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2일
김오랑 소령은 12일 저녁 아내 백영옥에게 전화로 "오늘도 집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 미안해" 라고 말한다. 백영옥은 미안해란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여인의 예감처럼 이 통화는 남편이 아내에게 들려준 마지막 음성이 되었다.
1979년 12월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자신의 상관인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총장이 자신을 보직 해임한다는 사실을 알고 총장을 연행하려면 국방부장관과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사조직을 통해서 12일 저녁 군사행동을 저지른다.
당시 신군부에 속하지 않은 군단 급 지휘관이 있는 군단급부대로 서울에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부대는 특전사령부와 수도경비사령부(수도방위사령부)였다. 전두환은 이들을 저녁 연희동요정에 초대하여 만취작전을 썼지만 실패하고 이 두 사령관은 바로 반란군 신군부에 대항하여 투쟁을 하였다.
김오랑 소령은 김해공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또 강직한 군인으로 인정이 되어 정병주 특전사사령관의 비서실장이 된다.
육사24기 조경철은 25기인 김오랑을 눈여겨보았고 그래서 자신의 여동생 친구인 백경옥을 소개한다. 당시 김오랑은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있었고 백경옥은 부산대 간호대를 나와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펜팔로 사랑을 나눈 이들은 1973년 결혼을 하였다. 1979년12월 이 부부는 수방사(현 남산한옥마을) 사택에 살고 있었다. 두 기수 선배인 박종규 부부와 친한 김오랑 부부는 11일에도 같이 식사를 하며 정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12일 박종규는 김오랑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부대가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러 갈 것이니 대세를 따르라고 말하였다.
인맥관리보다는 임무완수를 우선으로 하는 김오랑은 이 말을 거부하고 반란군에게 저항을 하다 박종규의 발포명령으로 시작된 M16소총 6발을 맞는다.
그의 나이 35세에...
백경옥은 극한 슬픔으로 일주일이상을 울먹이다가 시신경마비가 와서 시력을 상실하게 되어 부산 고향으로 내려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전화상담 봉사를 한다. 1987년 김오랑 소령이 모셨던 정병주 전 사령관이 부산에 부인을 만나려 내려온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자신이 키우고 아껴준 박희도 최세창에 의해 총격을 당하고 체포되어 군복을 벗었다.
정병주와 백경옥은 그냥 울었다. 그리고 살아서 저 신군부 놈들이 망하는 것을 보자고 하며 그의 아들의 박사학위논문집을 선물한다. 그 논문집 서문에는 참 군인 김오랑 소령을 위하여 란 글이 있다. 신군부의 역적을 고발하던 정병주는 1989년 자살을 하고 백경옥은 1991년 43세에 실족사하게 된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들에게 사과도 하지 않았고 역사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백경옥이 남긴 마지막 시가 아련하게 읽힌다.
나는 그대의 무덤가를 다녀오네
구름이 떠서 비가 내려 내 얼굴을 적시고
몇 송이의 꽃을 그대의 비석 앞에 바치고
나는 훌훌히 떠나는 파랑새 되어
그대 곁을 떠나 온다네
그대여 안녕, 안녕....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섰던 이름을 기억한다.
이건영 3군사령관, 장태완 수방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하소곤 육본작전참모장, 그리고 몇 분들
장태완장군의 신군부에 한 말이 들린다.
"야 이 반란군새끼야! 역적 놈의 새끼들"
그리고 광주는 이 거룩한 분노를 이어갔다.
ps...
제2의 계엄이 있을까? 반드시 있습니다. 12.12이후 광주학살이 있었던 것처럼 그/놈/과/그/년/은/ 그리고 그런 놈들은 지금도 계속 살기어린 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탄핵 후 즉각 체포하고 극우 세력들을 해산시켜야 합니다.
정도전의 탁월했지만 낙관적이고 그저 그런 인정을 정리 못해서 이방원에게 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