의 열등성을 필연적으로 함축하지는 않는다 (제 2 장).
2. 비잔틴 사본들의 후기성은 열등성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더 오래된 사본이 더 원문에 가깝다고 주장될 수 없다. 왜냐하면, 후기 사본도 매우 초기의 사본을 필사한 사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래된 이집트 사본들은 건조한 사막 기후로 인해 더 오래 보존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 4 장).
3. 초기 교부들의 성서인용이 비잔틴 본문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비잔틴 본문의 초기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비잔틴 지역에는 우리가 성서인용을 검토할 만큼 충분한 저술을 한 초기 교부가 없기 때문이다. 나무에서 물고기를 잡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제 6 장).
4. 본문조화라는 판단기준으로 비잔틴 본문을 열등하다고 규정할 수 없다. 본문조화는 다른 사본(특히 베자사본)에서도 많이 일어나며, 공관복음간의 상호 일치는 본문조화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본래 원문상 일치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독법이 본문조화이므로 원문이 아니라는 판단은 그 독법이 원문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가정한 순환 논법이 불과하다 (제 7 장).
5. 비잔틴 본문이 더 길다고 해서 더 열등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본필사과정에서 본문은 의도적으로 추가된 독법들이 계속 필사되어 점점 길어지기도 하지만 실수로 생략된 독법이 재생되지 못하여 점점 짧아지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본 필사의 역사는 이 두 가지 변화의 종합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늘 짧은 독법을 선택하면 원문보다 짧은 본문에 도달하게 되고, 늘 긴 독법을 선택하면 원문보다 긴 본문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특히 고대 파피루스들은 빼먹는 경향성 때문에 이들을 따라 짧은 독법을 선택하는 것은 위험하다 (제 10 장).
6. 비잔틴 본문이 매끄럽다고 해서 후기 본문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비잔틴 본문은 어색한 헬라어 표현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매끄러운 독법이 나중의 것이라는 판단기준은 신빙성이 없다. 저자 자신이 때로는 투박한 표현을 때로는 매끄러운 표현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투박하냐 매끄러우냐 하는 것은 저자의 문체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문체에 대한 고려 없이 어느 한 쪽을 원문에 가깝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제 12 장). 또한, 비록 셈어적인 표현들이 실은 70인역적 표현일 수도 있지만 (제 14 장), 비잔틴 본문의 셈어적인 표현들은 원문의 반영일 수 있다 (제 13 장).
공인본문이나 비잔틴 본문은 말씀보존학회나 그 동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완벽한 본문은 아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대개의 사본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완전히 열등한 본문도 아닐 것이다. 비잔틴 본문의 실상은 이 양 극단의 어느 중간 지점에 위치할 것이다. 그렇다면, 원문복원을 열심히 하다보면 현재의 네슬-알란트판을 공인본문에 조금 더 가깝게 고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말씀보존학회의 독단적 주장의 종말(철회)은 동시에 네슬-알란트 26-27판의 종말(개정)과 함께 예견되는 것이다. 그 때 겸손한 자들은 눈물을 닦고 오만한 자들은 고개를 떨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