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둘레길을 걸으며(8-4 북한산길)
(북한산우이분소∼도봉탐방센터, 2017년 7월 20일)
瓦也 정유순
서울둘레길 5구간(관악산길)을 끝내고 6구간(안양천변길)으로 이어져야 하나 불볕더위가 계속되어 그늘이 적은 6구간은 무더운 날씨가 수그러들면 이어서 진행하기로 하고, 오늘은 서울둘레길 마지막 부분인 8구간 북한산길 중에서도 북한산우이분소에서 도봉탐방센터까지 대신 숲길을 걷기로 하였다.

<북한산국립공원 우이분소>
북한산(北漢山)은 1983년 4월 5일 지정된 15번째 국립공원이다. 총면적은 도봉산을 포함하여 78.45㎢다. 북한산의 정상은 백운대(836.5m)∙인수봉(810.5m)∙만경대(799.5m)로 조선시대에는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는 최고봉 백운대(白雲臺)와 그 동쪽의 인수봉(仁壽峰), 남쪽의 만경대(萬景臺, 일명 국망봉)의 세 봉우리가 삼각형의 모양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산(삼각산)>
이외에도 삼봉산(三峰山, 세봉오리로 이루어진 산), 화산(華山, 꽃이 만발하는 산) 또는 부아악(負兒岳,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 등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북한산으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부터라고 추정되나, 북한산을 관할하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삼각산으로 불리기를 희망한다고 한다.

<우이동 만남의 광장>
북한산국립공원우이분소 도로 맞은편에 봉황각이란 간판이 보인다. 봉황각(鳳凰閣)은 천도교 제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가 1911년 인수봉과 백운대로 가는 입구에 임야와 밭을 사들여 1912년에 건물을 짓고 ‘봉황각’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3∙1 독립 운동을 계획한 독립운동의 요람이며 특히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5명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고 한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천도교수도원으로 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이라고도 한다.

<봉황각(천도교 의창수도원)>
북한산우이분소 뒤로 돌아서면 북한산 백운대에서 흘러내려오는 백운천(白雲川)이 골짜기를 이루며 맑게 흘러 우이령 입구에서 우이천으로 합류한다. 우이령 입구에는 “서울에서 서울을 잊는 곳”이라는 명제로 대단위 위락시설을 만들다가 공사를 중단하여 흉물로 변해 정말로 “서울을 잊어버리고 싶게”하는 건물들이 수년 째 암(癌) 덩어리처럼 서울의 허파에 붙어있다.

<백운천>

<공사가 중단된 리조트>
지하철 북한산우이역 공사로 조금 복잡한 우이령 입구를 지나 방학동과 연결되는 방학로를 따라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오르막 정상이 강북구와 도봉구로 나뉘는 경계지점에는 생태터널이 있으며, 약간 못 미치는 곳에 왕실묘역길로 접어드는 입구가 나온다. 주변에는 해열∙해독∙소종(消腫) 등에 한약재(韓藥材)로 사용하는 금방망이가 꽃을 피우며 군락을 이룬다.

<북한산우이역 공사현장>

<금방망이 꽃>

<강북구와 도봉구의 경계-생태터널>
숲이 우거진 방학동고갯길을 넘으면 연산군묘역이 나온다. 연산군(燕山君)은 조선조 10대 임금(재위 1494∼1506)으로 재위 기간 중에 왕권강화를 위해 많은 신진사류를 죽이는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 등을 일으키고 생모 윤 씨의 폐비(廢妃)에 찬성했던 수십 명의 신하들을 살해하였다. 또한 경연(經筵)을 없애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하는 등 비정(秕政)이 극에 달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喬桐)으로 유배되었다가 두 달 만에 역병으로 사망한다.

<연산군 묘>
31살의 나이에 사망한 연산군은 원래 강화도 교동에 안장되었으나 연산군의 부인이며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외손녀인 거창군부인(居昌君夫人) 신 씨(愼 氏)가 중종에게 요청하여 1513년(중종8년)에 현 위치로 이장(移葬)하였다. 그리고 묘역에는 연산군 내외의 묘와 연산군의 딸인 휘순공주(徽順公主)와 사위인 구문경의 묘가 있고, 묘역 중간 열에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義貞宮主) 조 씨(趙 氏)의 묘가 있다. 임영대군은 후손이 없는 의정궁주의 제사를 모셨고, 그 묘역으로 연산군 가족이 들어선 것으로 보여 진다.

<연산군 묘역>

<연산군 묘역 상설도>
연산군묘역 주변에는 연산군의 제향(祭享)을 모시는 제실이 있고, 묘역 앞에는 약600년 된 은행나무가 조선왕조 500여년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는 산 증인처럼 서있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로 지정(2013년 3월 28일)된 은행나무는 조선 전기에 식재된 나무로 수령이 오래되어 이 지역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념물로 지정된 서울시 소재 수목 중에서도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된 서울 문묘 은행나무(수령 : 702년) 다음으로 수령이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연산군 제실>

<은행나무>
또한 주변에는 원당천(元堂泉)이라는 샘물이 있다. 원당천은 약600여 년 전 파평 윤 씨 일가가 원당마을에 정착하면서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었으며, 마을 이름을 따서 원당샘으로 명명하였고, 수백 년 동안 생활용수로 공급되어 왔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이 너른 채소밭이었으나 원당천과 그 주변을 정비하여 지금의 공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원당천(우측 지붕)과 은행나무-풍소님 사진>

<원당천 공원-풍소님 사진>
연산군묘역에서 방학로를 건너 몇 걸음 나아가면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 1415∼1462)과 그의 부인 정의공주(貞懿公主, ?∼1477) 묘역이 있다. 공주는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 씨(沈 氏) 사이의 둘째로 태어나 세종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참여하였고, 특히 세종이 풀지 못한 변음과 토착을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고 한다. 슬하에 4남 2녀를 둔 정의공주는 남편인 안맹담이 죽자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대한민국 보물 966호로 지정되었다.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
정의공주 묘역을 지나 방학동길로 접어든다. 정오를 넘긴 더위는 한마디로 찜통더위다. 팔뚝에 벌래가 기어가는 느낌이 와서 처다 보면 땀방울이 맺혀 슬금슬금 내려간다. 바가지약수터에 도착하여 잠시 여장을 풀고 준비 해온 도시락으로 시장기를 달래본다. 식사 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온몸이 오싹해지며 그 무덥던 더위가 한 순간에 다 날라 간다.

<방학동길>

<바가지 약수 터>
다시 발걸음을 띄며 방학동 쌍둥이전망대로 향한다. 더위는 가마솥 찜통더위다. 한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땀은 비례하여 쏟아진다. 비석(碑石) 같은 바위도 뜨거운 삼복염천에 지쳤는지 나무사이를 침대 삼아 길게 누워 휴식을 취하는 것 같다. 조금 헉헉대며 올라간 쌍둥이전망대는 사방을 훤하게 볼 수 있는 위치이지만 오늘은 더위에 증발된 수증기가 시야를 흐리게 한다.

<나무 사이에 걸려 있는 돌>

<방학동 쌍둥이전망대>

<시야가 흐린 도봉산>
전망대에서 무수골로 내려가는 길은 산의 폐목(廢木)을 이용하여 야자수 멍석이 깔린 길 양쪽으로 산사태 예방 등 다목적용으로 세워 놓았다. 오래된 폐목에는 버섯류들이 터를 잡는다. 울타리에 누리장나무들이 꽃을 피운다. 누리장나무는 누린내가 난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울타리 안에는 봉지가 씌워져 뜨거운 햇빛에 알알이 익어가는 포도밭을 지나 무수골의 세일교를 건너간다.

<폐목을 이용한 길>

<누리장나무>

<무수골 세일교>
무수골은 북한산국립공원 안에 있어서 개발을 면한 자연마을로 400∼500년 이상 되어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는 서울의 전통마을이다. 무수골이란 이름은 1477년(성종8년) 세종의 17번 째 아들인 영해군 이당(寧海君 李瑭)의 묘가 조성되면서 유래됐다고 한다. 마을에는 500년이 넘는 전주이씨 마을과 안동김씨 마을이 있다고 한다.

<무수골 무수천>

<무수골 마을>
무수골을 지나 도봉옛길로 올라간다. 도봉산옛길 구간은 장애인·노약자·임산부 등 사회적 약자들이 국립공원의 탐방기회를 확대하고자 조성한 장애인탐방 가능구간이다. 그늘에서 잠깐 더위를 피하며 휴식을 취하는데, 옆의 참나무는 속이 텅 빈 상태로 꿋꿋이 서있다. 나무들은 필요한 물을 수피 안의 가장자리 수맥(樹脈)을 통해 물을 빨아올리기 때문에 속이 비어 있어도 생존에는 별 이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텅 빈 속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쓰럽게 한다.

<속이 텅 빈 참나무>

<도봉옛길>
도봉산옛길을 빠져나오면 천년고찰 도봉사가 나온다. 도봉사(道峰寺)는 고려 때인 968년(광종19년)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현종(顯宗) 때는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남쪽으로 피난하면서 도봉사에 들렀던 적이 있다고 한다. 이후 도봉사는 전쟁과 화재 등으로 여러 번 소실되었으나, 그 내력은 잘 알 수 없다. 조선 말 고종(高宗) 때 승려 벽암(碧巖)이 법당과 부속 건물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매주 주말에는 3000여명의 방문객이 찾을 정도라고 한다.

<도봉사 입구>
도봉사 아래로 가까운 곳에는 도봉산능원사(道峰山能園寺)라는 절도 있다.
능원사는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은 이색적인 사찰이라고 한다. 능원사는 경기도 여주에 본사(本寺)가 있으며 도봉산과 부산에 선원을 개설하여 미륵정법의 진리를 체득하여 심중소회(心中所懷)를 성취하게 하고 제세민안(濟世民安)과 인법호국(引法護國)에 목적을 두고 철웅(鐵雄)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절은 석가불을 주불로 모시는 것이 아니고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을 모시는 것이 특이하다. 그래서 이 절에는 대웅전(大雄殿) 대신 용화전(龍華殿)이 중심 법당이다.

<능원사 일주문>

<능원사 전경>
도봉산(道峰山, 739.5m)은 서울 북쪽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시와 양주시의 겨계에 있는 산이다. 북한산과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으며, 우이령(牛耳嶺)을 경계로 북한산(남)과 도봉산(북)으로 구분하며, 도봉산 북으로는 사패산이 연결되어 있다. 산 전체가 큰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봉인 자운봉을 비롯하여 만장봉·선인봉·주봉·우이암과 서쪽의 오봉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 밖에 칼바위·기차바위·해골바위·피바위 등 재미있는 이름의 바위들이 줄을 잇는다. 도봉산의 입구인 도봉천 통일교를 건너 북한산국립공원 도봉탐방지원센터에서 오늘 길을 마감한다.

<북한산죽립공원 입구(도봉산)>

<도봉탐방지원센터>
첫댓글 올려주신 글 잘 읽었읍니다^^
몇일전 허리가 삐끗하여 따라나서지 못했습니다ㅠㅠ
담에 뵙겠습니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셨군요. 뭐니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인데
빨리 쾌차하시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