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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무즈”가 방천촌이 되다
훈춘시 경신진 방천촌은 3국국경 련접점에 위치한 변경마을로, 장고봉전투발발지로 국내는 물론 국외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지고있지만 정작 많은 관광객들은 방천마을외곽을 스쳐지날뿐 방천마을을 외면하기도 한다.하지만 작년부터 이런 관습을 일거에 상쇄할만한 경치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그것이 바로 수채화와 같은 오늘의 방천촌 전경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여 기자는 그 내역을 자세히 따지러 방천행을 서두르기에 이르렀다.
훈춘시정부에서 취재전용차를 마련해주면서부터 승용차는 세멘트 포장도로우로 날아가더니 불과 40분만에 경신을 뿌리치고 방천촌에 다달았다. 도로가 경제력이란 말을 실감하는 대목이다. 마을에서 기별을 받고 기다리던 김만혁촌장(38세)이 대기업 사장실같이 호화로운 촌사무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원탁을 중심에 놓은 사무실 벽에는 촌대형기획도가 걸려있었고 그 아래에는 신형컴퓨터가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촌사무실부터 은근한 경제력이 묻어났다. 근엄한 기색을 짓고 수첩을 펼치면서 급급히 취재하기보다 먼저 중심을 피하고 한담식을 빌면서 점차 취재를 시작했다.
19세기중엽부터 조선이주민들에 의하여 순차적으로 “헤무즈”, “양관평”으로 두리뭉실하게 불리우던 이곳이 방천으로 이름을 거듭나기 시작한무렵은 20세기초엽으로 다시 올라온다.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오는 당시의 방천의 모습은 강가와 벌판에 버들숲이 우거지고 간혹 조선변민들이 일군 화대기밭에는 피만 푸르게 자랐다고 한다. 피농사, 보리농사, 감자농사만 알던 그 시절 피농사는 변민들이 해해년년으로 익숙히 짓던 농사다. 그 우거진 푸른 버들숲이 오늘의 방천촌의 촌명기원으로 남는다. 방천촌은 두만강이 루루천년 흐르면서 개석해놓은 하구의 분지로서 조선과 머리를 바투 마주한 지역이지만 훈춘지역에서 조선이주민들이 제일 먼저 개척한 마을은 금당촌이라고 사책에 기입하고있다. 그 사연을 캐고들면 우리는 “곡선월경”이란 낯선 력사와 만난다. 방천촌으로의 조선이주민들의 이주는 대개 청정부가 봉금령을 실시하던 시기 로씨야 극동지구 하싼지역으로 먼저 건너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이주, 정착했다고 하는데 월강하여 아침에 건너와서 농사하고 저녁에 돌아가면서 방천지역과 환경사정을 잘 알기에 결국 로씨야—중국이라는 곡선이주를 하면서 두개의 국경을 넘은셈이다. 그러고보면 방천촌의 개척자들은 두만강 건너편의 조선이주민들이다. 그 후의 이주력사는 두만강 좌안지구에서 겪은 력사와 대동소이하다.
그후 방천촌은 항일 저항조직과 독립군들이 로씨야 극동지구로 오가는 길목이 되였고 연해주로 통하는 그 특수한 지리적인 여건으로 내지에서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더우기 중, 로 관계가 긴장하던 1970년대 두만강의 침습으로 통로를 잃고 로씨야의 땅을 빌어서 오가야만 하는 륙지의 섬으로 연변에서는 제일 긴장한 전초지역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정부에서는 근 300만원을 투자하여 방천촌으로 통하는 양관평에 제방을 쌓고 새로운 통로를 개설하였는데 현재 방천촌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로 남아있다.
연변에서도 해발고가 5메터로 제일 낮은 방천촌의 지리적인 특성을 고려하여 국가에서는 1970년대 35호의 벽돌집을 지어주면서 방천촌은 기회의 땅으로 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촌당지부 서기 강태운이 중국공산당 당대회에 참가하면서 이름을 떨쳤다. 현재까지 연변지구에서 기층조직에서 마헌화(교원)와 강태운이 유일무일한 기층당대표로 남아있다.
방천촌은 세간에서는 조선과 로씨야의 “닭울음소리, 개가 짖는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류전될만큼 이 시기가 동방제일촌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첫 단계이다.
2. 장고봉과 방천촌
방천촌을 알려면 장고봉도 가볍게 스쳐지나갈수 없다.장고봉은 방천촌에서 약 3리쯤 상거한 북쪽에 자리잡았는데 일면 칼산이라고도 불리운다. 1938년 중외를 진감한 구쏘련(로씨야)과 일본간의 대규모무력충돌이 여기에서 서막을 열었다.
1938년 7∼8월, 동녕현을 수비하는 일본관동군 특수무전반에서 구쏘련군의 무전전문 한건을 판독하고 조선 라남주둔 일본군은 변복한 일본군 3명을 보내 통제구역에서 장고봉일대를 정찰하게 하였다. 그중 한명이 구쏘련군의 총에 맞아죽었다. 이것이 장고봉전투의 도화선이 되였다.
그 다음해인 1939년 노몬한 전투에서 일본군은 또다시 대규모의 병력으로 쥬꼬브가 지휘하는 쏘련군과 몽골 련합군을 상대로 다시 대결했으나 무참히 패퇴하고 말았다. 현재 방천촌과 린접한 로씨야 극동지구인 하싼 역사 구내 오른쪽에는 장고봉전투를 기념하는 비가 서있다. 비문에는 “여기 하싼호수지역(장고봉)에서 쏘베트군대는 1938년 7~8월 우리의 조국을 배신적으로 공격한 일본 사무라이들을 분쇄하였다”라고 썼으며 방천촌에도 력사지식에 득달한 한 범인에 의해 “장고봉전투기념관”이 개관되였다.
장고봉전투와 노몬한전투는 일본군이 로씨야군에 대한 대규모 군사화력정찰과 같았고 이 정찰에서 유럽식민지인 동남아시아로 진격하자는 해군중심의 남진파가 득세하고 구쏘련과 전쟁을 벌리자는 륙군중심의 북진파의 입김이 약화되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력사에서 방천지역은 이렇듯 중심에 서있기도 했다. 그외에도 방천지역은 1908년 여름 안중근을 비롯한 동의회(同義會) 의병부대가 거쳐간 곳이기도 하다.
이 장고봉전투에서 방천마을의 조선사람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전투를 전후하여 일군군은 방천촌 조선인부녀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밥을 짓게 하고 방천사람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부상자와 시체를 메여나르게 했다. 그 전투를 경험한 어린이와 로인들은 포격에 귀가 메고 숱한 조선인가옥들이 불탔다. 전투가 벌어지자 너무도 경황한김에 딸을 안는다는것이 베개를 안고나왔다는 일화는 지금도 방천촌에 남아있다.
이 장고봉전투에서 2차세계대전당시 독일군에 항격하러 전장에 나갔던 수많은 구쏘련홍군들의 전투사기를 불러일으켰던 “카츄샤” 노래가 탄생하기도 했다.
3. 두만강과 방천촌
방천촌은 어촌마을이다. 현재 방천촌은 120명의 조선족이 쾌쾌한 세거를 고집하고 살아가는데 로무송출과 어업에서 얻은 순수입만 인당 2만원씩 배분될만큼 부유한 마을이 되였다..
훈춘시정부는 현재까지 방천촌에 560만원의 자금을 투입하여 촌의 총체적인 규모건설을 완공하였는데 그중에는 42호의 살림집도 포함되여있다. 촌의 도로들은 이미 세멘트포장도로로 바뀌였고 수도, 수로, 록화, 철담장, 가로등 건설도 이미 완공하여 현대문화촌모습으로 탈바꿈했다. 특히 가정살림집들은 조선민족풍격과 현대의 건축풍격을 조화롭게 디자인하여 조망이 아름다운 수채화를 방불시킨다. 방천촌은 문화관광명촌으로 거듭나면서 동해초소관광에서 필수 관광코스로 부상하였다. 실제로 마을에 들어서면 산뜻한 포장도로와 디자인이 산듯한 철책속에는 현대문화적인 분위기가 풍겨나왔고 전통과 어우러진 민속가옥들속에는 조상님들의 얼이 슴배인 풋풋한 향기가 묻어있어 숭엄한 분위기까지 감지하게 됨은 나만의 호들갑일가.
산을 끼고있으면 산에 의거하여 부를 창조하고 강을 끼고있으면 강에 의해 살아가는것은 현시대의 물질적인 재부를 비축하는 수단과 방법이다. 방천촌은 현재 논밭이 5헥타르, 한전이 70여헥타르밖에 안되여 농사에만 의거하던 재래의 생산수단을 언녕 외면했다. 방천촌의 주요 수입원은 두만강에서의 물고기 포획이다. 32세에 방천촌의 촌장 사업을 맡고 올해로 6년째로 련임하는 김만혁은 촌당지부 서기이기도 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방천촌은 두만강의 자연자원에 의해 부유를 창조하고있다고 했다. 실제로 방천촌의 경제성장은 두만강에서 서식하는 물고기의 포획량과 정비례가 되여 있었다. 방천촌의 남성로력들은 일년사철 두만강에서 물고기를 포획하는데 봄에는 황어, 여름에는 숭어와 송어, 가을에는 련어, 겨울에는 뱀장어, 황어, 야레를 포획하는데 판로도 좋다고 했다. 현재 방천촌의 촌민들은 모두가 어업용배를 장만하고있었고 고기그물과 같은 현대적인 물고기포획어구도 구전하게 갖추고있어 어촌마을로 불리운다.
올해에는 너구리사양도 권장하고있었는데 200여마리의 종자너구리도 이미 사육하고있었다. 문화관광촌으로 부상하면서 환경오염으로 소사양을 금지하여 촌민들의 수입원천은 줄어든것 같지만 그 대신 문화관광에 필수적인 환경미화 완성도를 높여 방천촌 특유한, 새로운 시골문화분위기를 바꾸어왔다. 김촌장은 방천촌의 하드웨어건설이 완미하게 꾸려지면서 문화주택들이 모두가 관광객들의 류숙처로 제공될수 있다면서 관광객들을 부르고있었다.
사구공원, 오대징 기념탑, 동해초소와 어깨 나란히 관광코스에 편재한 방천촌은 미래와 비전이 있는 문명촌이였고 바야흐로 명실이 부합되는 동방제일촌으로 부상하고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신호였다.
사진설명:
4. 광복전의 "헤무즈"촌경(방천촌)
(사진출처: 장고봉전투기념관)
5. 장고봉전투후 피난가는 방천(헤무즈)조선인들.
(사진출처: 장고봉전투기념관)
연변일보 글/사진 최국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