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태종•이방원 제52편: 1.정통 유학과 도참설의 한판 대결 (계룡산 도읍지 공사 중단 사건)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 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 서면 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계룡의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에서 흘러갑니다.
이것은 송나라 호순신(胡舜臣)이 이른 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 하는 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태조실록>
신생국 조선의 야심찬 신도 건설이 벽에 부딪쳤다. 경기도 도관찰사 (京畿左右道都觀察使) 하륜이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풍수지리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으로서는 무학대사와 권중화 그리고 하륜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도 하륜이 도참설에 능통한 학자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외면 할 수 없었다.
계룡은 쇠하고 망하는 땅이라 하는데 어느 군주가 강행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흔들린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불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권중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재 등으로 하여금 하륜과 더불어 의논하여 보고하라 명했다. 새로운 도읍지로 계룡산을 지정하고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는 신도건설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하는 재검토 작업이다.
비로소 하륜이 중앙 정계에 얼굴을 내미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정통유학을 공부했지만 풍수지리와 도참설에 능하다는 이유로 이단아 취급을 당해 변방을 떠돌아야 했던 하륜이다. 하지만 정도전으로서는 붙여주고 싶지 않은 견제의 대상이었다. 불교와 도참설을 배척하고 정통 유학을 지양하는 정도전의 시각으로 볼 때 하륜은 이단이었다.
도참설은 망국의 온상이다. 정도전은 고려를 뒤엎어야 할 명분으로 기득권세력의 부패와 불교의 권력유착에서 찾았었다. 권문세족의 권력지향주의와 과도한 토지를 소유한 불교사찰의 부패를 방조하는 것이 도참설이라고 생각했다. 도참설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을 넘어 망국의 온상이라고 규정했다. 이제 신도안을 매개로 정통유학과 도참설이 한판 붙은 것이다.
정도전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경제문제는 자신의 학문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경제문제는 조준에게 일임하고 나머지 문제에 매진했다. 정치, 외교, 국방, 법률 등 당대의 최고라고 자신했다. 이것이 어떨 때는 자만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하륜과 겹치는 학문이 많았다.
대장군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에 성공하여 신생국의 기틀을 잡아가고 있는 정도전은 혁명에 공을 세우지도 않은 하륜이 자신의 영역에 끼어드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정통유학과 풍수지리 그리고 도참설에 능통한 하륜은 조준과 정도전의 공동의 적이었다.
하륜이 제시한 자료를 꼼꼼히 검토해보니 흠잡을 데가 없었다. 고려 왕조의 여러 산릉(山陵)의 길흉(吉凶)을 다시 조사해보았으나 하륜의 주장이 맞았다. 봉상시(奉常寺)의 제산릉 형지안(諸山陵形止案)의 산수(山水)가 오고 간 것으로써 조사해 보니 길흉(吉凶)이 모두 틀림없었다.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공사를 중단하라." 이성계의 신도공사 중지명령이 떨어졌다. 계룡의 땅은 쇠(衰)하고 패(敗)하는 땅이라 하는데 강행할 수 없었다. 신생국 조선을 개국하고 대대손손 권력을 이어갈 구상에 몰두하고 있는 이성계는 거두어들이고 싶은 땅이었다.
중지명령이 심효생을 통하여 계룡산 현지에 있는 김주에게 전해졌다.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이 대환영했다. 개경인들은 수도가 이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반겼고 부역에 동원된 경상도와 전라도 백성들은 중노동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기뻤다.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 때문에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동원되었는데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도망자는 체포하여 극형에 처하는 단속에도 불구하고 부역꾼들의 탈주가 빈번하게 일어났었다.
자손만대의 부귀영화를 꿈꾸고 있는 태조 이성계는 하륜의 논리에 탄복했다. 이성계 역시 풍수지리에 문외한이 아니었다. 전장의 장수는 천문과 풍수지리에 능통해야 전투에 승리할 수 있다. 날씨를 보아 기습과 공격을 감행하고 물길과 산세를 보아 진을 쳐야 군졸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장터에서 잔뼈가 굵은 이성계다.
하륜을 즉각 지방관서에서 수도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경기 관찰사에서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로 임명하고 곁에 두기 시작했다. 정도전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주군 곁에 참모는 한 사람으로 족하다고 여기던 정도전이다. 2인자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 사람 이상의 참모는 갈등을 낳고 추진력의 속도가 떨어진다고 믿어왔다.
이성계는 권중화에게 서운관(書雲觀)이 보관하고 있는 비록문서(秘錄文書)를 모두 하륜에게 공개하라고 명했다. 비장의 고서(古書)를 참고하여 천도(遷都)할 땅을 찾으라는 것이다. 천문 분야에서는 당대 최고라고 자부하던 권중화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하륜으로서는 평생 접할 수 없는 비장의 문서를 들춰볼 기회를 잡은 것이다.
오늘날의 기상대, 서운관이 풍수지리까지? 서운관은 기상관측 등을 관장하던 관서로서 절기와 날씨를 관측하고 기록했다. 개경에 천문을 관측하는 첨성대를 운용했으며 일식과 월식은 물론 혜성의 출현을 관측했다.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면 왕이 기우제를 지내던 시절, 왕은 하늘의 운행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서운관 제조는 왕의 최측근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서운관은 왕실의 능실을 관장하는 부차적인 임무도 수행했다.
최근 만원 신권에 등장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제작한 곳이 서운관이며 세종 조에 혼천의(渾天儀)와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제작한 장영실도 서운관 관원이었다.
관련서적을 뒤지고 심사숙고 끝에 하륜이 지목한 땅은 무악이었다. 무악(毋岳)은 오늘날의 연세대학교를 아우르는 신촌일대를 말한다. 하륜이 무악에 주목한 것은 조운(漕運)이었다. 국가의 재정을 뒷받침 할 세곡선 출입에 최우선 순위를 둔 것이다. 강화도 교동을 통과한 세곡선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양화진에 접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관심 대상은 무역이었다.
당나라 이래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한 중국과 활발한 교역이 있어야 국토가 비좁은 한반도가 살아가는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의주에서 국경무역이 있었지만 그것은 조정의 통제를 받는 말 무역을 비롯한 전략물자 교역일 뿐, 백성들의 민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개경에도 국제무역이 통했지만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온 무역선이 벽란도에 짐을 부리면 선의문 고개를 넘어 개경에 진입해야 했다. 날씨가 좋지 않거나 예성강 물살이 세면 예성강 하구에 짐을 부렸다. 때문에 벽란도와 예성강 하구는 번창했다. 육상 운송수단이라곤 달구지밖에 없던 시절에 왕도에 뱃길이 닿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인식했다. 운하와 무역.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이다.
°수도 이전계획에 저항하는 수구세력: 하륜의 보고를 받은 태조 이성계는 좌시중 조준과 권중화 등 11인을 보내어 무악(毋岳)을 살펴 보고하라 명했다. 권중화에게 특별히 지시한 것이 있었으니 지리비록촬요 (地理秘錄撮要)라는 책을 가지고 가서 살피라는 것이었다. 이 책은 하륜 자신이 무악을 지목하게 된 당위성을 주장하
는 책이었다.
무악(毋岳)을 현지 답사한 권중화와 조준이 개경으로 돌아와 무악산
남쪽은 땅이 좁아 도읍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했다. 이에 하륜이 반박하고 나섰다. "무악산 명당이 비록 협착한 듯 하지만 송도의 강안전(康安殿)과 평양의 장락궁(長樂宮)과 비교한다면 그래도 넓은 편이 될 것입니다. 또한 고려 왕조의 비록(秘錄)과 중국에서 통행하는 지리의 법에도 모두 부합(符合)합니다."
당대의 도참설(圖讖說)의 대가 하륜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고려 왕실이 간직하고 있던 비록을 들이대는 논리도 정연했다. 무악이 비록 좁기는 하지만 강안전과 장락궁 보다 넓다는 하륜의 말이 귀에 번쩍 들어왔다. 계룡산 천도공사가 중지된 상태에서 태조 이성계는 시간이 없었다.
"새 도읍지는 무악으로 한다." 왕의 결정이 떨어졌다. 왕의 결정은 곧 왕명이다. 왕명이 떨어졌는데도 신하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개경인들의 시선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이성계의 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개경에 눌러있고 싶어 하는 신하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태종•이방원^다음 제53편~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