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19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 성화의 날 (마태 11,25-30)간직하라>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 성심을 특별히 기억하는 날입니다. 또한 ‘사제 성화의 날’로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그 삶을 충직하게 사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 각자의 마음으로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적인 마음이 지배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심지어는 기도 안에서도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니 언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뀔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소망은 있지만 그에 따르는 노력과 정성은 여전히 소홀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마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9-30). 온유한 마음은 부드러움입니다.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 안에 뿌리 내리면 모두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뜻을 헤아리지 결코 절망하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겸손은 한없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시면서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7).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면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일상 안에서‘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자주 묻게 되기를 바랍니다.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겸손과 단순함이 있었고 그것이 사실 세상의 희망입니다.
잘난 사람은 남을 등쳐먹으려 애를 쓰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 내리지만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 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단순한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는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온전히 부모에게 의존합니다. 계산하지 않고 부모를 따릅니다. 그것이 겸손이기도 합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열어주시어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을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출처: 신을 벗어라 원문보기▶ 글쓴이 : raphael
2020. 6. 19. 금요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마태 11,25-30) 송영진 모세 신부
♣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 말씀의 ‘고생, 무거운 짐, 멍에’를 인생살이의 고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해방과 자유와 안식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여기서 ‘모두’ 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내 뒤를 따라라.” 라는 뜻입니다. ‘내 멍에’ 라는 말은, 예수님의 계명을 뜻하는데, 예수님의 계명이 실제로 멍에라는 뜻은 아니고, 비유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계명이 멍에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멍에를 벗겨주는 열쇠’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고통스러운 멍에를 벗기고 편한 멍에로 바꿔 주겠다. 무거운 짐을 가벼운 짐으로 바꿔 주겠다.” 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멍에를 벗겨서 편안함을 주겠다. 모든 짐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는 “내가 주는 멍에는 편안함이고”, 즉 “내가 주는 것은 멍에가 아니라 해방이고” 라는 뜻이고, “내 짐은 가볍다.”는 “내가 주는 짐은 가벼움이다.”, 즉 “내가 주는 것은 짐이 아니라 안식이다.” 라는 뜻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 때문에, “무거운 멍에를 벗으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가벼운 멍에를 감수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새로운 멍에를 메는 것이 아니라 ‘멍에를 벗기는 열쇠’를 얻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아무리 편안해도 멍에는 멍에일 뿐이고, 아무리 가벼워도 짐은 짐일 뿐입니다. ‘안식’은 멍에와 짐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라는 새로운 멍에와 짐을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멍에와 짐을 완전히 없애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식’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참 평화와 참 행복과 참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구원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만이 그 구원과 안식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고, 그것을 얻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과 안식은 죽은 다음에나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쪽 세상에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다음에 저쪽 세상에 갔을 때나 우리를 고생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안식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언제인지 모르는 ‘나중’에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으로 고통스러운 인생살이를 참고 견디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실제로 누리고 있는 구원과 안식 덕분에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생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예수님과 어떤 사마리아 여자의 만남이 연상됩니다. 그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요한 4,18) 여자였으니, 그의 인생은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는 인생이었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또 “무거운 멍에를 메고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갈증과 고생과 짐과 멍에를 꿰뚫어보셨고, 그 여자를 그것들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그 여자는 예수님 덕분에 자기를 짓누르고 있던 갈증과 고생과 짐과 멍에에서 해방되어서,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 여자가 어떤 유혹을 받아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이 생긴다면? 그러면 더욱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더 무거운 멍에를 메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의 경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병자는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고, 벳자타 못 가에 오랫동안 누워 있었고, 자기 힘으로는 못 속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무거운 멍에와 짐을 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고, 그에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써 인생살이의 멍에와 짐을 벗겨 주셨고, 참된 안식을 향해서 나아가라고, 또 구원과 안식의 완성에 도달하라고 격려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고마워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밀고했습니다. 그는 몸의 건강은 얻었지만, 영혼의 안식은 얻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멍에와 짐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우리를 가엾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이고, 그 멍에들과 짐들을 벗겨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공경하고 경축하는 대축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받은 그 사랑과 자비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지만, 나누지 않으면 기름 없는 등불이 꺼지는 것처럼 희미해지다가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안식은 혼자서만 누릴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누릴 때에만 참된 안식이 됩니다.
◈ 원문보기▶ Rev.S.Moyes 송영진 모세 신부
2020년 6월 19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비가 그친 날 오후였습니다. 산책길에 새를 보았습니다. 새는 지렁이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새는 지렁이를 몇 토막 냈습니다. 그리고 처마 밑에 있는 둥지로 날아갔습니다. 둥지에는 어미 새를 기다리던 아기 새들이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토막 낸 지렁이를 남김없이 나눠주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였지만 먹이를 주는 어미 새를 직접 보았습니다. 처마 밑에 있는 둥지는 안전해 보였습니다. 비를 맞을 일도 없었습니다. 서남향으로 지어졌습니다. 손도 없는 새가 부리로만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를 모아 아기 새를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언젠가 아기 새들은 둥지를 나와서 자신들만의 세상으로 날아갈 것입니다. 세상 모든 새는 이렇게 어미 새의 보살핌을 받으며 날 수 있었습니다. 잠시의 시간이었지만 어미 새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5년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도록 권고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매년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모여서 하루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강의를 듣고, 고백성사를 보고, 은경축을 맞은 사제들을 축하합니다. 무엇보다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먼저 하느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지금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습니까?” 율법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산상수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가난한 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 자비를 베푸는 이, 슬퍼하는 이, 평화를 베푸는 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잔치를 베풀어라. 죽었던 아들이 돌아왔다. 송아지를 잡자.”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배워야 합니다.
겸손과 희생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여우도 집이 있고, 참새도 새끼 두는 둥지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습니다. 누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마저 내어 주십시오. 겉옷을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속옷까지 내어 주십시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배워야 합니다.
2001년 사제성화의 날이었습니다. 경기지역 사제들은 의정부 성당에 모여서 하루 피정을 하였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이 제게 체험사례 발표를 부탁하였습니다. 사제가 사제 앞에서 발표하는 것은 무척 난감하고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선배들은 제가 살아온 날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료들은 저의 허물과 실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배 사제들은 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중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은 사목 체험을 편하게 이야기 하면 좋다고 하였습니다. 약간의 강사료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본당에서 있었던 사목체험을 기쁜 마음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듯이, 저의 발표는 교구청에도 전해졌고, 다음 인사이동 때 저는 교구청 사목국에서 교육담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사제성화의 날 발표는 그 뒤로 저의 사제생활에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해외 연수를 갈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고, 다시금 교구청에서 일하기도 했고, 지금은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2020년 사제성화의 날입니다. 오늘 하루 피정하는 마음으로 지내려고 합니다. 모든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출처 :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 글쓴이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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