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나해 12월 19일
루카 1,5-25
믿음을 받고 싶으면 손에 쥔 그걸 내려놓아라!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구세주의 선지자가 그에게서 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믿지 못합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
벙어리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조용하고 순응해보라는 뜻입니다.
해보면 알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지 않게 되자 정말로 그 일이 실현됩니다.
만약 계속 자기 생각을 말하며 이 핑계, 저 핑계를 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왜 세상 사람들은 믿어서 손해 볼 게 전혀 없는데도 믿지 않을까요?
믿는다고 크게 손해 볼 게 없습니다.
죽고 나면 알 일입니다.
진짜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믿은 게 얼마나 다행일까요? 하지만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믿음을 버립니다.
『한 번이라도 모든 걸 걸어본 적이 있는가』란 책을 쓴 전성민 씨가 있습니다.
그는 20대를 게임중독으로 날려버렸습니다. 행정고시 공부하다가 게임에 빠져 젊은 시절을
폐인처럼 날린 것입니다.
군대에 다녀오니 서른한 살이었습니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자신에게 묻습니다.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후회 없이 모든 걸 걸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부모님에게 한 번만 더 믿어달라고 청합니다.
그는 2년 만에 5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행정고시와 입법고시까지 동시에 합격합니다.
우리는 왜 믿지 못할까요? ‘자존심’을 지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믿었는데 하느님이 없으면 창피할까 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자기 자존심과 맞바꿉니다. 사이비에 들어가서 이건 아닌가 싶어 나오고 싶어도 창피해서 못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 자존심이 그만큼 믿음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관계입니다.
노태권 씨는 중졸 막노동꾼이었습니다.
난독증이 있어 글도 읽을 줄 모릅니다.
두 아들은 중학교 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둘 다 자퇴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아들을 대학에 보내겠다고 먼저 공부를 시작합니다.
난독증임에도 막노동하며 틈을 내어 공부한 끝에 2006년 수능 모의고사를 일곱 번 만점 받습니다.
12과목 모든 과목 만점을 맞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가르쳐서 맏이는 서울대 경영학과 4년 장학생, 둘째는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수석으로 입학시킵니다.
노태권 씨가 꿈꿨던 세상은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요? 그가 자존심을 내려놓는 계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IMF 구제금융 시절 서울에서 구두닦이를 할 때였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사흘 동안 한 명의 손님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흘을 꼬박 굶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때 구두를 신은 발 한쪽이 자기 앞에 올려졌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구두에 떨어졌습니다.
눈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려고 울면서 엄청 열심히 구두를 닦았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구두를 열심히 닦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1,000원이나 2,000원을 주며 나에게 구두를 닦아달라고 발을 내미는 사람에게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다면 그 사람의 자존심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눈물로 다 빠져버린 것입니다.
더는 자존심이 없어서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믿기 쉬워집니다.
이런 사람은 우리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전성민 씨가 처음에 게임중독이 되었던 것은 시험에 떨어지는 것에 대한 창피함을 이기기 위한 자기합리화가 더 컸습니다.
핑곗거리를 만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표징’을 달라며 핑계를 댑니다.
사실 표징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존심이 강해서 믿지 못하는 것이면서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하느님이 없으면 존재할 수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기 싫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을 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 19일
루카 1,5-25
얼굴과 존재 자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온유와 친절의 교사가 되어 주십시오!
60, 70 나이가 될 때 까지 자녀가 없어 의기소침해 살아가던 노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던지, 처음에 그들은 도무지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하는 것을 넘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고, 어이가 없는 일이어서 속으로 헛웃음까지 터져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그들 내면의 표현이 이랬습니다.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즈카르야의 반응은 오늘 이 시대 많은 노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표현 같습니다.
어쩌다보니 우리나라는 초고령 사회에 접어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치도 않은 긴 노년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품위있고 고상하고 삶의 질이 높은 노년기라면 아무 문제 없을 텐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대다수의 노인들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가치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앙없이 살아가는 노인은 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둡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희망을 둘 곳이 없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좌절이요 환멸이고 지옥 같은 현실입니다.
이렇게 신앙없는 노인들, 세상의 노인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지루해 죽습니다.
산보나 등산도 하루 이틀이지 즉시 싫증이 납니다.
그 어디서도 오라고 손짓하는 데가 없습니다.
외로움에 몸부림을 칩니다.
이런 면에서 올곧은 신앙을 지닌 노인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몇몇 노인들을 뵐 때마다 깜짝 놀랍니다.
연세가 70, 80인데도 새벽부터 밤늦도록 바빠 죽습니다.
기상하자마자 성모상 앞에 촛불을 켜고 한 시간 두 시간 자녀들과 손주들을 위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10시 미사 가기 위해 꽃단장을 하십니다.
성당에서 만난 절친한 교우들과 나누는 이야기꽃이 무르익으면 오전이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레지오 회합, 연령회 회합, 반 모임, 일주일이 금방 지나갑니다.
그래서 나이들수록 신앙생활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 안에 살아가는 노인들은 정녕 행복합니다.
지금 몸 담고 있는 이 세상 정녕 멋진 세상이지만, 이 세상 반드시 지나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풍요로운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불행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병고나 노화나 죽음도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또 다른 희망을 간직하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막 87세 생신을 지내신 노인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행복한 노인의 모델을 온 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병약한 노구를 이끌고도 세상과 인류를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불꽃을 아낌없이 활활 소진하고 계십니다.
노인으로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자신 안에 주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간직한다면 영원한 청춘으로 살 수 있습니다.
노인이라고 포기하거나 낙담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후손들에게 달릴 곳을 다 달린 훌륭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십시오.
얼굴과 존재 자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온유와 친절의 교사가 되어 주십시오.
자신에게 다가오는 병고나 노화 죽음조차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하십시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 19일
복음: 루카 1,5-25: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요한의 출생에 대한 예고는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께서는 아기를 못 낳는 엘리사벳의 몸에서 거룩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신다. 천사는 기적적인 출생과 아이의 이름에 대해 예고하기 전에 먼저 “두려워하지 마라.”(13절) 한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지어 준 아기 이름 요한은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이다. 이 은총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은총,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세상에 선포하러 왔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했고 하느님 은총의 기쁜 소식을 전했던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미 은총을 선포한다. 때문에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하였다고 한다.
엘리야와 요한은 둘 다 독신이었다. 두 사람은 다 거친 옷을 입었고 광야에서 살았다. 둘 다 정의를 지키다 왕과 왕비에게 박해를 받았는데, 엘리야는 아합과 이제벨에게(1열왕 19,1-3 참조) 요한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에게 받았다(마태14,3 참조). 엘리야는 불 마차를 타고 하늘에 오름으로써(2열왕 2,11 참조) 사악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요한은 순교를 당해 하늘나라에 들어감으로써 사악한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17절) 백성들을 불신에서 신앙으로 돌려놓아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17절) 하는 역할을 하였다.
즈카르야는 자신의 나이, 백발이 된 머리카락, 힘을 잃어버린 몸을 떠올렸다. 또 아내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는 사실도 떠올렸다. 그래서 장차 일어나리라는 천사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이렇게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던 즈카르야는 목소리를 잃었고, 마리아는 곧바로 믿었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시는 말씀을 잉태하실 수 있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25절) 나이 많아서 갖게 된 아들 때문에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 엘리사벳은 요한을 잉태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찬미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